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씬함의 숭배에서 나노 과학까지,
가벼움의 혁명이 이끈 새로운 시대는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가?
— 이 시대를 지배하는 모티프가 된 가벼움의 문명에 대한 철학적이고 사회적인 진단
우리는 ‘가벼움’이 지배하는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 가벼움의 시대는 이제 겨우 시작되었을 뿐이지만,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영역을 확장해 가면서 새로운 위업을 달성하고, 새로운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가벼운 것의 하이퍼모던한 혁명은 날씬함에 대한 숭배에서 가벼운 먹거리에 이르기까지, 활강스포츠에서 긴장 해소 테크닉에 이르기까지, 패션의 경향에서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이르기까지, 클라우드 컴퓨팅에서 바이오테크놀로지에 이르기까지, 나노 물체에서 첨단 기술 제품에 이르기까지, 이질적이고 다양한 형태의 수많은 장치를 통해 진행된다. 가벼운 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침투했으며, 우리의 상상세계를 뒤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하나의 가치와 이상, 중요한 명령이 되었다.
《텅 빈 것의 시대》, 《패션의 제국》, 《사치의 문화》 등 대중문화에 관한 신선하고 도발적인 주장을 담은 책으로 주목받은 프랑스 철학자 질 리포베츠키의 신간 《가벼움의 시대: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가벼운 것의 문명》은 ‘가벼움’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우리 시대를 해석하려는 중요한 첫 걸음을 내딛는 책이다. 저자는 ‘가벼움의 문명’을 분석함으로써, 일상의 삶을 점점 더 무거워지게 만드는 이율배반적인 현실을 밝혀내고자 한다.
몸과 패션, 예술과 과학, 건축과 디자인을 넘나들며
가벼움의 시대를 조망하다
질 리포베츠키는 그 동안 다양한 저서를 통해 우리 시대의 문화의 역사적이고도 사회적인, 그리고 철학적인 의미를 탐구해왔다. 기존 저작들은 모두 저자 자신의 직관을 뒷받침할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했다. 《가벼움의 시대》 역시 자신의 통찰을 뒷받침하는 풍부한 사례를 소개했으며, 이러한 사례는 그 자체로 책을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저자는 소비 세계와 몸을 이용한 행위들, 디지털 혁명, 패션, 예술, 건축과 디자인, 정치와 교육 분야를 탐험한다. 이러한 탐험들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가 어떻게 가벼움의 혁명으로 이끌렸는지를 세심하고 명확하게 보여준다.
인상파가 가져온 가벼움의 미학, 예술과 관계 맺기의 변화
빛이라는 비물질적 현실과 그것의 반짝거림, 그것의 일정하지 않은 파동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 인상파에서 시작된 가벼움의 예술은 기존 무거운 회화적 구성과 그 강한 표현력의 시대에 종언을 고했다.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가 “부르주아의 우둔함”이라 부른 회화 세계의 틀에 박힌 관습과 장중함, 부담감을 버리고 가벼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방가르드와 키치를 거쳐 현대 예술을 마주한 우리는 ‘흥미로운’ 뭔가를 발견할 뿐이다. 이러한 감정은 사실 심오함이나 지속적 효과 없이 금세 사라지는 호기심에 불과하다. ‘흥미로운’ 예술의 시대는 곧 가벼운 것과 예술이 맺는 관계의 시대이며, 삶에 실제로 아무 힘도 미치지 못하는 일시적인 감정의 시대일 뿐이라고 저자는 분석한다.
