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혹한 혁명가이자 탁월한 국가경영자, 태종 이방원
왜 지금 그를 읽어야 하는가?
◎ 도서 소개
새로운 시각과 해석으로 다시 태어난
대한민국 정치 리더십의 고전, 『태종실록』 완역본
“책임은 곧 나에게 있다”
태종 3년, 34척의 배가 바다에 침몰하는데…
재앙을 맞닥뜨린 군주는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국가는 한 척의 배와 같아서 역량이 부족한 리더가 키를 잡으면 그 배는 침몰한다. 우리는 리더의 역량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해왔다. 리더의 역할과 덕목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한 지금, 가장 가까운 곳 즉 우리 역사에서 답을 찾을 때이다. 원대한 구상을 하고 확고하게 결의하며, 저돌적인 추진력으로 난세를 치세로 바꾼 왕이 있다. 조선의 세 번째 왕인 태종 이방원이다. 『이한우의 태종실록 재위 3년』(21세기북스)은 태종의 재위기간 18년 중 재위 3년의 기록을 완역한 책으로, 재위 3년에 있었던 정치ㆍ외교ㆍ국방ㆍ경제 등의 문제를 태종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결했는지 면밀히 알 수 있다. 예리한 시각과 올바른 해석을 통해 균형 잡힌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이해하는 동시에 태종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져주는 통찰을 발견할 수 있는 책이다. 기존의 번역을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해석을 담았으며, 실록 완역본을 처음 읽는 독자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친절하게 번역했다.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면서도 가슴 한편에 애민심을 잃지 않았던 태종 이방원의 진면목을 확인할 시간이다.
*『이한우의 태종실록』은 총 18권으로 발간됩니다.
◎ 출판사 서평
난세를 치세로 바꾼 18년의 역사, 그 치열한 기록이 펼쳐진다!
태종 이방원을 떠올리면 어떤 이미지가 그려지는가? 형제들을 살육하고 왕위에 오른 ‘피의 군주’, 조선의 설계자라 평가받는 정도전을 죽인 ‘냉혈한’… 그에 대한 이해는 즉위 이전의 비정한 면모에 머물러 있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태종의 자취를 좇는 일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오랜 기간 언론인으로 활동하던 저자는 최근 역사 저술가로서 매진하며 우리 사회의 기본을 밝혀줄 고전 번역에 힘쓰고 있다. 군주의 리더십 함양의 필독서인 『대학연의』를 비롯해 『논어로 대학을 풀다』 등 ‘사서삼경’ 등을 번역해온 저자의 시선은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는 일로 이동하여 『조선왕조실록』을 완독하기에 이르렀고, 그 성과를 묶어 『태종 조선의 길을 열다』 등 ‘이한우의 군주열전(전6권)’ 시리즈를 집필했다. 이러한 행보에서 나아가 조선의 여러 왕 중에서도 가장 먼저 『태종실록』을 번역한 이유는 그만큼 태종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큰 통찰을 주는 군주인 까닭이다.
나는 왜 『조선왕조실록』을 완독하기로 결심했던 것일까? 선조들의 정신세계를 탐구해 우리의 정신적 뿌리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물론 이런 이유만으로 방대한 실록 번역에 뛰어든 것은 아니다. 삶에 대한 그리고 세계에 대한 깊은 지혜를 얻고 싶어서다. 그런 면에서 모든 실록 중에서 『태종실록』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지혜를 담고 있다. _본문 중에서
태종은 조선 건국 과정에서부터 왕이 되기까지 냉혹한 혁명가의 모습을 보였지만, 재위기간의 기록을 들여다보면 상왕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외교 전략을 펼치고 관제개혁에 힘쓰는 등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기 위해 현실 정치의 영역에서 다양한 족적을 남겼다.
