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진 시련을 딛고 일어선 인생 이야기
전 재무부 장관 · 전 신한은행장 이용만 일대기
◎ 도서 소개
- 국내 최초의 객관적 연구에 기반한 본격 인물 평전
- 최고의 경제경영 전문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공병호 박사 집필
- 이용만 장관의 일생을 돌아보는 평전
- 한국 경제정책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사료적 가치
한국 경제가 고도 성장의 기틀을 마련하던 시절, 남덕우 장관과 호흡을 맞춰 금융자원의 배분을 진두지휘하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정책과 기관을 만드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전 재무부 장관 이용만의 일대기를 다룬 『이용만 평전』이 출간됐다. 6년 3개월 동안 재정금융 정책의 핵심 자리에서 활동하며 산업 육성을 위한 금융 및 재정 정책에 관여했던 실무자의 증언을 듣는다는 점에서 한국 산업의 성장사를 조명하는 의의가 있는 작품이다. 국내 최고의 경제경영 전문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공병호 박사가 집필한 작품으로, 동원그룹 창업주 김재철 회장의 일대기를 엮은 『김재철 평전』에 이은 두 번째 평전이기도 하다.
이 책은 ‘공직자 이용만’에 초점을 맞춰 그의 삶을 조명한다. 그렇다 보니 대한민국 경제가 성장의 기틀을 마련하던 시절, 수많은 밤을 새면서 산업화의 대장정에서 국가 정책을 만들고, 기관과 제도를 자리 잡게 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남덕우 장관과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호흡하고 그 시대를 한껏 내달렸다는 점만으로도 공직자 이용만, 인간 이용만의 삶은 공유할 만한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시장주의가 지배적인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은 이 시대에 과거를 균형 있게 이해하고 평가하는 데는 물론, 시장경제의 기반이 매우 부실했던 시절 한국 정부가 어떤 방식으로 제도적인 틀을 만들어 오늘의 한국을 가능하게 했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귀한 자료다.
◎ 출판사 서평
전 재무부 장관·전 신한은행장 이용만
모진 시련을 딛고 일어선 인생 이야기
“내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잖아!
윗사람을 믿는 구석으로 삼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잖아!
젊은 날 나를 나아가게 하는 힘이었고, 자극이었어요.
일에 매달리는 것 이외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소.”
한국 경제가 고도 성장의 기틀을 마련하던 시절, 남덕우 장관과 호흡을 맞춰 금융자원의 배분을 진두지휘하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정책과 기관을 만드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전 재무부 장관 이용만의 일대기를 다룬 『이용만 평전』이 출간됐다. 6년 3개월 동안 재정금융 정책의 핵심 자리에서 활동하며 산업 육성을 위한 금융 및 재정 정책에 관여했던 실무자의 증언을 듣는다는 점에서 한국 산업의 성장사를 조명하는 의의가 있다. 국내 최고의 경제경영 전문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공병호 박사가 집필한 작품으로, 동원그룹 창업주 김재철 회장의 일대기를 엮은 『김재철 평전』에 이은 두 번째 평전이기도 하다.
이용만은 1933년생으로 일제 치하, 공산 치하, 해방, 6·25전쟁, 월남, 산업화의 대장정을 거치면서 공직자로 살아온 사람이다. 편안하고 아늑하고 넉넉했던 부모 슬하의 삶은 한국전쟁과 함께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열일곱의 나이에 혈혈단신 이남으로 내던져진 청년 이용만을 일으켜 세운 것은 “배움을 통해 이 땅에서 일어서고야 말겠다”라는 결의와 기백, 열망이었다. 자신의 처지를 정확하게 직시한 이용만은 ‘내 배경은 상사’라는 일념으로 스스로를 부단하게 갈고닦으면서 임무를 철저하게 수행했다. 이를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고 부지런하며 성실하고 진실하게, 잘해야 하는 일을 더 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이 책은 ‘공직자 이용만’에 초점을 맞춰 그의 삶을 조명한다. 그렇다 보니 대한민국 경제가 성장의 기틀을 마련하던 시절, 수많은 밤을 새면서 산업화의 대장정에서 국가 정책을 만들고, 기관과 제도를 자리 잡게 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남덕우 장관과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호흡하고 그 시대를 한껏 내달렸다는 점만으로도 공직자 이용만, 인간 이용만의 삶은 공유할 만한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시장주의가 지배적인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은 이 시대에 과거를 균형 있게 이해하고 평가하는 데는 물론, 시장경제의 기반이 매우 부실했던 시절 한국 정부가 어떤 방식으로 제도적인 틀을 만들어 오늘의 한국을 가능하게 했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귀한 자료다.
