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인간

나쓰메 소세키, 미야자와 겐지, 오카쿠라 텐신, 사카구치 안고, 가지이 모토지로 외 22명 | 봄날의책 | 2017년 12월 30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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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영미 작가들이 펼치는 산문의 향연
『천천히, 스미는』의 일본 문학 버전!

나와 멀지 않은 시공간을 살았던 작가들의 투명하고 섬세한 산문을 읽으며 나는 벚꽃과 전쟁을, 덧없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무자비한 문명의 광기를, 그것이 그이들의 내면에 만들어낸 특유의 그늘과 그을음 같은 것을 더듬어보기도 하였다. 누군가는 진진한 묘사로, 누군가는 따뜻한 유머로, 또 누군가는 서늘한 통찰로 그려낸 시대의 초상과 마음의 풍경들.
―허은실(시인)

일본 근현대 작가 26명, 41편의 산문

근대 이후 풍요로운 낭만과 지성이 꽃핀 시기의 정신을 이어받는 작품부터, 전쟁과 가난과 차별과 청춘 등 각종 파란 속 우울과 자포자기 가운데 치열하게 각자의 삶을 살다간 인간의 풍경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사랑한 스미다강의 푸른 물소리 같은 울림으로, 고바야시 다키지가 식민지 감방 동지를 향해 쿵쿵 굴러주던 발소리의 뜨거움으로, 다카무라 고타로가 감각의 본질에 육박해갔던 정신의 치열함으로, 하라 다이키가 자신의 전존재가 실린, 곧 생을 마감할 것 같은 아슬아슬한 느낌으로 나를 멈춰 세우고 밑줄 긋게 만든 문장들.

저자소개

저 : 나쓰메 소세키
Natsume Soseki,なつめ そうせき,夏目 漱石,본명: 나츠메 긴노스케(夏目 金之助)
일본의 셰익스피어라 불릴 정도로 확고한 문학적 위치에 있는 일본의 국민작가다. 1867년 일본 도쿄 출생이며 본명은 긴노스케[金之助]로, 도쿄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제1고등학교 시절에 가인(歌人)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를 알게 되어 문학적, 인간적으로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도쿄고등사범학교·제5고등학교 등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1896년 제5고등학교 교수 시절 나카네 교코와 결혼 했으나 원만하지 못한 결혼 생활을 보냈고, 1900년 일본 문부성 제1회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영국에서 유학했다.

타지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예민하고 우울한 자아를 남겼으며, 이는 귀국 후에도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그는 치유의 한 방편으로 『고양이전』을 썼고, 이 작품은 1905년 『호토토기스(두견)』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1905∼1906)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어 큰 호평을 받았다. 1907년에 교직을 사임하였으며 아사히[朝日]신문사에 입사하여 『우미인초(虞美人草)』를 연재하고 『도련님』(1906), 『풀베개[草枕]』(1906) 등을 발표하였다.

20세기 초 근대적 주체와 삶의 불안한 내면 풍경을 깊은 통찰력으로 꿰뚫어 보여주는 그의 작품들은 일본적 감수성과 윤리관으로 서구 근대의 기계문명과 자본주의를 비평적으로 바라보며 인간세계를 조명하고자 했다. 경쾌한 리듬과 유머를 바탕으로 권선징악과 같은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가치에 기반을 둔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며 템포가 빠르고 리듬감이 있는 문체로 자연스레 소설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소설 외에도 수필, 하이쿠, 한시 등 여러 장르에 걸쳐 다양한 작품을 남겼으며, 그림에도 재능이 있었다.

그의 작풍은 당시 전성기에 있던 자연주의에 대하여 고답적인 입장이었으며, 그후 『산시로[三四郞]』(1908), 『그후』(1906), 『문(門)』(1910)의 3부작에서는 심리적 작풍을 강화하였고, 다시 『피안 지나기까지』(1912), 『마음』(1914) 등에서는 근대인이 지닌 자아·이기주의를 예리하게 파헤쳤다. 반복적인 위궤양, 당뇨 등을 앓았던 그는 1916년 12월 병이 악화되어 『명암』 집필 중 49세의 나이로 타계하였으며, 1984년, 영국에서 그가 살았던 집 맞은편에는 런던 소세키 기념관이 설립되었다.

