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서지는 기억 속의 너를 기억할 수 있을까
언젠간 모두 사라져버릴 기억들에 이름을 붙이다
이것은 소녀였던 나의, 그리고 당신의, 사랑의 기록이다
사랑에 빠진 기간엔 항상 생각했다.
내가 글로 적지 않는 날에도 나의 하루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내가 지쳐서 기억하지 못할 순간들까지도 당신이 기억해줄 테니까.
그렇게 ‘당신’이란 보통명사에 의존해온 기억들은 어느 날 한숨에 모두 사라졌다.
나는 나의 인생을 복원하지 못한다. ―조소담
◎ 도서 소개
‘오늘이 기대되는 작가’ 조소담의 첫 산문집
여성의 몸으로 써내려간 아주 보통의 연애, 아주 보통의 청춘
우리의 마음과 몸은 하나가 아니다. 조소담,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표현이 아닐까. 20대 여성 CEO, 디지털 미디어 전문가, 유리천장을 깬 여성, 영향력 있는 30세 이하 리더…… 그에게 붙는 수식어는 다양하다. 그가 대표를 맡고 있는 미디어 스타트업 〈닷페이스〉가 유튜브와 페이스북에서 인기를 누리기 전부터, 그가 문재인 대통령 직속기관 저출산고령사회위원 최연소 위원으로 위촉되어 언론의 주목을 받기 전부터, 그는 꽤나 유명 인사였다. 거침없이 당당하게 자신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목소리를 내왔으며, 사회활동가이자 콘텐츠 생산자이며 미디어 기업가로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는, 그리하여 오늘 어떤 일상을 보냈을지 기대하게 만드는 사람, 그런 그가 오늘은 ‘무명의 작가’라는 새로운 얼굴을 가지고 독자들을 찾아왔다.
서툴렀던 그 순간을 우리는 왜 기억해야 할까
아무것도 아니게 될 순간들에 이름표를 붙이다
조소담은 자기소개는 잘 못해도 자기 서사는 스스로 잘 꿰고 있는 사람이라 본인을 소개한다. 서툴렀던 지난 연애는 미화되거나, 폐기처분되거나 둘 중 하나의 수순을 밟기 쉽다. 그렇게 과거의 순간들은 대개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 채로 기억 저편 어딘가에 매장된다. 하지만 조소담은 과거를 허투루 흘려보내는 법이 없다. 지나쳐간 사람과 시간이 남긴 흔적과 의미를 자음과 모음으로 배열한다. 왜곡도 과장도 없이 그저 기억의 유리병에 라벨을 하나씩 붙인다.
≪당신이라는 보통명사≫는 브런치에서 ‘썸머’라는 필명으로 그가 써내려간 한 편 한 편을 모아 내놓은 그의 첫 산문집이다. 남의 일기장을 훔쳐 읽는 느낌, 내가 쓰지 못했던 날들의 내 일기장을 읽는 기분이 들지만, 독서가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그가 기억의 유리병에 붙인 라벨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느새 내가 어두컴컴한 심해에 묻어놓은 기억들의 잔해를 줍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홀로 외롭게 분투했던 시간, ‘망했네, 이건 사랑이야’라고 중얼거리며 얼굴 붉어지던 순간, 살 내음을 맡으며 잠들었던 그날의 새벽…. 이 책은 바로 ‘우리는 왜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려 애쓰는지, 그리하여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며, ‘우리가 왜 사소하고 서툴렀던 순간을 기억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마냥 아름답지도 비참하지도 않은 보통의 연애담으로
뻔한 위로가 아닌 진짜 위로를 받는다
조소담 작가가 연애를 탐구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연애는 유독 특별한 이름으로 분류된다. ‘나’와 ‘당신’이 세상의 유일한 존재로 관계 맺는 실로 엄청난 사건. 그는 “보호막을 뚫고 서로 한자리에 누울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이라고 말한다. 두 사람의 세계가 포개어졌다 떨어져나가는 연애 관계는 모든 관계의 원형이다. 그래서 소녀가 소년을 만났을 때 벌어지는 일들은 연애담이자 섹슈얼리티의 고백이며 관계로 얽힌 세상 그 자체를 바라보는 시선이 된다.
“나는 누군가 나를 사랑하고, 내 몸을 원한다는 것에 금세 도취되었다. 그 애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고, 누군가를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는 것에 도취해 있었다. 내가 어쩔 줄 몰라 하면 더 심하게 목에 얼굴을 묻었고, 치마를 들추고, 속옷을 벗겼다. … 누군가의 갈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느껴본 적 없는 원초적 즐거움이었다.” ―본문 [인형의 권력] 중에서
그의 연애담에는 ‘나’의 다양한 형상이 등장한다. ‘도구적 존재로서 타인에게 보여지는 나’에서 ‘영리하게 욕망을 교환할 줄 아는 나’를 지나 ‘사랑에 빠져 어쩔 줄 모름을 연출하며 즐기는 노련한 나르시스트’까지. 여태껏 서사의 영역에서 여성의 몸은 늘 ‘바라봄’의 대상이었다. 조소담 작가는 이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욕망을 말할 수 있는 주체이자 타인의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나’를 재료로 세상에 대한 잔잔하면서도 예리한 사유를 펼쳐놓는다.
