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기원’에서 ‘평화의 기원’으로 패러다임의 전환
한국전쟁을 둘러싼 가장 뜨거운 논쟁은 그것이 내전이냐 국가 간 전쟁이냐, 즉 누구에게 책임이 있느냐를 둘러싼 것이다. 한국전쟁의 성격에 대한 논쟁이 격렬했던 것은 이 논쟁이 전쟁의 참혹한 결과와 고통, 상흔을 전쟁 발발의 기원에 있다고 여기고 전쟁의 가공할 결과를 모두 전쟁을 시작한 ‘적들의 책임’으로 귀속시키고 ‘단죄’하고 ‘처벌’하려는 형법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형법적 정서가 전쟁의 성격과 책임 자체를 냉정하고 깊이 있게 성찰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지기보다, 어느 한쪽의 정치적 입장을 선택하고 강화하는 정치투쟁에 의해 압도된다는 것이다. 소련과 북한을 만악의 근원으로 만들려 해왔던 쪽이나, 미국의 책임에만 주목하는 입장이 이분법적 구도 안에서 국가 간 ‘비난 게임’을 강화해 온 것을 우리는 오랫동안 지켜봐야 했다. 이 책은 이런 영구 투쟁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전쟁의 기원’이라는 문제의식에서 ‘평화의 기원’이라는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제안한다. 즉 한국전쟁 자체가 처음부터 (내전이나 국제전 같은) 특정한 ‘형태’의 전쟁임과 동시에 특정한 평화 기획들과 맞물려 그 자장 속에서 전개되고 종식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연구 또한 미국의 냉전 연구, 즉 소련의 책임을 묻고 비난하는 전통주의와, 미국의 책임을 강조하는 비판적 수정주의, 그리고 탈냉전 이후 소련과 동구권 문서고의 실증적 역사 자료를 바탕으로 다시 기존의 정치적 주장들을 반박하고 수정하는 탈수정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왔다. 특히 연구들이 오랫동안 전쟁 발발의 기원 문제에 천착했던 것에는 전쟁의 책임을 둘러싼 냉전의 정치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었으며, 그 결과 한국전쟁은 국제전인가 내전인가라는 이분법적 선택의 구도로 논쟁이 주도되었다.
그 결과 특정한 평화 체제로서 판문점 체제의 제도적 ‘형태’와 ‘평화의 성격’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예컨대, 이런 질문. 한국전쟁은 왜 군사적 실무 차원의 정전 협상으로 종식되고 평화협정이 체결되지 않았는가? 이 책은 그것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진행된 전 지구적 자유주의 국제법 질서의 구축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즉, 한국전쟁을 종식시킬 평화 체제의 성격과 형태에 대한 논쟁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무조건 항복과 뉘른베르크 재판, 도쿄 재판, 그리고 유엔 헌장과 제네바 협정, 냉전과 중국의 개입 같은 무거운 국제법적 쟁점과 논란들이 연계되어 있었다. 이 책은 냉전 이전부터 형성되어 온 자유주의적 평화 기획의 장기적인 역사적 형성과 변화에 주목하며 20세기 자유주의 평화 기획을 분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