신간 전자책

코페아신드롬 커피 테이스팅 가이드

도서정보 : 김나영 | 2021-10-2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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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페아신드롬의 브랜드 스토리, 일본의 커피문와, 코페아신드롬에서 취급하고 있는 로스팅 레벨에 따른 커피 맛의 특징과 함께 그동안 써왔던 글들을 요약해서 정리했습니다.

커피 맛에 관해 설명되는 커피들은 모두 코페아신드롬에서 상품으로 취급하고 있는 제품들입니다. 이 가이드북을 읽는 분들이 커피를 통해 심신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수단으로써 커피문화와 커피 맛에 관한 기준을 이해하는 것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구매가격 : 25,000 원

한국의 유교화 과정

도서정보 : 마르티나 도이힐러 | 2023-12-1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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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계중시, 종손의 가계계승, 장자우대상속, 제사의 관행들은 17세기에 형성되어 20세기까지 존속한 한국 사회의 특징이다. 우리는 소위 ‘전통’이 되어버린 이것이 아주 특별한 발달 과정을 거친 최종 결과물이라는 사실에 대해 아예 모르거나 종종 잊는다. 한국의 유교화 과정은 정말로 획기적인 것이었으며 거대한 변화였다.

마르티나 도이힐러는 조선왕조의 건국을 단순한 왕조 교체로서가 아니라, 신유학의 이념에 입각한 사대부들의 이상사회 건설을 향한 의지의 표현으로 보고 있는데, 여기에 바로 『한국의 유교화 과정』의 독특한 점이 있다. 조준과 정도전을 비롯한 조선 건국의 주역들이 의식적으로 과거의 전통과 단절되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 했다는 점에서, 저자는 조선왕조의 등장을 중요한 역사적 분기점의 하나로 파악하는 것이다. 저자는 조선 초기의 일련의 입법에 대해 중국에서 11세기 왕안석의 개혁이 실패한 이후 동아시아세계에서 가장 야심차고 창조적인 개혁 시도였다고 평가한다.

이 책은 15~16세기 당시 사회에 신유학(성리학)의 도입과 정착이 지속적으로 강력히 추진된 동기는 무엇이었으며, 신유학이 사회 구조에 미친 영향은 어떠했는가에 대한 공백을 메운 최초의 본격 시도였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사회인류학과 교류하면서 친족, 조상 숭배, 가계계승, 상속, 결혼, 상장례 등 6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고려 초기에서 조선 후기까지 한국의 역사를 통찰하여 유교 사상이 한국에 미친 영향들을 두루 살펴본다.

구매가격 : 21,000 원

밸러리

도서정보 : 사라 스트리츠베리 | 2023-12-1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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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금까지 만난 모든 남자를 총으로 쏘는 꿈을 꿔요.”

래디컬 페미니즘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인물
앤디 워홀 암살 미수범
밸러리 솔래너스, 그녀는 누구인가?

“이 안에는 텍스트로 체험할 수 있는 모든 감각적 경험이 있다.
단순히 읽기를 넘어서는 이 특별한 경험을
모두에게 추천한다.”_조예은(소설가)

“미국의 위대한 문화 아이콘의 삶과 시대에 대한 눈부신 재-상상.”_비비언 고닉(작가)

밸러리』를 통해 스트리츠베리는
북유럽 현대문학의 가장 훌륭한 작가임을 증명했다.
_아프텐포스텐(노르웨이)

“그 질문은 틀렸어요. 옳은 질문은 이거죠. 그 여자는 왜 총을 쏘지 않지? 도대체 왜 총을 쏘지 않지? 그 여자의 모든 권리가 공격받고 있었어요. 강간당한 여자 아기나 강간당한 여자 동물과 같은 상태. 그런데 왜 그들은 총을 쏘지 않나요? 난 정말이지 모르겠어요, 닥터 쿠퍼. 내가 안다면 우린 여기에 앉아 있지 않겠죠.” _본문에서

북유럽 현대문학을 이끌어가는 작가 사라 스트리츠베리의 장편소설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된다. 미국의 급진적 페미니스트로 알려진 밸러리 솔래너스의 삶을 다룬 작품으로, 2007년 북유럽이사회문학상을 수상하고 2019년 맨부커 인터내셔널 후보에 오르며 국제적인 관심을 받았다. 밸러리 솔래너스라는 인물과 그녀의 삶에 흥미를 느낀 스트리츠베리는 밸러리의 대표작 『SCUM 선언문』을 스웨덴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스트리츠베리는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결정하는 노벨위원회 종신회원 열여덟 명 중 열세번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노벨위원회 설립 이래 최연소 종신위원이었다. 그러나 2018년 노벨위원회에 장클로드 아르노 스캔들이 불거지고, 사무총장 사라 다니우스가 피해자 지지를 선언하며 위원회를 떠났다. 그러자 스트리츠베리도 다니우스와의 연대를 표명하기 위해 종신위원직을 내려놓았다. 사라 스트리츠베리는 소설, 희곡, 동화, 번역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며 고유의 작품세계와 실험적인 스타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기억해…… 기억해……
나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정신이 온전한 여자라는 걸 기억해.”

난 전두엽 절제술을 받은 번식용 암소 같은 삶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내 주위의 세상은 그런 나를 받아들일 수 없었지. _본문에서

1968년 6월 8일, 세계적인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의 작업실 ‘팩토리’, 어느 여성이 앤디 워홀에게 총구를 겨눈다. 총알은 워홀의 복부를 관통했다. 이때 입은 심각한 부상으로 워홀은 죽을 때까지 정기적으로 수술대에 올라야 했다. 앤디 워홀을 쏜 사람은 밸러리 솔래너스. 그녀는 이전에도 팩토리를 드나들었으며 워홀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리고 워홀이 자신의 희곡 「똥구멍이나 쑤셔라Up Your Ass」를 훔쳤기 때문에 총을 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그러나 워홀은 그녀의 희곡에 관심이 없었고, 단지 그녀가 건넨 원고를 잃어버렸을 뿐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솔래너스는 워홀이 그녀의 희곡을 훔치기 위해 자신을 의도적으로 배척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희곡을 되찾기 위해 오랜 기간 워홀을 스토킹했다. 앤디 워홀 살인미수죄로 기소된 재판에서 솔래너스는 정신분열증 환자라는 점이 참작되어 3년간 정신병원 치료감호을 처분을 받았다.
밸러리 솔래너스, 그녀는 누구인가? 1936년 4월 9일 조지아주 벤터에서 태어났다. 앤디 워홀을 저격한 당시 나이는 32세였다. 래디컬 페미니스트이자 그 시절에는 흔치 않은 공개적인 레즈비언. 직업은 일정치 못했는데, 공식적으로는 무직이었고 그녀 자신의 말에 의하면 작가였으며 매춘으로 생계비를 벌었다. 그녀가 쓴 『SCUM 선언문』을 두고 페미니즘계에서는 “유머 혹은 패러디”라며 옹호했지만 그녀 자신은 “몹시 진지하게” 쓴 글이라고 반박했다. 암살미수 사건 이후 래디컬 페미니스트들로부터 열렬한 반응을 얻기도 했으나 정작 솔래너스 자신은 그들과 철저히 거리를 두고자 했다. 어린 시절 친부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메릴랜드대학교에서 국가장학생으로 심리학을 공부하다 중퇴했다. 편집증적 조현병을 앓으며 여생 동안 정신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 1988년 어느 낡은 호텔에서 홀로 세상을 떠났다.


“이게 내 인생이에요.
내 인생에서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
난 밸러리 솔래너스라고요.”

난 내가 싫지만 죽고 싶진 않아. 사라지고 싶지 않아. 돌아가고 싶어. 누군가의 손을, 어머니의 손을, 여자의 팔을 간절히 원해. 아니면 아무 목소리라도. 햇빛을 점점 가리는 이 암흑만 아니라면 뭐든 좋아. _본문에서

작가는 작품을 시작하기 전에 이렇게 밝힌다. “『밸러리』는 전기가 아니며, 지금은 세상을 떠난 미국인 밸러리 솔래너스의 삶과 저작에 기반을 둔 환상문학이다. 밸러리 솔래너스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많지 않으나 이 소설은 그나마도 충실히 재현하지 않았다. 따라서 소설 속 인물들은, 밸러리 솔래너스 자신을 포함해, 모두 허구의 산물로 간주해야 한다.” 스트리츠베리는 문제적 인물 밸러리 솔래너스에게 매료되었다. 작가는 홀로 죽어가는 밸러리가 있는 호텔방으로 간다. 2인칭 관찰자가 되어 밸러리의 인생을 보고 그녀의 말을 듣는다. 사라 스트리츠베리의 도발적인 사유와 시적인 문체를 통해 밸러리의 삶과 환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밸러리 솔래너스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그녀는 왜 앤디 워홀을 총으로 쏘았을까? 그녀는 예술가 혹은 운동가일까? 아니면 그저 정신이상자일 뿐일까? 그녀는 그렇게 쓸쓸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을까? 밸러리 솔래너스의 마지막에 대한 또다른 가능성을 찾기 위해, 작가는 귀를 기울인다.

구매가격 : 12,300 원

사소한 문제들

도서정보 : 안보윤 | 2023-12-2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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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문제를 숨기고 살아가는 불길한 존재들의 이야기.

우리 사회의 병리학적 현상들을 주목해 냉정한 시선과 필체로 파헤치는 작가 안보윤의 세번째 장편소설『사소한 문제들』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그녀는 2005년 제10회 문학동네작가상수상작『악어떼가 나왔다』로 문단에 데뷔한 이래 줄곧 사회에서 발붙일 곳 없는 사회적 약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무방비로 노출된 폭력과 절망적인 상황 등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그녀만의 독특한 소설세계를 구축해왔다. 이번 신작 장편『사소한 문제들』또한 작가가 천착해온 주제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으로 가정과 학교의 폭력에 내몰린 여자아이 ‘권아영’과 사회에서 이탈해 자신의 방에 틀어박힌 동성애자 ‘배두식’의 삶을 묶어 세상의 음지에서 몸부림치며 불행해할 수밖에 없는 불길한 존재들의 이야기를 그녀만의 하드보일드한 문체로 그려내고 있다.

불행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아이들의 잔혹동화 같은 세상

소설의 첫 장면은 텅 빈 놀이터의 묘사로 시작된다. 핏물이 배어든 고무매트, 헐겁게 늘어진 그넷줄, 요새처럼 사방이 가로막힌 놀이터 일층의 빈 공간. 놀이터를 장악하고 있는 건 학교에 가지 않은 아이들 무리이다. 그 음침하고 위험한 놀이터에서의 아이들 놀이란, 고등학생 남자아이들이 중학생 남자아이 ‘황순구’를 괴롭히는 것. 또한 황순구에게 여중생을 겁탈하라 명령하고 그 모습을 낄낄대며 지켜보는 것이다. 남자아이들과 황순구 사이에는 폭력으로 서열화된 명령과 복종만 있을 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남자아이들에게 정기적으로 돈을 상납해야 하고, 그들이 시키는 나쁜 일 모두를 도맡아 해야 한다. 그 아이들에게 삶의 원리란 자신보다 더 센, 더 지독한 폭력에 굴복하는 것. 폭력의 내리물림 현상. 어쩌면 황순구를 거느리는 남자아이의 위에는 어른의 폭력이, 그 어른들 위에는 더 높은 서열의 폭력이 끊임없이 존재할 것만 같다.

“황순구 역시 상당한 액수의 돈을 남자아이에게 뜯기고 있었다. 이번 달에 갖다바친 돈만 해도 벌써 이십만원이 넘었다. 용돈은 다 떨어진 지 오래고 부모에게 더이상 돈을 받아내는 것도 무리다. 오늘 놀이는 황순구 주머니에 돈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앞으로는 더욱더 많은 놀이가, 황순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 황순구에게 어느 날 초등학생 여자아이 ‘권아영’이 눈에 띄게 된다. ‘슈렉’이라 불리는 여자아이 권아영. 못생기고 뚱뚱한데다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짧은 팔다리를 가진 먹잇감 소녀. 그런 그녀를 발견한 황순구는 자신이 당해왔던 폭력을 고스란히 슈렉인 아영에게 되풀이한다. 돈을 상납하게 하며 게임방 아저씨에게 돈을 받고 ‘슈렉’의 몸을 팔기도 한다. 마치 그런 일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혹은 이게 바로 ‘삶의 규칙’이라는 듯 설명하고 황순구는 권아영을 폭력의 지배하에 두게 된다. 아영은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저 그 순간을,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것만이 황순구라는 괴물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라 믿는다. 아영은 충동적으로 가출을 시도한다. 우연히 발견한 책으로 가득 찬 헌책방. 모든 일에 심드렁해 보이는 주인 ‘배두식’이 사는 책들로 묻혀 있는 집, 그 안으로 아영은 몰래 숨어든다.

“오늘 하루 무사하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내일은, 또 그 다음날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황순구는 언제 어디서든 아영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러니 도망쳐야 했다. 황순구에게서, 안전하다고 생각되지만 실은 손톱만큼도 아영을 지켜주지 않는 허울뿐인 학교와 집에서. 헌책방을 떠올린 건 우연이었다.”

헌책방은 아주 많은 사람들의 손때 묻은 책들이 묻히는 무덤이다. 헌책에 실려 온 특유의 냄새는 죽음의 냄새와 흡사하다. 세월에 묵은 책장과 썩어가는 벌레 시체, 먼지와 곰팡이가 뒤섞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 눅눅하고 그늘진 곳에서 아영은 오히려 따듯함을, 집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온전한 아늑함을 느끼게 된다. 누구도 아영을 괴롭히지 않고, 관심을 두지 않는 그곳. 세상과 격리된 헌책방에서 아영은, 단 하나뿐인 안식처를 처음 경험하게 된다.

‘독한’ 이야기와 구원의 희망

헌책방 주인 두식. 사실, 두식 또한 침묵과 고독뿐인 책들의 무덤 속에 숨어사는 서른아홉 살 동성애자이다. 그는 자신의 성정체성과 마음속에 품어온 사랑에 대한 배신으로 인해 스스로를 파괴하러 은밀한 성벽과도 같은 헌책방 안에서 은둔하고 있었던 것. 소설은 재빨리 몸을 바꿔 헌책방 주인 ‘배두식’의 불행했던, 세상에서 거부되었던 지나온 과거 이야기로 카메라 앵글을 돌린다.

“누군가의 농담 한마디에 마음을 다칠 그. 끝내 자신의 갈망을 무시하고 주변 권유에 따라 평범한 여자와 결혼할 그. 일반적인 삶에 비로소 섞여들었음에 안도하면서도 뻥 뚫린 가슴을 어쩌지 못하고 방황할 그. 욕망과 위화감, 죄책감, 혼란 속에 오늘도 불안한 하루를 보내고 있을 그. 소심하고 겁 많은 게이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확률은 한없이 제로에 가깝다. 기대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면 돌아오는 건 경멸뿐이다. 그런 것이다.”

우리 사회가 동성애자에게 보내는 싸늘한 시선.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심각성만큼의 관심이나 합의가 쏠리지 않는 차별의식. 두식에게 세상은 스스로 포기하게끔 만드는, 배제와 차별만 존재하는 그런 울타리밖에 되지 못했다. 그런 두식이 울타리를 벗어나 그나마 자유롭게 숨쉴 수 있는 곳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헌책방뿐이었다. 두식은 자신의 집에 숨어든 아영을 발견하자마자 심하게 훼손당한 아영의 모습을 보며 동류의식을 느낀다. 아영이 아이들의 따돌림과 폭력에 의해 내쳐진 것이라면, 자신 또한 사람의 눈으로부터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내쳐진 것과 비슷하다고 느끼던 터. 어떻게 보면 그 둘은 사회적으로 ‘문제아’라 낙인찍힌 자들인 셈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문제아’가 되어버린 약자였던 것. 그런데 이들이 바라는 소망은 누군가의 따듯한 체온, 한 뼘의 체온이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꿰맨 상처에서 다시 피가 배어나오는 것과 상관없이 두식은 자신에게 구체적으로 닿는 이 체온이 기쁘다. 누군가가 곁에 있는 것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살을 맞대는 것이 한없이 기쁘다.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갈구해왔던 이만큼의 체온. 고작 이만큼, 이만큼의 체온을 원했을 뿐인데.”

두식과 아영은 천천히 그 체온만큼 더디게 세상에 대해 닫아두었던 빗장을 풀기 시작한다. 잊고 있었던, 아니 잊어야만 했던 사람과 사람 간의 따스한 체온을 다시 기억하게 된 것이다. 서로에게 그동안 누락되었던 삶의 온기를 되새겨보기도 하고, 서로의 안위에 대해 의논도 하며, 미래와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아가게 된다. 엉뚱하게 숨어들어온 웃자란 아이 아영, 그 작은 소녀가 책들의 무덤으로 둘러쳐진 헌책방 그곳에서 삶을 훼손당한 남자 두식에게 삶의 회복이라는 화두를 던져준 셈이었던 것.

“딸이야. 두식은 제 입에서 나온 말이 어쩐지 부끄럽지 않다. 거짓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화끈거리던 뺨도 지금은 아무렇지 않다. 두식이 안개 낀 골목에 발을 내딛는다. 아영은 어디로 갔을까. (……) 두식은 서슴없이 뛰기 시작한다. 뚱뚱하고 뻔뻔한, 버릇없는 불청객이지만 지금 이 순간은, 아영은 두식에게 체온을 나눠준 유일한 사람이다.”

뒤돌아보지 않는다. 낡은 몸으로 걸어내야 한다

칠 년 남짓한 시간 동안 작가 안보윤이 꾸준하게 이야기해온 키워드들은 하나같이 주로 우리 사회의 음지에서 벌어지는 난폭한 사건 사고에 관해서였다. 음지에 사는 이들에게 그 사건 사고는 평범한 일상이 된 지 오래고, 잔잔한 수면 아래 잠복하고 있는 절망은 어느 새 희망이라는 단어를 대체하고 있다. ‘미래’란 말을 믿지 않는다. 희망은 더이상 그들에게 일상의 치료제가 아니며, 이미 절망이 내성화된 공간 안에서 더욱 편안함을 느낀다. 그런 그들에게 유일한 구원의 제스처는 그 낡은 몸으로 자기 앞에 놓인 삶의 앞을 향해 걸어가는 것뿐이다. 절대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 그들이 사는 음지의 일상이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터널 속 같더라도, 부서지고 훼손당한 몸이더라도, 그저 묵묵히 앞을 향해 걸어가는 수밖에 없다. 방법은 없다. 삶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이 불편한 진실을 작가 안보윤은 삶의 양지에 있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구매가격 : 9,800 원

존 치버의 편지

도서정보 : 존 치버 | 2024-01-12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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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들로 인해 다시 살아난 한 인간은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내가 알고서 사랑했던 그 사람보다 더 완전하다”

“놀랍도록 재미있는 이 비범한 편지 컬렉션에서
존 치버라는 대가의 존재감을 여실히 느꼈다.”
_워싱턴포스트 북월드

20세기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 존 치버가 일생 동안 써온 편지들을 한데 엮은 서간집 『존 치버의 편지』가 출간되었다. 1930년대 청년 시절부터, 강렬한 단편소설을 쏟아내던 시기를 거쳐 『왑샷 가문 연대기』 『팔코너』 등의 장편소설로 거장의 반열에 오른 후, 암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써온 편지들에는 작가의 인간적 초상과 삶의 자취가 그대로 담겨 있다.
이 책은 작가의 사후에 아들 벤저민 치버가 엮어 출간한 것이다. 벤저민은 아버지 존이 전 생애에 걸쳐 쓴 방대한 분량의 편지를 정리해서 엮었을 뿐 아니라, 존과 편지를 주고받았던 지인 40여 명의 증언과 대학 도서관의 소장 자료들을 바탕으로 탁월한 설명을 더함으로써 책의 완성도를 높였다. 편지들은 존 치버가 작가로서 후대의 출간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솔직하면서도 유머 넘치는 이 편지들은 어떤 글보다도 작가를 우리 곁에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존 치버의 삶에서 중요한 일들은
전부 편지 안에 있다

존은 10대 후반부터 70세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일주일에 10~30통에 이르는 편지를 썼다. 젊은 시절에 전전한 월세방, 자원입대한 군부대, 1년간 체류했던 로마, 알코올중독 치료실 등 머물렀던 모든 곳에서 편지를 썼고, 수신인은 아내, 자식들, 작가들, 애인들, 편집자들, 육체관계를 맺던 남자들로 다양했다. 그의 삶에서 일어난 중요한 일 중에 편지에 언급되지 않은 것은 없다고 벤저민 치버는 말한다. 소설을 쓰고,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우고, 교외에 살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생의 여정에서 느낀 사랑과 우정, 행복과 고통, 원망과 좌절이 그의 아름답고 힘 있는 문장으로 되살아난다.
존의 편지 중에는 안부인사나 용건을 전하는 글도 있지만 가상의 인물을 표현하거나 주변을 관찰해 상세하게 묘사한, 마치 소설의 습작 같은 글도 있다. 자신의 삶과 경험을 자주 소설의 소재로 삼았던 것처럼 편지에 드러난 일상들 역시 자연스레 그의 작품과 연결된다. 존 치버의 편지를 읽는 것은 그의 작품을 읽는 일과도 맞닿아 있는 것이다. 더불어 E. E. 커밍스, 솔 벨로, 존 업다이크, 필립 로스를 비롯한 작가들, 편집자들과 주고받은 서신에서는 당대 문학에 관한 그의 사유를 엿볼 수 있다. 『뉴요커』에서 존 치버의 담당 편집자로 40년 이상 서신을 주고받은 윌리엄 맥스웰은 말한다. “존 치버는 형편없는 편지를 쓴 적이 없다. 내게 쓴 편지에서 그는 항상 고공 줄타기를 하는 사람 같은 느낌을 주었다.”


독자를 존중한 작가이자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던 인간의
유쾌하고 감동적인 생애

존 치버는 20세기 후반 미국사회 중산층의 생활상을 배경으로 풍요로움 속의 고독, 속박, 모순을 포착한 작가였고, 지독한 우울증과 알코올중독으로 고통받기도 했다. 하지만 편지에서 드러난 그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하고 농담을 즐겨 하는 익살꾼이자,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은’ 충동으로 글을 쓰는 작가였다. 그가 세상을 단순화시켜 그저 유쾌한 곳으로만 바라봤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존에게 이는 독자를 존중하지 않는 행위였다. 삶을 사랑했기에 삶의 야수성을 더욱 냉철하게 인식하려 했고, 이를 작품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철저히 헌신했다. 존은 곤란한 상황에 처한 자신을 능숙하게 희화화할 줄 알았고, 친한 동료 작가에게 짓궂은 농담을 하거나, 자신이 키우는 개의 입장에서 편지를 쓰기도 했다. 작가다운 예리한 관찰력과 타고난 유머감각이 빛나는 편지들에서 그의 유쾌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한편, 시간순으로 엮은 편지를 통해 존 치버의 생애를 따라가면서 그가 작가와 인간으로서 농익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평생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지옥과 같은 절망을 경험한 동시에 해맑게 행복해할 줄도 알았던 그의 편지에서는 자신의 삶을 충만하게 살아낸 인간의 위대함이 느껴진다.