이 때문인가. 그녀의 글에는 감성적인 단어도, 기교를 뽐내는 문장도 없다. A는 걸었다. B를 바라보았다. 뚝뚝 끊기는 단순한 문장들 사이로 꾹 참고 있는 울음이 보이고, 푹 배인 진심이 묻어난다. 몇 마디 예쁜 단어로 포장하지 않는 대신, 단단한 진심이 주는 힘으로 우리는 뻔한 위로가 아닌 진짜 위로를 받는다.
◎ 책 속으로
우리는 스치듯 겪더라도 인연을 만나면 그게 인연인 것을 안다. 인연을 만나면 한순간에 마음의 온도가 달라진다. 그 인연을 붙잡아 온몸을 열면 인연이 존재 안으로 흘러들어와 그 존재가 사는 공간의 온도를 바꾸고 공기를 바꾼다. 낭만이란, 그런 순간이 오기를 기다리고 기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순간을 다시 되새김하는 것이다. 사진가는 그런 순간을 위해 한쪽 눈을 감고 렌즈를 들여다본다. 방랑자는 바람이 좋아서 길가에 눕고, 사람들은 사랑을 기다리며 창문을 연다. ―p.14~16【낭만이란 무엇인가】
나는 좋아한다는 한마디 말 이후에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을 생각했다. 내 일과의 빈틈마다 밀려왔다 밀려 나가는 잔물결 같은 것. 네가 말한 것들, 우리가 함께한 순간들이 반짝이며 발등을 적셨다. 나는 맨발로 따뜻한 모래 위를 걷던 어린 시절처럼 천진난만해졌다. 좋아한다는 말이 가진 주술적 힘. 나는 네가 들려준 노래에, 함께 본 그림에, 나눈 말과 말 사이 시 같은 것들에 그 감정의 조각이 있었음을 기억했다. 어쩌면 주술은 우리의 말 이전에 이미. ―p.61~62【사랑에 빠지는 순서】
둘 사이에 생긴 틈에 단어 단어가 쌓이고, 점점 일은 난해해지고, 가깝고 싶었던 마음은 더 외로워진다. 말이 아니라 따뜻한 품이 필요한 것이다. 이해받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사랑받고 싶은 것이다. 길에서 다친 작은 동물처럼 조심스레 안아줬으면 하는 마음. 얼마나 초라하든, 얼마나 더럽든. ―p.72~73【헤어지는 중입니다】
사랑에 빠진 기간엔 항상 생각했다. 내가 글로 적지 않는 날에도 나의 하루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내가 지쳐서 기억하지 못할 순간들까지도 당신이 기억해줄 테니까. 그렇게 ‘당신’이란 보통명사에 의존해온 기억들은 어느 날 한숨에 모두 사라졌다. 나는 나의 인생을 복원하지 못한다. ‘당신’들에게 맡겨둔 어떤 순간들의 의미. 그렇지만 그 기억을 되돌려 받을 수 있는가. 기억의 조각들만 가지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길로 흩어진다. ―p.83【당신이라는 보통명사】
전선에 서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누구나 이 시대의 목격자로서 오늘을 산다. 자신 앞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직시 후에 말을 꺼내는 것은 더 쉽지 않은 일이고, 그 후에 변화를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다. 그래도, 직시하고 기록하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우리는 목격자니까. 미래에 덜 부끄러우려면 오늘 더 용기를 내야 한다. ―p. 185【덜 부끄러우려면 용기를 내야 해】
“나 아웃팅을 당했어.” “내 여자 친구가 남자를 사귀고 싶대.”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었다. 온전히 이해할 수 없어도 나는 그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그도 친구인 나의 감정을 그렇게 이해하려 애쓰며 껴안아준 적이 있다. 우리는 그런 사이였다. 그럼에도 내가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존재했다. 왜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평생 혼자 살 계획을 하는지, 또 왜 그러면서 커플 아이템은 꼭꼭 챙기는지, 알 것 같다가도 알 수 없었다. ―p. 206~207【친구의 사랑】
상실의 의식. 누군가를 잘 잃는 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충분히 슬퍼하고 충분히 아파하고, 또 기억하며, 남은 사람들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그 모든 시간. 그 시간을 지나지 않고서는 누군가를 잃고서도 묻을 수가 없다. 누군가를 온전히 보내지 못한 사람은 상실의 시간 안에 갇힌다. ―p. 211【상실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