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룩에 두 개의 모용세가가 있으니 세칭 남북모용이라 한다.
남모용 - 낙양벽력모용세가 수백년 간 천하 제일 무문임을 자부하며 당금 무림계의 패주로 군림하는 곳.
북모용 - 각산모용세가.
각산의 준령 속에 묻혀 오직 지고한 학문만을 연구해온 문의 가문
남복모용의 공동후계자!
이 시대의 풍운아!
기괴무쌍한 지략과 추측불능의 무학을 지닌 채 이 땅에 등장했다.
모용소야!
그날 이후 무림 전체는 사상 최악의 혼돈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맛보기>
* 序 章 慕容莊院의 少爺
하북성(河北省) 유주(幽州)땅.
옛부터 유주와 기주(岐州)의 산세는 상서로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서쪽에서 웅위하듯 연경(燕京)을 감싼 것이 태행산(太行山)이며 동쪽의 무려산(霧麗山)은 마치 용과 봉황이 날고 춤추는 듯이 수려한 산세를 길게 쭈욱 뻗어 각산(角山)에 다다라 산해관(山海關)을 만들었다.
산해관----
그 곳에서 창려현(昌侶縣) 쪽으로 조금 가다보면 웅장한 장원이 각산 아래 자리해 있었다.
푸른 기와(靑瓦), 붉은 담(紅坍), 무성한 대나무 숲 사이에 들어선 누대(樓臺)와 정각(亭閣).
-모용장원(慕容莊院).
수백 년 전, 대륙(大陸) 동북방(東北方)을 차지했던 대연(大燕)의 모용왕족(慕容王族).
선비족(鮮備族)을 이끌고 오호전국시대(五胡戰國時代)를 질타하며 대연제국(大燕帝國)을 세운 숭정무제(崇政武帝).
그 당시, 중원의 여타 왕조(王朝)들이 공물(貢物)을 헌납(獻納)할 정도로 막강한 국운(國運)을 과시했던 대연제국이었다. 그러나, 세월의 부침(浮沈) 속에 모용왕족은 훗날 북위(北魏)에 의해 멸망(滅亡)을 당한다.
나라를 잃은 모용왕족들은 대륙 곳곳에 흩어졌다. 나라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부단히 했지만 대륙은 새로운 주인(主人)을 바라고 있어 모용왕족의 바램은 바램 그 자체로 끝나야만 했다.
여기 각산 창려현에 위치한 모용장원, 중원 처처(處處)에 널려있는 수 많은 모용장원과 마찬가지로 각산 모용장원 역시 세월에 순응(順應) 하여 왔다.
각산의 모용왕족은 대대로 학문(學文)에 정진해 왔다.
그 결과, 남북위조(南北魏朝)를 비롯해 당(唐), 북송(北宋), 원(元)을 거쳐 당금 대명제국(大明帝國)에 이르기까지 명망높은 학사들을 배출해 왔다. 그리고, 당금에 이르러선 대명(大明) 유림(儒林)의 대표적인 인물을 탄생시켰다.
-백상대선생(白祥大先生) 모용군악(慕容君岳).
당금 각산 모용장원의 장주(莊主)이다.
그는 일찍이 대과(大科)에 급제(及第) 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나이가 들자 관직을 사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