힘든 시절이었다. 아버지의 알코올중독은 더욱 심해졌고 그로 인한 병세도 더욱 뚜렷해졌으며 가족의 불화는 깊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시기는 예외적일 뿐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요즘은 예술가를 고통받는 영혼으로 그리는 상투적인 경향이 있다. 내 아버지가 깊은 불행과 불안을 경험한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넋 놓고 행복해할 수 있는, 그리고 자주 그런 행복을 느꼈던 사람이었음을 잊어선 안 된다. 언젠가 빌 맥스웰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아버지를 불행한 사람으로 보는 것은 정확한 시각이 아니라고 말했다. “정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빌이 말했다. “무례하기도 하지.”_본문 27쪽,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에서

우리도 자네를 만나면 아주 즐거울 것 같네. 우리는 거의 항상 이곳에 있어. 클레어를 만나면 정말 신나겠군. 문학계 소식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섞여 있네. 존 업다이크의 소설이 내가 보기엔 일류급 같더군. 내 메달은 금이 아니야. 내 소설이 그렇게 좋았다는 생각도 안 들어. 나는 암이라는 성가신 병에 걸렸네. 아드리아 해수를 증류한 나폴리제 카펫세제를 일주일에 한 번씩 내 혈관에 채워넣고 있고, 머리카락이 다 빠져서 머리가 꼭 달걀 같다네. 하지만 난 아직도 돌아다니며 고양이들을 구박하고 있어. 자네를 어서 만나고 싶군. _본문 774쪽, 필립 로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최악의 기질은 최고의 기질과 이어져 있다”
아들이 아버지의 인간적인 맨 얼굴을 본다는 것

존 치버는 양성애자였다. 하지만 이 책을 엮은 아들 벤저민은 이를 알지 못했다. 이 책을 엮으며 아들로서 아버지의 동성애 성향이 드러난 대목을 마주할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그는 말한다. 존은 불륜을 저지르면서도 일부일처제를 열렬히 옹호했고, 양성애자이면서도 성적 지향의 모호함을 싫어했다. 또한 편지를 쓸 때는 재미를 위해 이야기를 왜곡했고, 음란하고 뻔뻔하고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기만을 마주할 때마다 그는 아버지 존의 작품을 다시 펼쳐 읽거나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의 혼란한 마음을 봉합해나가고 아버지를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말년에 암으로 고통받는 와중에 자신의 양성애를 아들에게 힘겹게 털어놓는 존과, 작가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아버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벤저민의 모습은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진정으로 알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아버지가 때로 얼마나 냉정하게 위선을 행할 수 있었는지를 알고 나는 깜짝 놀랐다. 아버지가 이야기를 지어낸다는 것, 그리고 같은 이야기를 때에 따라 마음대로 바꾸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건 항상 이야기 자체를 위한 것이라고, 그 이야기가 주는 즐거움을 키우기 위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나는 아직도 대개는 정말로 그랬을 거라고 짐작하지만, 이따금 어떤 작가를 한껏 치켜세워놓고, 그와 알고 지내는 다른 동료에게 편지를 쓸 때는 그를 깔아뭉개는 아버지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불만들, 그리고 알코올중독자의 자식이 갖게 마련인 보다 흔한 불평들은 이 책의 주제가 아니다. 이 편지들은 비범한 사람의 글이며, 아버지가 비범했던 것은 그의 냉혹함이나 결함 때문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비범함은 그가 느낀 기쁨과 그 기쁨을 주변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재능에서 비롯되었다. _본문 14쪽,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에서

구매가격 : 17,500 원

존 치버의 일기

도서정보 : 존 치버 | 2024-01-12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가슴을 울리는 경이로운 작가노트, 한 가족의 연대기,
잔인할 정도로 솔직한 자서전, 존 치버의 미완성 소설……
이 책을 그 무엇으로 읽어도 좋다.

바로 이것이 미국 현대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혁신적인 문장이다.”
_뉴욕 타임스

‘교외의 체호프’ ‘단편소설의 거장’으로 불리는 미국 소설가 존 치버의 이야기이다. 세계문학사를 통틀어도 매우 희귀하고 유의미한 기록으로 꼽히는 『존 치버의 일기』가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한국어판 924쪽, 방대한 분량의 이 일기는 존 치버가 1940년대 말부터 1982년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불과 며칠 전까지 35년간 써내려간 일기 중 일부이다. 존 치버는 평생 29권의 일기장을 남겼고, 그중 그의 삶을 대표할 만한 20분의 1가량의 일기들만이 선별되어 이 책에 실렸다.
존 치버는 노년에 이르러, 평생 가족들에게조차 신경증적으로 보여주길 꺼렸던 이 일기들을 도서관 사서에게 가져다주기도 하고 아들에게 꺼내 보이며, 누군가로부터의 이해와 인정을 애타게 갈구하는 듯했다. 그는 이 일기를 통해 무엇을 남기고 싶었을까. 이미 세인들로부터 충분히 기억할 만한 작가로 인정받은 그가 죽기 전, 무엇을 그토록 이해받고 싶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의 아들이 비로소 이 일기를 읽어나가기 시작했을 때, 존 치버는 왜 조용히 눈물을 흘렸을까.
여기 아주 가끔 구원받고 대부분의 시간을 절망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견뎌내야 했던 매일을 처절할 정도로 생생하고 집요하게 기록한 한 작가가 있다.


완벽한 작품에 이르기 위한 한 소설가의 투쟁의 기록,
한 남자의 상처투성이 인생을 위한 연습장

일기 속의 아버지는 (…) 그렇게 재치 있고 매력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일기의 내용은 침울한데다 자주 천박했다. 일기엔 동성애에 관한 내용이 아주 많았다.
(…) 아버지가 지니고 있었던 양성애적인 면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아버지가 지녔던 그와 같은 배반의 범위를 알고 있었을 뿐이다. 아버지 내면의 인생에 깃들어 있던 분명한 절망을, 아버지의 통찰력에 담겨 있던 냉소적인 본성을 예상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콘플레이크가 되는 일에 큰 관심을 가졌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아침식사 메뉴인 콘플레이크이기 이전에 작가였다. 아버지는 또 한 남자이기 이전에 작가였다. _벤저민 치버의 서문에서

존 치버의 아들 벤저민 치버는 아버지의 일기를 읽어내려가며 크게 놀라게 된다. 그 일기는 잔인할 정도로 솔직하고도 의외의 내용들로 가득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소설가 존 치버는 교외에서 개를 키우며 가족들과 단란하게 살아가고, 일부일처제를 열렬히 옹호하며 중산층의 평범한 삶을 누리면서 자신과 비슷한 이웃들의 삶을 예리하게 응시하는 ‘영국 신사’와도 같은 이미지의 작가였다. 그러나 일기장 속의 남자는 여기저기 망가져 있었고 위태로워 보였다.

동성애라는 단어를 듣게 될 때마다 나의 세계는 둘로 쪼개지는 듯하다.
_1966년의 일기에서

존 치버는 양성애자였다. 그는 자신의 양성애 성향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고 깊은 회의감에 빠지면서도, 끊임없이 남자들과 육체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 앞에서는 일부일처제를 지지한다고 밝히곤 했다. 그는 아들이 자신의 양성애 성향을 선천적으로 물려받았을까봐 두려워하고 경계했다. 자신의 ‘힘든 성향’이 아들에게 물려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때는 모든 미국인들이 동성애를 걱정하던 해였다. 물론 다른 것들도 걱정하긴 했지만 그들의 그 다른 걱정은 출판되고, 논의되고, 또 사람들에게 환기되었던 반면, 동성애에 대한 우려는 말해지지 않고 어둠 속에만 잠겨 있었다. 그 사람이? 그가 그랬을까? 그들이? 내가? 내가 그럴 수 있을까? _1959년의 일기에서

그가 아내 메리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내는 존 치버가 “인생에서 알게 된 모든 것”이었다. 그는 아내와의 평화로운 결혼생활과 아이들에게 제공할 안정적인 환경이 계속 유지되길 꿈꿨지만, 결혼생활은 매일 서로를 조금씩 허물어뜨리는 전쟁과도 같았다.

최근 며칠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적어봤자 무슨 의미가 있으랴. 화요일에 우리는 연인이었고 수요일에는 전사(戰士)였다. 난 미친놈이라는 소리도 들었는데 심지어 애정 어린 행동을 할 때도 그랬다. 메리는 집을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이는 이번주에만 두번째다. 오늘 저녁식사를 하던 중 앞으로 내가 잊어야 하고 또 다시는 언급하게 되지 않을 말을 메리로부터 들었다. “여자에게 더 나쁜 일은 뭘까? 전립선에 문제가 있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 아니면 동성애자와 결혼하는 것?”
_1970년의 일기에서

그의 단편소설에 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부부가 등장해 고요한 파국에 이르는 장면들이 유난히 많은 것은 이러한 존 치버의 실제 결혼생활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975년 지독한 알코올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요양소에 머물렀던 시간들도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가 스스로 요양소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구제불능의 알코올중독자였다는 사실은, 교도소라는 폐쇄된 공간을 배경으로 인간성의 극치를 보여준 걸작 『팔코너』를 낳았지만, 그의 인생에는 지울 수 없는 상처였다. 그는 요양소에서 갇혀서도 일기를 쓴다. 금단증상과 이 요양소를 벗어나는 순간 다시 술을 마시게 될 스스로에 대한 두려움과 환멸에 사로잡힌 채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치버는 계속 썼다.


그러니, “인생이란 얼마나 불가해한가”
어둠 속에 벌거벗은 채 앉아 있는 한 작가의 초상

존 치버는 ‘교외의 체호프’라는 낭만적인 별칭으로 불려왔지만, 이웃들의 삶을 저 높은 곳에서 조망하고 관조하는 작가는 아니었다. 자기분열과 갈등의 한복판에서, 치버는 너무나 많은 고통을 받고 그 속에서 몸부림치며 살아간 작가였다. 외로움에 뼈가 저리고 그래서 남녀불문 끝없이 사랑을 찾아다니며, 다른 작가들을 질투하기도 하고 원고료와 출판사들의 관심을 갈구하던 작은 인간이었다.
그는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간 존 업다이크, 헤밍웨이 등을 동경하면서도 강렬한 경쟁심을 느꼈다. 심지어 소설가 필립 로스가 치버의 장편소설 『팔코너』를 잘 읽었다고 지나가는 말로 칭찬하고는, 그에게 곧바로 업다이크의 전화번호를 좀 알려달라고 말하자, 그는 묘한 감정을 느끼며 이렇게 쓴다.

소설가들 사이의 경쟁의식은 소프라노들 사이의 그것만큼 강하다. _1977년의 일기에서


그러나 존 업다이크가 사망했다는 부고를 받자 그는 자신의 일기장에 통렬한 추도문을 쓴다. 알고 보니 그 부고는 장난전화로 밝혀졌지만, 이렇게 존 치버의 일기장에는 그의 하루에 일어난 자잘한 사건들과 감정의 파고가 그대로 포착되어 있다.

이런 것들은 사소하지만, 그야말로 사소하기 이를 데 없지만 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전에 수백 번이나 그랬듯이 나는 벌거벗은 채 식당으로 가서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_1969년의 일기에서

존 치버의 일기는 어둠 속에 벌거벗은 채 앉아 있는 한 남자의 독백이다.
온갖 사소한 아픔과 불행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인생의 국면들과 한 작가가 완벽에 이르기 위해 거쳐간 35년간의 여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흔치 않은 기록물이다. 그리하여 이 책은 오늘날의 작가지망생에게는 가난과 중독, 우울 속에서도 매일 빈 종이를 메우는 일만은 멈추지 않았던 한 대가의 지독한 성실성에 대한 자극과 창작의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일반 독자들에게는 이 불가해한 인생의 문제들을 끝내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려 했던 한 인간의 집요함과 위대함에 감탄하게 한다.

이미 문학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작가마저도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토록 고뇌하고 몸부림치며 자기 스스로를 증명할 한줄기 빛을 찾아 헤맸다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우리들에게는 희망일까, 절망일까.
이제, 당신이 이 일기장을 열어 확인할 차례다.

구매가격 : 19,600 원

율리시스 1(세계문학전집 239)

도서정보 : 제임스 조이스 | 2023-12-29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언어의 재탄생을 선언한 가장 충격적인 문학작품
거장 조이스의 담대하고 전복적인 모더니즘 실험

“현대 작가는 모험가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위험하게 써야 한다.” _제임스 조이스

문학동네판 『율리시스』 : 독자들의 완독을 기원하며

20세기 모더니즘 문학의 새 지평을 연 거장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전 2권)가 조이스 전문가 이종일 교수의 번역으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으로 출간되었다. 모더니즘 문학의 특징인 ‘의식의 흐름’ 기법이 극한으로 발휘된 이 작품은 조이스 언어 실험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걸작이다.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율리시스』는 독자들이 완독하기 어려운 책으로 여겨져왔다. 특히 기존 번역본들의 방대한 주석에 짓눌려 중도에 독서를 포기하기 십상이었다. 이에 문학동네판 『율리시스』는 꼭 필요한 주석만을 엄선하여 소설의 흐름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주석은 면주로, 작품의 배경 이해에 도움을 주는 주석은 미주로 처리해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완독률을 높일 수 있도록 했다. 예술적 깊이와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성으로 고전의 지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율리시스』가 정밀하고 유려하며 가독성이 향상된 새로운 번역을 통해 더욱 많은 독자들에게 가닿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조이스 신화는 계속된다

2023년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출판된 지 101년째가 되는 해다. 총 14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방대한 작품은 언어, 문학, 역사, 종교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전제하는 데에서 오는 난해성과 시대를 앞서간 언어 실험으로 인해 출간 당시 문학계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미국에서는 외설 이슈에 휘말려 십여 년간 금서 목록에 오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리시스』는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독창적이고 예술적인 문학 기법으로 인간의 삶을 묘사하는 데 성공한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소설은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포스트모더니즘, 후기구조주의 등 여러 철학적 패러다임 또한 유연하게 수용하며 고전 중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또한 작중 배경인 6월 16일 더블린에서는 매년 주인공 블룸의 행적을 따라가보는 ‘블룸의 날’ 행사가 성황리에 개최되어, 이 작품의 인기가 현재진형형임을 입증한다.


더블린에서 펼쳐지는 소시민의 오디세이아

『율리시스』는 고대 그리스의 대문호인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를 구성적 틀로 삼고 있으며, 제목 ‘율리시스’ 역시 『오디세이아』의 주인공 ‘오디세우스’의 영어식 이름이다. 조이스는 한 편지에서 『율리시스』 구상의 의도가 “신화를 우리 시대에 맞게 바꾸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오디세이아』가 트로이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 오디세우스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십여 년에 걸친 대모험을 그리는 데 반해, 『율리시스』는 1904년 6월 16일(‘블룸의 날’) 하루 동안 소외당하는 헝가리계 유대인 리어폴드 블룸이 더블린 시내를 돌아다니며 겪는 사소하고 잡다한 일상사를 다룬다. 이와 같이 두 이야기 사이에는 기본적인 구조적 유사성이 있으나, 영웅과 소시민, 10년과 하루 등 디테일에서 두드러지게 대조적인 양상 또한 존재한다. 조이스는 『오디세이아』 서사시를 구조적 토대로 삼아 자신만의 독창적인 기법으로 새로운 현대의 신화 『율리시스』를 창조해낸 것이다.


“인간의 사유 과정을 이토록 낱낱이 밝혀낸 작가는 조이스 이전엔 없었다.”

『오디세이아』를 다시 쓰면서 조이스가 택한 전략 중 가장 특출한 기법은 바로 ‘의식의 흐름’이다. 서술자의 전지적 관점으로 흘러가는 서사 사이사이에 인물들의 의식이 내면독백 형식으로 느닷없이 튀어나온다. 줄거리 속 특정 내용으로 인해 등장인물의 머릿속에 연상된 온갖 사항들, 예를 들어 그 인물의 과거에 일어난 사건, 노랫말, 책의 한 구절 따위가 별다른 설명 없이 나타나 끼어든다. 블룸의 아내인 몰리의 마음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들로만 구성된 마지막 18장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극한으로까지 몰고 간 위대한 결과물이다. 이렇게까지 내면독백을 직접적으로 철저히 텍스트로 옮기려는 시도는 세계문학사상 최초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문학적 실험이 『율리시스』가 어렵다는 평을 받는 가장 큰 원인일 것이나, 인간의 내면세계가 외부의 현실 못지않게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을 문학적으로 드러내려 한 조이스의 빛나는 업적이기도 하다.


가장 실험적인 문학, 『율리시스』

『율리시스』는 그야말로 소설이라는 장르가 꾀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실험을 시도하고 있는 작품이다. 의식의 흐름 기법뿐만 아니라 조이스는 언어, 문체, 서술 형태 등의 분야에서 혁신적인 실험을 수행했다. 인물의 지적 수준이나 성격에 맞는 언어 표현을 적재적소에 배치했으며 각 장의 주요 모티프에 걸맞은 문체와 서술 형태를 고안해냈다. 신문사가 배경인 7장에는 신문기사처럼 조각 글들이 짜깁기되어 있고, 10장 「떠도는 바위들」에서는 더블린 곳곳의 수많은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이 잘게 나뉘어 제목 그대로 ‘떠도는 바위들’처럼 산재되어 있다. 14장에서는 삼십여 문단이 영국문학사의 각 시기를 대표하는 문필가들의 문체 모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희곡 형식을 취한 300페이지에 달하는 15장에서는 현실과 환상이 쉴새없이 교차한다. 이러한 실험들이 각 장의 내용과 주제에 부합하도록 고안되었다는 점은 경탄을 자아낸다. 당대 모더니즘의 구호 ‘새롭게 만들기’의 시대정신을 반영한 조이스의 실험이 그 시대의 유행에서 끝나지 않고 후대 문학인들에게 엄청난 창조적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예술적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구매가격 : 17,500 원

율리시스 2(세계문학전집 240)

도서정보 : 제임스 조이스 | 2023-12-29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언어의 재탄생을 선언한 가장 충격적인 문학작품
거장 조이스의 담대하고 전복적인 모더니즘 실험

“현대 작가는 모험가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위험하게 써야 한다.” _제임스 조이스

문학동네판 『율리시스』 : 독자들의 완독을 기원하며

20세기 모더니즘 문학의 새 지평을 연 거장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전 2권)가 조이스 전문가 이종일 교수의 번역으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으로 출간되었다. 모더니즘 문학의 특징인 ‘의식의 흐름’ 기법이 극한으로 발휘된 이 작품은 조이스 언어 실험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걸작이다.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율리시스』는 독자들이 완독하기 어려운 책으로 여겨져왔다. 특히 기존 번역본들의 방대한 주석에 짓눌려 중도에 독서를 포기하기 십상이었다. 이에 문학동네판 『율리시스』는 꼭 필요한 주석만을 엄선하여 소설의 흐름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주석은 면주로, 작품의 배경 이해에 도움을 주는 주석은 미주로 처리해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완독률을 높일 수 있도록 했다. 예술적 깊이와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성으로 고전의 지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율리시스』가 정밀하고 유려하며 가독성이 향상된 새로운 번역을 통해 더욱 많은 독자들에게 가닿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조이스 신화는 계속된다

2023년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출판된 지 101년째가 되는 해다. 총 14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방대한 작품은 언어, 문학, 역사, 종교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전제하는 데에서 오는 난해성과 시대를 앞서간 언어 실험으로 인해 출간 당시 문학계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미국에서는 외설 이슈에 휘말려 십여 년간 금서 목록에 오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리시스』는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독창적이고 예술적인 문학 기법으로 인간의 삶을 묘사하는 데 성공한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소설은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포스트모더니즘, 후기구조주의 등 여러 철학적 패러다임 또한 유연하게 수용하며 고전 중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또한 작중 배경인 6월 16일 더블린에서는 매년 주인공 블룸의 행적을 따라가보는 ‘블룸의 날’ 행사가 성황리에 개최되어, 이 작품의 인기가 현재진형형임을 입증한다.


더블린에서 펼쳐지는 소시민의 오디세이아

『율리시스』는 고대 그리스의 대문호인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를 구성적 틀로 삼고 있으며, 제목 ‘율리시스’ 역시 『오디세이아』의 주인공 ‘오디세우스’의 영어식 이름이다. 조이스는 한 편지에서 『율리시스』 구상의 의도가 “신화를 우리 시대에 맞게 바꾸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오디세이아』가 트로이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 오디세우스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십여 년에 걸친 대모험을 그리는 데 반해, 『율리시스』는 1904년 6월 16일(‘블룸의 날’) 하루 동안 소외당하는 헝가리계 유대인 리어폴드 블룸이 더블린 시내를 돌아다니며 겪는 사소하고 잡다한 일상사를 다룬다. 이와 같이 두 이야기 사이에는 기본적인 구조적 유사성이 있으나, 영웅과 소시민, 10년과 하루 등 디테일에서 두드러지게 대조적인 양상 또한 존재한다. 조이스는 『오디세이아』 서사시를 구조적 토대로 삼아 자신만의 독창적인 기법으로 새로운 현대의 신화 『율리시스』를 창조해낸 것이다.


“인간의 사유 과정을 이토록 낱낱이 밝혀낸 작가는 조이스 이전엔 없었다.”

『오디세이아』를 다시 쓰면서 조이스가 택한 전략 중 가장 특출한 기법은 바로 ‘의식의 흐름’이다. 서술자의 전지적 관점으로 흘러가는 서사 사이사이에 인물들의 의식이 내면독백 형식으로 느닷없이 튀어나온다. 줄거리 속 특정 내용으로 인해 등장인물의 머릿속에 연상된 온갖 사항들, 예를 들어 그 인물의 과거에 일어난 사건, 노랫말, 책의 한 구절 따위가 별다른 설명 없이 나타나 끼어든다. 블룸의 아내인 몰리의 마음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들로만 구성된 마지막 18장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극한으로까지 몰고 간 위대한 결과물이다. 이렇게까지 내면독백을 직접적으로 철저히 텍스트로 옮기려는 시도는 세계문학사상 최초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문학적 실험이 『율리시스』가 어렵다는 평을 받는 가장 큰 원인일 것이나, 인간의 내면세계가 외부의 현실 못지않게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을 문학적으로 드러내려 한 조이스의 빛나는 업적이기도 하다.


