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자동차 바퀴에 스카프가 감기어 비참한 최후를 마친 이사도라 덩컨의 나이는 49세였다.
흔히 이사도라 하면 맨발로 춤추는 것을 연상하게 된다. 그만큼 그녀는 전통적 무용이 갖는 격식이나 관습의 일정한 규준을 깨뜨린 무용의 혁명가였다.
또한 이사도라 덩컨은 무용의 새로운 기법뿐만 아니라 무용과 인생의 새로운 개념까지도 이 세상에 가져온 디오니소스적 무용가였다. 그녀는 "나에게 있어서 무용이란, 동작을 통하여 인간의 혼을 표현하는 예술이고, 보다 자유스러운 그리고 보다 조화 있고 자연스러운 인생의 완전한 개념의 근본이다"라고 말한다.
자연과 자신의 육체와의 연계를 강하게 느꼈던 그녀는 파도ㆍ바람ㆍ구름의 움직임이라는 자연현상 가운데서 운동의 모범과 리듬의 규율을 발견하였다. "무용에 관한 나의 최초의 관념은 확실히 파도의 리듬으로부터 비롯된다. 나는 파도의 움직임에 따르고 그 리듬에 맞추어 춤추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민중과 창조자 사이를 격리시켜 버리는 전통적 무용술로부터 인연을 끊은 '이 자연으로의 회귀'도 그녀에게 있어서는 생명에 접하는 순간일 뿐이고, 그 생명이란 결국 한 사회의, 나아가 한 민족의 생명이었다.
그러한 이사도라 덩컨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했던 것은 자유였을 것이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스스로 창조해 왔던 무용은 다름 아닌 '자유'의 표현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해방의 예술로서의 무용'이라는 제목으로 베를린에서 강연을 한 적도 있다. 그것은 단지 한 개인의 해방에 관한 것이 아니고, 억압적인 관습이나 교육에 대한 끊임없는 싸움에 관련되는 것이었다.
무용가이며 혁명가였던 그녀는, 결혼하지 않고도 자유롭게 어린애를 낳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모든 여성을 위해서-세속적인 혼인법에 도전장을 던졌다. 사생아를 둘이나 낳고, 나중에는 연하의 젊은 러시아 시인 예세닌과 결혼까지 했던 이사도라 덩컨, 확실히 그녀는 한 시대를 앞서간 천재였음이 분명하다.
덩컨은 개인적 행위에 의해서 아카데미즘에 대항하여 하나의 문호를 개방하였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근대의 무용이 창조되었다. 무용에 인간적 의미 작용을 다시 부여하고, 믿음ㆍ정열ㆍ분노ㆍ희망 등을 무용으로써 이야기하려는 의도에서 그녀는 육체를 해방하였으며, 동작에 자유를 주고 무용과 음악과의 새로운 유대를 확립했던 것이다.
그녀는 물질에서, 결국 코르셋이나 구두 따위의 불편한 장식들에서 육체를 해방하고, 나체야말로 예술에 있어서 가장 숭고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사도라 덩컨이 근대 무용의 개척자이며 선구자라는 사실은, 그녀가 무용을 통해서 자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했던 노력에서 충분히 입증된다.
누군가가 얘기했듯이 그녀의 죽음은 '근대 무용예술의 밝은 별이 떨어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