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정의 문제에서
이상 국가의 탐색까지
플라톤,
어떻게 살 것인가란
일생일대 질문을 던지다
고전의 정수, 철저히 분석하고 완벽히 재구성하다
고전을 읽어라.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말이다. 여러 언론과 대중매체들은 인문 고전의 놀라운 통찰에 대해 시시때때로 보도하며, 국내외 유명 대학들은 학생들이 읽어야 할 고전 목록을 해마다 발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고전을 집어 드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방대한 분량, 어려운 단어와 문장들, 복잡한 논리 구조, 낯선 시대 상황, 선행되어야 할 배경 지식 등을 극복할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전은 어렵다’며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간다.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시리즈가 클래식 브라운이다.
2015년 가을, 《군주론》에서 시작된 클래식 브라운 시리즈는 고전을 뜻하는 클래식과 변하지 않는 가치를 상징하는 색인 브라운을 함축하고 있다. 긴 세월 동안 고전을 연구해 온 저자들이 원전 내용을 숙고하고 철저히 분석해서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200쪽 미만의 포켓 크기 책에 담았다. 이 시리즈는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고전은 결코 어렵지 않으며, 과거를 뛰어넘어 현재 우리 삶의 문제의식에 밀접하게 연결된 콘텐츠임을 깨닫게 해 줄 것이다.
《국가》, 소크라테스와 함께하는 하룻밤의 철학 여정
“모든 서양 철학사는 플라톤 철학의 주석이다.” 현대 철학자 앨프리드 화이트헤드의 말처럼 플라톤(Platon, 기원전 427년~기원전 347년)은 인류의 사상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최고 철학자다. 그런 그의 철학을 집대성한 대표작이 바로 《국가》다.
《국가》는 어느 축제 날 저녁에 지인들과 대화하는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워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페르소나인 셈이다. 대화의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플라톤의 형제인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트라쉬마코스 등이다. 이들은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때로는 동의하기도 하고 반박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제기된 문제의식과 토론 내용이 《국가》 10권을 이루고 있다. 사람들은 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지, 공동체를 구성하는 계층은 어떻게 나누어지는지, 계층 상층부를 차지하는 수호자들의 삶은 왜 통제되어야 하는지, 가장 바람직한 국가의 상像은 무엇인지, 이상적인 국가에 필수인 정의란 무엇인지 등이 논의되는 것이다.
정의,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
하룻밤의 대화라고 믿기지 않는, 이 길고 긴 대화에서 소크라테스의 의견에 가장 크게 반격하는 자는 트라쉬마코스다. 트라쉬마코스는 정의란 지배 세력이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법과 제도로 수립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부정의를 행할 능력이 없는 약한 자들이나 남들에게 부정의를 당할까 두려워하면서 정의를 치켜세운다는 것이다. 신비의 반지를 끼고 투명인간이 된 기게스가 결국 왕을 죽이고 나라를 차지했듯이, 누구나 들킬 염려가 없다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기꺼이 부정의를 행할 것이다.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조차 소크라테스에게 세간의 평판을 떠나 정의가 그 자체로 좋은 이유를 증명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어째서 부정의가 아니고 정의인지를 입증해야 할 과제를 부여받는다. 이것은 곧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문제로 이어진다. 동시에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평생 활동을 설명해 주는 동기이자 플라톤 철학의 기본을 이루는 물음이다. 《국가》는 말한다. 사람들은 타고난 자질이, 즉 잘할 수 있는 일이 다르다. 잘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잘 해낼 수 있고, 그렇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이다.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는 이유도 공동체가 나에게, 또 모든 구성원에게 더 나은 삶을 가능하게 한다는 믿음과 연결되어 있다. 좋은 공동체란 모든 구성원들이 더 나은 삶을 살게끔 조직되고 운영되는 공동체다.
수호자들의 통제된 삶 vs. 시민들의 행복
소크라테스는 이상적인 국가의 상을 제시하기 위해 최초의 공동체부터 탐색한다.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양식, 주거, 의복, 신발이라는 네 가지 요소를 필요로 한다. 이에 이 네 가지 일을 하는 네 사람으로 조직된 폴리스가 최초의 공동체로 태어난다. 시간이 흐르고 일의 종류와 구성원 수가 늘어나면서 최초의 공동체는 교환경제의 시장을 도입하게 되고, 상인과 임금노동자 계층이 새로 만들어진다. 또한 공동체를 지키고 전쟁을 수행하는 수호자들도 필요해진다. 이로써 생산자와 수호자 계층이 형성되며, 수호자 계층은 다시 통치자와 통치자를 보조하는 전사인 보조자로 나뉜다. 플라톤의 나라는 생산자, 보조자, 통치자라는 세 계층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배 계층인 수호자에게, 소크라테스가 요구하는 책임과 역할은 엄격하다 못해 가혹하다. 수호자는 양 떼를 지키는 양치기 개와 같다. 수호자는 자신이 지켜야 할 시민에게 오히려 늑대처럼 덤벼들어서는 안 된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수호자를 잘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뿐 아니다. 수호자는 재산을 소유해서는 안 되며, 공동으로 거주하고 식사하며, 심지어 아내와 자녀들까지 공유해야 한다. 여자 수호자라고 예외는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남녀 수호자에게 이런 제한을 두는 것은 모든 것을 공유해야 그들이 나라 안의 모든 것들을 다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소중히 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시민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길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이런 구상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공격받는다. ‘모두의 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라는 현실적인 지적이다.
어디에도 없지만 늘 가슴에 새겨야 하는 나라
소크라테스가 하룻밤의 대화를 통해 세운 이상적인 나라는 구성원의 전체 영혼이, 그리고 공동체 전체가 최상의 상태에 도달하여 분별과 정의를 확보하는 나라다. 이것은 철인哲人의 통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철학자가 통치를 하거나 통치자가 진정한 철학을 하는 나라란 현실에서 과연 가능한가?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말로 세운 나라가 실제로도 존재할 수 있는지 입증하라고 강요하지 말라고 강변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말로만 존재하는 나라, 이야기 속에서나 존재하는 허구라는 뜻은 아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묻고 자신의 삶을 가능한 한 훌륭하게 꾸려 가고자 하는 모든 존재에게, 그 나라는 하늘 위에 떠 있는 막연한 이상이 아니다. 소크라테스-플라톤의 나라는 우리가 늘 가슴에 새기고 따르고자 애써야 할 모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