가장 실험적인 문학, 『율리시스』

『율리시스』는 그야말로 소설이라는 장르가 꾀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실험을 시도하고 있는 작품이다. 의식의 흐름 기법뿐만 아니라 조이스는 언어, 문체, 서술 형태 등의 분야에서 혁신적인 실험을 수행했다. 인물의 지적 수준이나 성격에 맞는 언어 표현을 적재적소에 배치했으며 각 장의 주요 모티프에 걸맞은 문체와 서술 형태를 고안해냈다. 신문사가 배경인 7장에는 신문기사처럼 조각 글들이 짜깁기되어 있고, 10장 「떠도는 바위들」에서는 더블린 곳곳의 수많은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이 잘게 나뉘어 제목 그대로 ‘떠도는 바위들’처럼 산재되어 있다. 14장에서는 삼십여 문단이 영국문학사의 각 시기를 대표하는 문필가들의 문체 모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희곡 형식을 취한 300페이지에 달하는 15장에서는 현실과 환상이 쉴새없이 교차한다. 이러한 실험들이 각 장의 내용과 주제에 부합하도록 고안되었다는 점은 경탄을 자아낸다. 당대 모더니즘의 구호 ‘새롭게 만들기’의 시대정신을 반영한 조이스의 실험이 그 시대의 유행에서 끝나지 않고 후대 문학인들에게 엄청난 창조적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예술적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구매가격 : 17,500 원

연필로 쓴 작은 글씨

도서정보 : 로베르트 발저 | 2023-12-26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손글씨에서 스스로를 비춰보고 연필로 쓴 것을 베껴 쓰는 동안
나는 어린아이처럼 글 쓰는 것을 다시 배웠다.”
_로베르트 발저


로베르트 발저의 책을 수십만, 수백만의 사람이 읽었다면 세상은 보다 나은 곳이 되었을 것이다._헤르만 헤세

발저의 작품에 나타나는 윤리의 핵심은 권력과 지배에 대한 저항이다. 발저의 힘은 고도로 세련된 예술의 힘이다. 그는 진실로 놀라움과 저릿함을 느끼게 하는 작가다._수전 손택

로베르트 발저가 살면서 남긴 흔적은 너무나 희미해서 바람이라도 한 자락 불면 흩어져 사라질 것만 같다. 예나 지금이나 발저는 여전히 유일무이한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그는 독자들에게 자기 자신을 가능한 한 숨겼다._W. G. 제발트

카프카와 헤세가 사랑한 작가 로베르트 발저가
발다우 요양원에서 쓴 스스로도 읽을 수 없는 작은 글씨들
1956년 12월 25일, 눈이 내리던 크리스마스에 한 노인이 눈 속에서 산책을 하다가 쓰러졌다. 헤리자우의 요양원에 거주하며 산책을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던 이 평범한 노인은 위대한 작가 로베르트 발저다. 그는 평생 동안 글을 써왔지만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다. 세상 어디서에도 적응하지 못했고 집 한 채, 가구 한 점, 아주 적은 재산 한 푼 가져본 적이 없었다. 이 세상의 고립된 작가들 중에서도 가장 고립된 작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발저는 그저 변변찮은 양복 한 벌 입고, 조끼 주머니에 몽당연필 한 개와 잘라낸 메모지들을 가지고 다니며 이런저런 것들을 적어넣는 수줍은 사람일 뿐이었다.
장편소설 『벤야멘타 하인학교』와 『타너가의 남매들』 등으로 이제는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로베르트 발저는, 그의 작품만큼이나 ‘고독한 산책자’ 혹은 ‘작가들의 작가’라는 수식어로 유명하다. 하지만 잘 알려진 초기 작품들에 비해, 발저 문학의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후기 작품들은 국내에서는 여전히 미답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연필로 쓴 작은 글씨』는 프란츠 카프카와 헤르만 헤세, W. G. 제발트, 수전 손택 등 무수한 대가들의 찬사를 한몸에 받은 발저가 직접 쓴 작은 글씨의 유고인 ‘마이크로그램’을 해독하고 선별해 펴낸 책이다. 총 33편의 글과 함께 그 글에 해당하는 육필 원고를 찍은 사진 68장을 실제 크기로 함께 배치했다. 맨눈으로는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이 글씨들은 그 존재와 조형성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오롯이 빛난다.

‘마이크로그램’의 역사와 의미
『연필로 쓴 작은 글씨』에 담긴 마이크로그램은 발저가 살아 있는 동안 공개하지 않았던 비밀 원고다. 이 원고들은 고독과 불안, 망상으로 고통받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글쓰기를 이어가고자 한 발저의 의지를 보여준다. 마이크로그램 뭉치가 처음 발견된 당시에는 해독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져 의미 있는 텍스트로 인정받지 못했으나, 1980년부터 2000년까지 베른하르트 에히테와 베르너 모어랑이 총 526장으로 이루어진 메모들을 모두 정리해 6권의 『연필 영역』으로 펴냈고, 이 개척적인 편집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학적 업적”으로 평가되었다. 그리고 이 텍스트는 발저 후기 작품의 중심적인 텍스트이자 문학예술의 위대성을 보여주는 본보기로 자리잡았다.
1920년대 이후 손의 움직임에 이상 증세를 느낀 발저는 펜으로 쓰기를 중단하고 연필로 작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중에 그 위에 다시 펜으로 정서하는 작업 방식, 다시 말해 그가 ‘연필 체계’라 부른 작업 방식을 취한다. 이처럼 연필과 펜으로 이중으로 쓰인 각종 원고 뭉치들 중에는 1929년 본인의 의사와는 달리 정신분열증으로 베른 근처의 발다우 정신요양원에 보내진 이후에 쓰인 것들이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암호문인가 그림글자인가
출판되지 않았던 원고의 특성상 이 텍스트들은 종종 이해하기 힘들고 거친 부분이 많은데, 극도로 작은 글씨로 쓰인 초미세원고는 그 자체로 시각적인 놀라움을 선사하기도 해서 초기 연구자들은 여기서 분열, 자폐, 거부증 등 정신적 질환을 읽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누구보다 발저에게서 정신적 친밀성을 발견했던 W. G. 제발트는 이 원고를 병리적 증후로 읽는 것에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정신이 해체 직전의 가장자리에 놓여 있을 때 오히려 일반적인 상태에서는 가능하지 않았던 관찰력과 예리함이 날카롭게 작동한다는 것이다. 제발트는 오히려 그 속에서 도무지 줄어들지 않는 글쓰기에 대한 치열한 욕구를 발견했다.
『연필로 쓴 작은 글씨』에 실린 육필 원고의 사진들은 손으로 쓴 글씨체, 텍스트의 전달체인 용지, 용지 위에 텍스트의 배치 등에서 발저가 구사한 자신만의 독특한 작업 방식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달력이나 포장지, 엽서, 영수증이나 계산서 같은 각종 문서 등, 주변에서 구할 수 있었던 일상적인 종이의 뒷면이나 여백에 텍스트를 배열하거나 여백을 사용하는 방식은 시각적, 신체적, 물질적 요소들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암호문’ ‘그림글자’ 등으로 불린 이 텍스트는 종류도 일반적인 산문에서부터 시, 소설, 산문 등 여러 가지로 다채롭다.

침묵을 위한 글쓰기
글쓰기에 관한 여전히 꺾이지 않는 갈망에도 불구하고, 그의 많은 마이크로그램들이 어느 시점부터는 독자들을 상정하지 않은 채 오로지 스스로를 위해 쓰였다는 의미에서 『연필로 쓴 작은 글씨』는 가장 은밀한 텍스트이기도 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발저의 글씨들은 점점 더 작아졌으며, 나중에는 발저 자신도 알아보기 힘들어졌다. 그리고 헤리자우 정신요양원으로 옮겨간 이후에는, 마침내 글쓰기를 그만두었다. 스스로를 이른바 금치산자로 만듦으로써만 비로소 글쓰기의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사람. 글 쓰는 것을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마치 나쁜 짓이나 심지어는 부끄러운 짓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언제나 부리나케 메모장을 주머니에 감췄던 사람. 이런 발저에 대해 제발트는 “아무래도 작가들에게 글쓰기라는 것은 아무리 지긋지긋하고 답이 없더라도 어느 날 갑자기 관둘 수는 없는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로베르트 발저에게 연필로 글을 쓰는 것은 숨쉬며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작업에 다름아니었다. 삶이 그러하듯, 그의 글은 우리에게 그 무엇도 확정적으로 말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문학의 의미와 무의미가 동시에 존재한다. 읽고 난 후에도 여전히 하나의 수수께끼로 낯설게 남아 있는 이 텍스트들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이 불가해한 아름다움을 선사할 것이다.

*

도대체 왜 이 글들을 읽고, 심지어 번역까지 하려 했는가? 그것은 발저의 글을 옮기는 내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기도 하다. 의미 있고 심오한 글을 번역해서 우리 학계와 문단에 뭔가를 기여하리라는 나의 자부심과 욕망은 아랑곳없이, 그는 낮은 목소리로, 밑도 끝도 없이, 자신만의 생각을 늘어놓는다. 매 순간 머릿속을 잠시 스쳐갔던 생각들, 눈앞에 잠시 머물렀던 인상들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것이다. 도대체 그는 과묵하고 수줍은 사람인가? 수다스럽고 말 많은 사람인가? 그는 스위스 특유의 애국주의자인가, 모든 규범에 저항하는 반사회적 인물인가? 그의 작은 글들은 목적성과 성과 의식으로 가득찬 내가 끝끝내 답을 찾지 못할 것임을 미리 말해주는 듯하다._‘해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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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환담

도서정보 : 윤채근 | 2023-12-13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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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고 짜릿한 한국사 인물 열전

과감한 상상력의 힘!
현대 감성으로 재탄생한 고전 서사

역사는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는 역사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변화를 향한 갈망, 끝없는 고뇌, 감정적 결단
내면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어난 역사적 순간!
역사 속 한 페이지로 빨려드는 듯한 환상적인 체험


“누군가를 나만큼 미워할 수 있는 자가 있을까? 나만큼 누군가를 미워하며 동시에 좋아할 수 있을까? 증오에 치를 떨다가도 말할 수 없는 흠모의 기분에 빠져 차 마시는 기쁨조차 잊을 수 있을까? 일흔두 살이 된 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덧없는 업보의 바다에서 만났던 적장 이순신을 회고할 때마다 늘 그런 상태가 되고야 만다.”
2022년 영화 <한산>이 개봉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트위터에 짤막한 소설 「왜장 와키자카의 고백」이 올라왔다. “필력 어메이징” “와 무슨 왜장 회고록인가” “<한산> 보고 읽으면 머릿속에서 영상 재생돼”. 반응은 뜨거웠다. 70대 노인이 쓴 것 같다는 후기까지 올라왔다. 이처럼 필력이 뛰어난 작가가 과연 누구인지 모두 궁금해했다. 그런데 이토록 감각적이고 과감한 팩션을 쓴 사람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작가는 단국대학교 한문교육학과 교수 윤채근이었다.
윤채근 작가는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진지한 연구자다. 소설에 대한 탁월한 이해와 탄탄한 사료 조사가 뒷받침되어 그의 손길에서 생생한 팩션 한 편 한 편이 탄생할 수 있었다.

『고전환담』은 여러 고전 서사를 바탕으로 역사적 사실과 허구적 상상을 결합하여 창조해낸 팩션 26편을 실은 소설집이다. ‘환담(幻談)’은 괴상한 이야기라는 뜻으로, 현실과 가상의 모호한 경계를 넘나드는 재미와 함께 사건이 기이하게 펼쳐지는 긴장감을 준다. 윤채근 작가는 짧은 이야기 속에 강렬한 역사적 순간을 응집해내어, 그 순간을 온몸으로 겪어낸 인물을 입체적으로 그린다. 각 소설 끝에 나오는 ‘역사와 문헌’에서는 소설의 토대가 된 역사 속 인물과 고전을 다루어 역사적 배경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준다. 그 옛날 누군가가 남긴 역사적 기록과 이야기가 오늘날 다시 소설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기존에 볼 수 없었던 팩션의 세계,
역사의 단면을 환상적으로 보여주다
1부 ‘전쟁과 혁명’에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 현장을 무대로 삼아 창조된 유사 현실이 펼쳐진다. 이순신을 흠모한 일본 장수의 고백, 반정에 실패한 윤영손의 낙담과 비관, 한성백제 최후의 날에 울려퍼진 개로왕의 탄식, 한양의 유명한 거지와 박지원의 우정 등의 내용을 담았다. 이외에도 이옥의 「부목한전」을 새롭게 변형시킨 「불멸하는 고독」, 부여국이 몰락하면서 제각기 독립한 여러 하위 부족의 사건을 다룬 「세상의 마지막 단군」이 나온다. 한편 「어떤 하루」는 인조반정과 남원성 전투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으로, 전쟁에 참여한 병사들의 트라우마와 참혹한 전쟁의 상흔을 보여준다. 윤채근 작가가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은 그들에게 바치는 글”이다.
2부 ‘현장의 미스터리’에서는 판타지 스릴러 형식을 통해 공식 역사 속에서 충분히 소화되지 못한 사건들의 빈칸을 허구로 채워넣었다. 복선과 반전의 묘미는 물론 판타지 요소가 잘 살아난 소설을 모았다.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추리 서사가 돋보이며, 조선시대에는 식인귀로 불렸을 좀비도 등장해 오싹함을 자아낸다. 이덕무 문집에 수록된 「은애전」을 각색한 이야기, 원효 해골물 깨달음과 연관된 통속적 설화와 『삼국유사』의 사복 관련한 불교 설화를 결합한 이야기, 조선 후기 야담 작가 김려의 「가수재전」을 토대로 한 이야기, 신광수가 지은 한시창 <관산융마>와 소설 「검승전」을 결합한 이야기, 노년의 정약용이 지은 『아언각비』라는 어학 관련 저서와 「조신선전」이라는 산문 그리고 젊은 시절 천주교도로서의 그의 이력을 한데 결합시킨 이야기 등 여러 흥미로운 팩션을 모았다.
3부 ‘시간을 초월한 사랑’에서는 시대를 대표한 여성들에 관한 서사를 재해석해 그들에 대한 기존 관점을 뒤집고자 했다. 절개를 지키는 지고지순한 여성 인물들의 전형을 탈피해 누구보다 사랑과 의리와 일에 진심인 인물들의 모습이 펼쳐진다. 선화공주가 불같은 사랑에 빠진 순간, 낙랑공주가 자명고를 찢고 호동왕자에게 띄운 격정적인 편지, 남자라면 죽고 못 사는 황진이의 비범한 삶, 최고의 가객 송실솔의 음악적 교류 등이 소설로 탄생했다. 「세종,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에서는 한글 창제에 크게 기여한 정의공주의 고백이 나온다. 자식 사랑하는 마음으로 백성을 사랑하신 아버지 세종이 훈민정음을 반포하기까지 여러 우여곡절을 거쳤음에도 끝까지 포기를 하지 않으신 참뜻을 헤아린다. 이외에 대영박물관 컬렉션에서 발견된 고대 페르시아 구전 서사시 『쿠쉬나메』와 경주에서 출토된 페르시아 황금보검을 소재로 여러 사실을 직조해 엮은 이야기, 『삼국사기』의 「온달전」을 바탕으로 한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의 이야기, 1747년 12월에서 1748년 7월에 걸쳐 이뤄진 조선 통신사행을 토대로 하여 남공철의 「최칠칠전」을 중심으로 최북의 생애를 재구성한 이야기가 나온다.

역사적 인물의 진면모를 발견하다
『고전환담』은 역사적 인물의 획일화된 상과 영웅화를 걷어내고 인간적인 면모를 조명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역사적 인물이 누구인지, 그의 업적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개개인의 고백을 듣다보면 어느새 우리가 아는 유명한 인물의 새로운 진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윤채근 작가는 상상력에 힘입어 역사적 인물의 성향에 따라 각기 다른 내적 갈등, 번민, 그리움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익숙한 소재를 참신한 관점으로 풀어내 극적인 사건을 연출하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 몰입감을 배가하고 잔상을 뇌리에 깊이 박히게 한다. 무엇보다 역사적 인물들의 삶을 도식적으로 화려하게 그려내지 않고 어떨 때는 벅차고 힘겹게 느껴지기도 하는 파란만장한 인생의 한 부분으로 그려낸다. 이로써 과거에 특별했던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오늘날 누군가의 이야기로 다가오는 소설에 독자들이 깊이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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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여자들의 은밀한 삶

도서정보 : 디샤 필리야 | 2023-12-22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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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나를 구원할 수 없다.
나는 위험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원받기를 거부하고 가장 날것의 욕망까지 탐험하는
그리고 끝끝내 자유롭게 전락하는
교회 여자들의 은밀한 삶

데뷔작으로 펜/포크너상을 수상하고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에 오른 미국 문학의 새로운 반향, 디샤 필리야의 소설집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디샤 필리야는 문학을 전공하거나 창작 프로그램을 이수한 작가가 출판사의 지원을 받으며 데뷔하는 미국 문단의 대세적인 흐름과는 사뭇 떨어져 있는 길을 걸었다. 학부에서 경제학을,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그는 은행에서 근무하다가 전업 작가로 전향했다. 그리고 데뷔작인 『교회 여자들의 은밀한 삶』으로 단숨에 독자와 문단이 주목하는 중요한 작가가 되며 유수의 상을 수상했고 백만 달러 이상의 선인세를 받으며 차기작을 계약하는 이례적인 사건을 일으켰다.

안정적인 문장과 개성 있는 인물, 탄탄하면서도 재치 넘치는 구성이 돋보이는 디샤 필리야의 첫 소설집 『교회 여자들의 은밀한 삶』은 우리로 하여금 이 놀라운 현상을 완전히 납득하게 만든다. 느슨하게 연결되어 기시감을 주며 이어지면서 9편의 단편소설은 길지 않은 분량 안에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기독교 신앙의 교차성 문제를 밀도 있게 담아낸다. 필리야는 세대를 넘나드는 다양한 흑인 여성들의 삶을 통해 그들이 겪는 여러 층위의 억압과 폭력 그리고 한계를 넘어서는 그들의 진짜 욕망과 자유로운 도약을 생생하게 그린다. 오직 작품의 힘만으로, 우리에게 매섭도록 매혹적인 충격을 선사하는 이 책은 분명 미국 문학의 새로운 시대를 힘차게 알리고 있다.


온몸으로, 떨면서, 넘쳐나게, 두려움 없이
깊고 비밀스러운 곳에서 길어낸 강력한 욕망

필리야는 ‘순정한 교회 여자들’이라는 허울좋은 프레이밍 뒤에 숨겨진 현실과 그들의 진짜 욕망을 거침없는 문장과 절묘한 형식으로 까발린다. 『교회 여자들의 은밀한 삶』에는 새로운 욕망을 발견하는 여성들이 있다. 교리에서 어긋난 욕망, 위험하고 낯선 욕망,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욕망을 자기 자신에게서 발견하는 순간, 이들은 당황하고 때론 절망에 빠진다.

「율라」에서 소꿉친구인 율라와 캐럴레타는 세계가 혼란에 빠진 새로운 밀레니엄의 밤, 여느 때처럼 둘만의 밀회를 즐긴다. 두 사람은 매년 제야가 되면 호텔에서 육체적 친밀감을 나누지만 독실한 신자인 율라는 그들의 관계가 신 앞에 죄악이 될까봐 두려워하고, 밤이 지나면 언제나 모든 것이 실수였으며 자신은 여전히 동정이라고 말한다. 한편 「물리학자와 어떻게 사랑을 나누는가」의 라이라는 엄격하게 자유를 통제하는 기독교도 어머니 아래서 자라 마흔두 살이 된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몸이 낯설다. 학술대회에서 만난 물리학자 에릭과 서로 마음이 통하지만, 그가 원하는 걸 자신이 줄 수 없으리란 생각에 관계를 진전시키기 꺼린다. 「안-대니얼」에서 암 투병중인 어머니를 보살피는 ‘나’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유부남과 호스피스 센터 주차장에서 섹스를 하는 사이가 된다. 중학교 동창인 대니얼을 닮았지만 대니얼은 아닌 ‘안-대니얼’과 비좁은 차의 뒷좌석에서 몸을 움직이면서도 ‘나’는 비참한 현실을 완전히 잊기가 힘들다.

믿음과 욕망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망설이는 자들의 이야기는 비단 ‘교회 여자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사회가, 종교가,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바를 충족하기 위해 살아온 이들이 그것과 완전히 반대되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서서히 알아갈 때, 익숙한 세계는 분열되고 새로운 충격이 찾아온다. 그러나 날것의 자유를 맛본 자들은 이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 책을 펼친 우리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처럼.


“내 인생은 절대 엄마 인생하고 같지 않을 거야.
아름다울 거니까, 부스러기가 아닐 거니까.”

은밀한 비밀들은 할머니에게서 엄마로, 엄마에게서 다시 그 딸로 전해지며 계속되고 변화한다. 필리야는 짧은 분량 속에 촘촘하게 서사를 구성해 사회적, 종교적 억압과 폭력이 여성들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답습되는지, 또 모녀를 비롯한 여성 집단이 어떻게 그 틀에 갇히거나 그 틀을 깨고 나오는지에 대해 그린다. 이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애증과 죄책감, 상실감과 같은 복잡하고 인간적인 감정들은 때로는 일기로, 편지로, 지침으로 생동감 넘치게 전해진다.

「자엘」에서는 증손녀인 자엘의 일기와 외증조모 시점의 이야기가 번갈아 진행된다. 아이가 태어나면 대대로 성경 속 인물의 이름을 붙일 정도로 독실한 집안에서 태어난 자엘은 목사 부인인 세이디에게 성적 매력을 느낀다. 외증조모는 그런 자엘을 걱정하지만 결국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나자 모든 일에 대해 함구하며 자엘을 보호한다. 외증조모는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은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의 딸과 손녀를 생각하며 자엘은 적어도 남자아이들에게 곁을 내주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자매에게」의 네 이복자매는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할머니 집에 모인다. 이들은 세 명의 여자와 네 딸을 낳고도 평생 가정에 소홀했던 아버지에게 또다른 숨겨진 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녀에게도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알리려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복숭아 코블러」의 올리비아는 외딴 빈민가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간다. 어머니는 월요일이면 찾아오는 ‘하느님’을 위해 정성스레 복숭아 코블러를 준비한다. 그가 코블러 접시를 비우고 두 사람이 침실로 들어가면 여지없이 어머니의 “오, 하느님!” 하는 외침이 들려온다. ‘하느님’이 교회의 유부남 목사라는 걸 알 만큼 올리비아가 자란 뒤로도 어머니와 목사의 부정한 관계는 계속되고, 고등학생이 된 올리비아는 목사의 아들에게 과외를 하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복숭아 코블러를 만드는 엄마는 결코 딸에게 레시피를 전해주려 하지 않는다. “달콤함을 맛보면 그걸 너무 원하게 되고, 자라서 그 부스러기나 맛보면서 살 테니까”라고 말하며 코블러의 맛조차 보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교회 여자들의 은밀한 삶』은 거기에 굴하지 않고 밤중에 부엌에 몰래 내려가 쓰레기통 바닥에 붙은 코블러를 핥아먹는 여자애에 대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는 원망과 절망과 공포가 있지만 오로지 자신만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구원도 남아 있다. ‘구원받기’를 거부한 여성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것들과 투쟁하며 끝끝내 저마다의 짜릿한 전락을 맞이한다. 여기 살아 숨쉬는 비밀들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합창은 사랑과 삶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송두리째 뒤흔들 것이다. 그 기분좋은 덜컹거림을 기대해봐도 좋다.

구매가격 : 10,500 원

테러리스트

도서정보 : 마이 셰발, 페르 발뢰 | 2023-12-06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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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의해 창조된 인물 중
마르틴 베크만큼 내가 마음 깊이 공감한 이는 없다.”
_박찬욱, 영화감독

라틴아메리카에서 장기간 독재정치를 행하던 대통령이 거리 한복판에서 폭탄 테러로 죽임을 당한다. 곧 배후에 있는 암살 조직의 정체가 밝혀지고, 최근 그들이 유력 정치인을 대상으로 세계 곳곳에서 테러를 자행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긴장감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미국으로부터 정상급 정치인이 방문하는 일정을 앞둔 스웨덴 경찰은 국빈 경호를 위한 특별반의 총책임자로 마르틴 베크를 임명한다. 지난 십여 년간 함께 일한 경찰 동료들과 함께, 마르틴 베크는 암살 테러 시도를 저지할 수 있을까?