저 : 미야자와 겐지
Kenji Miyajawa,みやざわ けんじ,宮澤 賢治
일본의 대표적인 동화 작가이자 시인이면서 농예과학자. 이와테 현 하나마키 시의 독실한 불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일본의 시조라 할 수 있는 단가를 짓기 시작한 겐지는 열여덟 살 무렵부터 동화를 지어 형제들에게 읽어 주었다고 한다. 1921년에는 무작정 도쿄로 상경하여 동화를 창작했는데, 겐지 동화의 초고는 대부분 이 시기에 씌어졌다. 이후 농업 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왕성한 창작 활동을 계속하였는데, 생명 존중 사상과 공생(共生)의 행복관을 담아내던 겐지의 동화들은 당시 주위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배타적이던 일본에서는 외면당한다. 결국 겐지의 동화는 끝내 빛을 보지 못하고,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늑막염으로 생을 마친다.

그러나 사후 7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일본 열도는 '겐지 붐'이라고 할 만큼 열광적인 독자군이 형성되어 있으며, 그의 작품은 일본 교과서에 오랫동안 수록되어 정서적 영감을 불어넣을 만큼 수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는 겐지의 작품이 현대 사회에 대한 환멸감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메시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대표작으로는 『쥐돌이 쳇』, 『주문 많은 음식점』, 『바람의 마타사부로』, 『은하 철도의 밤』, 『첼로 켜는 고슈』, 『카이로 단장』 『미야자와 겐지 전집 1,2』등이 있다.

저 : 오카쿠라 텐신
Tenshin Okakura,おかくら てんしん,岡倉 天心
저자 오카쿠라 텐신은 일본 미술운동의 지도자이자 문명 사상가. 세계를 향해 막 문을 연 일본 최대의 무역항 요코하마(橫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비록 하급무사이기는 했지만 요코하마에서 번(藩)이 운영하는 무역상을 책임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어렸을 적부터 서양 문물을 직접 맛보며 자랐다. 더구나 6살 때부터 미국인에게 영어를 배워 영어가 제2의 모국어나 다름없었다. 11살 때 도쿄외국어학교에 입학했으며, 14살의 나이로 현재의 도쿄대학 제1기생이 됐다. 학교 졸업 후 문부성 관리가 되어 미술행정을 담당하던 오카쿠라는 1889년 도쿄미술학교(현재의 도쿄예술대학 미술학부)를 건립했고,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여기서는 오로지 일본 전통미술만을 가르치도록 했다. 1893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동양 예술의 근원을 찾아 헤맸으며, 특히 이 시기에 도교의 노장 사상을 만나 깊이 빠져 그 후 그의 인생관, 예술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04년 미국으로 활동거점을 옮겨 보스턴미술관 동양미술 부문 책임자로 고미술품 수집활동을 펴는 한편, 서양세계를 향해 동양 전통문명을 퍼트리는 데 힘을 쏟았다. 그 성과가 『차 이야기』를 비롯한 여러 영 문저작으로 나타났다.

저 : 사카구치 안고
Ango Sakaguchi,さかぐち あんご,坂口 安吾,본명:사카구치 헤이고
본명은 헤이고. 1906년 10월 20일 니가타현 니가타시에서 아버지 니이치로와 어머니 아사 사이의 5남으로 태어났다. 사카구치가의 선조는 지금의 후쿠오카현 가라쓰의 도공이었다가 후에 니가타로 이동해 온 지방 부호다. 아버지 니이치로는 당시 중의원 의원이자 니가타 신문사 사장이었고 한시 시인으로도 알려진 정치가로서 언제나 다망했으며 장남을 제외한 자식들에게는 무관심하고 냉담했다. 사카구치가의 재산은 체면과 의리를 중시했던 니이치로의 대에서 탕진되게 된다. 니이치로의 전처와 첩의 아이까지 합한 열세 명의 형제 중 열두 번째 아이로 태어난 안고는, 어린 시절 이미 방랑벽이 있었으며, 골목대장 행세를 하며 싸움질을 하고 돌아다녀 어머니의 미움을 사는 한편, 주로 무사들의 군담을 숙독했고, 남몰래 닌자의 인술을 연구하기도 했다. 1919년 니가타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이 무렵부터 집과 학교를 싫어해서 수업을 빠지고 홀로 방황하는 날들을 보내다 낙제하게 되고, 다니자키 준이치로와 발자크 등의 소설을 탐독하며 지내다가 결국 1922년에 퇴학당했다. 그해 가을 상경해 부잔 중학교에 입학했고 에드거 앨런 포와 이시카와 다쿠보쿠 등을 인생의 낙오자로서 사랑하며 그들의 작품을 숙독했다.

