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벼룩에서 인공지능까지
철학, 과학, 문학이 밝히는 생명의 모든 것
연세대학교 학생이라면 꼭 한 번 듣는 명강의 〈위대한 유산〉
인간을 살아 있게 하는 생명이란 무엇인가. 문학, 철학, 자연과학의 눈으로 보는 인간과 생명의 비밀
인간의 유전정보를 정확히 알아낸 지금, 이를 수정하고 개선하여 슈퍼맨을 만들 수도 있는 아주 낯선 미래가 다가오고 있다.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였고, 이제 무엇이 되려고 하는가. 3000여 년 시공을 관통하는 위대한 질문과 탁월한 대답. 인간과 생명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열린다.
◎ 도서 소개
연세대학교 학생이라면 꼭 한 번 듣는 명강의 〈위대한 유산〉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중세의 신학, 다윈의 진화론과
인공지능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생명과 영혼을 찾아 떠나는 여정
“나는 누구인가?”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인간의 본질을 물었고 ‘생명’은 철학과 예술의 으뜸가는 과제로 자리 잡았다. 생명의 신비를 영혼의 존재를 통해 이해하려 했던 고대와 기독교 신학에 의지해 생명체의 질서를 규정하고 해명했던 중세를 지나 오늘날 우리는 진화와 유전자를 통해 생명의 비밀을 파헤치고 있다. 흔히 진화론 하면 다윈을 떠올리지만, 고대 그리스의 엠페도클레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생명체가 어떻게 탄생해서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는가를 탐구했던 진화론의 선구자들이었다.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생명의 본질을 해명하기 위해 부단히 사색하고 연구하며 새로운 전망을 열어온 것이다. 이제 우리는 생명을 ‘이해’하는 단계를 넘어, 자신의 유전정보를 정확히 읽어내 원하는 대로 개선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했다. 유전병을 예방하는 차원을 뛰어넘어 수려한 외모와 강인할 체력, 뛰어난 지능을 지닌 맞춤형 인간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유전자 변형과 더불어 인간의 지적 능력을 능가하는 인공지능의 등장은 눈앞의 현실이다. 인간보다 훨씬 강하고 빠를 뿐만 아니라 지능까지 뛰어난 로봇이 등장한다면 과연 우리와 공존할 수 있을까? 혹여 인간을 멸종시키려 들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는 열지 말아야 할 상자를 열어버렸는지도 모른다. 특별한 피조물인 인류는 스스로 ‘창조주’가 되려는 문턱에서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철학, 문학, 생물학을 전공한 지은이들은 각자의 영역을 넘나들며 수천 년 인류의 발자취를 되짚으며 인간과 생명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어디서 왔고 지금 어디에 있으며 앞으로 어디로 나아갈지를 함께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육체와 영혼의 알레고리
미국의 의사 던컨 맥두걸은 정밀한 저울을 사용해 사람이 죽어 영혼이 몸을 떠난 순간 몸무게를 재보았다. 죽은 후에는 살아 있을 때보다 21그램이 적었다. 그렇다면 영혼의 무게는 21그램인가? 우리 몸무게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2퍼센트에 불과한 뇌와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지도 않고 무게를 가늠할 수도 없는 영혼(맥두걸에 따르면 21그램)은 ‘인간의 거의 모든 것’이다. 영혼, 즉 생명이 없는 인간의 육신은 단순한 물질일요 허깨비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이 죽으면 영혼이 감옥이나 다름없는 몸에서 빠져나가 지하세계로 떠난다고 믿었다. 또 영혼은 불멸하며 죽음을 통해 육신에서 해방되면 새로운 몸을 입어 다시 태어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믿음은 중세 천년에도 근본적으로 변함이 없었으며 철학과 문학, 예술의 영원한 테마가 되었다. 하지만 두 번째 밀레니엄을 열어젖힌 오늘날에도 우리는 호모사피엔스의 ‘찬란한 불꽃’, 영혼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단지 신화로 이야기하고 시로 노래하며 그림으로 묘사할 뿐이다. 대신 영혼의 또 다른 짝이자 생명의 담지자인 인간의 육체에 대한 탐구는 비약적으로 발전해 이제 거의 모든 비밀을 풀어냈다.