이용만의 인생 전편에 흐르는 메시지는 “정신이 살아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일으켜 세운 주인공의 삶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명확하다. “사람이든, 조직이든 나라든 정신이 살아 있어야 일어설 수 있다. 정신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만다.”
공직자 이용만, 그리고 인간 이용만의 인생이 의미 있는 이유 - 현대사의 비극이 담긴 가족사
- 한국 경제성장의 시기에 핵심 정책 주도한 실무자
- 부침을 거듭한 끝에 재기에 성공, 이 과정에서 보여준 이용만 특유의 리더십
성공한 기업가도 아니고 한 시대를 풍미한 정치가도 아닌 사람이 평전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공병호 박사가 공직자의 삶을 소재로 평전을 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저자는 시장의 역할을 중시하고 정부의 영향력과 규모를 줄여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자유주의 경제학자이자 작가로, 공직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런 그가 이용만이라는 사람의 일대기를 쓰기로 결정한 데는 3가지 이유가 있다. 이 3가지 이유는 이 책이 갖는 의의와도 상통한다.
첫째, 이용만이 걸어온 인생 역정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유복하게 지냈던 강원도 평강군에서의 삶은 공산당의 북한 지배와 함께 완전히 바뀌었다. 한반도의 분단과 함께 이용만은 혈혈단신으로 남한에 내팽개쳐졌고, 스스로 삶을 개척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렇듯 분단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이 고스란히 담긴 그의 가족사가 집필 이유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남한에서의 삶은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일으켜 세울 수 있는지는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그의 삶에는 극적인 면이 있으며, 그가 역경을 극복하는 과정에 감동과 감격, 교훈이 있다.
둘째, 공적인 측면에서 이용만의 활동은 기록으로 남길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산업화라는 대장정에 올랐을 때 박정희 대통령을 보필하여 나라의 초석을 닦는 데 이바지한 공직자들이 많다. 이들 가운데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인물이 재무부 장관과 경제부총리를 지낸 남덕우다. 이용만은 남덕우가 재무부 장관으로 재직하던 기간 내내 곁에서 실무 책임자로 일했다. 그는 이재과장과 이재국장으로서 남덕우 재무부 장관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필했다.
지금까지 대통령과 장관들의 회고록은 나왔지만, 실무 담당 공직자의 증언이나 회고록 성격의 책은 없었다. 특히 한국 산업화의 토대를 구축하던 시기에 대해 실무자의 증언을 듣는다는 것은 우리 경제의 성장사를 재조명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시장경제의 기반이 부실했던 시절에 한국 정부가 어떤 방식으로 제도적인 틀을 만들어 오늘의 한국을 가능하게 했는지를 엿보게 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셋째는, 그의 삶이 부침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그가 평탄하게 과장, 국장, 차관보, 차관을 거쳐 장관으로 공직을 마무리했다면 의미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등장하면서 그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옷을 벗었다. 공직자로서 치명적인 일격을 당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11년 만에 재무부 장관으로 복귀했다. 이후 또 한 번의 큰 위기가 그를 덮친다. 재기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두 번의 추락 속에서도 끝까지 완주한 그에게서 끈기와 우직함을 배울 수 있다. 게다가 그는 공직자 출신으로서는 드물게 실무 경험을 가진 사람이다. 신한은행장과 외환은행장을 거치면서는 조직을 크게 성장시켰다. 조직도 득을 보았지만, 그 역시 업계의 실상을 속속들이 아는 보기 드문 공직자로 성장했다. 머무는 조직마다 경영자로서 새로운 기록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유능한 리더라는 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요컨대 슬픈 가족사 속에서도 일군 인간 승리, 한국 경제성장의 결정적 시기에 핵심 정책을 주도한 실무자로서의 경험,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공직에서 물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재기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이 책, 그리고 이용만의 인생이 의의가 있다.