요 네스뵈, 헨닝 망켈 등 유수의 범죄소설 작가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리즈, 북유럽 미스터리의 원점, 경찰소설의 모범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10번째 작품이자 마지막 작품 『테러리스트』가 출간되었다. 2017년에 출간된 『로재나』를 포함한 아홉 편의 작품에서 여러 범죄 사건을 해결해온 마르틴 베크가 10권 『테러리스트』에서는 유력 정치인을 노리는 세계적인 암살 테러 집단을 상대로 경호 임무를 수행한다.
엘릭시르에서 2017년 출간한 『로재나』를 시작으로 7년간 꾸준히 이어져온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스웨덴 국가범죄수사국에 근무하는 형사 마르틴 베크를 주인공으로 하는 경찰소설이다. 공동 저자인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는 전체 열 권으로 이루어진 이 시리즈에 ‘범죄 이야기’라는 부제를 붙여 부르주아 복지국가인 스웨덴이 숨기고 있는 빈곤과 범죄를 고발하고자 했다. 또한, 긴박한 전개와 현실적인 인물이 자아내는 위트까지 갖추어 대중소설로서의 재미도 놓치지 않은 작품으로 완성시켰다.
세계적인 영화감독 박찬욱 감독은 지난해 〈헤어질 결심〉(2022년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경쟁 부문 초청, 감독상 수상작)의 주인공 캐릭터를 조형하는 데 ‘마르틴 베크’ 시리즈가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밝힌 바 있다. (출처: 김혜리의 콘택트 https://youtu.be/9RdNY19MtSw?t=718) 차분하고 유능한 경찰인 장해준(박해일 분)은 차근차근 단서를 수집하고 사건을 끊임없이 곱씹으며, ‘생각하는 형사’ 마르틴 베크의 수사 스타일을 보여준다. 이들은 모두 천재적인 추리력을 뽐내는 독보적이고 영웅적인 탐정이 아니라, 정해진 일과와 절차를 따르는 지극히 현실적인 경찰로 그려진다.

●‘범죄 이야기’의 마지막 장으로
작품의 제목으로부터 쉽게 유추할 수 있듯이 『테러리스트』에서 마르틴 베크는 정치인을 대상으로 암살 테러를 일삼는 국제 테러리스트를 추적한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벌어진 대규모의 폭탄 테러 사건은 세계 각국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이에 따라 스웨덴 정부는 예정된 국빈 방문 일정 중에 불미스러운 일이 없도록 경찰에 지시를 내리고, 그 임무를 맡은 특별책임반의 책임자로 마르틴 베크가 지명된다. 이제 마르틴 베크는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동료들과 함께, 이미 스웨덴 땅으로 숨어든 테러리스트들의 계획을 저지해야만 한다.

소설의 제목인 ‘테러리스트’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의 마지막 ‘마르틴 베크’ 시리즈인 이 책에서는 테러가 잔뜩 벌어진다. 하지만 테러로 인한 혼란은 줄거리의 맨 앞과 뒤를 장식한 정치적 암살에서만 발생하는 게 아니다. 셰발과 발뢰가 이 책에서 꾀하는 바는 테러의 근본적인 정의 자체를 훨씬 더 폭넓게 탐구하는 것이다.
_데니스 루헤인, 『테러리스트』 서문 중에서

직전 작품인 『경찰 살해자』에서 스웨덴 사회의 타락과 경찰 조직의 방만한 실태를 신랄하게 지적했던 저자들의 태도는 『테러리스트』에서도 조금도 꺾이지 않는다. 단, 거대해진 범죄의 규모만큼이나 시야를 넓힌 셰발과 발뢰는 본작을 통해 스웨덴 사회를 넘어서,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해악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테러리스트』에서 ‘테러리스트’는 단순히 국제 테러 조직에 속해 있는 자들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타국민을 향해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거리끼지 않는 강대국의 정치인들과, 자국민을 억압하고 입맛대로 움직이기 위해 폭력을 휘두르는 권력자들, 즉 ‘국가’와 ‘체제’에 의한 폭력이 테러와 다름없음을 비판한다. 이 책의 서문을 쓴 미국의 하드보일드 스릴러 작가 데니스 루헤인 역시, 『테러리스트』의 서문에서 마르틴 베크와 동료들에게 최대의 적은 “총알이나 폭탄이 아니”며, “스스로에게 불행한 상황을 오히려 치켜세우고 보상하는 관료 기구”라고 지적하고 있다.

●범죄소설을 현실의 거울상으로 만들다

“마르틴, 자네의 문제는 잘못된 직업을 가졌다는 것뿐이야. 잘못된 시대에, 잘못된 나라에서, 잘못된 체제에서.”
_『테러리스트』,

저자인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는 복지국가로 알려진 스웨덴의 현실을 범죄소설이라는 장치를 통해 여과 없이 그려내, 독자들이 즐거운 독서 안에서 1970년대 스웨덴 사회의 문제적 면면들을 발견할 수 있게 했다. 등장인물들은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 인종차별주의 정책 반대 시위가 벌어지는 현장을 지나치기도 하는데, 이렇게 사회상을 문학작품에 녹이는 작풍은 ‘마르틴 베크’ 이전까지의 범죄소설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었기에 특별한 의의를 지닌다.
데니스 루헤인은 ‘마르틴 베크’ 시리즈가 당대 사회상을 고스란히 녹여내고 있다는 점을 짚어내기도 했다. 시리즈의 후반으로 갈수록 논객으로서의 셰발과 발뢰가 체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가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루헤인은 소설가로서의 셰발과 발뢰가 ‘이야기’의 유머와 재미를 놓치지 않음으로써 장르소설의 모범적 사례가 되었음을 극찬한다.

순수한 사람들은 파괴된다. 그들을 착취하는 사람들도 파괴될 때가 많다. 소설 속 사건들이 일으킨 여파는 영혼을 난도질하는 것이어서,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아무 상처도 입지 않고 빠져나올 수는 없다. 오직 체제 그 자체만이 모든 더러움과 어리석음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로 꾸역꾸역 굴러간다. 그 규범을 지켜내려고 애쓰는 영리하고, 끈질기고, 멜랑콜리한 마르틴 베크와 함께.
_데니스 루헤인, 『테러리스트』 서문 중에서

‘마르틴 베크’ 시리즈 이후로 완전히 다른 흐름을 따르게 된 범죄소설은, 범죄를 통해 사회를 비추는 거울 같은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또한 후배 작가들에게는 앞으로 범죄소설이 나아갈 길을 보여주며 그들로부터 “경찰 소설의 모범”(요 네스뵈), “현대의 고전, 오늘날에도 유효한 소설”(헨닝 망켈) 등의 찬사를 받았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최근까지도 스웨덴에서 드라마화가 진행되고 있는 등, 시대를 넘어서 그 인기와 작품성을 꾸준히 증명해나가고 있는 작품이다.

구매가격 : 12,600 원

책 사냥꾼의 도서관

도서정보 : 앤드루 랭, 오스틴 돕슨 | 2023-12-13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책이라네, 책, 그리고 다시 한번 책이라네. 책은 우리의 주제라네.”
고대의 철학자와 태고의 왕부터 왕비와 교황, 도둑과 처세가까지
책 속에 파묻히고 도서관에 묶이고자 하던 이들의 이야기

책이 융성하던 시대가 있었다. 책의 장정, 제지, 제본에 많은 사람이 열 올리고 왕족과 성직자마저 희귀한 책을 탐내서 훔치던 시대. 지식의 보고로서뿐 만 아니라, 미적 취미의 대상이자 문학적이고도 역사적인 유물로서 책이 다뤄지던 시대. 영상이나 게임 등 각종 미디어가 넘쳐나는 현대에도 책에 애정을 품고 그로부터 눈 돌리지 못하는 독자들에게는 이 시기는 그야말로 호시절이라 부름 직하다.
물론 그 시기는 오래전에 지나갔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듯, 쓸려나간 과거는 역시 책 속에 고스란히 보관됐다. 앤드루 랭과 오스틴 돕슨의 『책 사냥꾼의 도서관』은 책을 무척이나 사랑한 덕에 종내는 책으로서 전해지게 된 애서가들의 이야기다. 동시에 지금 우리가 접하는 책들을 찾아내고 보존한 사람들의 발랄하고도 생생한 모험담이다.
제목에 등장하는 ‘책 사냥꾼’은 거리와 경매장, 시장통 등 다양한 장소에서 책을 ‘찾고’‘낚는’ 애서가들을 뜻한다. 그들은 매일 책 사냥에 나서며 오래도록 소망하던 장서를 찾아내길 꿈꾼다. 그 과정은 때로 무척이나 극적으로 나타난다. 우연히 발견한 책에서 가장 사랑하던 작가가 남겨둔 꽃잎을 발견하고 밤새 잠 못 이루던 수집가부터 도서관을 만들기 위해 한 도시의 책을 “회오리바람이 나뭇잎을 모두 휩쓸어간 듯”(64쪽) 사들인 학자, 본인이 탐내던 책을 사들인 자들을 공격한 책 도둑까지. 이 책 속에는 ‘한 권의 책’을 위해 살아가던 이들의 유쾌한 고군분투가 담겨 있다. 책이 가장 귀중하고 위대하던 시대, 누구보다 책을 사랑했던 책 사냥꾼들의 이야기 속으로 한 발짝 내디뎌보자.


“이상이 책 수집에 대한 우리의 변명이다.”
책을 찾고, 구하고, 모으고, 지켜내던 열정적인 ‘책 사냥꾼’들의 시대
자신만의 도서관을 만들고자 시장통과 거리, 경매장을 헤매던 사람들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책이란 ‘종이를 여러 장 묶어 맨 물건’이며, ‘일정한 목적, 내용, 체재에 맞추어 사상, 감정, 지식 따위를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하고 적거나 인쇄하여 묶어 놓은 것’이다. 글과 그림으로 묶인 이 발명품은 오랜 시간 인류의 기억과 기록을 책임져왔다.
『책 사냥꾼의 도서관』은 책이라는 매체가 여전히 강력하고 독자적인 힘을 발휘하던(비록 작가는 당시에도 영국의 독자들이 줄어드는 중이라고 불평하지만) 시대에 적힌 ‘책 이야기’다. 저자인 앤드루 랭과 오스틴 돕슨은 국내에 19세기의 중후반과 20세기 초반을 두루 겪었던 작가들로 문학과 역사에 대해 다양한 책을 펴냈다. 소설가이자 민속학자, 시인이자 전기작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저자로서 활동하던 그들에게 ‘책’은 분명히 대체 불가능한 존재였을 테다. 책 첫머리에 들어간 오스틴 돕슨의 짤막한 시(“그 작고 진귀한 책, 고색창연한 그 책”을 칭송하리라)만으로도 충분히 그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의 주 저자인 앤드루 랭은 디브딘 박사의 말을 인용하며 서문을 연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도서관 사서가 되고 싶어한다”(19쪽).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이 말이 얼마나 큰 공감을 불러올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뒤이어 랭이 펼쳐내는 각종 애서가의 일화를 보면 오랜 역사에서 ‘자신만의 도서관’을 만들고자 고군분투하던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 있다. 호메로스, 단테와 밀턴, 셰익스피어와 소포클레스 등 우리가 잘 아는 빛나는 이름들부터 리브리나 뒤몽스티에처럼 해당 분야에 깊이 관심을 품지 않으면 분명히 낯설 이름들이 연달아 등장한다. 책을 사랑하고 탐내던 이들의 계보는 꾸준히 이어진다. 그로부터 파생된 이야기는 가끔 오싹하고 때론 우스꽝스러우며 종종 감명 깊다. 헌책방에서 우연히 루소의 저작을 발견하고 밤새 잠 못 이루던 수집가는 책장 사이에서 루소가 보관한 페리윙클 꽃잎을 보고 “극한의 행복”을 느꼈다. 자신이 원하던 귀중한 기도서를 찾아내기 위해 500킬로미터를 한달음에 달려간 수집가도 있다. 어떤 책 도둑은 본인이 놓친 책을 포기하지 못하여 책 수집가들을 습격하고 그들의 집을 불태웠다. 이 다종다양한 애서가들이 끝내 바라던 풍경은 모두 같았다. 세상의 진귀한 책들을 한데 모아둔 자신만의 도서관이 그것이다.
대규모로 제작된 책들을 살 수 있게 된 오늘날, 현대의 독자에게 『책 사냥꾼의 도서관』 속의 이러한 일화들은 아무래도 낯설게 다가온다. 그렇다고 아주 멀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미 절판된 책들, 혹은 아주 오래전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져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책들은 여전히 어마어마한 가격 아래 팔려나간다. 이 책들을 찾아내기 위해 비밀스러운 거래에 뛰어드는 자들도 존재한다. 19세기이건 20세기이건 21세기이건 간에, 이들의 목적은 모두 같다. 우리가 잘 알거나 아직 모르는 목적, 사상, 체제에 맞추어 사상, 감정, 지식을 충실히 옮겨놓은 발명품. 『책 사냥꾼의 도서관』은 바로 그 발명품의 가치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말하고 있다.


우리는 책 속에서 시대를 뛰어넘어 과거의 작가와 손을 마주 잡는다
“문학적 유물”이자 “타인의 영혼”이 담긴 책들을 구하는 여정

앤드루 랭은 책의 가치를 ‘아름다움’‘희귀함’‘기묘함’ 등 세부적인 항목으로 구분한다. 비록 문학적 관점에서는 별다른 가치가 없을 작품일지라도, 책 자체로는 유의미한 작품도 있다. 먼 과거에 제작되어 만든 이의 손길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책이라거나, 희귀한 삽화가 수록된 작품 등이 좋은 사례다. 마리 앙투아네트나 뒤바리 부인, 나폴레옹 등 역사적으로 저명한 인물이 소유한 책 역시 큰 관심을 받는다. 알두스 마누티우스처럼 전설적인 출판인이 펴낸 책에는 마니아들이 따라붙는다.
랭은 이러한 책 수집의 매력을 “감상적인 측면”으로 설명한다. “고서들은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문학적 유물로서 신성하고 귀중한 가치”를 지니며, “이는 종교의 신자들이 종교적 유물을 신성하게 여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49~50쪽). 책을 모으는 이들은 한때 작가가 미래를 전혀 예견치 못한 채 설레고도 두려운 마음으로 출판한 바로 그 작품을 바란다. 작가가 제작에 직접 의견을 내고, 훗날 부끄럽게 여길 작품을 손수 다듬어 수록한 바로 그 책 말이다. 독자는 “이런 판본을 통해 작가의 영혼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선다”(50쪽)고 느낀다. 책이란 여러 기록이 담긴 인쇄물을 넘어, 타인의 영혼을 가까이서 접할 수 있는 유물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책 사냥꾼의 도서관』은 책을 읽기를 위한 도구로만 다루지 않는다. 본문에서 책이란 오래될수록 귀하며, 희귀할수록 탐나는 대상이다. 『몽테뉴의 수상록』은 현대 한국에서도 당장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1698년에 암스테르담에서 펴낸 판본이 주는 감동은 어디서도 느낄 수 없다. 해당 판본 속 삽화에는 17세기 파리의 대중이 본 복장을 그대로 차려입은 등장인물의 모습이 수록되어 있으며, 독자는 이를 통해 먼 과거의 사람들과 연결됨을 느낀다. 이때 책은 ‘읽기’를 위한 도구일 뿐만 아니라 한 시대가 여실히 드러나는 흔적이 된다. 저자는 “우리가 책에 생생한 애정을 느끼는 까닭은 바로 이 감상적인 측면”에 있다고 설명한다. “책을 통해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죽은 위대한 시인들, 학자들과 교류할 수 있다. 우리의 손은 시대를 뛰어넘어 그들의 손을 마주 잡는다”(56쪽). 우리는 마주 잡은 손에서 시와 소설을 발견하고, 기도나 노래를 마주하기도 한다.
이처럼 타인과 교류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매체가 책이었던 시절,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책에 열정을 쏟아부었다. 본문에서는 이 과정을 무척 생생하게 묘사한다. 장서와 서가를 관리하는 법은 지금 보아도 흥미롭다. 자신만의 책장을 가꾸거나 오래된 책을 고치는 요령 모두 현대에는 거의 배울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쓸 당시만 해도 작가는 책 표지에 광택제를 바른다거나 책장 안에 흑단을 대는 일이 완전히 생소해지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책 사냥꾼의 도서관』이 ‘책’이 어떻게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지에 주목하고 있음을 떠올리면, 19세기에 쓰인 이 책과 오늘날 우리가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은 새삼스레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기도가 담긴 책, 삽화가 아름다운 책, 오래도록 살아남은 책
19세기의 애서가들이 현대의 우리에게 건네는 ‘책을 향한 연가’

책의 1장과 2장이 애서가와 책 수집가, 그리고 그들의 기록에 대해 두루 다룬다면 3장과 4장은 고서와 삽화 책이라는 더욱 구체적인 주제에 집중한다. 이 중 3장이 주목하는 고서는 ‘필사본’으로, 유물로서의 책 중에서도 그 가치가 가장 높이 평가된다.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책’이라는 필사본의 특징은 많은 수집가에게 사랑받기 충분한 조건이었다. 앤드루 랭은 같은 장에서 채식 필사본을 수집하는 이들이 배워야 할 여러 지식을 전수하는데, 중세의 서체나 책장 차례의 순서, 낙장 조사 방법 등이 그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독자 중에서 필사본을 수집하는 이는 매우 드물 것이다. 그럼에도, 어쩌면 그렇기에 필사본을 손에 쥐고자 온 힘을 다하는 수집가들의 노력은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가치를 모르는 이에게는 사소한 오자나 얼룩으로 다가옴 직한 책의 오류조차 애서가들에게는 과거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통로가 된다. 15세기 이탈리아에서 필사된 성서에서 발견된“책을 끝냈으니,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147쪽)는 구절은 그러므로 더욱 강렬한 반향을 준다. 오늘날 책은 더는 가장 큰 주목을 받지 못하며, 귀족과 도둑을 막론하고 온갖 사람의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대상도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책장 속 활자들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독자와 작가를 연결하고 있다.
물론 활자만이 책 속의 연결 고리인 것은 아니다. 오스틴 돕슨이 쓴 4장 「삽화가 들어간 책」은 그림책이나 삽화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선물과도 같은 장이다. 오스틴 돕슨은 책이 쓰일 당시만 해도 신식 문화였던 ‘삽화’가 어떻게 책의 울림을 더하고 아름다움을 배가하는지 서술한다. 르네상스의 대표적 화가로 알려진 알브레히트 뒤러나 빛의 묘사로 이름을 떨친 윌리엄 터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시리즈의 삽화가로 잘 알려진 존 테니얼이 그린 그림과 그 뒷이야기는 지금 보아도 흥미롭다. 돕슨은 삽화라는 예술 분야가 어떤 식으로 성장하고 발전해왔는지를 다양한 사례를 통해 짚어나며, 이 과정은 책이 우리에게 주는 다양한 감각적 접근을 골똘히 생각해보게 만든다.
책이 융성하던 시절은 이미 떠나갔다. 다만 책은 여전히 쓰이고, 만들어지며, 읽히고 있다. 이 책을 비롯하여 과거의 책들은 다시 다채로운 글과 그림으로 살아나 현대의 독자에게 전해진다. 우리는 여전히 인쇄된 글과 그림을 통해 타인과 맞닿으며 다른 시공간을 체험한다. 때로는 책 안의 내용에만 감동하지만, 어떤 때에는 책이라는 사물 그 자체에 지극한 애정을 품는다. 『책 사냥꾼의 도서관』은 이 감동과 애정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는 책이다. 19세기 유럽을 살았던 애서가들의 삶을 정확히 공감할 수야 있겠으나, 그들이 ‘책을 향해 바치는’ 연가의 진실성에는 충분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이 연서 역시 책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면서 말이다.

구매가격 : 13,500 원

사냥꾼들

도서정보 : 주톈신 | 2023-12-19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이 책은 거리에서 살아가는 동물을 문명적으로 대하는 길을 모색하고 추구한
우리 세대의 기록이다”

-어떤 날은 차도에서, 어떤 날은 인간의 침대 위에서……
집 안팎을 넘나들며 인간과 엇갈리고 마주치는 고양이들
-그런 그들에게 바치는 타이완 국민 작가 주톈신의 근심 어린 서한
-약자에 대한 폭력과 차별이 난무한 세상을 향해 외치는 포용에의 주문

작은 것들, 단절된 것들, 사라진 것들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글쓰기를 선보여온 주톈신이 오랫동안 품고 안고 먹인 도시의 사냥꾼, 고양이의 생애에 대해 말한다. 주톈신은 소설가이자 각본가인 언니 주톈원, 타이완 최고의 문화비평가이자 전방위 학자로 인정받는 남편 탕누어와 함께 타이완을 대표하는 문학가로, 2012년 소설 『고도』로 국내 독자들을 만났다. 불의한 세태에 대한 치열한 고발정신을 특유의 서정적인 문체로 표현하는 그는 『사냥꾼들』을 통해 ‘길고양이를 괴롭히지 말라’는 다소 해묵은 주문을 다시금 주목해야 할 낯선 주장으로 새롭게 건져 올린다. 소파 위에서, 식탁 아래서 생생하게 겪어낸 경험을 문장가다운 아름다운 말로 엮어냄으로써.

고양이에 대한, 고양이를 바라보는 마음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묘사

이 책은 고양이를 그려내는 기존의 이미지를 소비하면서도 그것을 거부한다. 주톈신이 소개하는 고양이는 마냥 사랑스럽지 않으며, 심지어 불량하다. 「모든 고양이가 사랑스러운 건 아니다」에서는 고양이의 고약한 면모를 ‘겁쟁이 고양이’ ‘못생긴 고양이’ ‘말하기 좋아하는 고양이’ ‘훔쳐 먹는 고양이’ ‘꽁한 고양이’ ‘집에 붙어 있지 않는 고양이’ ‘독신남 고양이’ ‘불량소녀단’과 같은 항목별로 분류하여 ‘귀엽고 예쁜’ 동물이라는 고양이의 신화에 구태여 흠집을 낸다. 그는 “그가 암암리에 폭력에 가까운 행위로 늙거나 어린 묘족을 괴롭히는 모습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라든가 “한한은 진짜 진짜 못생겼다” “예전에 우리 집에 살았던 커다란 흑백 무늬 수고양이는 추한 생김새 때문에 아추라는 이름이 붙었고, 때때로 히틀러라 불리기도 했다”라고 쓴다.

이로써 얻어지는 건 무엇인가. 그가 ‘비방’하는 목적은 분명하다. “다들 아름다운 인연이 시작되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길고양이를 입양하려는 마음을 먹었을 터. 그러다 보니 나에게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릴 의무가 생겼다”라는 말로 미루어 볼 때 작가는 고양이의 다양한 면모를 알지 못한 채 귀엽다는 이유만으로 덥석 입양해 쉽게 파양할 경우를 미연에 방지코자 한다. 동시에 달성되는 또 다른 가치도 있다. 동물이 귀엽지 않아도, 심지어 ‘불량’해도 사랑스럽다는 작가의 자연스러운 태도는 어느새 읽는 이조차도 ‘못생긴 한한’을 자연스레 긍정하고 사랑하게끔 만든다. 대상을 조건 없이, 자연히, 저절로 사랑하기. 주톈신은 자신의 사랑을 통해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사랑의 가능성을 증명해 낸다.