인간은 신이 될 것인가, 프랑켄슈타인이 될 것인가
인간이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했다는 진화론은 놀랍게도 고대 그리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또 DNA를 비롯한 생명공학의 중요한 아이디어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이미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원자라는 개념을 제시했고 원자 하나하나가 모여 더 높은 수준의 기관, 생명체가 된다는 이론을 내놓은 고대인들은 당대의 ‘화학자’들이었다. 사실 엠페도클레스와 아리스토텔레스는 위대한 진화이론가들이었으며 다윈조차 “린네와 퀴비에는 내게 신이지만 그들도 아리스토텔레스에 비하면 어린아이에 불과하다”고 털어놓았을 정도였다. 17, 18세기 과학혁명, 19세기 찰스 다윈의 업적에 의해 자신이 진화해온 궤적을 밝혀낸 인류는 20세기에 이르러 마침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히고 말았다. 2000년 인간유전체사업을 완료해 인간 DNA를 이루는 30억 개의 염기쌍을 모두 해독해낸 것이다. 30억 개의 알파벳으로 쓰인 23장(인간 염색체 23쌍)으로 구성된 책 한 권을 완독한 셈이다. 이제 인간은 원하는 유전체를 설계하고 합성하여 다른 생명체에 이식해 맞춤형 생명체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공상과학영화가 ‘실화’가 될 날이 멀지 않았다. 또 한편 위험하고 더러운 일을 대신 처리하는 ‘일꾼’ 로봇을 넘어 인간보다 뛰어난 지능을 가진 수준 높은 로봇을 만들어내고 있다. 인간의 위대한 영감과 창조성을 상징하는 게임의 하나였던 바둑의 절대고수조차 ‘인공지능’에 압도적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이처럼 아주 낯선 미래에 맞닥뜨린 우리에게 인간과 생명은 여전한 수수께끼이고 비밀을 풀어낼 열쇠이다. 인간의 욕망은 제약이 없고 과학기술은 맹목적으로 나아갈 뿐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진정 고귀하고 참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우리는 무엇을 지향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궁그해야 한다. 인간과 세계의 파멸을 막기 위해서라도 과학과 철학, 도덕과 윤리의 대화와 소통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인간은 완전할 때는 모든 동물 가운데 최선이지만 법과 정의에서 일탈하면 최악이기 때문이다.
◎ 책 속에서
그렇다면 다윈 이전에는 생명계의 모습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서양에서는,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생명의 세계가 사다리 모양을 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맨 밑에는 물, 불, 흙, 공기 와 같은 생명 없는 물질들이 있고 그 위에 식충류나 해면 같은 하등 생명체들이 자리 잡고 있고, 이어 곤충, 어류, 조류, 포유류, 인간이 윗자리를 차지하면서, 모든 생명체가 하나의 사다리 구조를 이룬다고 보았지요. 이에 따르면 사다리의 각 단계는 서로 분명히 구별되는 하등/고등 생명체로 구성되지만 이는 진화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게 아니라 무시간적으로 고정된 것입니다.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체계화된 생각이고, 이 생각이 기독교 세계관에도 받아들여지면서 거의 2000년 동안 서양의 생명관을 지배해왔습니다.(26~27쪽)
기원전 6세기에 접어들면서 ‘철학자’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보통 ‘자연철학자들’이라고 불립니다. 그리스 최초의 철학자들에게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자연physis’이 그들의 주된 관심사였기 때문입니다. 호메로스를 비롯한 그 이전 사람들이 제우스, 포세이돈, 아폴론 등 신들의 모습과 작용에 관심을 두었던 ‘신학자들theologoi’이라면, 자연철학자들은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데서 신적인 것을 배제하고 자연을 그 자체로서 이해하겠다고 선언한 사람들입니다. 런 뜻에서 철학사가들은 그들을 ‘피시올로고이physiologoi’라고 부릅니다. 그리스어 ‘피시스physis’는 ‘네이처nature’를 뜻하거든요. 피지션physician, 피직스physics, 피지올로지physiology, 이런 낱말들이 모두 ‘피시스’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피시스’는 여러 가지 뜻으로 쓰입니다. ‘자연적인 생성’, 불의 뜨거운 성질이나 돌의 무거운 성질 같은 ‘자연적 성질’, 자연적 성질들이 발휘하는 ‘자연적인 힘’, ‘자연의 질서’, 전체 ‘자연 세계’, 자연 안에 있는 자연물들, 이 모든 것을 가리키는 용어가 바로 피시스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철학이 시작될 때 철학자들이 한 일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피시스의 발견’, ‘자연의 발견discovery of nature’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53~54쪽)
천지를 창조한 신이 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기독교 신학자들은 신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세 가지 특징을 옴니omni, 모두라는 말을 이용해서 만들어냅니다. 신은 ‘전능omnipotent’하고 ‘전지omniscient’하고 ‘전재omnipresent’하다. (98쪽)
중세인들의 시간관을 살펴볼까요? 중세인들의 하루는 분초를 다투며 치열하게 일에 매진하는 우리의 하루와는 달랐습니다. 당시 서구의 모든 사회가 교회를 중심으로 움직였는데, 중세인들은 교회와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며 살았습니다. 그들의 시간은 교회의 시간과 다르지 않았지요. 당시엔 자연조명 밖에 없었기 때문에 5시, 6시쯤 되면 깜깜해집니다. 그러니까 종이 치면 집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지요. 그게 중세인들의 일상이었고 이런 삶은 매일 똑같았습니다.