이 책의 구성
이 책은 모두 7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유년기의 추억과 공산화된 세상에서의 삶을 다룬다.
2부는 혈혈단신으로 이남에 내려와 자신의 발로 세상에서 우뚝 서는 과정을 다룬다. 1부와 2부는 한 사람의 평생을 지탱해주는 기질과 성격 그리고 태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로, 이때 만들어진 것들은 이용만의 삶을 지탱하는 기반이 되었다.
3부는 남덕우 장관을 도와 실무를 주도하던 시대를 그렸다. 이 책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하는 시기로, 한국 경제성장사에서 정부가 어떤 일을 어떻게 추진했는지 알려주는 귀한 증언들이 담겨 있다. 시장 중심의 사고가 팽배해 있는 지금,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지금의 우리를 바라볼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또한 경제성장의 초기에 제대로 된 제도와 기관을 만들어 시장이 잘 작동할 수 있도록 헌신했던 사람들의 노고를 엿볼 수 있는 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4부는 이용만이라는 리더의 개인적 자질과 리더십을 조망한다. 이를 통해 한 인간이 가진 자질이 조직을 이끄는 데 어떤 영향을 발휘하는지를 탐구한다. ‘리더를 위한 교훈’이라는 면에서 독자들에게 ‘조직을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이끌어야 하는지’를 알게 한다.
5부는 전두환 정권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야인 시절의 생활과 신한은행장·외환은행장 시절을 다룬다. ‘세상에 버릴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처럼 한 사람이 역경과 좌절을 겪고 어떻게 성장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경험들이 것들이 훗날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귀한 사례다. 예상치 못한 좌절을 맛본 사람들에 용기와 위안을 줄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6부는 공직자로서 토대를 닦았던 재무부에 장관으로 돌아와 이룬 일들에 대해 설명한다. 특히 그가 국가 경제에 기여한 결정적인 3가지를 중심으로 위기 상황에서 리더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과 지침을 보여준다.
7부는 이용만에게 어려움을 안겨주었던 정치 자금 조성 사건과 신앙 문제를 다룬다. 예민한 부분인 만큼 저자 입장에서 고민이 많았던 부분이지만 최대한 객관적으로 정리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한 인간의 역경 극복기라는 측면에서 많은 교훈을 얻기를 바란다. 근래 들어 정부 부문의 경쟁력 하락에 대한 질타가 높아지고 있는데, 초기 우리 사회를 이끈 공직자들의 헌신적인 모습에 주목했으면 한다. 무엇보다 내려갈 수 없을 만큼 바닥까지 떨어진 한 젊은이가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이야기에서 어려운 시기를 살아가는 독자들이 지혜와 용기 그리고 위안을 얻기를 바란다.
◎ 본문 중에서
그의 부친은 “부함과 빈함, 그리고 귀함과 천함은 항상 돌고 도는 것이다” “부귀영화라는 것은 한순간에 가버릴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겸손’이란 덕목이 깊이 뼛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으면 이런 이야기를 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듯이 훗날 운명이 빈부귀천의 유전(遺傳)을 보여줄지 그때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 1부 1장 ‘갈 수 없는 고향’ 중에서
1950년 10월 초순의 어느 날, 밤새 동네 경비를 서고 경찰서 내에 있던 치안대에서 잠시 눈을 붙인 다음, 학도대원 30여 명과 함께 김화읍에서 북쪽에 있는 금성 방면으로 “공비를 토벌하러 가라”는 명에 따라 출동하던 도중에 잠시 집에 들렀다. 어머니는 예감이 이상했던지 서두르는 용만을 붙잡고 떡을 먹고 가라고 말한다. 그가 받아 쥔 3개의 떡이 그의 생애에 어머니가 해주신 마지막 음식이 되고 말았다. 세월이 흐르고 또 흘렀지만, 급히 콩고물이 묻은 떡을 가져오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손에 잡힐 듯이 떠오르곤 한다.
