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이론 물리학자. 독일의 바바리아 지방의 울름(Ulm)에서 출생. 루이트포르트 김나지움에 입학하고 여가를 이용하여 공장 기사(工場技師)인 백부로부터 대수(代數)와 기하학을 배워 수학적 재능의 우수함을 과시했다. 아버지가 공장의 사업에 실패하여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이사하게 되자 그를 따라 아라우의 중학을 거쳐 취리히 공과 대학에 입학했다. 학교 성적은 그다지 우수지 못했으나 수학ㆍ물리학에 특수한 재능을 나타내어 16세에 이미 《운동체의 광학(運動體의 光學)》에 착안하고 있었다. 21세에 대학을 졸업하여 가정 교사를 지내고 빈곤과 투쟁하면서 이론 물리학을 연구하였으며 1901년 취리히의 공민권을 회득하여 특허국의 기사(技師)가 되었고 1905년 《물리학연보(物理學年報)》에 광전 효과(光電效果)에 플랑크(Μ.K.E.L. Planck)의 양자 가설(量子假說)을 응용한 《광양자가설(光量子假說)》과 분자물리학에 신생면을 개척한 《브라운 운동에 관한 기체론적 연구》 및 《특수 상대성 이론(特殊相對性理論)》 등 세 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독일의 물리학 대가인 플랑크에게 인정받아 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1911년 보헤미아의 프라하 대학 1912년 취리히 공과 대학 교수가 되었고 1914년 베를린 대학에 초빙되고 또 카이저 빌헬름 협회 물리학 연구소 물리학 부장 베를린 학사원 회원이 되었다. 그 해 제1차대전이 발발(勃發)했으나 다행히 스위스 국적이었기 때문에 부자유스러우나마 연구를 계속할 수 있어 1915년 《일반 상대성 이론(一般相對性理論)》을 완성했으며 이어 1917년 상대론적 우주론을 발표하였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 있어서 예견한 광선굴곡(光線屈曲)의 사실은 1919년 영국의 일식관측대(日蝕觀測隊)에 의하여 실증되었다.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고 1929년에는 상대성 이론을 더욱 확장하여 만유인력(萬有引力) 및 전자기력(電子氣力)의 일체(一切)를 포함한 《장의 통일 이론(場의 通一理論)》을 발표하였다. 그의 연구는 불변의 진리(不變의 眞理)라고 생각되어 오던 뉴턴의 물리학에 근본적 변혁을 가져옴으로써 20세기 이후의 물리학에 새로운 자극을 불어넣었으며 또한 당시 발전 도상에 있던 양자역할(量子役割)에 미친 영향도 크다. 바이올린의 명수이고 요트의 애호자로서 알려 지고 있다. 1933년 나치즈에게 추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가서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에서 연구에 전렴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원자폭탄 제조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제2차 대전의 종결을 빠르게 했으며 평화주의자로서 세계 연방 운동을 주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