그런데 14세기 들어 이탈리아에는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도시의 주요 광장에 자리 잡은 성당들에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거대한 탑시계들이 설치되기 시작하지요. 탑시계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도시 곳곳에서 시계 수요가 급등하면서 모래시계, 기계화된 시계가 속속 등장하더니 중세 유럽 전역으로 퍼집니다. 탑시계, 기계화된 시계의 등장은 인간의 의식을 바꾸는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교회 종소리에 따라 반복되던 하루가 정확히 24시간으로, 한 시간은 60분으로, 1분은 60초로 쪼개지면서 분초를 다투는 삶이 문을 열었지요. 어찌 보면 인간이 굉장히 불행해진 순간이기도 합니다. 하루가 조각조각 나뉘면서 인간은 시간에 쫓기게 된 것이죠. 이 또한 기계화되어가는 인간의 의식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122~123쪽)
문제는 과학이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매우 실용적인 지식을 제공하지만, 우리가 던지는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왜 태어나야만 했는가?”라고 물으면, 쓸데없는 질문이라고 일축해버리는 과학자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과연 과학적으로 의미가 없는 그래서 비과학적인 질문은 무의미한 걸까요? 과학이 답을 할 수 없을 뿐, 우리에겐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질문을 ‘궁극 질문’이라고 합니다. 과학은 보통 궁극 질문을 다루지 않습니다. 바로 앞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보면 어떨까요? “우리는 어떻게 태어났을까?” 이런 질문을 ‘근접 질문’이라고 하는데, 과학은 주로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과학자들은 가용한 모든 정보와 실험 결과, 관찰을 근거로 가설을 세우고, 이를 검증하기 위해 실험을 하고 또 다른 관찰을 하기도 합니다. 검증 과정에서 가설이 맞지 않으면 폐기되거나, 수정· 보완되어 다음 검증을 받게 되지요. 이런 과정에서 가설이 살아남아 계속 다듬어지면 이론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142~143쪽)
과학에서 말하는 이론이란, 수많은 증거를 토대로 더 완벽한 이론이 나오기까지 사실로 인정받는 지식의 체계를 말합니다. 진화이론은 명백한 과학 이론입니다. 개인의 성향에 따라 진화론이 좋거나 싫을 수는 있겠지만 무조건 진화이론을 부정하려는 태도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과학이라는 잣대로 다른 사람의 종교적 믿음을 비웃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요. 소모적인 논쟁보다는 열린 자세로 논리적이고 건설적인 비판을 통해 서로 약점을 보완하면서 진리를 찾아가는 데 힘을 합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75쪽)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은 ‘영혼psychē’에 대한 논의에서 시작합니다. 물론 그가 말하는 ‘영혼’은, 곧이어 이야기하겠지만, 뭔가 신비한 것이 아니라, 영양 섭취, 생식, 감각, 운동 등과 같은 동물의 생명 능력 전체를 아우르는 낱말입니다. 영혼에 대한 연구에 이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의 다양한 기능들이 어떤 신체 기관을 통해서 수행되는지 연구합니다. (210~211쪽)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을 “잠재적으로 생명을 가진 자연적인 물체의 첫째 현실태”라고 정의합니다. 『영혼론』에 나오는 영혼에 대한 유명한 정의입니다. (215쪽)
하지만 다윈의 모델, 헤켈의 모델, 굴드의 모델 등 어떤 모델로 진화 과정을 설명하건 한 가지 점은 변함이 없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공통의 유래를 갖는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이나 말미잘이나 해면이나 멍게나 개불이나 모두 공통의 유래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인간과 다른 동물 사이에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 차이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 이르게 됩니다. (247쪽)
그런데 영혼의 무게를 잴 수 있다면 영혼이 비물질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떤 때는 영혼이 육체와 완전히 분리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둘이 하나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육체와 영혼이 하나가 아니고, 죽음이 육체에 의해 감금당했던 영혼을 해방시킨다는 믿음은 육과 영의 이원론body and spirit dualism이라 불립니다. 반면 육체와 영혼이 분리될 수 없다는 사상은 물질적 일원론materialist monism이라 하지요. 물질적 일원론자는 영혼이 비록 비물질로 보일지라도 물질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물질의 순도가 너무 높아서 그렇지 않게 보일 뿐이지요. 이 생각을 끝까지 따라가면 사람이 죽을 때 영혼과 육체가 둘이 아니므로 육체이자 영혼이 죽는다는 모탈리즘mortalism이라는 극단적인 견해에 이르기도 합니다. 일원론 대 이원론의 논쟁에서 이원론이 승리하지만 어느 영향력 있는 시인이 일원론적인 우주관을 드러내는 작품을 내놓아 부지불식간에 세상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그 작품이 밀턴의 『실낙원』입니다. (255~256쪽)