소설적 상상 또한 이 책의 묘미다. 고양이를 오래 바라보던 작가는 스스로 고양이가 되어 자신에게 고한다. “아이고, 똘똘하고 모든 걸 다 안다 싶은 내 집사도 이 즐거움은 결코 알 수 없겠지. 갖가지 소식을 실은 산들바람이 풀 끝을 스치고, 풀 끝은 가장 예민하고 가느다란 배털을 사박사박 훑고, 그 빛과 그림자는 초 단위로 또는 그보다 더 미세하게 달라지고, 백만 년간 뜨거운 핏속에 응축된 조상들의 목소리에 소환되는 그 순간, 시간은 시간이 아니다.”(42) 문장을 읽고 난 독자는 인간을 벗어나 고양이의 몸이 되어 배털을 스치는 가상의 공기를 체험하게 된다. 주객이 뒤바뀐 상황 속에서 작가는 대상으로 고정되어 있던 고양이에 대한 더 큰 이해에 도달하게 되고, 독자 역시 같은 경험을 통해 고양이와 더욱 가까워진다. 이 책을 읽고 난 우리는 이로써 고양이를 더 잘 알게 되었노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냥꾼이 사냥당하는 도시,
주톈신이 고발하는 타이베이

주톈신이 타이완에서 마주하는 고양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야성이다. 그들 묘족은 인족(주톈신의 표현)을 경계하며, 인족의 “목소리와 몸짓이 아무리 상냥하고 온화해도,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아도” 그들과 가까워질세라 냅다 도망치기 바쁘다. 얼핏 그들은 도시의 질서에 길들지 않은, 문명의 반대말로서의 야성성을 갖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 야성성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주톈신은 방어적이고 회피적인 타이완 고양이들을 보며 탄식한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들은 그토록 사람을 경계하며 죽어라 달아나는 걸까? 무엇 때문에 그들은 에게해 작은 섬의 고양이들처럼 우리를 쓱 보고는 기지개를 켜고 단잠을 잘 수 없는 걸까?” 동시에 작가는 묘족이 야성적일 수밖에, 인간에게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해한다. “내가 만약 이 섬나라의 묘족이라면, 나 역시 그럴 테니까.”

호기심에 이끌려 고양이에게 다가가는 아이에게 “더러우니까 떨어지라”고 다그치는 부모부터 길고양이에게 끓는 물을 뿌리는 노점상 주인,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아기 들고양이를 4층 창밖으로 던져버린 교사, 묘족이 지나다니지 못하도록 마당에 울타리를 두르고 철조망까지 친 어느 고급 주택의 집주인까지. 타이베이에서 고양이는 그들에게 붙여진 사냥꾼이란 별명만큼 호령하고 군림하지 못한다. 이 도시의 사냥꾼들은 죽거나 버려진 것만을 ‘사냥’해야 하는 비운을 감내해야 하며, 도처에 도사린 사냥‘당할’ 위험을 감지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 책이 현재의 우리에게 유의미한 이유는 책이 가진 문제의식이 바다 건너 한반도에 그대로 와닿기 때문이다. 책에서 그리는 고양이의 무대는 사적 공간인 집이 아닌 공적 공간인 도시다. 도시인들에게 박해받는 도시 고양이의 비운을 읽는 독자는 비단 그곳에만 머무르지 않고, 내가 사는 이곳 도시 고양이의 삶으로까지 생각을 옮겨오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는 타이완에서 박해받는 고양이를 상상함과 동시에 당장 내가 앉아 있는 건물 밖에서, 담벼락 사이에서, 주차장 구석에서 울고 있는 이쪽의 고양이 역시 떠올리게 된다. “공공연히 통치자의 이익과 선호에 부합하는 사람만 골라 유권자로 삼으려고 하는데, 하물며 ‘내 종족이 아닌’ 이들의 사정을 봐줄 리가?”라고 묻는 주톈신의 물음 앞에서 우리는 이 책이 애초에 다른 언어로 쓰였던 번역서라는 사실에 놀라게 될 것이다.

사냥꾼 아닌 사냥꾼을 두고도 주톈신이 책 제목을 『사냥꾼들』이라고 지은 데는 이러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제목은 고양이의 본능을 지켜주고 싶다, 뛰놀도록, 배회하도록, 살아 있는 개체와 섞이도록, 그렇게 내내 진정한 사냥꾼이도록 해주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있다. 인간의 생존만이 유일한 과제가 된 도시에서 고양이 애호가는 필연적으로 수호자일 수밖에 없다. “우리 집에는 이미 개 여섯 마리에 토끼 세 마리가 있었고, 고양이는 수도 없이 많(았)으니까!”

구매가격 : 11,900 원

문명 국가 대학

도서정보 : 간양 | 2023-12-20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간양의 사상적 행적이
곧 중국현대사상사의 한 부분이다”

중국사상의 리더 간양,
민족 너머 문명에서 길을 찾다
마오쩌둥-공자-덩샤오핑을 잇는
‘유가사회주의공화국’

‘문화영수’ ‘신좌파’ 등으로 불리며 사상계를 종횡무진 활약했던 논객 간양의 중국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담았다. 간양의 강연록, 인터뷰, 기고문 가운데 핵심적인 것을 추리고 이를 관통하는 세 가지 키워드 ‘문명’ ‘국가’ ‘대학’을 제목으로 삼았다. 이 책에서 간양은 민족-국가를 넘어 문명-국가로 나아가는 것을 새로운 중국의 과제로 제시한다. 국가는 그 과제의 주체이며 대학은 그 교육과 실천의 장이다. 간양이 주창한 ‘문명-국가’, 이른바 ‘유가사회주의공화국’은 마오쩌둥-공자-덩샤오핑으로 대표되는 정치적 사회주의-문화적 보수주의-경제적 자유주의를 통합하는 새로운 사상해방에 근거한다. 이 사상해방은 중국의 역사문명에 대한 재인식과 함께 서구에서 설정한 사고방식과 서구에서 제기한 문제에 따라 생각하는 습관을 버리고, 중국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사유할 것을 촉구한다.

민족국가에서 문명국가로의 전환, 다시 복고를 말하다
간양이 중국의 새로운 과제인 ‘문명국가’와 대비하는 것은 명실공히 20세기 중국의 과제였던 ‘민족국가’다. 간양은 근대화 초기 생존을 위해 택해야 했던 민족국가의 노선이 다만 단기적인 과제이자 근대화의 첫 단계에 불과하며 중국의 장기적 비전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근대적 민족국가가 되기 위해 서양을 열렬히 학습하고 중국 문명을 철저히 폐기했던 것을 벗어나 반대로 중국 문명을 재인식하고 부흥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 결과로 기대되는 것은 바로 ‘문명국가’의 등장으로, 이것이야말로 근대화의 완성 단계라는 것이다. 간양의 주장은 사실 낯설지 않다. 문명의 재인식이란 동아시아에서 줄곧 외쳐져온 문명적 ‘복고’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간양 또한 자신의 길이 새로운 복고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복고가 중국연속성을 반영한 혁명만이 성공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진정한 함의란 ‘유가사회주의공화국’이다
그렇다면 간양의 복고는 무엇인가? 『맹자』를 읽고 『당시 삼백수』를 외는 것이 근대화를 이루는 복고의 전부일 수는 없다. 간양은 대니얼 벨의 사상을 참고하여 공자로부터 내려오는 유가적 전통은 물론, 마오쩌둥으로 대변되는 사회주의 전통, 덩샤오핑이 상징하는 개혁개방의 전통까지 포섭하는 새로운 복고를 주창한다. 그러나 이는 모든 역사를 무차별적으로 껴안고 가겠다는 단순한 발상은 아니다. 간양은 그 우선순위를 정치적 사회주의, 문화적 보수주의, 경제적 자유주의로 설정하며 이때 각각 전자는 후자를 이루기 위한 필요조건이 된다. 사회주의 정치의 제도가 유가 문명의 버팀목이 되고, 유가 문명은 다시 경제적 자유화가 식민주의나 노예화로 기울지 않게 하는 잣대가 된다. 간양은 이 세 가지 전통의 융합을 ‘통삼통’(通三統)이라고 일컬으며, 개혁개방 이후 외면해온 전통 문화와 사회주의 정치의 가치가 이미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 안에 구현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중화는 곧 문명이며 인민공화국이란 바로 이 나라의 주인이 노동자와 농민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제2차 사상해방과 ‘중국의 길’
새로운 사상해방은 사회주의, 보수주의, 자유주의 세 가지 전통의 융합으로 구축된 중국인의 새로운 자기정체성에 기반한다. 여기서 간양은 새로운 사상해방을 말하며 중국인들에게 서양국가를 학습하는 학생의 신분과 서양의 질문에 대답하는 수동적 상태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가장 절박한 문제를 스스로 제기할 것을 촉구한다. 그러나 이는 제1차 사상해방이 전통 문명을 배척했던 것처럼 서양 문명에 대한 전면적인 배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제2차 사상해방은 오히려 서양국가를 더 깊이, 제대로 연구할 것을 요구한다. 다만 그 중심에는 반드시 중국이 있어야 하며, 이로써 새로운 ‘중국의 길’이 열릴 수 있다. 간양은 묻는다. ‘수천 년의 문명을 보유하고 100여 년의 현대 역사를 가진 중국은 도대체 어떤 국가인가? ‘중국은 어떤 국가가 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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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열전 (상)

도서정보 : 사마천 | 2023-12-20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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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주三家注’를 넘어 최신 연구 성과까지
『사기』의 모든 주석을 망라한 결정판!

그동안 국내『사기』 번역 대부분은 주석이 불충분하거나 『사기집해』 『사기색은』『사기정의』 등 ‘삼가주三家注’ 위주의 주석 소개에 국한되었다.
원저자인 사마천이 범한 오류 또한 거의 언급하지 않았고 당연히 교정하지도 않았다.

글항아리에서 펴낸 이번『사기열전』 상·하는 『사기집해』 『사기색은』『사기정의』 삼가주三家注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검증되고 인정받는
많은 『사기』 연구자의 연구 성과를 같이 검토함으로써 풍부한 주석의 세계를 선보였다. 다양한 학설을 제시한 뒤에 가장 옳다고 생각한 내용을 번역에 반영했으며, 아울러 독자들도 다양한 학설의 구체적인 내용을 접할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분량 또한 방대해졌다.

『사기』에는 의외로 사마천의 착각 혹은 실수로 인한 오류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기존에는 이런 부분을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지만, 때로 발언이나 행동의 주체가 뒤바뀌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잘못된 역사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내용도 있다. 이번 번역에서는 여러 자료의 검토와 비교를 거쳐 주석에서 오류 부분에 대해 빠짐없이
구체적인 설명과 함께 교정의 근거를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사마천司馬遷은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정의를 좇아 행동하고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시기를 잃지 않고 천하에 공을 세우고 이름을 날린 사람들을 위해 70편의 「열전列傳」을 지었다. 전체가 130편에 52만6500자로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이름 지었다”고 했다. 『사기史記』의 원래 명칭은 사마천이 밝힌 대로 『태사공서』였으며 『사기』가 아니었다. 사마천은 자신의 저서에서 여러 차례 ‘사기史記’라는 글자를 사용했지만 그 의미는 책 명칭이 아닌 모두가 ‘고사古史’ 혹은 ‘고서古書’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사기’라는 명칭이 사마천 저작의 고유명사가 되기 시작한 시기는 분명하지 않은데, 범엽范曄(398~445)이 지은 『후한서後漢書』 「반표전班彪傳」에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했다”는 구절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범엽은 남조 유송 시기의 사람이다. 이처럼 한나라 당시 사람들이 말했던 ‘사기’는 『태사공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으며, 또한 『태사공서』는 당시에 ‘사기’라는 이름을 갖지는 못했다. 『사기』가 사마천이 지은 저작의 고유명사가 된 것은 아마도 후한後漢 후기부터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광범위한 연구 성과 반영

2000년 동안 전해져 내려온 『사기』의 판본은 상당히 많다. 『사기』의 각본刻本은 북송 때 시작되었고, 이후에 가장 유명한 배인裴駰의 『사기집해史記集解』, 사마정司馬貞의 『사기색은史記索隱』, 장수절張守節의 『사기정의史記正義』를 합친 ‘삼가주합각본三家注合刻本’이 출현했다. 명대에 이르러서는 평론을 숭상하는 기풍에 따라 평림본評林本들이 출현하는데, 이들 평론은 구절과 단락을 나누어 평론한 것도 있고 편 전체를 평론한 것도 있다. 청대에 와서는 송나라 판본을 보충한 백납본百衲本이 출현했는데, 완전하지 못한 잔본殘本들을 모아 완성시킨 것으로 백납본白衲本 『사기』라 부른다.
이후 현대에도 많은 『사기』가 간행되었지만 이번 번역에서 역자는 2013년 중화서국에서 간행한 ‘점교본이십사사수정본點校本二十四史修訂本 『사기』’를 이번 번역 작업의 저본으로 삼았다. 이 책은 1959년 중화서국에서 간행한 점교본 『사기』와 청나라 동치同治 연간(1862~1875)에 금릉서국에서 간행한 『사기집해색은정의합각본史記集解索隱正義合刻本』 130권을 저본으로 삼아 『사기』 문헌학의 권위자인 자오성췬趙生群 난징사범대학 교수의 교감과 수정을 거쳐 펴낸 것이다. 이 판본은 중국에서 가장 최근에 간행된 것으로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기존 판본들의 오류를 교정하고 수정한 ‘수정본 『사기』’라 할 수 있다. 이 판본은 각 「열전」 말미에 ‘교감기’를 통해 본문의 오류를 수정한 내용을 소개했는데, 역자는 이번 번역본에서 이를 참고하고 인용할 때 주석에서 ‘교감기’라 하지 않고 ‘수정본’이라고 밝혀두었다.
기존에 국내에서 출판되었던 『사기』 번역본 대부분은 주석이 불충분하거나 ‘삼가주三家注’(남조南朝 송宋 배인裴駰의 『사기집해史記集解』, 당나라 사마정司馬貞의 『사기색은史記索隱』, 당나라 장수절張守節의 『사기정의史記正義』) 위주의 주석 소개에 국한되어 있었다. 특히 『사기』의 원저자인 사마천이 범한 오류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고 당연히 교정하지도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역자는 이러한 기존 번역서의 한계를 넘어 ‘삼가주’의 중요한 주석 내용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검증되고 인정받는 많은 『사기』 연구자들의 견해를 주석을 통해 설명하며 오류를 바로잡고자 했다. 또한 ‘삼가주’의 내용과 상이한 경우에는 그 내용을 소개하고 비교하며 출처를 밝혔다. 역자가 참조한 대표적인 저작물은 명대 능치륭凌稚隆의 『사기평림史記評林』을 비롯해 청대 전대흔錢大昕의 『이십이사고이二十二史考異』, 양옥승梁玉繩의 『사기지의史記志疑』, 왕염손王念孫의 『독서잡지讀書雜志』 가운데 「독사기잡지讀史記雜志」, 곽숭도郭嵩燾의 『사기찰기史記札記』, 그리고 근대의 저작물인 추이스崔適의 『사기탐원史記探源』 , 천즈陳直의 『사기신증史記新証』, 일본 학자인 다키가와 스케노부瀧川資言의 『사기회주고증史記會注考證』 등과 왕수민王叔岷의 『사기각증史記斠證』, 현재 『사기』 연구의 최고 전문가라 평가받는 한자오치韓兆琦의 『사기전증史記箋證』(2015년 수정판), 그리고 장다커張大可, 딩더커丁德科의 『사기통해史記通解』(2015)를 중점적으로 참고하고 인용했다. 이들 외에도 번역 중 검토했던 주요 자료 목록을 참고문헌에 상세하게 소개했다.

사마천의 오류 집중 분석

『사기』에는 의외로 사마천의 착각 혹은 실수로 인한 오류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기존의 출판물에서는 이러한 오류 부분에 대한 지적과 설명, 교정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여러 자료의 검토와 비교를 거쳐 주석에서 오류 부분에 대해 빠짐없이 구체적인 설명과 함께 교정의 근거를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여러 견해가 존재할 경우에는 역사적으로 가장 검증되고 타당한 견해들을 소개했으며 필요한 경우 역자가 타당하다고 판단한 내용을 채택하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이러한 오류 이외에 『사기』에는 또한 『전국책』 『한서』 등과 비교해 내용이 상이하거나 시대 순서의 오류 등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이 부분 또한 『전국책』 『한서』와 비교하며 차이점을 소개했고, 『전국책』 『한서』와 관련된 많은 역사 저작에서 『사기』와 상이한 내용을 발췌하여 주석에 소개하고 각각의 오류를 검증하고 바로잡았다.
그 외에 사마천은 『사기』를 기술하면서 제자백가와 사서오경 등 여러 고대 저작물의 내용을 언급하거나 인용했다. 글항아리판 이번 번역에서는 사마천이 인용한 내용의 출처를 밝혔을 뿐만 아니라 원전과 상이하거나 다른 한자를 사용한 것까지도 비교 검토하여 주석에 상세히 소개했다. 또한 국내에서 출판된 기존의 『사기』 번역서에서 심각한 번역 오류라 판단된 경우에는 이들 번역이 왜 오류인지 근거와 함께 바른 번역을 제시했다.
『사기』는 중국 최고의 기전체紀傳體 역사서로서 중국 역사의 고찰뿐만 아니라 역사의 중심을 ‘천天’이 아닌 ‘인人’, 그리고 ‘민民’으로 더욱 구체화시켰으며 이들이 가장 존귀한 존재이며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었음을 증명했다. 또한 이들 평민 백성의 사적과 역할을 기술해 옳고 그름이 뒤바뀌는 혼란한 시대 상황과 공정하지 못한 세태를 비판하며 분노했다.

구매가격 : 32,300 원

사기열전 (하)

도서정보 : 사마천 | 2023-12-20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삼가주三家注’를 넘어 최신 연구 성과까지
『사기』의 모든 주석을 망라한 결정판!

그동안 국내『사기』 번역 대부분은 주석이 불충분하거나 『사기집해』 『사기색은』『사기정의』 등 ‘삼가주三家注’ 위주의 주석 소개에 국한되었다.
원저자인 사마천이 범한 오류 또한 거의 언급하지 않았고 당연히 교정하지도 않았다.

글항아리에서 펴낸 이번『사기열전』 상·하는 『사기집해』 『사기색은』『사기정의』 삼가주三家注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검증되고 인정받는
많은 『사기』 연구자의 연구 성과를 같이 검토함으로써 풍부한 주석의 세계를 선보였다. 다양한 학설을 제시한 뒤에 가장 옳다고 생각한 내용을 번역에 반영했으며, 아울러 독자들도 다양한 학설의 구체적인 내용을 접할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분량 또한 방대해졌다.

『사기』에는 의외로 사마천의 착각 혹은 실수로 인한 오류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기존에는 이런 부분을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지만, 때로 발언이나 행동의 주체가 뒤바뀌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잘못된 역사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내용도 있다. 이번 번역에서는 여러 자료의 검토와 비교를 거쳐 주석에서 오류 부분에 대해 빠짐없이
구체적인 설명과 함께 교정의 근거를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사마천司馬遷은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정의를 좇아 행동하고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시기를 잃지 않고 천하에 공을 세우고 이름을 날린 사람들을 위해 70편의 「열전列傳」을 지었다. 전체가 130편에 52만6500자로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이름 지었다”고 했다. 『사기史記』의 원래 명칭은 사마천이 밝힌 대로 『태사공서』였으며 『사기』가 아니었다. 사마천은 자신의 저서에서 여러 차례 ‘사기史記’라는 글자를 사용했지만 그 의미는 책 명칭이 아닌 모두가 ‘고사古史’ 혹은 ‘고서古書’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사기’라는 명칭이 사마천 저작의 고유명사가 되기 시작한 시기는 분명하지 않은데, 범엽范曄(398~445)이 지은 『후한서後漢書』 「반표전班彪傳」에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했다”는 구절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범엽은 남조 유송 시기의 사람이다. 이처럼 한나라 당시 사람들이 말했던 ‘사기’는 『태사공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으며, 또한 『태사공서』는 당시에 ‘사기’라는 이름을 갖지는 못했다. 『사기』가 사마천이 지은 저작의 고유명사가 된 것은 아마도 후한後漢 후기부터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광범위한 연구 성과 반영

2000년 동안 전해져 내려온 『사기』의 판본은 상당히 많다. 『사기』의 각본刻本은 북송 때 시작되었고, 이후에 가장 유명한 배인裴駰의 『사기집해史記集解』, 사마정司馬貞의 『사기색은史記索隱』, 장수절張守節의 『사기정의史記正義』를 합친 ‘삼가주합각본三家注合刻本’이 출현했다. 명대에 이르러서는 평론을 숭상하는 기풍에 따라 평림본評林本들이 출현하는데, 이들 평론은 구절과 단락을 나누어 평론한 것도 있고 편 전체를 평론한 것도 있다. 청대에 와서는 송나라 판본을 보충한 백납본百衲本이 출현했는데, 완전하지 못한 잔본殘本들을 모아 완성시킨 것으로 백납본白衲本 『사기』라 부른다.
이후 현대에도 많은 『사기』가 간행되었지만 이번 번역에서 역자는 2013년 중화서국에서 간행한 ‘점교본이십사사수정본點校本二十四史修訂本 『사기』’를 이번 번역 작업의 저본으로 삼았다. 이 책은 1959년 중화서국에서 간행한 점교본 『사기』와 청나라 동치同治 연간(1862~1875)에 금릉서국에서 간행한 『사기집해색은정의합각본史記集解索隱正義合刻本』 130권을 저본으로 삼아 『사기』 문헌학의 권위자인 자오성췬趙生群 난징사범대학 교수의 교감과 수정을 거쳐 펴낸 것이다. 이 판본은 중국에서 가장 최근에 간행된 것으로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기존 판본들의 오류를 교정하고 수정한 ‘수정본 『사기』’라 할 수 있다. 이 판본은 각 「열전」 말미에 ‘교감기’를 통해 본문의 오류를 수정한 내용을 소개했는데, 역자는 이번 번역본에서 이를 참고하고 인용할 때 주석에서 ‘교감기’라 하지 않고 ‘수정본’이라고 밝혀두었다.
기존에 국내에서 출판되었던 『사기』 번역본 대부분은 주석이 불충분하거나 ‘삼가주三家注’(남조南朝 송宋 배인裴駰의 『사기집해史記集解』, 당나라 사마정司馬貞의 『사기색은史記索隱』, 당나라 장수절張守節의 『사기정의史記正義』) 위주의 주석 소개에 국한되어 있었다. 특히 『사기』의 원저자인 사마천이 범한 오류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고 당연히 교정하지도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역자는 이러한 기존 번역서의 한계를 넘어 ‘삼가주’의 중요한 주석 내용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검증되고 인정받는 많은 『사기』 연구자들의 견해를 주석을 통해 설명하며 오류를 바로잡고자 했다. 또한 ‘삼가주’의 내용과 상이한 경우에는 그 내용을 소개하고 비교하며 출처를 밝혔다. 역자가 참조한 대표적인 저작물은 명대 능치륭凌稚隆의 『사기평림史記評林』을 비롯해 청대 전대흔錢大昕의 『이십이사고이二十二史考異』, 양옥승梁玉繩의 『사기지의史記志疑』, 왕염손王念孫의 『독서잡지讀書雜志』 가운데 「독사기잡지讀史記雜志」, 곽숭도郭嵩燾의 『사기찰기史記札記』, 그리고 근대의 저작물인 추이스崔適의 『사기탐원史記探源』 , 천즈陳直의 『사기신증史記新証』, 일본 학자인 다키가와 스케노부瀧川資言의 『사기회주고증史記會注考證』 등과 왕수민王叔岷의 『사기각증史記斠證』, 현재 『사기』 연구의 최고 전문가라 평가받는 한자오치韓兆琦의 『사기전증史記箋證』(2015년 수정판), 그리고 장다커張大可, 딩더커丁德科의 『사기통해史記通解』(2015)를 중점적으로 참고하고 인용했다. 이들 외에도 번역 중 검토했던 주요 자료 목록을 참고문헌에 상세하게 소개했다.