막연하게 엄격한 구도자의 삶을 동경하여 1926년, 도요 대학 인도철학윤리과에 입학한다. 입학 후 불교서와 철학서를 섭렵하는 데 몸을 혹사하며 공부에 매진한 탓에 생긴 신경쇠약 증세를 극복하기 위해 다시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티베트어, 라틴어, 프랑스어 등 어학을 맹렬히 공부한다. 1930년, 대학을 졸업한 후 동인지 <말>과 <청마>를 창간했다. 1931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바람 박사>와 <구로타니 마을>이 소설가 마키노 신이치의 극찬을 받음으로써 신진 작가로 급부상한다. 1932년 여류 작가 야다 쓰세코를 알고 사랑에 빠지지만 1936년 절교한 후 신생을 기하며 교토를 방랑하면서 그녀와의 사랑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 ≪눈보라 이야기≫를 썼다. 1946년, 전후의 시대적 본질을 예리하게 통찰하고 파악한 <타락론>과 <백치>에 의해 일약 시대의 총아, 오피니언 리더로 떠오르며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1947년 가지 미치요와 결혼하고, 전후의 시대상을 반영한 소설과 에세이, 탐정소설, 역사 연구, 문명 비평 르포르타주 등 다채로운 집필 활동을 전개하여 전후의 난세에 문화와 역사 및 사회의 흐름에 대한 대중의 지적 갈증을 해소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와 동시에 세무 당국을 상대로 한 소송, 경륜 부정 사건 고발, 각성제와 수면제 중독에 의한 정신착란 발작 등 실생활 면에서도 언제나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1955년 2월 17일 지방 취재 여행에서 돌아온 후 자택에서 뇌일혈로 급사했다. 향년 50세였다.

전후 일본 사회의 혼란과 퇴폐를 반영한 작풍을 확립하고 시대의 새로운 윤리를 제시함으로써 일본인에게 충격과 감동을 안겨준 사카구치 안고는 다자이 오사무와 오다 사쿠노스케 등과 함께 전후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무뢰파 작가로 평가된다.

저 : 가지이 모토지로
Motojiro Kajii,かじい もとじろう,梶井 基次郞
1901년 2월 17일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난다. 기타노(北野)중학교를 거쳐 1919년에 제3고등학교(第三高等?校) 이과에 진학하지만 점차 문학과 음악에 흥미를 느낀다. 1920년 9월에는 폐첨카타르 진단을 받고 잠시 학교를 떠나지만 11월에 다시 복귀한다. 문학에 대한 관심은 날로 깊어져 1922년부터 습작을 시작하는 한편, 방탕한 생활로 5년 만에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1924년 도쿄제국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하고, 나카타니 다카오(仲谷孝雄) 등과 동인지《아오조라(?空)》의 창간을 준비한다. 같은 해에 객혈(喀血)과 이복 여동생의 죽음을 겪으며 심적으로 예민하고 불안정해진다.
1925년 1월,《아오조라》창간호에「레몬」을 발표하고, 병이 깊어가는 와중에도 창작 활동을 이어간다. 1926년 말부터 요양을 위해 이즈(伊豆)의 유가시마(湯ヶ島)온천에 머물며 1년여를 보낸다. 이를 계기로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를 비롯한 당시의 문인들과 교류하게 된다. 1927년 6월 《아오조라》는 폐간된다.
1928년에 상경하지만 병세가 악화되어 오사카로 돌아간다. 병상에서도 창작을 멈추지 않았으며, 1931년 5월 작품집 『레몬(??)』이 간행되었으나 이듬해인 1932년 3 월 24일, 서른한 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저 : 오카모토 카노코
Kanoko Okamoto,おかもと かのこ,岡本 かの子
1889년 명치시대 말 도쿄에서 태어난 오카모토 카노코는 ‘일본 근대 문학 부활의 첫울음’이라는 격찬을 받으며 문단에 들어섰다.
『설국』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그녀는 요즘 대단한 일을 해내고 있다.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는 그녀의 작품은 생명의 샘에서 신비한 꽃이 만개한 것처럼 환하다. 이 꽃의 뿌리는 깊고 수중과 구름 사이에서 자랑스럽게 핀 꽃과 같다’고 찬사를 보냈고, 평론가 주조 쇼헤이는 그녀를 ‘형이상학적인 깊이를 집합적 무의식으로 드러낸 여류 천재 소설가’로 꼽았다.
그녀는 다니자키 준이치로, 아쿠다카와 류노스케 등 당대의 저명한 작가들과 교류하며, 동시대에선 찾아볼 수 없는 모던함과 경계 없는 상상력으로 자신만의 예술지상주의적 작품 세계를 펼쳐 나갔다.
생명의 고향으로서 음식을 선택해 소재로 사용한 그녀는 먹이에 대한 집착과 사유를 예술의 경지로까지 승화시켰다.
일본 여류 근대 문학사에 전례 없이 ‘생명’에 대해 천착한 유일한 여성작가로 특히 「초밥」, 「집 유령」, 「식마」에서 보여주는 생명의 깊이 있는 통찰은 동시대의 작가뿐 아니라 후대의 모든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카노코의 문학은 분명한 자리를 가지고 일본 문학사의 뼈대를 잇고 있다.

