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사서관장으로 제직 중인 ‘나’는 충남 홍주 가야 서원의 서재고인 문장각 자료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아주 특별한 서적 한 권을 발견한다. 유학 장서들을 보관, 수집 장소에서 불도의 승려일지가 발견됨에 의문을 품은 ‘나’는 책의 낯선 음역에 비교종교학 전공 제자 중 고대 범어와 음성계보학 연구에 재능을 지닌 김동율 제자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김동율 또한 그 책에 강렬한 흥미를 느끼지만 번역하던 도중 의문의 죽음을 맞고 만다. 그리고 ‘나’는 그가 진행하던 범어 번역본을 확인하던 중, 낯선 이국의 서책 원본을 최초로 접하게 된 조선시대 서원의 유생 김이듭과 그를 찾아간 승려 여광이 마주한 공포에 대해 점점 그 실체를 깨닫게 되는데...
비교종교학과 신비형이상학 연구회가 밝힐 이 공포의 책의 비밀은 무엇일까?
[본문]
이것이 생의 끝에서 꾸어지는 악몽이라면 그저 깨어나고 싶단 생각이 들 뿐이었다. 죽음이든 삶이든 그런 것은 더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너는 이제 우리의 인도자가 될 것이다.”
남만 사내의 음성이 육중하게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가 산봉우리에 부딪히면서 메아리로 되돌아와 수십여 개의 소리로 분열되었다.
“너는 이제 우리의 인도자가 되어, 벌레의 시대로 가는 문을 열게 될 것이로다.”
여광은 너무나 황망한 심정으로 고개를 들어 다시 앞을 보니, 남만인이 벌레의 옆구리를 조심히 움켜쥔 채로 그것을 공중을 향해 높이 들어 눈이 깜박이지 않는 여인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여인의 눈빛은 잔인한 악의와 사악한 환희가 번갈아가며 스쳐 지나고 있었다. 벌레는 다리를 휘저으며 공중에서 발버둥을 쳤고, 몸 전체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곧장 러브 크래프트나 보르헤스를 떠올릴 수 있었다.독자들은 이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두려움과 공포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책임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