사마천의 오류 집중 분석

『사기』에는 의외로 사마천의 착각 혹은 실수로 인한 오류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기존의 출판물에서는 이러한 오류 부분에 대한 지적과 설명, 교정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여러 자료의 검토와 비교를 거쳐 주석에서 오류 부분에 대해 빠짐없이 구체적인 설명과 함께 교정의 근거를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여러 견해가 존재할 경우에는 역사적으로 가장 검증되고 타당한 견해들을 소개했으며 필요한 경우 역자가 타당하다고 판단한 내용을 채택하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이러한 오류 이외에 『사기』에는 또한 『전국책』 『한서』 등과 비교해 내용이 상이하거나 시대 순서의 오류 등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이 부분 또한 『전국책』 『한서』와 비교하며 차이점을 소개했고, 『전국책』 『한서』와 관련된 많은 역사 저작에서 『사기』와 상이한 내용을 발췌하여 주석에 소개하고 각각의 오류를 검증하고 바로잡았다.
그 외에 사마천은 『사기』를 기술하면서 제자백가와 사서오경 등 여러 고대 저작물의 내용을 언급하거나 인용했다. 글항아리판 이번 번역에서는 사마천이 인용한 내용의 출처를 밝혔을 뿐만 아니라 원전과 상이하거나 다른 한자를 사용한 것까지도 비교 검토하여 주석에 상세히 소개했다. 또한 국내에서 출판된 기존의 『사기』 번역서에서 심각한 번역 오류라 판단된 경우에는 이들 번역이 왜 오류인지 근거와 함께 바른 번역을 제시했다.
『사기』는 중국 최고의 기전체紀傳體 역사서로서 중국 역사의 고찰뿐만 아니라 역사의 중심을 ‘천天’이 아닌 ‘인人’, 그리고 ‘민民’으로 더욱 구체화시켰으며 이들이 가장 존귀한 존재이며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었음을 증명했다. 또한 이들 평민 백성의 사적과 역할을 기술해 옳고 그름이 뒤바뀌는 혼란한 시대 상황과 공정하지 못한 세태를 비판하며 분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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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 탐구

도서정보 : 문기영 | 2023-12-11 | EPUB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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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개의 주제로 알차게 공부하는
홍차에 대해 궁금한 모든 것
부록으로 인도, 스리랑카 홍차 산지를 탐사하는(한) 방문기 수록

스테디셀러 『홍차 수업』의 저자 문기영은 궁금한 것이 많은 탐구자다. 그의 서재엔 온갖 차 관련 서적과 논문으로 가득하다. 차를 마시다가 궁금한 것이 생기면 못 참고 하나둘 사서 공부하던 것이 어느덧 큰 서가를 이루었다. 그는 드물게 학구적인 스타일의 홍차 애호가다. 책이나 논문으로 해결되지 않는 홍차에 대한 갈증은 현지 탐방으로 이뤄진다. 중국 윈난성과 인도의 아삼, 닐기리, 다르질링은 물론 스리랑카 같은 차 산지를 수시로 드나들며 차를 만드는 이들과 직접 교류한다. 또한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차 문화를 선도하는 나라들을 방문해 최신 트렌드를 계속 업데이트하는 것도 그가 매년 해온 일이다. 그러니 홍차에 대해 많은 것을 안다고 자부하는 그이지만, 늘 기존 지식을 갈아엎고 새로운 지식으로 그를 찾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그런 경험들이 계속 쌓이면 또 새로운 책을 내게 된다.

50개 주제로 홍차의 모든 것을 입체적으로 파악

이번에 그는 홍차를 마시면 누구나 궁금해질 만한 50개 주제들을 모아 신작을 펴냈다. 제목은 『홍차 탐구』. 좋은 홍차란 무언인지, 홍차는 어떻게 탄생했는지와 같은 기본적인 질문부터 시작해 애프터눈 티와 하이 티는 어떻게 다른지, 찻잔 받침에 차를 따라 마신 이유가 무엇인지, 왜 녹차는 여러 번 우리고 홍차는 한 번 우리는지 등 홍차 애호가의 실용적 궁금증부터 홍차의 역사, 홍차 관련 산업의 근황, 차 트렌드의 변화 등을 심도 깊게 짚어냈다.
특히 4장에서는 오랫동안 차 음용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주제들에 관해 많은 자료를 근거로 해서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답을 찾아나갔다. ‘차와 커피: 내게 필요한 카페인은?’에서 “커피는 날카롭게 정신을 깨우고, 차는 편안하게 정신을 맑게 한다”라고 표현한 부분은 저자의 오랜 차 생활에서 나온 결론이라 깊게 와 닿는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책은 차를 새롭게 알아보고자 하는 독자들이 짧은 시간에 ‘차가 무엇이고 홍차가 무엇인지’ 전체적인 윤곽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동시에 오랫동안 차를 즐겨왔음에도 정리된 차 지식에 대한 아쉬움을 갖고 있는 차 애호가들에게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정보와 지식을 제공한다.
또한 『홍차 탐구』엔 2023년 봄과 여름에 걸쳐 인도와 스리랑카를 다녀온 저자의 차 산지 탐방기가 실려 있다. 홍차 생산의 방향과 트렌드, 현지 티 매니저들과의 대화를 통해 얻어낸 쏠쏠한 (최신) 정보들이 티 팩토리의 내부 전경과 펼쳐진 차밭 등 시원시원한 사진과 함께 제공된다. 홍차 애호가들에겐 피와 살이 될 정보들이다.


홍차를 맛있게 마시기 위한 조지 오웰의 11가지 규칙

마지막으로 이 책은 특별한 부록이 하나 등장한다. 작가 조지 오웰이 쓴 홍차에 대한 에세이다. 100년 전의 글이지만 오늘날 홍차를 마시는 사람들에게도 유용한 정보와 철학이 담겨 있다고 판단되어 저자가 직접 번역하여 수록했다. 오웰은 홍차를 맛있게 우려내기 위한 11개의 규칙을 세웠다.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인도 홍차나 스리랑카 홍차를 마시는 것이다. 물론 중국 홍차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은 있는데 가격이 싸고 우유를 넣지 않고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 홍차에는 자극이 없다. 그래서 중국 홍차를 마시고 난 후에는 좀 더 현명해졌다거나 좀 더 용감해졌다거나 더 낙천적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따라서 ‘한 잔의 맛있는 홍차’라는 표현처럼 차가 주는 위안을 소중히 여기는 이들은 대부분 인도 홍차를 마신다.
(…)
여섯째, 티포트를 물이 끓고 있는 주전자 쪽으로 가져가야지 반대로 해서는 안 된다. 물은 아주 펄펄 끓여야 한다. 이 말은 티포트에 붓기 직전까지 물이 끓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갓 끓기 시작한 물만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맛에 어떤 차이를 가져오는지 나는 전혀 알 수 없다.
(…)
열한째, 러시아 스타일로 마실 요량이 아니면 설탕을 넣지 마라. 물론 이 점에 있어서는 내가 소수의견에 속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홍차에 설탕을 넣어 자신이 마시는 차 맛을 망가뜨리면서도 어떻게 스스로를 진정한 홍차 애호가로 여길 수 있는지 모르겠다. 마치 홍차에 후추와 소금을 넣지 않는 것과 같이 이치다. (본문 중에서)

구매가격 : 16,500 원

계절을 먹다

도서정보 : 이혜숙 | 2024-01-05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먹어본 사람의 행복, 안 먹어본 사람의 불행
음식은 기억이 되고 기억은 글이 된다
70년간 혓바닥을 맴돈 음식들

먹어본 사람은 행복하고, 안 먹어본 사람은 불행할까? 사람의 행불행을 먹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일흔이 넘은 작가 이혜숙은 이 책에서 먹는 걸로 생애 감정을 판가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계절을 그냥 보내지 않고 늘 먹으면서 흘려보낸다. 프루스트가 홍차에 적셔 맛봤던 마들렌 같은 건 먹지 못해도, 파 뽑아다가 파숙지 해 먹고 열무로 여름을 나고 겨울철에는 보리와 곁들여 홍어애국을 맛본다. 저자는 사계절을 칠십 번 이상 먹은 경력의 소유자다. 먹은 것은 위장으로도 가지만 머리로도 간다. 먹은 음식이 쌓여서 글이 될 수 있는 이유다.
음식은 기억이다. 작가는 할머니도 음식으로 기억하고, 엄마의 살아생전을 묘사할 때도 음식을 반찬 삼아 한다. 기억력이 거울처럼 정확한 것은 삼시 세끼 만들어 먹던 시대였고, 시골에서는 밭에서 직접 뽑아다 반찬을 만들었기에 농사일의 결과물이 늘 눈앞 밥상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또 자자의 혀는 노래를 부르기보다 맛을 감별하는 데 더 발달되어 있기도 하다.
글쓰기는 문체가 중요하다. 구조와 쌍벽을 이룰 만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디킨스의 소설 『황폐한 집』의 줄거리가 평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문체를 보세요! 중요한 건 내용보다 문체예요”라고 강조한다. 이 책에도 나보코프의 말을 적용할 수 있다.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 먹었느냐보다 한 손으로는 음식을 만들고, 다른 한 손으로 글을 써온 작가의 문체가 책에 생명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기억력은 글쓰기의 가장 밑바탕이 된다. 관찰력은 이야기 감이 될 만한 인물의 생김새, 말버릇, 대화, 사고의 틀까지 모두 기억해야만 생생할 수 있다. 저자는 과거의 대화를 이야기의 구조로 얽어 머릿속에 비축하는 데 소질이 있고, 대화의 꼬투리에 매달리는 새침함이나 여운 같은 뒷감정까지 수집할 줄 안다. 즉 들리는 대화와 들리지 않는 속내가 모두 마음속에 쌓인다.
그는 마치 끊임없이 이야기를 지어내는 소설가처럼 배 속엔 먹었던 음식들이, 혓바닥에는 그 재료의 향기가, 머릿속에는 음식을 둘러싼 사람들의 대화가 끊임없이 맴돌고 있다. 그리고 그 세 가지 감각이 합쳐져 그만의 독특한 문체와 이야기가 펼쳐진다.

먹을 것으로 울고 웃던,
현재와 과거가 맞닿는 기억의 조각들

한 아주머니가 고무 다라이랑 전기밥솥을 들고 저자가 운영하는 가게에 왔다. 손때 묻은 살림이 버려지는 게 서운해 어디 쓸 데 없느냐고 묻는 모습이 안타까워 받아두었는데 그것으로 쉽게 고구마를 쪄 먹는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 댁에 들렀을 때 선생님 내외는 반색했지만 내줄 것이 궁했다. 고구마를 깎아주시며 그게 미안했던지 “봄에 씨 고구마는 아주 귀한 손님이 아니면 주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겨울부터 이른 봄까지 이어지는 춘궁기에 고구마는 귀한 식량이었다. 집마다 부엌 바닥에 굴을 파서 묻어두고 하나씩 꺼내 먹었다. 긴 겨울밤 엄마의 일과는 저녁 설거지를 다 하고도 불이 사윈 아궁이를 헤집어 군고구마를 방에 들여놔주고야 끝났다. 지금은 고구마 굽는 게 어렵지 않지만 그때는 요령이 필요한 일로, 불이 너무 세서 겉이 타지 않도록 짚불로 속까지 깊숙이 익혀야 했다.
초봄이 지나면 삼밭 지천으로 풀이 돋았다. 지금은 꽃으로만 아는 유채와 자운영을 꺾어 무쳐 먹거나 데쳐서 양념에 버무려 먹었다. 어느 노인이 “내가 건강하게 사는 이유는 봄에 돋는 풀이란 풀은 다 먹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어디 건강 때문에 그랬겠는가. 도처의 먹을 것을 훑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 건강식품이라고 판매하는 것을 살펴보면 그 시절 들판에 버럭버럭 자라던 것들이 많다. 시골에 하우스가 들어서기 전, 급작스레 기온이 떨어지거나 작달비가 내려 잎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애써 키운 열매가 나뒹굴면 사람들은 낙심했다. 식구들의 입을 책임지는 엄마는 몇 날 며칠 비가 이어지던 날이면 하늘을 향해 숭악한 욕을 뱉었다. “미쳤네. 밑구멍이 아조 빠졌는갑네.”
먹을 수 있는 것을 버리는 일은 죄악으로 여겨지던 시절, 독에 남은 것들을 모아 발효시켜 만든 묵덕장은 남은 음식을 활용하는 지혜이자 맛을 내는 한 가지 비법이었다. 지금은 간편하게 사 먹는 장류와 젓갈, 초를 그 시절에는 모두 직접 만들었다. 저자는 더 이상 쓰지 않는 엄마의 초병을 집으로 가져왔지만 정작 초는 사다 쓰고 초병은 옛날 생각이나 하는 것으로 방치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시골에서도 그렇게 만들어 먹는 사람 없다 한다. 그때 지금같이 오래 사는 사람 없었다면서 옛것이 무조건 좋다 할 필요 없다는 게 어머니의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점점 오염에 단련되어가는 일상에서 직접 초를 분양받아 키워 먹는 목표를 세워본다.

“고것들 맛이지요”

남도의 잔칫상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홍어다. 홍어는 겨울 보리와 잘 어울렸고, 그즈음이면 어른들은 “장에 홍어 나왔는가 봐라!” 했다. 삼합이라는 건 나중에 나온 것이고, 홍어 좀 먹는다고 하려면 홍어로만 배를 채워야 한다. 날로 먹고, 삭혀서 먹고, 말려서 먹고, 탕으로 끓여 먹는 홍어는 버릴 게 없었다. 다른 지역보다 홍어가 어렵지 않게 잡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싼 고기는 아니어서 남도 사람이라고 해도 어린 시절 그것을 먹었던 추억을 가진 이가 많지 않다. 그래서 홍어를 이야기하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가슴 한구석을 콕콕 찌르는 일이 되기도 한다.
시골이라고 육고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잔칫날에나 구경하던 시절이었다. 어쩌다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채소뿐인 밥상을 내는 걸 엄마는 미안해했다. 그러나 푸르디푸른 엄마의 밥상은 고소하고 상큼하며, 기름 두른 부추적은 고기 반찬 못지않았다. 엄마가 가장 소중히 하는 것이 간장, 된장, 깨소금, 마늘, 참기름이다. 음식 솜씨가 좋다는 칭찬을 받아도 그저 이 양념들 맛이라고 몸을 낮췄다. 어느 방송에 소개된 음식점의 일화다.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나왔는데 며느리가 우리만의 비법은 알려줄 수 없다고 하니 “너는 꼭 그런 소리 하더라. 우리가 비법이 뭐 있냐!”라던 시어머니의 냉갈령. 간만 맞으면 맛나다. 주변에서 무엇 무엇 넣고,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는 별의별 말이 오히려 요리에 겁을 먹게 한다. 한 가지 재료를 매번 똑같이 먹으란 법도 없다. 그릇에 상추를 넣고 끓인 라면을 부어 먹으면 그 맛이 끝내준다는 친구의 말. 식재료의 활용은 끝 모를 일이다. 싸각싸각!

뒷덜미 잡힌 기억은 글이 되고

가마니든 대야든 햇볕 담을 만한 것이라면 곡식 말리는 데 모조리 동원되던 가을마당. 물이 졸졸 흐르는 깨랑에 어쩌다 쓸려내려가는 열매를 보고는 가슴 철렁하던 일. 지붕 높이와 맞먹는 노적가리 틈으로 숨바꼭질하던 일들. 때로 혼자 남아 집을 지키는 날이면 그 안에서 뭐가 나올지 몰라 그늘마저 무서웠다. 가끔씩 먼 산을 쳐다보노라면 어른들은 ‘저것이 커서 뭐가 될 끄나’ 하고 걱정했다. 그 여백의 순간들이 모여 기억은 오히려 더 선명해지고 글이 되어 나왔다.
엄마는 사방 가시 속에 살았다. 매섭던 시어머니뿐 아니라 김 나는 음식 대령해도 헛기침하는 집안 어른들, 남편 시중, 어린 새끼들까지…… 명절이면 절하는 발바닥이 오십 개가 넘었다. 그래도 농사짓는 틈으로 밥 하고 옷을 지었다. 육식을 좋아하는 식구들이 콩나물 비린내를 타박하자 “비린 것을 그리 잘 먹는 사람들이 어째 콩나물 비린 것은 못보는고” 하는 말대꾸는 그저 엄마의 혼잣말이다. 저자는 믹서를 보며 그 옛날 엄마의 돌확을 떠올린다. 젖가슴까지 몹시 흔들리던 엄마의 메공이질. 한창 입덧 중이던 어느 날엔 시장에서 아주머니들이 밥 먹는 것을 보고 울었다 한다. 칠게 반찬 때문이었다. 보리가 누렇고 모내기가 끝나갈 즈음 엄마는 등이 억세진 검은 게를 확에 넣고 갈아 마늘이랑 고춧가루 넣어 죽처럼 만들었는데 그게 칠게젓이었다. 지금 그 한입이 간절하다.

구매가격 : 12,600 원

날마다, B

도서정보 : 현택훈 | 2023-12-22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현택훈 작가는 온기를 나누기 위해서라면 젖은 성냥을 말려서라도 모닥불을 피워낼 사람이다. 음악을 사랑하지만 악기를 못 다뤄서 시를 쓴다는 고백은, 상황에 굴하지 않고 한계를 포용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나는 이것이 B의 기품이자 의지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_강건모(작가, 『무탈한 하루』 저자)

약하고 외롭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B의 에세이

이 책은 세상의 B들을 위한 위로의 에세이다. 모두가 A의 주류를 꿈꾸는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해도 따듯한 품성으로 서로 보듬어주는 B의 정서를 담아냈다. 양극화된 사회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주류를 이루는 부류는 A가 아닌 B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목받지 못하는 B가 우리라는 공동체를 이루며 약하고 소외되고 외로운 이의 편에 서서 공감하는 마음을 전한다. 저자는 자칭, 타칭 무명 시인으로 살아가는 B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비주류로 살아야 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하며 통칭 B급이 아니라 B라 하게 된 이유를 풀어놓는다.

A급은 주류, B급은 비주류?
세상의 B급에게 내미는 따스한 손

우리는 흔히 정품보다 못하거나 아류 혹은 이름 없는 예술에 B급이라 등급을 매긴다. 하지만 예술에 급을 매겨 줄을 세우는 것은 좀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냥 B라 하겠다. 그런데 B의 삶을 쓰려니 약간 비참한 생각이 든다. 열패감에 허우적대야만 한다. 그러다 위안을 얻은 것이 B의 마음이다. 약하고 외롭고 소외된 이의 편에 서는 것이 B다. B의 정서는 비록 성공하지 못했어도 따뜻한 품성으로 서로 이해하며 사는 마음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우울한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_「들어가며」에서

흔히 말하는 A급과 B급은 어떤 기준으로 분류한 것일까. 사회 구성원 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주류의 B급은 어쩌다 비주류로 불리게 되었을까. 주류가 아닌 비주류는 열패감을 안고 살아야 할까. B급에도 예술과 삶이 있고 B급은 B급만이 누릴 수 있는 색깔의 행복이 있다고 말하는 저자는 성공하지 못했어도 따뜻한 품성으로 서로 이해하며 사는 B급 정서에서 위안을 얻었다. B급 정서는 이상의 세계를 꿈꾼다. 일종의 자기 최면이 필요한 일이지만 이루지 못한 꿈은 동경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
저자는 각자 주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예술이므로 등급을 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시세계의 B급,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무명 시인은 스스로 만족하며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가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내 상황을 즐길 수 있으면 그것이 행복이다. 알아주는 이 없어도 시를 읽으며 위안을 얻고 시를 쓰는 즐거움이 있다면 그것이 시를 쓰는 원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편애라는 말은 부정적인 말로 들릴 수 있지만 소외받는 대상에게는 편애가 필요하다. 그것은 우표나 시나 처지가 비슷하다. 시 역시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지 않은가. 오늘 밤 시를 쓰고 우리의 시간을 기념할 기념우표 한 장 붙여 너에게 편지로 보내야지.
_「우표 편애」에서

무명 시인, 향토 시인

누구나 B급이 아닌 A급을 꿈꾸지만 현실에서는 녹록지 않다. 하지만 B급으로 살면 어떠랴. B급은 나쁜 것이 아니다. 한계를 인정할 때 각자만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 이는 일부 생각의 차이로 달라질 수 있다. 빛을 발하지 못한 무명 시인. 저자는 그 무명 시인의 시를 읽는 단 한 명을 위해, 아니 설령 없다고 해도 시가 좋아 시를 쓴다. 그렇게 나이가 지긋하게 들 때까지 무던히 시를 쓰다보면 누군가 저자를 향토 시인이라 불러주리라.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저자는 제주를 노래하며 오늘도, 내일도 시를 쓴다.

오늘도, 내일도, 날마다 파이팅!

‘날마다’ 시리즈는 날마다 같은 듯 같지 않은 우리네 삶을 담습니다.
날마다 하는 생각, 행동, 습관, 일, 다니는 길, 직장……
지금의 나는 수많은 날마다가 모여 이루어진 자신입니다.
날마다 최선을 다하는 우리를 응원하는 시리즈, 날마다 파이팅!

구매가격 : 8,400 원

날마다, 자개

도서정보 : 강명효 | 2023-12-22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과거와 현재,
공상과 상상의 세계를 이어주는
오색찬란한 빛의 세계

“나는 경이로운 자연을 자개로 표현하고 싶다. 바람, 태풍, 달과 새, 봄, 여름, 가을, 겨울, 비와 눈, 나뭇잎과 계절마다 다른 나무, 구름, 산과 들, 바다와 파도, 고양이와 꽃, 별이 가득한 밤하늘과 우주, 블랙홀과 성단, 별자리, 거대한 향유고래와 하늘을 뒤덮을 상상 속의 용…….”