저 : 하라 다미키
Tamiki Hara,はら たみき,原 民喜
1905년~1951년. 히로시마 출생. 피폭 체험을 작품에 새긴 소설가, 시인. 1933년에 게이오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1936년부터 잡지 《미타 문학》을 무대로 단편소설을 다수 발표하기 시작했다. 1945년에 전쟁을 피해 고향인 히로시마의 형님 댁으로 옮겼지만 8월에 원폭투하를 경험하게 된다. 이 체험은『여름의 꽃』『진혼가』 등의 작품을 낳았다. 특히 『여름의 꽃』은 아름답고 냉정하고 투명한 문체로 묘사된 작품인데 원폭을 묘사한 수많은 문학작품 중에서도 가장 빼어나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1951년, 중앙선 철도에서 자살했다. 향년 45세. 대표작으로는『여름의 꽃』『폐허에서』『괴멸의 서곡』『진혼가』『원폭 소경小景』 등이 있다.

저 : 나오키 산주고
Sanjuugo Naoki,なおき さんじゅうご,直木 三十五
일본의 소설가,각본가,영화감독. 본명은 우에무라 소이치이다. 순문학이 대세이던 20세기 초 일본 문단에 대중문학의 바람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다.
도쿄에서 잡지 편집을 하다 간토 대지진을 계기로 고향인 오사카에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작가들에게 대중문학을 청탁하여 본인도 직접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간결한 문장, 철저한 고즘, 이야기의 개인성, 독자들을 움직일 수 있는 감성과 풍부한 상상력 등, 그가 주장한 대중문학 작가의 조건과 마음가짐은 여러 작가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사실상 일본 대중 문학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했다.
나오키 자신도 「유비근원대살기」,「남국태평기」등을 비롯해 여러 소설을 썼으며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나오키 산주고라는 필명은 직접 지은 것으로, 본명 중 우에의 한자를 둘로 나눠 나오키라는 성을 만들었다. 산주고는 35라는 뜻으로, 서른한 살 때 산주이치(31)라는 필명을 만들고 나이를 먹을 때바다 그에 맞춰 필명을 바꾸었는데, 서른다섯 살이 되던 해 산주고로 바꾼 후 죽을 때까지 그 이름을 사용했다.
일본 최고의 대중 문학상이라 불리는 나오키 상은 그의 이름을 딴 것으로, 문예춘추사 사장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가쿠치간이 '대중 문학의 역사를 바꾼 나오키 산주고의 공헌'을 기리기 위해 1935년 창설했다. 오사카에 그를 기념하는 나오키 산주고 기념관이 있다.

