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몸은 주변의 모든 것들에 익숙해져 가고 있지만, 여진의 시계는 여전히 1년 전에 멈추어져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아직도 몇몇 순간들이 실사처럼 그려지곤 했다. 동생 여정과 함께 다급히 서울을 떠났던 순간, 어슴푸레한 새벽에 탔던 첫 기차, 그리고 도착한 이 마을의 간이역.
그를 버렸던 순간, 여진은 그녀의 가슴도 함께 버렸다. 폐허가 된 가슴 밑바닥을 처음으로 쏘삭거리다가 들쑤시다가 때때로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던 남자의 체온은 이제 없다. 주제도 모르고 그가 내민 손을 덥석 잡아 버린 그녀 자신이 어리석었고 염치가 없었다는 것을 이제 안다. 모진 후회 끝에 얻게 된 값진 깨달음은 그녀로 하여금 일방적인 이별을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느끼지 말아야 할 무거운 미련 속에서, 바깥에 고정되어 있던 눈동자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주워 담을 수 없는 지나간 사랑이 뾰족한 파편처럼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를 향한 미안함과 그리움 사이에서 중심을 못 잡고 흔들리는 감정 때문에, 그녀는 여전히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1년이 흘렀다.
딸랑.
입구 문이 열리고 방울소리가 울렸다.
“어서 오세요.”
손님을 맞기 위해 기계적으로 입을 연 여진은, 황급히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 코트를 벗으려 했다. 깊은 상념에 빠진 눈빛을 손님에게 들킬까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였다.
“여전하군. 사람 눈도 마주치지 않는 거.”
팔 하나를 벗던 순간이었다. 긴 시간이 흐른다 해도 절대 잊지 못할 목소리가 온기를 다 잃은 채 건너왔다. 그리곤 여진이 차마 고개를 들기도 전에 눈앞에 고급 명함이 들이밀어졌다.
Y&T 건축사무소 소장 윤건우
“내가, 잘 찾아온 건가?”
한쪽 팔이 여전히 꿴 채 코트를 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명함 속 이름 석 자를 내려다보는 여진의 가슴이 파열음을 내며 어그러졌다. 믿을 수 없는 그 순간에, 미처 닫지 못한 쪽창에서 한 차례 이는 파도소리만이 가득 건너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