우리가 태종에 집중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조선 최고의 성군인 세종대왕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기 때문이다. 『태종실록』 곳곳에는 세종의 한글 창제의 밑바탕이 된 민본정치의 기조가 담겨 있는데, 저자는 예리한 시각으로 이러한 부분을 짚어내며 태종의 정치철학을 드러낸다. 이처럼 『이한우의 태종실록』은 세종을 비롯하여 조선 왕조 500년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태종을 적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자, 우리 역사 속에서 위기를 기회로 만든 군주의 리더십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올바른 번역, 치밀한 해석, 섬세한 역주…
우리에겐 친절한 실록 완역본이 필요하다
『이한우의 태종실록』은 실록 원문의 편년체 서술을 따라 1년 단위로 책을 구성하여 재위기간 18년의 기록을 18권의 책으로 엮는 방대한 시리즈이다. 실록을 처음 읽는 독자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문 번역 과정을 친절하게 담았고, 실록에 등장하는 인물ㆍ사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또한 기존 번역물의 오류를 바로잡고 저자의 새로운 해석을 담아냈다. 번역본과 함께 한문 원문을 책에 실었고, 독자들에게 한문 읽기의 묘미를 전하고자 ‘원문 읽기를 위한 도움말’을 통해 저자만의 번역 노하우를 소개한다.
기존의 공식 번역은 한자어가 너무 많고 문투도 낡았다. 게다가 역주가 거의 없어 불친절하다. 전문가도 주(註)가 없으면 정확히 읽을 수 없는 것이 실록이다. 특히 실록의 뛰어난 문체가 기존 번역 과정에서 제대로 드러나지 못했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이 점을 개선하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았다.
_본문 중에서
고위 공직자들의 논문 표절과 무단인용 문제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저자는 최근 연구부정행위검증 민간기관인 연구진실성검증센터에서 실시한 논문표절 예비검증에서 모범 사례로 꼽혔다. 특히 인용문 번역에 충실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번역에 대한 저자의 철학과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결과다. 『이한우의 태종실록』은 태종에 대한 탐구를 넘어『조선왕조실록』을 편집ㆍ요약본만으로 읽어온 독자들과 기존 공식 번역에 아쉬움을 느껴온 독자들 모두에게 실록을 깊이 있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역사의 진면목이 살아 숨 쉬는 우리 고전을 만나다
“이 사람은 하늘의 영묘한 기운으로 가득 찼다. 태종은 나면서부터 신령스럽고 기이했으며 점점 자라면서 영명함과 슬기로움이 출중했고 책읽기를 좋아해 배움이 날로 나아갔다.”
_본문 중에서
태종은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이면서도 오랜 시간 왕위에 오르지 못하는 지난한 세월을 보냈다. 태종 1년, 그의 행보는 ‘준비된 국왕’ 그 자체였다. 정치권력 구조를 정비했고, 등문고(신문고)를 설치하는 등 재위 원년부터 민본정치에 대한 구상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명나라 황제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은 조선의 첫 왕으로 군림하며, 태조와 정종이 이루지 못한 뜻을 이루기도 했다.
군주의 덕목은 동서양을 막론한 수많은 고전 속에 담겨 있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시기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이한우의 태종실록』은 우리의 고전에 담긴 선조들의 살아 있는 정신을 발견하고, 오늘날 우리 사회가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할 것이다.
◎ 본문 중에서
내가 실록 번역에 뛰어든 이유는 삶에 대한, 그리고 세계에 대한 깊은 지혜를 얻고 싶어서다. 이런 기준 때문에 여러 왕의 실록 중에 『태종실록(太宗實錄)』을 번역하기로 결심했다. 일기를 포함한 모든 실록 중에서 『태종실록』이야말로 어쩌면 지금의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지혜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_6쪽(‘들어가는 말’)
이번 작업에는 새로운 시도가 담겨 있다. ‘실록으로 한문 읽기’라는 큰 틀에서 번역을 진행했다. 월 단위로 원문과 연결 독음을 붙인 것도 그 때문이다. 번역문 중에도 어떤 말을 번역했는지를 대부분 알 수 있게 해놓았고 번역 단위도 원문 단위와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어떤 문장을 어떻게, 심지어 어떤 단어를 어떻게 옮겼는지를 남김 없이 알 수 있도록 해놓았다. 이를 통해 조금이라도 살아 있는 한문을 익히고 우리 역사와 조상들의 사고방식을 가까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_8쪽(‘들어가는 말’)
“너희는 짐(朕)이 즉위하게 된 까닭을 아느냐? 건문(建文)이 고황제(高皇帝)의 뜻을 돌보지 않고 마침내 숙부 주왕(周王)을 쫓아내고 골육을 잔혹하게 해쳤으며, 또 짐을 해치려 하여 군사를 일으켰기에 짐도 역시 죽을까 두려워 어쩔 수 없이[不得已]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짐은 두 번이나 화친(和親)하려고 했건만 건문(建文)이 듣지 않아 이에 군사를 들어 그 일을 꾸미는 신하들을 치고자 했다. 건문은 서로 만나기를 부끄러워하여 궁문(宮門)을 닫고 스스로 불타 죽었다. 주왕(周王)과 대신(大臣)이 짐(朕)에게 ‘고황제(高皇帝)의 적장자(嫡長子)이니 마땅히 제위(帝位)에 올라야 된다’고 하므로 어쩔 수 없이 자리에 나아온[卽位] 것이다. 애초에 어찌 (황제의) 자리를 얻는 데 뜻이 있었겠는가?”