가벼움의 시대, 우리의 몸에 명령을 내리다
가벼움의 시대는 우리의 몸에 새로운 명령을 내린다. 가벼움의 시대는 “어디서나 기름진 음식을 피하고, 몸을 유연하게 만들고, 납덩이처럼 몸을 짓누르는 육체성에서 벗어나”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명령은 크고 작은 개인적 비극을 불러일으키고 우리의 정신을 무겁게 만든다. 몸에 가해지는 날씬함의 이상은 그들이 자신의 외모에 대해 부정적인 판단을 하고, 자기가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든다. 몸무게를 가볍게 만들어야 하는데, 결과적으로 삶 자체의 무게는 무거워지는 것이다. 가벼운 것의 문명이 가벼운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감정의 가벼움, 쿨(cool)의 문화
삶을 가볍게 한다는 현대의 계획은 물질적인 생활의 변화를 넘어 함께 살아가는 방식, 사람들의 감정, 사회화와 개인화의 형태에도 큰 변화를 불러왔다. 금지와 터부의 중압감을 떨쳐 버리는 것, 우리 좋을 대로 육체적 쾌락을 즐기는 것,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초연하고 더 유연하게 사는 것, 즉 존재의 가벼움은 하나의 갈망이, 하나의 민주적이며 대중적인 에토스가 된 것이다. ‘가벼운 동거’와 같은 제3유형의 커플들은 사랑과 같은 감정에 새로움을 가져왔다. 감정이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긍정적인 측면을 보여준다. 함께 살고 싶은 사람을 선택할 수 있고, 계약연애를 ‘시험’해 볼 수 있으며, 마음대로 관계를 끝낼 수 있고, 불행한 결합에서 빠져나오더라도 그것을 ‘영원히’ 견뎌 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가벼움의 혁명은 양날의 칼과도 같다. 왜냐하면 개인주의적 자유는 파괴할 수 없는 관계를 끝냄으로써 불안정한 감정과 내일에 대한 불확실성,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그 속에 품기 때문이다. 우리를 사회적 억압의 무게에서 벗어나게 해주어야 하는 것이 오히려 반복되는 실패와 고독으로 더 무거운 짐을 안겨 주었다. 우리는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보다는 존재의 고독이 불러일으키는 중압감에 더 시달린다. 유동성으로서의 가벼움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내적 가벼움은 그렇지 못했다.
가벼움의 문제를 다시 한 번 고민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가벼움에 대해 정치적•도덕적 찬양도 하지 않고, 비난도 하지 않는다. 가벼움은 어떤 미덕이나 악덕으로 분석되는 것이 아니라 하이퍼모던 시대에 엄청난 중요성을 띠는 하나의 인류학적 요구로서, 사회조직 원리로서, 미학적이며 기술적인 가치로서 분석하고 있다. 가벼운 것들이 이렇게 우리의 일상생활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유효한 것으로 만드는 이 뚜렷한 징후들의 총합이 그렇다고 해서 이 가벼움의 어두운 이면을 보호해주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모든 것이 유연하다면 삶도 역시 “방향을 잃고, 불안정하고, 매우 취약하다”고 말한다. 쾌락에 대한 찬가가 급증하지만 또 한편으로 “불안과 우울증도 증가한다”. 가벼운 장치들의 급증이 성과우선주의의 폐해인 불쾌감과 스트레스, 자존감의 훼손을 막지는 못한다. 저자가 ‘가벼운 것’을 통해 드러내려는 것은 바로 이 패러독스다. 가벼운 것의 혁명은 계속되지만, 우리 삶의 조화는 발견할 수가 없다. 이 혁명은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해주지는 않는 것이다. 모든 것은 유동적이지만, 각자는 부족한 시간을 좇아다닌다.
우리는 행동의 가벼움에서 많은 것을 얻었지만, ‘내적 가벼움’에서 많은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 저자는 “우리는 가볍게 사는 것의 어려움을 그 어느 때보다 절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 시대의 위험은 변덕스러운 가벼움이 아니라 가벼움의 ‘비대함’이다. 즉 가벼움이 삶에 침투하여 삶의 다른 본질적 차원(성찰, 창조, 윤리적•정치적 책임)을 억누르는 방식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질 리포베츠키의 《가벼움의 시대》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