밀턴의 우주는 만물이 각자의 역할과 생을 착실하게 수행하고 살아갈 때 본연의 방향, 즉 상향 이동이 가능하다는 면에서 중세의 고정된 우주와 차이를 보입니다. 또한 창조된 모든 것은 때가 되면 소멸하는데 이는 신(의 물질)에게 회귀하는 것으로서 이 역시 상향입니다. 단 하나의 전제가 있으니 바로 “선으로부터 타락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260~261쪽)
프랑켄슈타인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만 막상 메리 셸리의 원작 소설을 읽은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잘못 알려진 것이 있지요.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이름이 아닙니다. 괴물을 창조한 사람 이름이 빅터 프랑켄슈타인이고 괴물은 그냥 ‘그것’으로 지칭됩니다.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이름으로 둔갑하고 만인은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이지요. 다시 원작으로 돌아가서, 소설의 괴물은 이름이 없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이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기 때문이죠. 소설 속에서만 일어난 일이지만 인간이 역사상 처음으로 창조한 것이 창조자로부터 외면당하고 정당한 존재로 인정받지 못한 것입니다. (304쪽)
최초의 공상과학소설을 쓴 메리 셸리의 비전은 무엇이었을까요? 과학이 약진함에 따라 물리, 화학적으로 설명이 되는 세계, 하나의 기계처럼 돌아가는 세계 속에서 인간조차도 배터리에서 공급되는 전기에 의해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존재라면, 인간은 과연 무엇인가? 프랑켄슈타인의 목적이 인간의 ‘창조’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온전한 시체에 생명을 불어넣었다면 그것은 창조가 아닌 부활이었겠지요. 창조를 위해 여러 사체에서 필요한 부분을 모아 ‘그것’을 만들었다는 점. 소설에 나오는 이러한 암시들은 인간이 결국 여러 부품으로 이뤄진 움직이는 기계일 뿐이라는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메리 셸리는 과학 발전과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기계화 사이의 상관관계를 포착한 것 같습니다. (312~313쪽)
지금까지 했던 이야기에서 드러나듯이 나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은 동서양의 현자들에게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물음이었습니다. 탈레스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지요. 기원전 6~7세기에 살았던 탈레스는 ‘서양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이에요. 그는 이 세상 만물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질문을 던졌고, 물이 모든 것의 원리라고 대답했지요. 탈레스의 지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일화가 있는데, 어떤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무엇인가라고 묻자 탈레스는 “남에게 충고하는 것”이라고 대답했지요. 남에게 충고하는 것, 훈수 두는 것만큼 쉬운 일이 어디 있겠어요? 바둑에 문외한인 나 같은 사람도 이세돌이 바둑 두는 데 훈수를 둘 수 있어요. 그다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자 탈레스는 “나 자신을 아는 것”이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2700여 년 전의 탈레스에게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나 내가 무엇인지 아는 일은 가장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364쪽)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과거 경험을 상상의 재료로 삼아서 미래를 계획한다고 말하면서, ‘상들similitudines’이라는 낱말을 쓰는데, 결국 미래에 대한 상상은 과거의 경험들을 재료로 삼아서 이루어지는 ‘시뮬레이션simulation’이 되겠지요. 현대 심리학은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계획이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새롭게 발견한 사실처럼 내세우지만, 그런 사실은 이미 고대와 중세의 철학자들이 누누이 반복해서 강조했던 것입니다. (402~403쪽)
다른 동물들의 경우와 달리 인간에게는 이성적 확신에 의거해서 본성과 습관을 넘어서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인간 사회의 뿌리 깊은 악, 그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간을 단순히 생물학적 존재로 여기는 관점은 인간 사회에서 빚어지는 수많은 악의 현상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인간이란 완전해질 때에는 모든 동물 가운데 최선이지만, 법과 정의로부터 일탈할 때에는 최악입니다. 인간에게는 이런 양극의 가능성이 존재하고, 이 양극의 가능성은 인간이 이성적인 동물, 즉 호모사피엔스라는 데서 유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축복일까요, 저주일까요? 아무쪼록 이 강의가 인간으로서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우리가 지향할 만한 최선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4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