_98~99쪽(태종 3년 계미년 4월 무신일 기사)
경상도의 조운선(漕運船)4 34척이 바다 가운데 침몰돼 죽은 사람이 대단히 많았다. 만호(萬戶)가 사람을 시켜 수색하니 섬에 의지해 살아난 한 사람이 이를 보고 도망쳤기에 쫓아가서 붙잡아 그 까닭을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도망쳐서[遯去=遁居] 머리를 깎고[薙髮] 이 고생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상이 듣고 탄식하며 말했다.
“책임은 곧 나에게 있다. 만인(萬人)을 내몰아 사지(死地)로 나가게 한 것 아닌가? 닷샛날은 음양(陰陽)에 수사일(受死日)이고, 또 바람의 기운이 대단히 심하여 행선(行船)할 날이 아니다. 바람이 심한 것을 알면서도 배를 출발시켰으니 이는 실로 백성을 몰아서 사지로 나가게 한 것[驅民而就死地]이다.”
_157쪽(태종 3년 계미년 5월 신사일 기사)
“저화를 시행하려 한다면 사섬서를 혁파하지 않는 것이 옳고, 저화를 시행하지 않는다면 쓸데없는 관사[冗官]가 되니 혁파하는 것이 옳다. 나는 저화를 시행하지 않으려고 하니 만일 나라에 이득이 있다면 내가 죽은 후[身後=死後]를 기다려 다시 사섬서를 세워도 진실로 어렵지 않을 것이다. 백성들에게 원망을 들어가며 나라에 이득이 되게 한다면 이는 진실로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지금 이후로는 크게 나라에 이익이 있고 백세(百世)라도 변치 않을 일이 아니면 신법(新法)을 세우지 말라. (중략) 오늘날의 민심으로 살펴본다면 다시 저화를 시행하는 것은 크게 불가하다. 경은 이 말로 정승에게 자세하게 고하라.”
또 스스로 탄식하여 말했다.
“애초에 저화를 만든 것은 나의 허물이다. 오히려 누구를 탓하랴?”
_324~325쪽(태종 3년 계미년 9월 을유일 기사)
“상께서 귀 밝고 눈 밝은 자품[聰明之資]으로 좋은 도리를 듣기 좋아하시니 신 등은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부지런히 하다가도 끝에 가서 게으르게 되면[始勤終怠], 다움[德]은 반드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니 청컨대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毋怠=無逸]. 상께서 청단(聽斷)하심이 귀신과 같으니 참소(讒訴)하는 말이 나올 데가 없는데 그럼에도 참소하고 아첨하는 사람[讒諂]은 옳고 그름을 바꿔서 어지럽히고[變亂] 틈을 보아서[見隙] 나아오니 청컨대 이를 조심해야 합니다.”
상이 박석명 등에게 말했다.
“너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상서(尙書)-서경』 일부(一部)는 진실로 그때의 임금과 신하가 서로 경계한 말일 것이야!”
김과(金科)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상이 말했다.
“이제서야 『서경(書經)』의 글맛이 좋다는 것을 더욱 잘 알겠도다.”
_458~459쪽(태종 3년 계미년 윤11월 병인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