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정치권의 성쇠에 따라 부침 많은 삶을 살았던 천재 문필가, 대니얼 디포는 플랑드르 출신의 양초 판매상인 제임스 포(James Foe)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을 ‘디포’(Defoe)로 바꾼 것은 30대 중반인 1695년경으로, 원래의 성 ‘포’(Foe)를 기초로 변형한 듯하다. 비국교도였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유명한 교육자인 찰스 모턴(Charles Morton) 경의 아카데미에서 목회자 교육을 받았지만, 곧 자신의 관심사가 상업에 있음을 자각하고 1683년부터 면직물 등을 파는 상인이 되었다. 1685년 가톨릭교도인 제임스 2세(James II)가 즉위하자 열렬한 비국교도로서 반란에 가담하기도 했으나 참패의 혼란 속에서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였으며, 이후 여러 해 동안 사업에만 몰두하였다. 총명한 두뇌와 근면함, 과감한 결단력을 타고난 그는 사업으로 크게 성공하였고 번창일로를 걸으며 사회적 영향력 또한 키워 갔다. 1688년 왕위에 오른 윌리엄 3세(William III)를 지지하는 글을 발표하면서 그와 교분을 쌓을 기회를 얻은 디포는 정치 저널리스트로서의 명성을 업고 궁정에 진입했으며, 수년 동안 국왕 직속 비밀 정보원으로 활동하는 등 사업가로서 정치가로서 승승장구의 세월을 보냈다. 1692년 파산하여 막대한 부채를 지고 그 여파로 죽는 날까지 빚에 시달려야 하기는 했지만, 저널리스트로서의 능력과 정치 현안에 대한 안목은 그를 국왕의 소중한 동지로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후원자이자 동료였던 윌리엄 3세가 사망하고 앤(Ann) 여왕이 등극하여 권력의 중심이 보수파 국교도에게 이동하면서 디포는 다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는 비국교도를 핍박하는 급진 고교회파를 풍자하는 팸플릿,『국교 반대자들을 처리하는 가장 빠른 길』을 출간하였는데,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국교도, 비국교도 양측 모두의 비난과 오해를 받고 체포되어 칼을 쓰고 구경거리가 되는 수모를 당하였다. 감옥에 투옥되면서 사업이 기울고 가족들이 아사할 처지에 놓였던 이때의 참담한 경험은 이후 그가 3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온 세계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이름을 잊을 수 없게 만든 파란만장한 모험담을 쓰는 데 소재와 사상을 제공하였다. 수감 생활의 고생을 황량한 무인도 체험담으로 그려낸 알레고리적 모험담,『로빈슨 크루소』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대니얼 디포의 뉴게이트 감옥 생활은 보수당의 실력자 로버트 할리(Robert Harley) 수상의 부름으로 종료되었다. 그는 또다시 몇 달 만에 최고위 공무원으로 상승하여 비밀 정보원 및 정치 관련 저술가로 활동하는 한편, 권위 있는 정치 정기 간행물『리뷰』를 창간하고 거의 10여 년간 주도적으로 집필, 관리하였다. 1719년 디포는 자신의 기구한 삶과 그 동안의 묵상들을 한 권에 모아『로빈슨 크루소의 생애와 놀라운 모험』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으며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출간되자마자 번역, 모방, 번안의 대상이 된 이 책의 위력은 그야말로 대단하여 일명 ‘세계적인 책’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그는 연달아서『로빈슨 크루소의 또 다른 모험』과『로빈슨 크루소의 무인도 명상록』을 출간하였으며,『몰 플랜더스』,『록사나』 등 영국 소설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준 작품들을 다수 발표하였다. 보통 사람은 꿈도 못 꿀 만큼 높은 직위에서 영달을 누리고 당대에 가장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섰던 그이지만, 말년은 고통스럽고 처참한 것이었다. 그는 잇따른 사업 실패로 인한 채무와 가족들과의 불화, 심각한 건강 손실로 편치 못한 노년을 보내야 했고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한 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재능 있고 혜안 깊은 현자이자 기인이었던 대니얼 디포는 생전 그가 진술한 대로 또는 그의 대표작이 된『로빈슨 크루소』의 주인공이 대변하는 대로 참으로 우여곡절의 인생을 산 사람이었으며, 시련과 고난을 통해 인간으로서 숙고해야 할 내면의 본질을 들여다보고 복음의 위대한 진리와 무릎 꿇음의 미덕을 깨우친 또 한명의 기독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진 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