이 책은 현대의 생활환경에 맞게 나전칠기 공예품을 새롭게 구상하여 디자인하는 저자의 경험적 에세이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6년 차 나전칠기 공예가의 현대적 감성으로 디자인한 서안부터 회화로 표현한 겨울밤 빛나는 자작나무 숲, 애정하는 단골집 현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물에 일 년 열두 달 날마다 자개로 빛을 수놓는 과정을 그린다.
저자는 새롭게 발견한 아름다움을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개로 표현하는 것, 직접 느낀 아름다움을 자개로 표현하는 것, 경이롭게 느끼고 경탄하며 바라보았던 모든 아름다운 것을 자개로 표현하는 것 등 경험을 통한 일상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공상과 상상의 세계를 자개라는 매개체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여 디자인하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책에서 말하는 ‘자개 디자인’은 패를 백골기물(白骨器物, 옻칠이 가능한 다양한 소재로 만든 물건으로 칠이 되어 있지 않은 것)에 나만의 디자인으로 다양한 기법을 사용하여 붙이는 것을 의미한다. 즉 기물에 붙일 이미지를 디자인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 이미지를 표현할 자개를 선택하고 이미지와 선택한 자개에 맞게 표현방법을 결정하여 디자인을 구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_「들어가며」에서

왜 ‘날마다, 자개’인가

이 책은 엄밀히 말하면 자개를 붙이고 옻칠로 마감한 전통 공예인 나전칠기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저자만의 감각으로 새롭고 멋진 나전칠기를 만들고자 하는 공예에 대한 저자의 지향을 표현하는 데 자개 디자인이 더 적합하기에 책명에 나전칠기 대신 ‘자개’를 선택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에서 말하는 자개 디자인이 전복, 조개 등의 껍데기를 얇게 떼어낸 패를 디자인하는 것을 이르지 않는다. 저자만의 디자인으로 다양한 기법을 사용하여 붙이는 것을 의미하는데, 기물에 붙일 이미지를 디자인하거나 그 이미지를 표현할 자개를 선택하고 이미지와 선택한 자개에 맞게 표현방법을 결정하여 디자인을 구현하는 것이다.
저자가 자개에 완벽히 매료된 계기는 아주 우연이었다. 깊은 절망과 슬픔에 빠져 있을 때 바닥에 떨어진 영롱한 광채를 뽐내며 반짝이는 작디작은 흑진주패 조각에서 위안과 용기를 얻은 순간이었다. 이는 저자가 지금껏 자개 디자인을 하고 앞으로도 계속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개의 아름다움을 디자인하여
전통 공예를 현대화하다

나전칠기라고 하면 조금은 생소하게 느끼거나 전통 공예의 상징으로만 여길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전통 공예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자개로 대상을 표현한다. 특히 저자가 느낀 자연의 힘을 토대로 자개의 아름다움을 디자인한다. 땅의 퉁소소리, 겨울밤 자작나무 숲, 정지상의 시구에서 차용한 수양버들, 벌들의 날갯짓 소리, 여름밤의 은하수, 우주를 유영하는 우주인, 거대한 향유고래, 하늘을 뒤덮을 용 등 오감과 상상을 동원하여 가장 전통적인 기법으로 현대적이고 표상적으로 표현한다. 이는 저자의 자개 디자인 내면의 깊이를 보여준다.
나전칠기는 기다림의 미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온도와 습도의 영향을 많이 받는 옻칠은 자개의 두께만큼 쌓아올리기를 여러 번 거듭해야 하고 표면을 매끈하게 갈아 광택을 내야 하는 고된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자개 디자인이 즐겁다고 말한다. 빛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영롱한 반짝임이 자개의 한계를 뛰어넘어 과거가 아닌 현재, 미래로 이어지기를 희망하며 자개의 아름다움을 날마다 디자인한다.


오늘도, 내일도, 날마다 파이팅!

‘날마다’ 시리즈는 날마다 같은 듯 같지 않은 우리네 삶을 담습니다.

날마다 하는 생각, 행동, 습관, 일, 다니는 길, 직장……
지금의 나는 수많은 날마다가 모여 이루어진 자신입니다.
날마다 최선을 다하는 우리를 응원하는 시리즈, 날마다 파이팅!

구매가격 : 8,400 원

꼴, 좋다! - 첫번째 이야기

도서정보 : 박종서 | 2023-12-22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슬그머니 이어지는 것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새로운 세상일 것이다”

디자인은 자연 속에 이미 존재한다

폭스바겐의 골프, 현대자동차의 포니 등을 디자인한
20세기 최고의 자동차 디자이너로 꼽히는
조르제토 주지아로 강력 추천!

“미래의 디자인은 자연의 이치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자연에서 배우는 일에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 자연이라는 최고의 디자인을 연구한 그에게 진심으로 최고의 찬사를 보낸다.”
_조르제토 주지아로(이탈리아 자동차 디자인의 거장)


티뷰론, 쏘나타, 싼타페…
현대자동차를 이끈 1세대 자동차 디자이너이자
한국 자동차 디자인 역사의 대부가 바라본 자연 그리고 디자인

아직 우리 힘으로 디자인한 자동차가 없던 시절, 저자는 우리만의 자동차 디자인을 꿈꾸며 한국인 최초로 영국 왕립미술대학원(RCA)에 입학한 뒤 수석으로 졸업했다. 한국 자동차 디자인의 암흑기나 다름없던 1979년부터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2003년까지 약 25년간 현대·기아자동차 디자인을 이끌며 스쿠프, 티뷰론, 쏘나타, 싼타페, 아반떼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자동차들을 디자인했다. 저자가 현대자동차에 입사할 당시에는 디자인 부서라 부를 만한 별도의 조직이 없다시피 했다. 그러다 직접 디자인 전문조직을 만들고 이를 지금의 디자인센터로 끌어올리면서, 이전과는 다른 더욱 진화된 자동차 디자인을 선보여 디자이너로서는 최초로 임원에 오르는 등 산업디자인의 위치를 격상했다.

저자는 현대·기아자동차 디자인연구센터장을 거쳐 국민대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장, 대한민국산업디자인협회장, 대한민국브랜드학회장을 역임한 한국 자동차 디자인의 거장이다. 현재는 국내 최초의 자동차디자인미술관인 FOMA의 관장으로 일하고 있다. FOMA(Form of Motors And Arts)는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자동차디자인미술관으로 디자인의 결과물보다 결과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특히 번뜩이는 영감을 보여주고자 저자가 사비를 들여 직접 세웠다. 이곳에서 1세대 자동차 디자이너로서 보고, 듣고, 느낀 경험과 철학을 일반 시민과 디자이너 후배들에게 공유하고 있다.


“나는 세상을 거꾸로 살아왔습니다”
자연에서 발견한 디자인
우리 손으로 디자인한 자동차가 한 대도 존재하지 않고 함께 일할 만한 디자이너도 많지 않던 시절, 저자가 1세대 자동차 디자이너로 우뚝 설 수 있게 해준 건 ‘자연’이었다. 어릴 적부터 자연에서 뛰놀며 온갖 동식물을 보고 만지며 자란 그는 자연스럽게도 디자인의 영감을 자연에서 얻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많은 것이 자연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였다. 오늘날의 배가 인류 최초의 배인 갈대배의 디자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앵무조개는 아무렇지 않게 황금비율을 품고 있다. 벨크로는 도깨비바늘(도깨비풀)에서 왔고, 마디가 따로 움직이는 게 다리와 굴삭기는 꼭 닮았다. 그뿐 아니라 하나씩 어긋나 있는 상어 이빨은 톱의 모양이 절로 떠오르고, 풍뎅이 등짝은 구두코에 그대로 옮겨 갔다.

저자는 자신의 인생을 ‘물구나무선 인생’이라고 말한다. 이토록 많은 것이 자연을 본뜬 것인데 엉뚱하게 디자인을 먼저 배웠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처럼 물구나무선 디자이너들을 보며, ‘자연’스러움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깊이 안타까워한다. “기계들은 퍽 이성적이어서 고와 스톱, 예스와 노, 업과 다운의 양면성만을 지닐 뿐 ‘슬그머니, 은근슬쩍’과 같은 짓거리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빠른 것보다 느리게 하는 것이, 맺고 끊음보다 슬그머니 이어지는 것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새로운 세상일 것이”라는 저자의 말이 오늘날 고민에 빠진 디자이너들에게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디자인은 자연 속에 이미 존재한다고 믿는 이 자연주의 디자이너가 “꼴, 좋다!” 외치며 수집한 자연의 세계로 초대한다.

21세기를 맞이했음에도 우리가 따르거나 흉내 내지 못하는 것이 있다.
인류가 만들어낸 문명 속에서 찾아지지 않는 것.
그들 속에는 자잘한 몸짓이 없다.
가오리의 춤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유연함도 없으며, 기계적 몸놀림에 환호와 갈채를 보내는 사이 어느새 당연함이 되어버렸다. _「너울너울」에서

구매가격 : 19,500 원

꼴, 좋다! - 두번째 이야기

도서정보 : 박종서 | 2023-12-22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나는 이 낯선 만남을 소중히 생각한다”

디자인은 손끝과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시작된다

폭스바겐의 골프, 현대자동차의 포니 등을 디자인한
20세기 최고의 자동차 디자이너로 꼽히는
조르제토 주지아로 강력 추천!

“미래의 디자인은 자연의 이치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자연에서 배우는 일에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 자연이라는 최고의 디자인을 연구한 그에게 진심으로 최고의 찬사를 보낸다.”
_조르제토 주지아로(이탈리아 자동차 디자인의 거장)


티뷰론, 쏘나타, 싼타페…
현대자동차를 이끈 1세대 자동차 디자이너이자
한국 자동차 디자인 역사의 대부가 바라본 자연 그리고 디자인

아직 우리 힘으로 디자인한 자동차가 없던 시절, 저자는 우리만의 자동차 디자인을 꿈꾸며 한국인 최초로 영국 왕립미술대학원(RCA)에 입학한 뒤 수석으로 졸업했다. 한국 자동차 디자인의 암흑기나 다름없던 1979년부터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2003년까지 약 25년간 현대·기아자동차 디자인을 이끌며 스쿠프, 티뷰론, 쏘나타, 싼타페, 아반떼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자동차들을 디자인했다. 저자가 현대자동차에 입사할 당시에는 디자인 부서라 부를 만한 별도의 조직이 없다시피 했다. 그러다 직접 디자인 전문조직을 만들고 이를 지금의 디자인센터로 끌어올리면서, 이전과는 다른 더욱 진화된 자동차 디자인을 선보여 디자이너로서는 최초로 임원에 오르는 등 산업디자인의 위치를 격상했다.

저자는 현대·기아자동차 디자인연구센터장을 거쳐 국민대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장, 대한민국산업디자인협회장, 대한민국브랜드학회장을 역임한 한국 자동차 디자인의 거장이다. 현재는 국내 최초의 자동차디자인미술관인 FOMA의 관장으로 일하고 있다. FOMA(Form of Motors And Arts)는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자동차디자인미술관으로 디자인의 결과물보다 결과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특히 번뜩이는 영감을 보여주고자 저자가 사비를 들여 직접 세웠다. 이곳에서 1세대 자동차 디자이너로서 보고, 듣고, 느낀 경험과 철학을 일반 시민과 디자이너 후배들에게 공유하고 있다.


“디자인은 손으로 하는 것입니다”
저자가 스케치북을 사러 들렀던 화방에서 주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요즘은 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종이와 연필을 쓰지 않아 화방 문을 닫게 생겼다는 것이었다. 아직도 연필을 깎아 스케치북을 채워나가고 있는 저자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의 디자인은 종이 위에 연필로 끄적이고, 손이 더러워지더라도 점토를 만지고, 오리고 끼워 붙이는 과정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2017년 현대자동차그룹 신입사원 교육에서도 “Busy Hands, Busy Brain!”이라고 외쳤을 정도로 손을 사용하는 것이 디자이너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동차디자인미술관 FOMA에서 디자이너가 되기를 꿈꾸는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도 손으로 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직접 연필을 깎고, 깎은 연필로 스케치하고, 스케치를 바탕으로 목업을 만들어보는 과정에서 손끝에서 탄생하는 디자인의 보람을 느끼도록 돕는다. 한국 최초의 콘셉트카 HCD-1 역시 저자의 목탄 스케치에서 탄생했다. 이 콘셉트카가 상어를 닮은 티뷰론으로 이어졌으니 말 그대로 ‘손끝’에서 자동차 디자인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저자가 생각하기에 손은 디자이너에게 있어 무엇보다 뛰어난 도구이다.

“손가락 마디마디, 팔목이 중심이 되면 웬만한 작은 곡선은 컴퍼스처럼 정확하고 빠르게 그릴 수 있고, 팔꿈치, 어깨, 허리를 축으로 선을 그으면 흔들리거나 떨리는 곡선이 없이 실제 크기의 자동차를 그릴 수 있어요. 손짓이 빠를수록 곡선의 완성도가 높아지죠. 아무리 빨리 그어도 목탄은 제 몸을 바삐 갉아 종이에 내어줍니다. 사각사각 첫눈 밟는 소리도 나고요. 손은 이 발자국 소리를 모두 기억합니다.”
_「고래를 닮은 차」에서


‘꼴’에서 찾은 ‘값’비싼 디자인
“꼴, 값하네!”
저자는 종종 엉뚱하다고 할 수도 있는 것에 시간을 쏟는다. 벌레들이 갉아 먹어 생긴 죽은 나무 밑동의 흔적을 한 장의 그림처럼 감상하고, 마호가니의 썩은 속부분을 긁어내 미니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터널로 만든다. 우연히 귀퉁이가 닳아 없어진 프레스코화를 보고는 직접 돌을 깨 다양한 색을 만들어 온전한 작품을 재현해내고, 동서남북으로 뻗친 암태도의 호랑가시나무 잎을 이리저리 궁리하여 거대한 크기로 만들어내기도 한다. 누군가 그런 일을 왜 하냐고 물으면 ‘그냥!’이라 답하는 저자에게 디자인은 답이나 이유가 없는 즐거움이다. 자연에 존재하는 ‘꼴’에서 생각지 못한 디자인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뿐이다.

“어릴 적에는 무지개가 우물끼리 다리를 놓아 연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무지개는 넓은 들판을 건너뛰고 산등성이를 훌쩍 넘어가고
냇물도 건너서 이 동네, 저 동네를 이어주었기에 나름대로 이웃 동네 누구네
우물에서 나와서 면사무소 우물로 들어갔을 거라고 짐작하곤 하였다.
우물이 깊어야 샘물도 색깔도 많이 나올 거라고,
학교 우물에도 우리집 우물에도 어미 가재 새끼 가재 가리지 않고
잡히는 족족 우물 속으로 던졌다. 깊게 깊게 샘을 찾아 파고들어 가라고…….”
_「고운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에서

일곱 빛깔의 찬란한 무지개를 보고 이쪽 우물과 저쪽 우물이 다리를 놓아 연결한 것이라 생각하고, 우물이 깊으면 색깔도 많이 나올 테니 우물을 만나는 족족 가재를 던져 샘이 더 깊어지기를 바랐던 사람이 비단 저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호기심과 관심으로 점철된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수많은 발명품이 탄생했듯 우리 주변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많은 것이 숨겨져 있다. 저자는 지금 우리가 누리는 디자인이 자연에서 얻은 것이라면, 미래의 디자인도 자연에서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저자처럼 부지런히 눈과 손을 사용하는 것이다.

구매가격 : 19,500 원

종이 위의 직관주의자

도서정보 : 박찬휘 | 2023-12-26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당신의 생각이 낙서가 될 때 일어나는 일”
예술은 위로하고 디자인은 자극한다!

나를 깨우고 세상을 바꾸는 손안의 힘
길들여지지 않은 창조성을 깨우기 위한 조언

유럽 20년 차 자동차 디자이너의 생각 노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직관의 힘을 신뢰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성과 논리를 가장 중요시할 것 같은 물리학자가 자신의 감(感)과 상상력을 믿고 따랐다는 게 이상하게 들리지만, 그는 “가장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은 직관이다”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연구 과정에서 직관을 자주 이용한 ‘연구실의 직관주의자’였다. 예를 들어, 상대성이론을 발견할 때 그는 직관적으로 시공간이 휘어져 있다는 가설을 세웠고, 이를 수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아인슈타인의 직관은 옳았고, 그는 현대 물리학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직관은 감성적인 지각처럼 추리, 연상, 판단 등의 사유 과정을 거치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학교에서 시험을 칠 때 문제를 보는 순간 즉시 정답이나 풀이 방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면 직관이 작용한 것이다. 길을 걷다가 위험을 감지할 때도 마찬가지다. 직관은 감성적이고 예술가적인 기질을 지닌 디자이너들에게도 유용하게 발휘된다. 창의적인 결과물을 얻기 위해 골몰할 때 디자이너는 연필로 선을 그어가며 이미지와 생각을 종이 위에 떠오르게 하려 노력한다. 내면의 직관을 가장 열정적으로 그려내 보이는 스케치는 순수한 창작의 에너지, 직관을 통해 탄생되는 최초의 답안이다.

박찬휘 작가의 『종이 위의 직관주의자』는 이처럼 우리 안에 깊이 머문 감각과 경험을 통해 길들여지지 않은 창조성을 깨우는 방법을 조언하는 책이다. 저자 박찬휘는 페라리, 메르세데스-벤츠, 아우디 등 세계 굴지의 자동차 회사에서 활동한 20년 경력의 자동차 디자이너이다. 홍익대학교와 영국왕립예술대학원에서 디자인을 공부했고, 페라리의 디자인하우스로 알려진 피닌파리나를 시작으로 메르세데스벤츠, 아우디를 거쳐 현재는 뮌헨에 위치한 전기차 니오의 디자인센터 수석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다. 첫 책 『딴생각』에서 상상력의 원천이었던 딴생각과 호기심을 통해 세상에 질문을 던졌던 그는 이번 두번째 책 『종이 위의 직관주의자』에서 직관적 사유의 중요함을 전제로 인간을 따르는 디자인과 나를 깨우고 세상을 바꾸는 손안의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를 새롭게 하는 단순하고 사소한 생각
상상과 공감으로 만들어진 디자인이란 ‘상자’

저자는 디자인을 어렵거나 복잡하거나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본질적으로 “단순하고 사소한 생각”이며 “디자인은 일상의 일”이라고 설파한다. 저자가 의미하는 디자인이란 창의성과 상상력을 일상과 연결함으로써 새로운 것에 이르는 일이다. 그리고 디자이너는 바로 그 상상을 현실화하는 사람이다. 오랫동안 디자인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많은 작업을 해온 그는 디자인이란 그저 일상의 어떤 부분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는 경험이고, 전혀 거창한 것도 아니며, 그렇기에 오히려 더 가치 있는 생각의 방식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일상의 어떤 부분을 조금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는 경험처럼, 디자인은 전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외려 조촐한 생각의 방식이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이것을 여러 차례 실감했다. 그리하여 내가 해온 일과 삶의 경험의 단편들이 디자이너를 꿈꾸는 사람들이나 현역 디자이너들에게만이 아닌 모두에게 투영될 수 있는 이야기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_「프롤로그」, 12쪽

아울러 저자는 우리는 누구나 창의성을 발휘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디자이너”라고 주장한다. 명함에 디자이너라고 쓰여 있든 아니든, 태생부터, 뼛속까지 다 디자이너라는 것이다. 이제껏 살아오며 빈 종이에 뭐라도 채우고 싶었던 적이 있거나, 부수기와 조립을 반복하며 즐거움을 느낀 적이 있다면 누구나 예술가와 디자이너의 자질인 창의적 의지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만들 때마다 모양이 달라지는 손뜨개처럼 익숙한 것을 거부하며 새로운 것을 찾는 사람을, 고장 난 물건을 수리하며 일상의 결핍을 스스로 해결하고 행복해하는 사람을 디자이너라고 한다면, 우리가 디자이너가 아닐 이유가 없다.
한편 디자인은 생각을 모으고 가다듬어 완성에 이르게 하고, 사람과 사물의 새로운 만남을 통해 더 나은 미래의 윤곽을 그려내는 일이다. 저자는 이런 관점에서 디자인을 상자에 비유하며 그 안에 뭔가를 담는 일이 인생의 경험을 쌓는 일과도 닮아 있음을 여러 곳에서 환기한다.

디자인은 시공을 초월한 단정함을 이루는 일이다. 사물은 디자인이라는 상자에 정돈되어 담김으로써 사용자의 필요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다. 그것은 공동체의 우월한 취향을 돕는 것은 물론 기술이 나아갈 방향과 대중의 요구를 읽어내는 이정표가 된다. 한마디로 각기 다른 이들의 무수한 생각의 굴절들을 한곳에 담아내는 관념의 공간, 그 반듯한 상자가 바로 디자인이다.
_「디자인은 ‘상자’다」, 23-24쪽

상자 속에는 사물도 담지만 생각도 담을 수 있다. 하나의 결과물을 완성하기 위해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게 마련이다. 무심히 떠오른 생각들이 사방으로 튀어오르다 한순간 그것들이 하나로 모아질 때가 있다. 바로 새로운 생각이 꿈틀대는 순간, 디자인의 결정체가 등장하는 순간이다. 디자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관념의 상자는 서로 다른 영역의 생각을 한곳에 모은다. 우리 삶과 세계를 이루는 근본적인 것들, 사소하고 빤한 생각들이 이리저리 모습을 바꾸며 결합한다.
흥미로운 것은 (뭔가를 담고 모으는) 상자 자체가 디자인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즉흥적 발상을 통해 의미를 발견하는 상자, 긍정이라는 불빛을 통해 꿈을 꾸고 문제를 해결하는 상자,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 힘을 빼기보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게 하는 상자다. 결국 디자인이란 나의 이야기이면서 모두의 이야기가 어우러질 수 있는 공간을 빚는 일인 것이다.
이러한 상자를 갖기 위해 필요한 것은 비싸고 무거운 것이 아니다. 연필과 종이 한 장만 있으면 된다. 저자는 종이 위에서 자유롭게 노는 방식으로 누구나 직관주의자가 될 수 있다고, 우리 안에 잠재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종이 위의 직관주의자』는 디자인의 본질과 일상을 새롭게 하는 창의성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공감과 교감이 디자인의 가장 중요한 가치임을 깨닫고,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건드리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아름다운 힘의 원리를 궁구할 수 있을 것이다.

구매가격 : 13,500 원

곽곽선생뎐

도서정보 : 곽경훈 | 2023-12-26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피도 눈물도 없는 왕의 사냥개
무엇을 위해 칼을 휘두르는가!

목적이 있는 자는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다!
피냄새를 놓치지 않는 기이한 사내의 이야기

“밀정의 아들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밀정으로 살 수밖에 없는 사내,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며 반인반신 같은 능력을 지녔으나
암울한 현실을 바꾸지 못하는 사내의 신나고 서글픈 모험에 당신을 초대한다.”
_「작가의 말」에서

가는 곳마다 피바람을 일으키는
곽곽 선생의 짜릿한 모험 활극

이 작품은 환상의 제국을 그려내고 매혹적인 이야기를 빚어내는 이야기꾼이 되고 싶었던 곽경훈 작가의 첫 소설이다. 작가는 가상의 나라 쥬와 와 카락을 배경으로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지만, 암울한 현실에서 무엇을 위해 피바람을 일으키고 꿈꾸는 이상사회가 무엇인지 고뇌하는 한 인물의 모험 이야기를 담아낸다. 첫 소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작가의 풍부한 소설적 상상력으로 밀도 높게 촘촘히 짜인 이야기는 왕의 밀정으로 태어나 밀정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암행총관 곽곽 선생의 박진감 넘치는 짜릿한 모험 활극의 매력을 전한다.
또한 작가는 디테일한 인물 묘사를 통해 다층적 이야기의 서사를 풀어낸다. 부조리한 제도와 사회에서 다양한 인물 군상이 보여주는 서사는 곽곽 선생이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피바람을 일으키고 깔깔거리며 즐거워하는 괴물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당위성을 뒷받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바뀌지 않는 암울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반인반신 같은 능력을 지닌 곽곽 선생이 어떻게 타개해나갈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곽곽 선생이라 들어보았는가?
그게 날세.”

보통 남자보다 머리 하나쯤 큰 키에 어깨가 벌어진 탄탄한 체격을 지녔고 특히 쌀 한 섬을 가볍게 지탱할 만큼 허벅지가 튼실했다. 찢어진 눈매는 날카로웠으며 콧날은 오뚝했고 입술은 얇았으며 피부는 햇볕에 갈색으로 그을렸다. 또 검은 두건을 쓰고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가는 곳마다 피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괴물. 겉으로는 아무 말이나 함부로 지껄이는 듯해도 정교하게 계산된 함정을 숨겨놓는 주도면밀한 인물. 그가 바로 쥬의 암행총관 곽곽 선생이었다.

