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김부식 (金富軾)은 1075년(문종 29) 김근(金覲)의 넷째아들로 경주에서 출생하였다. 1096년(숙종 1, 22세) 과거에 합격하여 관료의 길로 들어섰다. 그후 요(遼)의 출병 요구를 반대하거나, 금(金)에 대한 유화적 관계를 주도하는 등 명분보다는 주로 현실적 이해를 크게 고려하는 외교 노선을 취하였다. 과거시험 고시관인 지공거(知貢擧)를 몇 차례 역임하였고, 왕에게 『주역』(周易)과 『상서』(尙書) 등을 강의하였다. 1116년(예종 11, 42세) 송나라에 사신단의 일원으로 파견된 이후 모두 세 차례 입송하였다. 특히 그가 당시 문장의 고문체(古文體) 운동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송 문화를 접했던 경험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왕권에 도전했던 이자겸의 행태를 논박한 글 ’대외조의’(對外祖議)가 있으며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의 비문을 작성한 바 있다. 1135년(인종 13, 61세) 묘청 등이 주도한 서경(西京) 반란이 일어나자 토평총책이 되어 이를 진압하였으며, 이 공으로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에 책봉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서 최고의 권력수반이 되었다. 그는 왕권 중심의 유교적 통치이념에 충실하고자 했으며, 신비주의적 사고나 급격한 개혁을 반대하고 비교적 온건한 현실 순응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1142년(인종 20, 68세) 개혁론자들의 복권을 계기로 정치력의 한계에 봉착하자 현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10여 명과 함께 『삼국사기』 편찬을 주관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비슷한 정치환경에 있었던 송나라의 사마광과 그가 저술한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145년(인종 23, 71세) 『삼국사기』를 완성하여 왕에게 바쳤으며 『예종실록』, ?인종실록』의 편수에도 참여하였다. 1151년(의종 5) 7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조정에서는 문열(文烈)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인종묘(仁宗廟)에 배향(配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