저 : 요사노 아키코
Akiko Yosano,よさの あきこ,輿謝野 晶子
요사노 아키코는 사카이(堺)의 전통 과자점 스루가야(駿河屋)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12세 무렵부터 가업을 도와 장부를 기록하거나 대나무 껍질로 단팥묵을 포장하는 등 일에 쫓기는 생활을 해야 했다. 후일 유년 시절을 회상한 글에서 그녀는 “밤일이 끝나기를 기다려 밤 12시에 꺼지는 전등 아래서 겨우 1시간 또는 30분 부모의 눈을 피해가며 내가 읽은 책들은 여러 가지 공상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어 나를 위로하고 용기를 주었다”고 술회했는데, 답답한 일상 속에서 그녀의 유일한 벗은 문학 작품 속의 주인공들이었다. 부친의 장서였던 ≪겐지 이야기(源氏物語)≫, ≪마쿠라노소시(枕草子)≫, ≪영화 이야기(榮華物語)≫ 등 고전문학 작품 속의 주인공들을 동경하며 소녀 아키코는 암울한 현실의 저편에 있는 감미로운 사랑의 세계를 꿈꾸었을 것이다. 또한 그녀의 독서 목록에는 제국대학에 재학 중이던 오빠가 보내오는 당시의 최신 문예 잡지와 신소설이 포함되어 있었다. 소학교 졸업 후 진학한 사카이 여학교는 현모양처를 양성하는 봉건적 여성 교육을 주로 하는 학교였으나, 아키코는 독서를 통해 새로운 시대의 사조를 체감하고 가부장적 구습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할 의식을 키워갔다. 그녀의 재기는 1899년 서일본 지방 문학청년들의 모임인 관서청년문학회 입회를 통해 싹트기 시작해, 요사노 뎃칸과의 운명적인 만남과 함께 일시에 분출되었다. 그 첫 번째 결실인 ≪헝클어진 머리칼≫은 근대적 자아에 눈뜬 새로운 여성의 목소리를 대담하고 분방하게 표현한 것으로, 단숨에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초기 일본 낭만주의의 거점이었던 문예지 <묘조>의 여왕으로 활약하며 일본 문학사상 ‘정열의 가인’으로 기록된다. 결혼 후에는 소설, 시, 평론, 고전 연구 등 다방면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는 한편, 11명의 자녀를 키우며 가계를 꾸려가는 정력적인 삶을 영위했다. 그사이 작풍은 초기의 격정적인 어조는 퇴색되었으나 낭만적 미질을 유지하는 가운데 점차 내면적인 깊이를 더해 고요한 자기 관조와 사색적 서정을 내포해 가게 되었다. 1912년 뎃칸과 함께한 유럽 여행 이후에는 여권 신장 운동 체험을 바탕으로 넓은 사회적 시야를 갖고 부인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문화학원(文化學院)을 창립(1921)해 초대 학감에 취임하는 등 문학은 물론 교육 활동에 있어서도 폭넓은 족적을 남겼다. ≪헝클어진 머리칼≫과 함께 널리 회자되는 그녀의 대표작으로는 반전시로 일컬어지는 장시 <너는 죽지 말거라(君死にたまふことなかれ)>(1904)를 들 수 있다. 아키코는 무엇보다 진실한 마음을 표현하는 시의 가치를 믿었으며 전 생애를 다해 사랑을 노래한 작가로 기억된다. 1942년 뇌일혈 투병 중 사망하기까지 그녀가 남긴 가집은 20권, 약 5만 수다.

저 : 이시카와 다쿠보쿠
Takuboku Ishikawa,いしかわ たくぼく,石川 啄木,본명 : 石川 一
1886년 이와테현에서 태어났다. 모리오카 보통중학교를 중퇴한 후 문학지 『묘조』의 동인으로 활동하며 시부타미 보통소학교·야요이 보통소학교 대리교사와 『하코다테 일일신문』 ·『기타몬신보』 ·『오타루일보』 ·『구시로 신문』 기자 등 여러 직장을 전전했다. 이후 『아사히 신문』 교정계에 취직하여 후타바테이 시메이 전집을 교정하고 아사히가단의 선자(選者)로 일하던 중 1912년에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저서로는 가집 『한 줌의 모래』, 『슬픈 장난감』, 시집 『동경』, 『호루라기와 휘파람』, 소설 『구름은 천재로소이다』 등이 있다.

저 : 하야시 후미코
Fumiko Hayashi,はやし ふみこ,林 芙美子
1903~1951. 일본 근대 문학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 후쿠오카 현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가난한 부모를 따라 여러 지방을 떠돌아다녔다. 여학교 졸업 후 도쿄에 올라와 잡일꾼, 사무원, 여공, 카페 여급 등 갖가지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작가를 꿈꾸며 고단한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1930년 자신의 가난한 삶이 그대로 녹아 있는 『방랑기』를 출판해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했다. 대공황의 와중에도 60만 부나 팔린 『방랑기』를 비롯한 그녀의 작품은 당시 도시 생활자의 밑바닥 삶, 특히 여성의 자립과 가족, 사회 문제를 생생하게 그려내 대중에게 사랑받았고 사후에도 다수의 작품이 영화, 연극, 드라마로 제작됐다. 1948년 제3회 여류문학자상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는 『청빈의 서』, 『만국』, 『뜬구름』, 『밥』 등이 있다.