왜 그는 왕의 사냥개로 태어나
사냥개로 죽을 운명일 수밖에 없는가

곽곽 선생에게 선택권 따위는 없었다. 아버지 곽현이 왕의 목숨을 살려주고 하사받은 암행총관의 직위와 철권은 그의 장자 곽곽 선생에게도 이어졌다. 그렇게 왕의 사냥개로 태어나 왕의 사냥개로 살다가 왕의 사냥개로 죽을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암행총관 외에는 아무것도 될 수 없었고 암행총관의 임무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왕정복고를 이루고 권력을 잡은 위선자로 가득한 백색당을 처단하는 것이 곽곽 선생이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기쁨이었다.
하지만 열교를 믿는 백색당은 내수교를 믿는 곽곽 선생을 싫어했고 한때 과두제로 나라를 다스렸던 흑색당의 평현 곽씨 자체를 경계했다. 곽곽 선생은 암행총관으로 백색당의 일탈을 처벌하고 부패를 척결할수록 국왕의 힘과 권위도 커졌다. 백색당의 우두머리는 국왕이었으며 그들이 내세우는 신념의 본질과도 같아 곽곽 선생이 백색당을 처단할수록 백색당 정권은 더욱 공고해졌다.
이 이율배반적인 상황에서도 곽곽 선생은 부조리한 사회를 변혁하고자 피바람을 일으키며 통쾌하고 짜릿한 모험을 펼친다.

암울한 현실을 바꾸지 못하는 사내의
신나고 서글픈 모험 이야기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로 이루어진 쥬. 흑색당의 과두제를 무너뜨리고 왕정복고를 이룬 백색당이 통치하는 나라. 신분제도가 엄격했으며 농업을 근본으로 삼아 쇄국정책으로 문호를 폐쇄한 나라. 국왕을 대신하여 대리청정하고 있는 왕세자는 백색당 구파를 몰아내고 신파와 협력하여 권력 장악을 꿈꾼다. 그리하여 색목인을 이용하여 새로운 군대를 육성하고자 은산군을 수장으로 한 사절단은 곽곽 선생을 필두로 조근, 칼잡이 후야와 함께 길을 떠난다.
암도에 도착한 사절단 일행은 인신매매 조직에게 붙잡혀 노예로 팔려와 거래되는 쥬의 백성들을 목격하고 쥬의 안전과 백성들을 위해 은밀히 상군부의 상군과 혈교의 주교를 만나 거래한다. 곽곽 선생은 고민 끝에 상군을 선택하지만 괴물의 눈빛을 띤 상군을 알현하는 순간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는 왜 상군을 선택한 것일까?

구매가격 : 11,500 원

자살카페

도서정보 : 구광렬 | 2023-12-26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극심한 우울증, 도저히 혼자선 용기가 나질 않네요.
외로운 저승길, 좋은 분들과 함께 떠나고 싶습니다.”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그들은 왜 죽음을 선택했는가?

모든 것을 상실한
상처받은 청춘들의 자살 이야기

이 책은 자살을 단순히 한 개인의 극단적 선택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대해 고민해보게 한다. 에밀 뒤르켐이 “자살은 사회 현상이다”라고 한 바와 같이 취업, 학업, 왕따, 상실, 보이스피싱, 성소수자 등의 사회문제가 어떻게 보편적인 개인문제가 되어 20대 꽃청춘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명수, 미진, 영욱, 현아, 슬기, 혜경, 주택의 이야기를 통해 풀어낸다. 그들이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돌아보며 현시대의 사회문제를 다시 한번 상기하게 한다.

“그래, 죽자고!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작가는 선택의 여지가 없거나 선택이 필요 없을 때는 차라리라는 말을 쓸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였을까. 상처 입은 일곱 명, 명수·미진·영욱·현아·슬기·혜경·주택은 모든 것을 잃고 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고 동반자살을 기도한다.
그들이 선택한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취준생 6년 차 명수는 계속되는 취업 실패로 더이상의 희망은 없다고 생각했다. 경제적으로도 힘든 시기를 보내면서 선택지 없는 죽음을 떠올렸다.
수능을 망친 미진이 생각하는 죽음은 도피였다. 부모의 기대는 그녀로 하여금 숨을 쉬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숨을 쉬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다.
영욱은 자신에게 징역형을 내리고 스스로를 가두었지만 우울과 공황장애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형선고를 내렸다.
현아는 희망이자 모든 것이었던 200만 원을 보이스피싱으로 날리고 더러운 세상과 작별하기로 했다.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슬기는 상실감에 한 차례 자살을 기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녀에게 죽음은 먼저 간 그에게 이르는 만남의 다른 말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스러움을 느낀 성소수자 혜경은 사회적 차별로부터 자유로워지기로 했다.
주택은 영농 지원 정책에 따라 열심히 교육받고 노력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빚밖에 남지 않은 신용불량자가 되어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했다.
그리고 준혁은 그들을 죽음의 늪에서 구하고 시나리오의 디테일과 경험 확대를 위해 그들의 죽음에 동조하고 동반자살에 휩쓸린다.

구매가격 : 9,800 원

은어는 안녕하신가?

도서정보 : 이상엽 | 2023-12-26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다큐멘터리 사진가이자 르포르타주 작가 이상엽,
카메라와 펜을 들고 우리 땅·우리 풍경을 담아내다

기후 위기 시대,
사진으로 보는 우리 땅 24절기

2023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111장에 담긴 우리 땅, 30년간의 한반도 기후변화
다큐멘터리 사진가이자 르포르타주 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이상엽 작가가 기후변화로 인해 새롭게 바뀐 24절기를 우리 땅 풍경을 담은 111장의 사진과 함께 전한다.
입춘에 폭설이 쏟아진 솔숲, 눈도 녹지 않은 1월에 봄비 같은 부슬비가 내린 가야산 해인사, 가뭄으로 말라붙은 안동호에 물을 찾아 내려온 고라니, 최근 몇 년간 축구장 80개 규모의 백사장이 유실된 강원도 해수욕장, 자연산 전복 보기가 귀해진 제주 앞바다 등 기후변화가 생생히 전해지는 듯한 사진은 물론, 맑은 산물이 흘러넘치는 섬진강 여울, 가마구지가 나른히 쉬고 있는 백령도 기암괴석, 한때 우리나라 에너지 생산의 1등 공신이었던 탄광 도시 철암, 시원하게 펼쳐진 제주도의 청보리밭, 충주호 건설로 수몰된 마을의 유적을 그대로 이전해놓은 제천 청풍문화단지, 강화도에서 바라본 북한땅, 매해 상강이면 초가지붕을 새로 잇는 고성 왕곡마을 등등 우리땅 곳곳의 풍경을 사진으로 담아 전한다.
어떠한 풍경들 앞에서는 이제는 쉽게 볼 수 없게 된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어떤 풍경들 앞에서는 우리가 언제까지고 이런 모습을 당연하다는 듯 볼 수 있을지 염려도 든다. 기후위기 시대, “성장보다는 지속을 선택”하고 “소비보다는 절약을 다시 배”우며 이 기후변화에 맞서야 하는데, “우린 정말 그렇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24절기, 그거 맞는 거예요?

많은 사람이 음력으로 절기를 나눈다고 생각하고 절기가 도통 맞질 않는다며 의아해하는데, 사실 24절기는 태양의 기울기를 기준으로 나눈 것이라 양력이다. 하지만 양력으로 따져봐도 뭔가 이상하다. 열대야로 잠을 잘 수가 없는데 입추라고? 왜 처서에도 모기 입이 안 비뚤어질까? 대한이 소한 집 가서 얼어 죽는다더니, 소한이 이렇게 포근해? 사실,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감각은 옳다. 2020년 국립기상과학원이 발간한 〈우리나라 109년(1912~2020년) 기후변화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절기는 지난 30년 전과 실제로 많이 달라졌다. 기후변화의 영향이다. 저자는 지난 30년간의 한반도 기후변화를 적용해 새롭게 바뀐 24절기를 111장의 사진과 함께 소개한다.

물범은 까나리 생태계를 걱정하고, 꽃게는 전어에게 서해안을 내어주고

백령도에서는 희귀한 해양 포유류 물범을 볼 수 있는데, 최근 백령도 일대의 해수 온도 변화로 물범이 위기에 처했다. 서해와 남해의 연안해역을 중심으로 이상 고수온 현상이 지속적으로 나타나면서 물범의 먹이인 까나리가 백령도 앞바다에 나타나는 시기가 계속 앞당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부들과 물범은 언제까지 백령도가 까나리로 넘치는 풍요로운 바다로 남을까 걱정이다. 서해안에서는 기후변화로 꽃게와 전어의 희비가 엇갈린다. 서해안 수온이 꾸준히 올라가면서 찬물을 좋아하는 꽃게는 지속적으로 조업량이 줄고, 따듯한 바다를 좋아하는 전어는 남해안에서 서해안 동해안 등지로 북상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그 흔하던 은어도 생태계 환경 오염으로 이제 섬진강 정도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는데, 그마저도 기후변화로 강의 생태계가 변하면서 더욱 보기 힘든 존재가 되었다. 은어는 자갈이 깔린 1급수에 사는데, 강수량의 변화로 강의 얕은 곳이 풀로 덮이면서 모래나 자갈이 있어야 할 부분이 식물로 덮여 하천 고유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는 탓이다.
이 책은 양질의 콘텐츠 생산과 출판 생태계를 위해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주관한 ‘2023 우수출판콘텐츠 제작 지원 사업’에 선정된 작품이다. 이러한 지원이 없었다면 환경에 대한 문제의식과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담은 이 책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구매가격 : 19,500 원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도서정보 : 고명재 | 2023-12-21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고명재 시인의 첫 산문!

‘사랑’이라는 이상한 리듬을 말하기 위한
시인 고명재의 무채색에 얽힌 백 가지 이야기!


202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첫 시집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문학동네, 2022)으로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은 고명재 시인의 첫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를 출판사 난다에서 펴낸다. ‘사랑’이라는 이상한 리듬을 말하기 위한 무채색에 얽힌 백 가지 이야기를 담았다. 무채색은 색상과 채도가 없고 밝고 어두운 차이만 있는 색을 말한다. 흰색에서 회색을 거쳐 검은색에 이르는 무채색은 그 자체로 있지만 없고 없지만 있는 색. 있고 없음 사이에서 존재하는 비존재의 색이다. 시인이 살펴본 무채 속 풍경은 사랑이라는 밥솥에서 끓어오르는 밥물과 같다. 누군가를 먹이고 돌보려 먹이는 하얀 밥, 흰살 생선, 밀가루, 두부, 멸치의 은빛, 능이버섯, 간장, 양갱…… 고명재 시인은 이 첫 산문집에서 우리에게 “사랑은 화려한 광휘가 아니라 일상의 빼곡한 쌀알 위에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늘어난 속옷처럼 얼핏 보면 남루하지만 다시 보면 우아한 우리의 부피” 같은 사랑을.

나랑 할머니는 둥근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엄마가 갖가지 반찬을 만드는 걸 보고는 했다. 특히 나는 엄마가 멸치를 볶을 때 이상한 기대감에 부풀곤 했는데 그건 순전히 멸치의 아름다운 빛깔과 달궈진 팬 위에서의 우아한 궤적 때문이었다. 은빛 멸치를 팬에 올리고 볶기 시작하면 엄마의 손짓 한 번에 얘들이 튀어올랐다. 팬 위에서 차글차글 소리를 내면서 공중으로 휙휙 떼로 날아가는데 그 모습이 자유로운 헤엄 같았다. 저렇게 떼로 움직이며 살아갔겠지. 무엇보다도 나는 멸치의 빛깔이 좋았다. 은화 같은 멸치들이 몇 분 사이에 팬 위에서 금빛으로 눌어붙었다. 그럼 좀, 덜 가난해 보이는 기분이었다. 그럼 좀, 할머니가 덜 슬퍼할 것 같아서 그럼 좀, 환기를 할까요? 명랑하게 말하고 가게 문을 활짝 열고 볕을 쬐었다. 그렇게 삼대三代가 멸치 냄새로 매캐한 가게에서 가슴 졸이며 서로를 훔쳐보았다. 생각해보면 그때의 햇빛, 은빛, 금빛도, 낡은 팬도, 멸치도, 물엿도 할머니 백발도 돌이켜보면 모든 게 햇살 속에 있었다. 그 모든 게 사랑의 풍경이었다. _「빛」 부분


어른도 우는구나
어른도 두렵고 슬픈 거구나

8월의 한여름, 자신에게 너무도 큰 사랑을 주었던 새-엄마, 비구니의 부고를 듣고 시인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어서 아이처럼 울다 깨닫는다. 자신이 슬픔에 빠져 그 사랑을 보지 못했음을. 가진 것 없이도 오래도록 안아준 사람. 아주 느리게 성실하게 그저 걸어가라고. 자신의 몸이 망가질 때에도 사랑만 쥔 채로 내가 쓸 종이의 흰빛을 꿈꾸게 해준 사람. 텅 빈 채로 가득한 소리를 내는 목탁, 나무로 된 심장을 보며 시인은 생각한다. 이별의 순간 그가 전해주었던 가르침은 이별이 완전한 사라짐이나 소멸이 아니라 흙이었던 것의 본래 흙으로 돌아감이라는 깨달음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이야기가 남습니다. 몸이 사랑이 됩니다. 또한 그 이야기와 사랑조차 시간에 녹아 다 사라진대도 우리가 함께했다는 것, 눈부신 그 사실만으로 충분하다는 걸 이제는 알 것 같아요”라고 시인은 신춘문예 당선소감에서 말한 바 있다. 시인에게 ‘눈’은 분명 손바닥에 닿았는데 녹아버리는, 존재와 소멸을 동시에 보여주는 놀라운 물질이다. 이렇게 사라지면서 존재하기에 눈은, 물질이라기보다는 ‘상태’에 가깝다. 눈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시인은 묻는다. 사람의 성분은 뭘까. 왜 빛이 났을까. 어쩌면 사람도 아주 더디게 녹고 있는 눈송이가 아니었을까.


‘언젠가는 꼭 다시 같이 살자’
내 안에 왜 이리 밝은 것들이 가득한가요

형아, 여기서는 경주가 전부 보이고 큰 나무도 보이고 산도 다 보여. 형아, 가끔씩 난 여기 선 채로 형아도 보인다고 생각해. _「능陵」 부분

동생과 어머니, 아버지와 헤어진 채로 할머니 집에 맡겨진 시인은 그곳에서 시라는 이상한 리듬을 배운다. 그에게 시는 인공관절 같은 것. 안에서 빛나며 느리게 펼쳐지는 것. 돕는 것. 삶을 무릎을 무지개처럼 일으켜 접고 걷게 하는 것. 고명재 시인은 말한다. 자신에게 시란 ‘이 사람이 존재했었다’ 그 빛나는 사실을 드러내는 능인지도 모른다고. 한겨울, 더 견딜 수 없을 만큼 보고 싶을 때 가족을 보러 찾아간 경주에선 마중 나왔던 보들보들한 동생. 그애가 자신을 데려간 눈 쌓인 언덕, 그 왕릉 위에서 잠시 바라본 시간 너머의 풍경처럼.

최소의 말, 최소의 눈빛으로 사랑을 가르쳐준 이는 떠나고 시인은 홀로 걷는다. 그러나 시인은 혼자가 아님을 느낀다. 자신의 등과 어깨를 감싸는 어떤 손길들이 있다. 세상 모든 것이 얼어붙는 겨울. 마음의 벼랑에 고드름이 슬고 무릎이 시린 시간, 그런 때야말로 우리가 온기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걸 스스로 증명하는 아름다운 숨, 입김이 보이는 것처럼. 시인에게 조끼는 구구절절한 형식과 장식은 모두 거두고 가장 소중한 것을 데우기 위해 만들어진 의복이다. 조끼는 왼팔 오른팔 거두절미하고서 심장을 감싼다. 뚫린 채로, 구멍 난 채로 사랑을 해낸다. 시인 역시 그러할 것이다.

구매가격 : 11,200 원

슬픔을 아는 사람

도서정보 : 유진목 | 2023-12-22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살아 있는 사람에게 행운처럼 주어지는 여행
나는 살아 있어서 여행할 수 있다

시인이자 영화인 유진목이 2년 만에 신작 산문집『슬픔을 아는 사람』을 출판사 난다에서 펴낸다. 2022년 여름, 베트남 하노이에 다녀온 세 번의 여행을 글과 56컷의 필름 사진으로 기록했다. ‘유진목의 작은 여행’이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기대와 설렘에 잠겨 낯선 곳을 체험하고 기록한 일반 여행 에세이의 온도와는 사뭇 다른 문장으로 독자를 맞이한다. 『슬픔을 아는 사람』은 작가 유진목이 긴 싸움 끝에 남아 있는 나 자신을 확인하고 회복하려는 ‘노력’에 관한 이야기이자 시인으로서의 ‘쓰기’에 대한 시론이라 할 수 있다. 총 여섯 파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 다섯 파트는 1부터 52까지 번호를 단 시 같은 산문을 실었다. 이는 여행중 노트에 기록한 메모를 초고로 하여 살을 붙이고 한 글자씩 짚어나가며 다시-쓰기한 글들이다. 유진목에게 다시-쓰기는 계속해서 살아보기, 다시-살기에 가까워 보인다. 그래서일까. 글 한 편 한 편은 유진목 시인 특유의 비워둔 공간이 말하는 듯한 여백이 매력으로, 날숨보다는 들이쉬는 숨에 가까운 호흡이 하나하나 살아 곱씹는 여운이 길다.
“슬픔은 사랑을 먹고 자란다. 슬픔은 충만한 사랑을 알아본다. 사랑을 먹고 자란 슬픔은 이내 충만해진다.” 때로는 시로, 한편으로는 아포리즘으로도 읽히는 이 글들은 시인이 겪어야 했던 어떤 ‘불행’을 그늘에 깔고 있다. “가로등도 없고 앞을 보아도 뒤를 보아도 어둠뿐인 밤길과 같”은 시간. ‘문단 내 성폭력’ 가해자의 보복성 고소에 조사를 받고 허위적시 명예훼손 고소에 ‘혐의 없음’ 처분을 받고 승소하기까지 시인은 싸우지 않는 마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완전히 잊어버릴 정도로 오랫동안 싸우면서 살았다. 가까스로 살아가기 위해 다른 것에는 마취에 가깝게 무감해져야 했던 그 시간이 끝난 여름, 유진목은 스스로 가진 돈을 남김없이 쓰고 일상에서의 생활도 멈추기로 마음먹고 하노이행 비행기에 올라탄다. 설거지를 할 때 그릇을 모두 깨부수고 싶고 빨래를 널다 말고 옷을 전부 찢어버릴 것만 같았던 분노를 잠재우고 싶어서.
시인은 그렇게 하노이라는 공간에서 수년간 내면에 차곡차곡 쌓여온 분노와 그에 잠겨 경험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자신이 통과해야 했던 삶을 반추한다. ‘기억의 끈’을 놓고 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 “어디선가 나도 모르게 나를 잃어버리는” 여행을 통해. 이것은 그가 “완전한 여행자”가 되어 멀리 떠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불행한 내가 본 것을 행복한 내가 다시 보려고.


자고 일어나면 내가 아니길 바랐다
아니, 잠들면 깨어나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하노이에 도착해서 반나절을 걷다가 맨 처음 알아차린 것은 이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_63쪽

내 것은 아무것도 없는 곳, 나는 여기서 아무도 아닌 존재가 되는 곳, 아무와도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없고 오직 나만이 나와 대화할 수 있는 곳. 뜨거운 햇빛이 몸을 관통해버린 것만 같은 여름의 하노이에 시인은 “아무것에도 압도당하지 않고 단지 계속해서 살아보자는 마음 하나에만 순순히 이끌리고 싶어 온 것이다.” 하염없이 걷던 거리에서는 옅은 망고 냄새가 났다. 오토바이들이 질주하는 도로 한복판에 서 있어도 엘리베이터를 타도 화장실을 가도 언제나 깔려 있던 그 냄새. 시인은 문득 이 달큰한 냄새가 무엇을 닮았는지 기억해낸다. “살갗과 살갗이 서로를 스칠 때 나는 냄새”였다는 것을, 살의에 가득차 있던 마음은 너무도 오래 살의 보드라운 감촉을 잊고 살아왔다는 것을. “나는 혼자서 울고 밖으로 나갈 때는 웃는 사람이다. 밖에서도 울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런 날들을 지나왔다고 지금은 쓸 수 있다.”
그는 그저 살아 있고 싶은 마음이었다. 잠에서 깨어나면 죽고 싶다 생각하지 않고 살고 싶은 마음. 살아 있다는 생각도 그만 하고 그냥 살고 싶은 마음. 살아 있음을 흉내내느라 스스로 지쳐 있던 나. 살아 있음을 행하지 않아도 되기에 잠은 달콤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시인은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서 까무룩 잠든 사람들을 보다 깨닫는다. 그들이 너무나도 선명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잠은 죽음에 속한 것이 아니라 삶에 속해 있다는 것을.” 그렇다. “우리는 우리에게 머물기로 한 슬픔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슬픔은 삶을 신중하게 한다. 그것이 슬픔의 미덕이다.”

구매가격 : 11,200 원

나는 왜 산티아고로 도망갔을까

도서정보 : 이해솔 | 2023-12-27 | EPUB파일

지원기기 : PC / Android / iOS

“당신은 어떤 길을 걷고 있나요?”

안정적인 직장에서 퇴사를 하고
무작정 비행기 표를 끊고 떠난 바로 그곳!
변덕스러운 폭염과 폭우, 밤낮없이 잠을 설치게 하는 모기떼,
길 위에서 만난 다양한 사연의 순례자들까지
한 번도 우연이 아닌 적 없던
31일간 800km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
이해솔 〈나는 왜 산티아고로 도망갔을까?〉

상실과 슬픔을 마주하기 위해 시작하게 된 산티아고 순례의 끝은,
결국 나를 사랑하는 일이 되어 돌아왔다.

이해솔의 〈나는 왜 산티아고로 도망갔을까〉는 물음으로 시작한 여정이 온전한 마침표를 찍기까지, 31일간 산티아고 순례길 800km을 걸으며 작가가 겪었던 우연한 순간들을 담은 에세이다. 작가는 대학교 졸업 직전 떠나게 되었던 첫 번째 순례에서 부르고스부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500km를 걸었다. 그렇게 5년 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다니던 회사의 퇴직 일자를 정한 뒤 무작정 비행기 표를 끊고 떠난 두 번째 순례는 생장 피에 드 포르부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800km를 걸었다.

그 모든 과정이 혼자만의 것이었다면 800km보다 더 긴 여정을 떠났다 하더라도 무의미할지 모른다. 스페인의 폭염과 폭우처럼 결코 견뎌내기 쉽지 않은 변덕스러운 날씨와 급작스레 겪은 무릎 경련으로 조난을 당할 뻔한 상황까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특별했던 순간 속에 각자의 방식으로 작가의 마음을 다잡아준 또 다른 순례자들이 있었다. 이처럼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다는 건 오직 자신만의 일이면서도 고독하지 않은 여정의 연속이다.

타인의 인정을 우선으로 두고 살아왔던 작가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때 인생이 더욱 의미 있음을 깨닫는다. 낯선 땅에서 펼쳐지는 길 위의 이야기는 오직 나에 의해, 나의 선택만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왜 산티아고로 도망갔을까〉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처음과 끝에서 새롭게 마주하게 될 자신만의 이야기가 무엇일지 막연한 이들에게, 800km의 길을 직접 걷는 것처럼 생생한 순간을 여는 초대장이 되어줄 것이다.

구매가격 : 11,760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