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된 남자는 수상한 구석이 다분했다.
경성에서 손꼽히는 부호인데도 사치스럽지 않았고, 아랫사람에게 친절했으며
친일 집안의 딸과 결혼하고도 서재는 불령선인들이 쓴 금서로 가득했다.
팔려 오듯 시집온 연화에게, 손을 대지도 않았다.
“부인께서는 늘 사랑스러우십니다.”
남자는 촛불처럼 연화의 마음을 스며들듯 서서히 침범했다.
그러나 연화는, 내내 어둡던 삶을 비집고 들어왔던 한 줄기 빛
하녀 덕연을 향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아가씨는 이미 세상을 다 가지셨어요.”
자꾸만 저를 밀어내는 덕연과 자꾸만 거리를 좁혀 오는 남자.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막은 채 자꾸만 변해 가는 세상.
그 모든 것들에 휩쓸려 연화는 혼란스러워하는데…….
“늦었습니다. 이제는 정말 늦었어요.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으니 피해 가지 말아요.”
남자의 손을 잡으면, 어디에 이르게 될까.
연화는 자신이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다.
늘 그랬듯 삶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을 향해 흘러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