저 : 하기와라 사쿠타로
Hagiwara Sakutaro,はぎわら さくたろう,萩原 朔太郞
1886년 11월에 군마 현 마에바시 시에서 태어났다. 마에바시 중학교 때부터 당시의 가장 유명한 문학잡지인 <명성(明星)>에 단가(短歌)를 투고하는 등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을 떠나 타지의 고등학교에 진학하지만 몇 번의 낙제를 거듭한 후 귀향하여 1913년경부터 본격적인 시작 활동을 개시했다. 이후로 수도 도쿄(東京)와 고향을 오가는 생활을 계속하면서 시작에 전념하여 1917년, 처녀 시집 ≪달 보고 짖는다≫를 간행했다. 이 시집에서 근대인들의 고독감과 신경 쇠약, 우울증을 구어체(口語體)로 섬세하게 표현해 냄으로써, 하기와라 사쿠타로는 다카무라 고타로(高村光太郞)와 함께 ‘일본 근대시의 완성자’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게 된다. 1923년에 두 번째 시집 ≪우울한 고양이≫를 출판한다. 이 시집에서는 우울함과 무료함, 권태로움을 ‘우울한 고양이 스타일’이라 불리는 독특한 시 형식으로 표현했다. 쇼펜하우어와 니체, 불교의 영향을 받은 염세적 허무 의식과 관능적이며 퇴폐적인 시상이 주를 이루고 있다. 1925년에 발간한 ≪순정 소곡집≫은 단가에서 시로 옮길 때의 작품인 ‘애련(愛憐) 시편’과 30대 후반에 발표한 ‘... 향토망경(鄕土望景) 시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자에는 소년 시절의 순수한 감상과 영탄이, 후자에는 도쿄에서 바라본 변해가는 고향의 모습과 비속한 인생에 대한 분노가 표출되어 있다. 1934년에 출판된 마지막 시집 ≪얼음 섬≫에서는 고향을 상실한 영원한 방랑자로서 당시 사회에 대한 ‘분노와 증오와 적요(寂寥)와 격정’을 담은 ‘절규’를 비분강개의 한문 번역 투의 문어체로 표현했다. 그 밖에 아포리즘을 모은 책 ≪새로운 욕망≫(1922), 시론집 ≪시의 원리≫(1928), 수필집 ≪일본으로 회귀≫(1938), 산문시집 ≪숙명≫(1939) 등이 있다.

저 : 다자이 오사무
Dazai Osamu,だざい おさむ,太宰 治,본명 : 츠시마 슈지(津島 修治)
다자이는 일본 동북 지방의 아오모리 현(靑森縣) 기타쓰가루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쓰시마 슈지로, 아버지는 그 지방의 대지주이며 귀족원(중의원) 의원이기도 하였다. 8남매 중의 막내로 형제들에 대하여 항상 열등 의식을 지니고 부모의 사랑도 모른 채로 유모의 손에서 성장하였다.

다자이는 고등학교 시절 동인 잡지에 아버지의 방탕한 생활과 위선을 폭로한 『무한 나락』을 발표했으며, 3학년 때인 1929년에는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첫 번째 자살 미수 사건을 벌였다. 1930년 도쿄대학 불문과에 입학한 다자이는 이부세 마스지를 만나, 이후로 사제 관계를 맺기에 이르렀다. 같은 해, 게이샤 출신의 오야마 하쓰요(小山初代)가 도쿄로 찾아와,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받게 되나, 그 때문에 다자이는 고향의 가족들로부터 분가 제적을 당하였다. 분가 제적의 실질적인 원인으로는 당시의 다자이가 비합법 운동에 가담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도쿄대학 불문과에 입학한 다자이는 구도 에이조의 끈질긴 권유에 못 이겨 좌익 운동에 가담하였고, 당시의 작품인 『지주 일대』와 『학생군』은 착취계급이나 국가 권력에 대하여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1931년 구도가 검거된 이듬해에 자수한 이후로 비합법 운동에서 탈락하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고향 집으로부터 분가 제적을 당한 지 얼마 안 되어, 다자이는 긴자(銀座) 카페의 호스테스와 함께 가나가와 현 에노 섬에서 투신 자살을 기도하였는데, 다자이만 살아남아 가마쿠라(鎌倉)의 병원에 수용되었다. 이 자살에 관하여는 『도쿄 팔경』『인간실격』『광언의 신』『허구의 봄』『광대의 꽃』등에서 다자이 스스로가 언급하고 있다. 다자이는 자살 방조 혐의로 기소 유예 처분을 받았으며, 이때의 체험 역시 평생 동안 죄의식으로 남게 되었다.