- 1부 2장 ‘공산치하의 삶과 한국전쟁’ 중에서
“정신이 몽롱하고 아득해졌어요. 일어서서 동료들에게 ‘빨리 피신하라’고 외쳤어요. 엎드렸어야 했는데 그런 생각이 나질 않았어요. 나는 죽을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서울 게 없었지요. 총알이 내 옆으로 연신 먼지를 내면서 땅을 때리고 있던 위기일발의 순간이었지요. 18세 청년이니까 이왕 이렇게 죽는 거, 전우라도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지요.”
그때 산 밑에서 정상을 향해 사격하던 김창조 소대장이 이용만이 서서 손짓하는 것을 보고 급히 한달음에 뛰어왔다. 용만의 오른쪽 팔을 자기 어깨에 끼고서 능선 하나를 훌쩍 넘었다. 그대로 서 있었으면 몇 발 더 맞았을 위급한 순간이었다.
- 1부 3장 한국전쟁 참전과 사선을 넘어서
사람의 청년기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한 인간으로서의 특성이나 기질의 중요한 부분들이 대부분 완성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의 삶을 탐구해가면서 필자는 대학 생활에 보였던 그의 기질이나 특성이나 태도가 평생 동안 거의 변함없이 지속되었음을 확인한다. 긍정적인 특성들은 세월이 가면서 치열한 학습 과정을 거치면서 개선에 개선을 더하게 되고, 더욱더 완성도를 높여감을 확인할 수 있다. 이용만의 특성은 ‘부지런하다’, ‘끝까지 해내다’, ‘주눅 들지 않는다’, ‘두루두루 챙기다’로 표현할 수 있다.
- 2부 2장 ‘일하면서 공부했던 대학 생활’ 중에서
오래 지속되는 인간관계는 상호 존경과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이런 관계 중에서도 으뜸이 결혼일 것이다. 서로를 존경하는 마음이 없다면 결혼 관계는 오래 지속할 수 없다. 두 사람 관계의 큰 특징을 하나 꼽으라면 그것은 서로를 향한 상호 존중이다.
“아내의 희생을 기반으로 그의 성취를 만들어낸 것이기에 내가 만든 영광은 순전히 아내의 몫입니다. ‘여자는 강한 듯 보이나 실상은 약하고, 약한 것 같으면서도 강한 존재’라는 말이 내 경우에는 꼭 맞습니다.”
- 2부 3장 ‘사업과 결혼’ 중에서
1962년 6월, 세종로에 위치한 중앙청으로 첫 출근하던 날의 감격을 이용만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늦봄이 가시고 여름이 막 시작하는 날의 아침은 싱그러웠다. 첫 출근길에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북쪽에 계신 부모님께 조용히 속삭였다. “아버지, 제가 서울에 와서 중앙정부의 공무원으로 첫 출근을 합니다.” 출근하는 것을 보셨다면 부모님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흥미로운 것은 중앙 공무원으로서 그의 삶이 정확하게 한국의 경제개발계획의 시작과 함께했다는 점이다.
- 3부 1장 ‘나라 재건을 위한 시대’ 중에서
“그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명확했어요. 내자 동원을 위해 가장 효율적인 수단과 방법을 찾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1967년 7월, 이용만이 과장으로 부임한 이재2과는 내자 동원을 효과적이고 지속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우선 저축기관 추가 신설, 둘째로 저축 유인책 마련, 셋째로는 저축 홍보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당시 재무부의 이재2과는 내자 동원이란 전투의 승리를 위해 전선의 최일선에 배치된 별동대였고 이용만은 별동대장과 같았다. 당시는 한국이 수출 증가와 산업 육성에 전력투구하고 있을 때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내자 동원이었고, 이를 위해서 이재2과가 구체적인 실행 방법을 내놓아야 했다.
- 3부 2장 ‘재무관료로서의 첫걸음’ 중에서
“뭘 맡았수?”
