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성공의 요인을 분석할 때는 객관적 조건 또는 상황과 주관적 능력 또는 의지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과거의 대우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삼성이나 현대의 인재들보다 못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대우는 해체되었고 삼성이나 현대는 살아남았다. 인재들의 능력이 모자랐다기보다는 기업을 이끈 총수의 능력과 리더십 때문이다. 부하는 아무리 유능해도 최고결정권자의 우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임진전쟁에서 조선 수군이 ‘23전 23승’이라는 전무후무한 승리를 거둔 원인이 전선과 무기가 일본군보다 우세했기 때문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전승을 거두었지만 원균은 단 한 번의 전투에서 함대의 대부분을 잃고 말았다. 이순신과 원균이 이끈 수군이 같은 전선과 무기를 지닌 조선의 수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러한 결과가 나타났을까? 그것은 이순신은 전력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이기는 전쟁을 했지만 원균은 질 수밖에 없는 전쟁을 마지못해 감행했기 때문이다. 원균은 무작정 싸우기를 좋아하는 무모한 장군으로 알려졌지만, 그를 질 수밖에 없는 전쟁으로 몰아간 것은 수전을 모르는 군왕과 최고사령부였다. 설령 그가 무모했더라도,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일부 장수들에 비해 특별히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이순신을 영웅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그를 지나치게 폄하한 것도 사실이다. 유능한 장수는 전투에 임하기 전에 이미 이길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만든 다음에 전쟁을 펼친다. 승리를 가늠하지 못하는 전쟁터로 부하들을 몰아넣는 장수는 용감한 듯 보이지만 무능한 지휘관에 불과하다. 이순신의 위대함은 싸울 때마다 이겼다는 사실보다 완벽하다고 할 정도로 부하들을 전투에서 희생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병법의 대가 손무도 싸우지 않고 이기는 지휘관을 최고로 평가했다.
성공 여부는 객관적 조건과 주관적 능력이 적절하게 결합되었을 때 가능하다. 개인에게 객관적 상황은 자신의 노력이나 의지와 무관하다. 물론 유능한 사람이라면 그러한 상황과 조건을 만들거나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객관적 조건을 창조하기란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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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반란을 일으키자 한신은 항우를 거쳐 유방에게 투신했다. 수많은 전공을 세우고 마침내 초한쟁패전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몇 차례나 유방의 불신을 받아 병권을 빼앗겼다. 제왕에서 초왕을 이동한 그는 유방에게 잡혀 수도로 끌려가면서 ‘재빠른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삶아먹고(狡兎死良狗烹), 높이 나는 새가 잡히면 좋은 활이 창고로 들어가며(高鳥盡良弓藏). 적국이 망하면 모략가가 죽는다(敵國破謀臣亡)’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결국 유방이 진희(陳豨)의 반란을 평정하러 갔을 때 병을 핑계로 따라가지 않았다가 반란죄를 뒤집어쓰고 여후에게 잡혀 피살됐다. 중국사상 개인과 관련된 고사성어를 가장 많이 남긴 사람이 한신이다. 그만큼 관심과 아쉬움을 많이 받은 사람도 드물다. 사마천(司馬遷)은 도덕과 겸양을 닦지 않았기 때문에 공을 세우고 너무 자신만만하다가 견제를 받아 죽었다고 아쉬워했다. 그가 반란을 도모했다는 것은 날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사마광(司馬光)은 공에 비해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한 한신이 불만을 품었을 수는 있지만, 자립을 권유한 괴통(蒯通)과 공이 높으면 군주를 두렵게 하니(功高震主) 항우와 연합해 정족지세를 이루라는 무섭(武涉)의 제안을 거절한 것으로 미루어 반란을 일으킬 엉뚱한 품성은 아니었다고 변호했다. 진량(陳亮)은 한신의 사람됨을 가장 먼저 알았던 소하가 한신의 살 길을 열어주지 않은 것을 아쉬워했다. 홍매(洪邁)는 오히려 한신을 대장군으로 삼고도 끊임없이 견제한 유방에게 책임을 돌렸다. 양옥승(梁玉繩)은 밥 한 그릇을 준 할머니에게 1천금으로 보답한 사람이 옷과 음식을 나누어준 유방을 배반했을 리가 없고, 배반하려고 했다면 차라리 영포(英布)나 팽월(彭越)과 같은 대국의 왕과 결탁할 것이지 하찮은 변방의 장수 진희와 결탁했겠느냐고 반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