퇴원 이후의 다자이는 삶에 대한 희망을 잃고 방황을 하던 중, 대학을 졸업할 가망이 없게 되자 미야코 신문사의 입사 시험에 응했지만 그것마저 실패한다. 그 후 1935년 가마쿠라의 산중에서 혼자 자살을 기도하고, 결국 미수에 그쳤다. 같은 해 ‘일본낭만파’에 합류하였으며 『역행』으로 제1회 아쿠타가와상 차석을 차지하지만 심사 결과에 불만을 품고 심사 위원이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항의하는 글을 발표한다. 그 후 복막염으로 입원했고, 처방된 마약성 진통제 파비날에 중독되어 정신착란적인 문체를 선보이기도 한다. 마약 중독 치료를 위해 정신병원에 강제로 수용되었으며, 1936년 입원하여 있는 동안 하쓰요가 불륜을 저지른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이듬해 두 사람은 미나카미(水上) 온천에서 동반 자살을 기도한다. 이 자살도 미수로 끝나고, 마침내 하쓰요와 결별한 다자이는 후지 산 기슭에서 홀로 지내며 마음의 평온을 되찾는다.

1939년 미치코(石原美知子) 부인과의 결혼으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 다자이는, 1945년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활발한 작가 활동을 하며 소시민으로서의 생활을 즐겼다고 할 수 있다. 다자이가 후지 산 기슭에서 홀로 지내던 당시의 생활을 기록한 것이 『부악백경』이다. 1945년 일본 패전 후 전쟁에서 패하여 윤리적 기반을 잃은 일본 사회에 가장 어울리는 무뢰파 작가로서, 이른바 '유행 작가'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사카구치 안고, 오다 사쿠노스케 등과 함께 ‘데카당스 문학’, ‘무뢰파 문학’이라 불리며 패배감에 쌓여 있던 일본 젊은이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다.

다자이의 최후는 비참했다. 폐의 질환이 악화되어 각혈은 물론, 계단도 제대로 오르내리지 못할 지경에 이른 다자이는, 1948년 6월 13일 밤 동거 중이던 야마자키 도미에와 다마 강 수원지에 뛰어들어 자살하였다. 그 시체는 닷세 후인 19일 아침, 썩어 짓무른 채로 발견되었다. 그날이 바로 다자이의 서른아홉 번째 생일이었다.

저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Ryuunosuke Akutagawa,あくたがわ りゅうのすけ,芥川 龍之介
도쿄 출생. 도쿄대 영문과 졸업. 서른다섯이라는 짧은 삶을 살다 갔지만, 문학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만큼 큰 영향력과 명작을 남긴 일본의 소설가이다. 우리에게는 일본의 신진 작가에게 수여하는 ‘아쿠타가와 상’의 실제 인물이며 ‘라쇼몽(나생문)’의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기쿠치 칸 등과 제3차 『신사조』를 발간하여 처녀작 「노년」과 「라쇼몽」을 발표했다. 그 해 나쓰메 소세키의 제자가 되고 1916년 「코」가 소세키로부터 격찬을 받아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당시의 주류에 휩싸이지 않은 이지적이며 형식미를 갖춘 단편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고대에서 제재를 가져온 초기 왕조물을 비롯하여 기독교물, 개화물, 사소설, 자연주의, 판타지 등 다방면에 걸쳐 많은 작품을 발표한 일본 최고의 단편작가로 평가된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생모의 발광으로 외삼촌의 양자로 자란 복잡한 가정 사정과 병약한 체질은 삶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워 비관적이고 회의적인 경향의 작품이 많다. 심신의 고통이 극한에 이른 35세 때 ‘그저 막연한 불안‘이라는 이유를 유서로 남기고 자살했다. 1935년부터 매년 2회 시상되는 아쿠타가와상은 그를 기념하여 문예춘추사가 제정한 일본 최고의 문학상이다.