도열한 과장들과 악수를 나누던 남덕우 장관이 던진 질문이다. “이재국 이재1과장입니다”라는 답에 “아, 그래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렇게 남덕우 장관과 상사와 부하로 만나서 한 시대의 중요한 부분을 만들어가게 된다. 1969년 10월 22일, 재무부 장관으로 취임한 남덕우는 이후 4년 11개월 동안 정말 많은 일을 해냈다. 그는 개발 시대의 경제 주역으로서 박정희 대통령을 도와 한국 경제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남덕우가 박정희를 도왔다면, 같은 기간 중에 남덕우를 도운 주요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 이용만이다. 그는 이재1과장으로서 2년 그리고 3년 5개월간 최장수 이재국장으로 재임하면서 ‘남덕우 시대’의 한 축을 담당했다.
- 3부 3장 ‘남덕우 장관과 함께한 정책’ 중에서
고전적인 덕목이긴 하지만 성실과 근면이 남덕우의 신임을 얻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남덕우는 이를 눈여겨보았고 그를 자신의 정책 수립과 집행에 야전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이용만에 대한 남덕우의 신임은 평생 동안 지속되었다. 공직을 은퇴한 이후에 남덕우가 선진화포럼을 결성할 때나 한일협력위원회 이사로 데려올 때도, 그는 “이용만 전 장관을 불러다 일을 부탁하게”라고 말했다. 그가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도 비서실장으로 맨 먼저 그를 선택하려 했다. “그에게 일을 맡기면 무엇이든 알아서 다 잘 해낸다”는 것이 남덕우의 머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 3부 3장 ‘남덕우 장관과 함께한 정책’ 중에서
원활한 대인관계는 이용만의 큰 장점이자 특기 가운데 하나인데, 이것이 꽃을 피우는 시점이 재무부 기획관리실장과 재정차관보 시절일 것이다. 그의 실력이 성과로 나타나는 시점이기도 하다. 당장 정책을 두고 국회와 언론의 협조를 끌어낼 수 있는지가 금방 드러나기 때문이다. 공직 생활을 통해 그는 국회 관계가 아주 원만한 편에 속했다. 동료나 상사가 같은 사안을 놓고 국회에 가서 대판 싸우고 돌아온 과제도 그에게 맡기면 말끔하게 해결되곤 했다. 누군가가 “당신들과 도저히 함께 못해먹겠소!”라고 판을 깨버리면 뒷수습이 이용만에게 맡겨진다.
- 4부 1장 ‘승진과 기회’ 중에서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그의 성취를 가능하게 한 개인적 자질을 다음의 15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와 지구력,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생각, 에너지를 집중시키는 능력, 타인의 생각과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감수성, 목표 성취를 가능하게 하는 수단 선택의 융통성, 필요할 때 분쟁과 대결 구도에 뛰어들 수 있는 과감함, 사람을 움직이는 능력과 동기 부여, 넉넉함과 베풂의 일상화, 탁월한 친화력과 사회성, 한시적으로 자신을 숨길 수 있는 자제력, 핵심을 정리하고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는 능력, 사람을 바라보는 따뜻한 마음, 털털함과 치밀함의 절묘한 조화, 강력한 책임감과 정면 돌파력, 확고한 국가관과 애국심
- 4부 3장 ‘15가지의 특별한 자질과 강점’ 중에서
“그곳에서부터 새로운 길이 열린다.” 전혀 예기치 않은 사건이 앞길을 막더라도 우리는 삶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 불행이 닥쳤을 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마음의 무게중심을 단단히 잡는 일이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재기할 수 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다시 일어서는 일이 쉽지 않다. 재기할 수 있는지 여부는 상황이나 환경이나 불운이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불운의 큰 파고를 헤쳐나갈 수 있는가의 여부는 그것에 맞서는 사람에게 전적으로 달려 있다. 스스로 허물어져 내리는 일에 단호히 ‘노’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거뜬히 일어설 수 있다.
