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뉴욕의 사회개혁은 이 책 한 권으로 시작됐다!
130년 전 뉴욕 빈민가를 사진에 담아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고전
사회운동가이자 포토저널리즘의 선구자, 제이컵 A. 리스
세기의 전환기 어두운 뉴욕에 빛을 비추다
130년 전 뉴욕의 빈민가 탐사보도
130여 년 전 뉴욕 인구의 4분의 3이 거주한 공동주택. 뉴욕 맨해튼 동쪽 지구인 이스트사이드는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과밀한 지역이었는데, 2.6제곱킬로미터당 29만 명이 거주하는 전례가 없는 밀도를 보였다. 여의도(약 2.9제곱킬로미터)에 세종시 인구(약 28만 명)가 밀집해 있었던 셈이다. 상업이 번창하고 도시가 급성장하면서 빈민에게 필요한 주택은 정작 부유한 이웃의 사업 기회가 되었다. 낡고 허름한 집이 돈벌이의 수단이 된 것이다. 새로운 기회를 찾아 낯선 곳에 발을 들인 각국의 이민자들은 도시 빈민으로 전락했고, 그들이 모여 군락을 이룬 공동주택은 노동 착취와 도덕성 타락의 메카가 되었다. 통풍구, 화재시 대피로 등 안전과 위생에 필수적인 시설이 누락된 집에서 그들은 비참하고 야만적인 생활을 이어갔다.
제이컵 A. 리스의 글과 사진은 이 음습한 공동주택의 주거 환경을 소재로 삼는다. 저녁 시간도 없이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노동 착취의 현장, 가족은 물론이고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갱단이 되어가는 부랑아들의 골목, 사회정의 실현보다는 선거 승리에 혈안이 된 정치인들이 빈민과 부랑아들의 표를 헐값에 매수하는 싸구려 숙박업소…… 공동주택의 원죄가 저자의 탐사보도로 드러난다.
공장의 법정 노동 시간은 10시간, 늦어도 9시에는 공장 문을 닫는다. 최소 45분은 저녁식사 시간으로 허용되어야 하고, 16세 이하 청소년은 영어를 읽고 쓸 수 없으면 고용될 수 없다. 14세 이하는 무조건 고용을 금한다. 이러한 규정들이 법령집에 등재되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노동자의 환경이 얼마나 열악한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공동주택은 법의 관대한 목적을 좌절시킨다. 이 내부에서 어린아이는 실을 잡아당길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부터 아무런 제지 없이 일을 시작한다. 저녁 시간 같은 것은 없다. 남자든 여자든 일을 하는 중간에 끼니를 때우고, 노동 시간은 밤늦게까지 연장된다.
_제11장 유대인 거주지의 노동착취자
고군분투하는 이민자들의 민족지
미국은 구대륙의 빈곤과 신분적 한계를 벗어나 새로운 삶을 일구고자 몰려든 이민자들이 세운 ‘꿈의 나라’였다. 동시에 ‘뜨내기의 나라’이기도 했다. 1812년 전쟁 이후 유입된 대규모 이민으로 10만 명 남짓했던 뉴욕의 인구는 35년 만에 50만 명에 육박했다. 하지만 자유와 성공의 기회를 얻기까지 이민자들은 너무나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들 대부분이 공동주택으로 흘러들어갔으며, 나중에 온 이민자는 먼저 자리잡은 이민자와 치열하게 경쟁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저자는 뉴욕 뒷골목의 공동주택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다양한 민족의 고군분투 현장을 세세하게 그려낸다.
저자에 따르면, 독일인 이민자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공동주택을 최대한 활용해 돈을 웬만큼 모으면 그 즉시 공동주택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체코인은 유난히 거칠고 매력이 없는 언어와 폭력적이라는 부당한 선입견 때문에 철저히 고립된 채 노예처럼 담배 만드는 일로 생계를 겨우 이어간다. 중국인들은 세탁업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이질적인 종교적·문화적 배경 때문에 문을 걸어잠그고 아편에 중독되어간다. 한편 이탈리아인들은 천재적인 브로커다.
이탈리아 이민자들은 매번 좋은 급여를 받게 해주는 브로커에게 의존해야 했다. 브로커들은 이탈리아인을 철도 건설업에 취직시켜준 뒤 고용주와 이민자 양쪽으로부터 수수료를 그것도 다달이 받아 챙겼고, 심지어 마음대로 해고까지 일삼았다. 시내에서는 이민자와 숙박계약을 맺고 최악의 셋방을 아주 비싼 월세를 받고 제공했고, 이런 행태를 모방하는 예가 많았다.
_제5장 뉴욕의 이탈리아인
위대한 기록자이자 위대한 개혁가
제이컵 A. 리스의 사진과 글은 사회개혁에 대한 강렬한 열정과 목적 속에서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그의 글과 사진은 학문적 성취나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자 한 것이 아니라 사실적 증거 자료 수집, 사회 실태의 고발에 목적을 둔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와 같은 뚜렷한 목적의식 덕분에 감정에 호소하는 대상과 일정한 거리 두기가 가능해졌고, 대상에 대한 열의와 사회정의에 대한 열정 덕분에 그의 글과 사진에서는 인간적인 이해와 감동이 묻어난다. 대중의 시대에 그의 책 『세상의 절반은 어떻게 사는가』는 여론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고, 실질적인 정책 변화를 이루어내는 데 성공했다.
19세기 말 미국에서 출간된 이 책이 21세기 한국에서 어떤 의의를 지닐 수 있을까? 우선 도시 빈민의 비참한 삶이 그들의 태생적인 성품이나 나태 탓이 아니라 정치·경제·사회적 조건이 빚어낸 결과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앞서 보았듯 각 민족의 성향을 세세히 언급한 것도 문제의 원인은 빈민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 여건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대의 지식인이나 사회가 무관심했던 ‘세상의 절반’이 ‘어떻게 사는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 책은 또한 오늘날 다큐멘터리 사진의 토대가 되는 사실상 최초의 작품집으로 여길 만한 가치를 지닌다. 저자는 누구도 보고 싶어하지 않는 도시의 뒷골목, 어두컴컴한 치부를 찾아 기록으로 남겼다. 비참한 그들의 삶은 전시되어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탐욕이 인간의 삶을 어디까지 파괴할 수 있는지 폭로한다. 우리는 19세기 말에 출간된 이 책 『세상의 절반은 어떻게 사는가』를 ‘역사적 원전’으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현실을 뼈아프게 고발하는 책’으로도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