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호는 가산. 사숙에서 한학을 배우고 1913년 평창 보통학교에 입학, 1925년 경성 제일 고보를 거쳐 이듬해 경성 제대 법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했다. 이 해 동대학의 조선인 학생회 문우회에 참가하여 동회에서 발간하는 기관지 '문우'에 시를 발표하고 '매일 신보'에 시와 단편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1928년 '조선 지광'에 『기우』,『행진곡』등을 발표하고 이듬해 동교를 졸업, 1931년 잠시 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에 근무하다가 경성 농업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경성 시절을 통해 실의에 잠기기는 했으나 이 무렵부터 세상일과 인연을 단절, 본격적인 작품 생활에 전념하여 한때의 동반 작가라는 것을 청산했다. 이 해 '구인회'에 참여했고, 이 무렵『돈』,『수탉』등 향토를 무대로 한 일련의 작품을 내놓았다. 1934년 평양 숭실 전문학교 교수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창작에 전념, 1936년『분녀』를 발표하여 그 특유의 성 모럴을 제시하고 『산』,『들』과 같은 작품에서 향토적 서정이 넘치는 작품 세계를 보여 주었다. 또한 그 해 한국 현대 단편 소설의 대표작의 하나인 『메밀꽃 필 무렵』을 '조광'에 발표하였다. 1934년을 전후하여 작품 경향이 변모, 소설에 있어서 자연과 인간 본능의 순수성을 시적 경지로 끌어 올리는 경향의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37년『개살구』『낙엽기』, 1938년 『장미 병들다』등 후기에 해당하는 작품을 발표, 초기의 향토적이니 소설과는 달이 서구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작품세계를 지향하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평소 매스필드나 체호프,입센,토마스 만을 섭렵하면서 문학관의 정립을 추구했다. 『화분』같은 작품에 짙게 반영되어 있는 또 하나의 특질인 자연적인 상태의 성적 개방은 인간성에의 회귀를 의미하는데, 유교적인 상태에 유폐된 한국 소설의 차원을 넘어선 작품 세계를 보여주었다. 장편에 『화분』『벽공 무한』『창공』등이 있으나 장편보다는 단편에서 탁월한 세계를 제시, 다나편 자가가로서 뚜렷한 문학사적 위치를 차지했다. 1942년 『봄의상』『풀잎』『일요일』등의 단편을 발표한 것을 마지막으로 5월 25일 뇌막염으로 사망했다. 유해는 향리인 진부에 안장되었다. 작품에는 상기 외에 『하루빈』『약령기』『일기』『노령근해』『상륙』『북국통신』『오리온과 능금』『가을과 서정』『성수부』『성화』『북국춘신』『사냥』『석류』『천사와 산문시』『독백』『시월에 피는 능금꽃』『성찬』『마음에 남는 풍경』『삽화』『계절』『인간 산문』『가을과 사냥』『해바라기』『거리의 목가』『막』『소라』『부록』『공상 구락부』『향수』『산정』『일표의 공능』『황제』『여수』『은은한 빛』『창공』『소복과 청자』『산협』『라오 고원의 후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