- 5부 1장 ‘난데없는 해고 통지’ 중에서
그는 새로운 자리를 맡게 되면 그 자리에서 무엇을 가장 잘해야 하는지, 그것을 잘하기 위해 무엇을 공략해야 하는지 우선순위를 매기는 능력이 뛰어났다. 창구에 필요한 최소한의 인력을 제외하곤 모두 시장에 나가서 작은 선물을 나눠주며 고객을 유치한다. 그리고 자신이 갖고 있는 인맥을 총동원해서 기관 물량을 확보한다. 신세를 진 사람들은 같은 값이면 그에게 돈을 맡겼다. “사람은 인센티브에 반응한다”는 원칙도 적용했다. 수신이 중요한 회사이니 수신을 더 많이 하는 사람에게 그만큼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지금은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상여금을 차등 지급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가 가진 특유의 활력이 직원들에게 전염되기 시작한다. 보수적이고 소극적인 분위기와 만년 꼴찌라는 패배주의를 날려버린 것이다.
- 5부 2장 ‘사기업 CEO로서의 첫발: 중앙투금과 신한은행’ 중에서
“문제 없는 사회는 없고,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해결책이 시작된다.”
이용만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자 신조다. 이런 신조를 가졌기 때문에 그는 어떤 조직을 맡더라도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부하들에게 ‘저분을 따르면 우리가 승리할 수 있겠구나’라는 확신을 주는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고 문제를 직시하기 위해서는 허심탄회한 대화가 있어야 한다. 우리 조직이 어떤 문제를 갖고 있는가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답이 아니라 질문이 있어야 하고, 일방적 지시가 아니라 열린 대화가 있어야 한다. 그는 이런 원칙에 충실하게 접근했다.
- 5부 3장 ‘공적 기관의 CEO: 외환은행장과 은행감독원장’ 중에서
중요하지 않은 자리가 없지만 장관은 특별한 지위다. 국정과 관련해서 최종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아야 하고, 그중에서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알아야 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선택 가능한 수단과 방법을 충분히 검토하고 선택해야 한다. 공직을 떠난 11년 간의 현장 경험은 그가 장관직을 수행하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중앙투자금융에서는 사금융 시장, 즉 사채시장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한은행에서는 시중은행들의 제반 문제를, 외환은행에서는 국책은행들의 제반 문제를 알 수 있었습니다. 감독원에서는 감독 업무 전반을 꿰뚫어볼 수 있었습니다.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그간의 현장 체험이 금융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데 용이하게 작용했습니다. 1980년도의 해직이 저에게는 전화위복이 된 셈입니다.”
- 6부 1장 ‘11년 만의 귀향’ 중에서
1993년 2월 17일, 장관 퇴임을 열흘 앞두고 가진 《중앙경제》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퇴임의 변을 이렇게 말했다. “걱정거리였던 증권시장을 어느 정도 정상화시킨 것이 재임 중 가장 보람 있었습니다. 1989년 12월부터 증권시장이 침체해 우선 이를 살리는 것이 급했습니다. 지난해 한국은행 특별 금융을 지원하고 8·24증권시장 대책을 발표해 증권시장은 일단 안정을 되찾았다고 봅니다. 그다음으로 역점을 둔 일은 기업들의 투자 활성화를 위한 금리 인하였습니다. 1991년 말에 19%선이었던 시중금리를 12%대로 떨어뜨리는 작업이 힘들었습니다. 특히 금리를 하향 조정하는 과정에서 금융시장에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 시장 여건을 조성해나가는 일이 신경이 많이 쓰였습니다.”
- 6부 4장 ‘증시 안정화 대책과 관치 금융의 명암’ 중에서
그의 젊은 시절은 복음에 빚진 삶이었다. 대학을 다닐 때도 주말이나 주중을 가리지 않고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다. 청년회와 성가대에서 열심히 활동하면서 마음을 다잡았고, 그 마음으로 대학을 마칠 수 있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젊은 날을 이렇게 회상한다. “전쟁의 와중에 어쩌다 혈혈단신으로 떠밀리듯 내려와 젊은 시절 숱하게 많은 날 외로움에 지치고 배움을 갈망했습니다. 가족의 생사조차 알지 못한 채 향수에 몸부림친 날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빈들에 마른 풀같이 시들어버릴 수도 있었던 그의 영혼을 봄비처럼 채워준 것이 성경 말씀이었고, 교회가 지탱해주었다.
- 7부 2장 ‘은혜의 강물이 흘러 오늘까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