저 : 미야모토 유리코
Yuriko Miyamoto,みやもと ゆりこ,宮本 百合子
1899년 도쿄 출생. 1916년 3월 오차노미즈 고증학교를 졸업하고, 4월 일본여자대학 영문과 예과에 입학하였으나,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의 무리』를 『중앙공론』9월호에 발표하고 학교를 자퇴해 작가 생활에 들어갔다. 1918년 아버지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그곳에서 아라키 시게루를 만나 이듬해 결혼하였다. 1930년 일본 프롤레타리아 작가 동맹에 가입하였으며, 이듬해 11월에는 일본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작품활동으로 인해 여러 차례 검거와 석방을 되풀이 하였으며, 1938년 1월 부터 이듬해 봄까지 집필 금지를 당하여 정신적, 경제적으로 타격을 받았다.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 검거되어 시력과 언어장애 등을 얻었지만, 작품활동을 계속 하였으며, 1951년 1월 21일 급성 뇌수막염균 패혈증으로 사망하였다.

저 : 이즈미 교카
Kyoka Izumi,いずみ きょうか,泉 鏡花,본명 : 이즈미 교타로
1873년 일본 이시카와 현 가나자와에서 금속공예가 아버지와 예능인 집안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전통문화가 정착되고 구비전승이 살아 숨 쉬는 도시 가나자와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문학적 감수성을 키워나갔다. 17세에 메이지 시대 대표적 소설가 오자키 고요의 작품을 읽고 감동을 받아 그의 문하생이 되고자 도쿄로 상경하여 1891년부터 3년간 오자키 고요에게 사사했다. 1895년 「야행순사」와 「외과실」을 발표하여 평론가들의 호평을 얻고 유망한 신진작가로 인정받았다. 이후 대표작인 「고야산 스님」을 비롯하여 「초롱불 노래」 「여자의 계보」 「눈썹 없는 혼령」 등 요괴나 민담, 일본의 전통 예능을 소재 삼아 이계(異界)의 공간과 고전의 세계를 그린 3백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1939년 폐종양으로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1973년 이즈미 교카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이즈미 교카상’이 제정되어 요시모토 바나나, 유미리 등 많은 유명 작가에게 수여되었다.

저 : 모리 오가이
Ogai Mori ,もり おうがい,森 鷗外
본명은 모리 린타로(森林太?)로, 근대 일본의 대표적인 계몽기 지식인이자 근대 문학의 선각자다. 오가이(鷗外)는 도쿄대학(東京大學) 의학부 출신의 군의관으로 독일 유학(1884∼1888)을 가서 위생학 연구뿐만 아니라 서양 문학을 두루 섭렵했다. 1894년 가을, 1개월간 군의관으로 조선 부산에 체재하면서 남긴 일기 등도 있다. 동서양에 걸친 넓은 시야의 소유자로서, 동서양의 학문과 문학 일반에 대한 이해를 바탕 삼아 일본 근대 문학 초창기에 평론과 번역으로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으며, 소설가·시인·학자로서도 여러 업적을 남겨 근대 문학 성숙기의 일본 문단에서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와 쌍벽을 이루는 작가다.
오가이의 대표작은 일본 근대 최초의 번역 시집 『그림자(於母影, 오모카게)』(1889)와 서양 문학 번역에 안데르센의 『즉흥시인』(1892), 입센의 『노라(인형의 집)』(1913), 괴테의 『파우스트』(1913)가 있고, 단편 소설 「무희(舞?)」(1890), 「망상(妄想)」(1911), 장편 『청년』(1910), 『기러기(雁)』(1911), 역사 소설 「아베 일족(阿部一族)」(1913), 「산쇼 대부(山椒大夫)」(1915) 「다카세부네(高?舟)」(1916), 역사 인물 전기 『시부에 추사이(?江抽?)』(1916), 그리고 『시로 쓴 일기(うた日記)』(1905)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면서 다방면에 걸쳐 활약했다.
오가이는 ‘서양에서 돌아온 보수주의자’답게 ‘동도서기(東道西器)’와 비슷한 소위 ‘화혼양재(和魂洋才)’로서 동서양에 대한 해박한 식견과 복안으로 서양의 장점을 배워 바람직한 일본 근대화의 방향을 모색했다.

저 : 나카야 우키치로
Ukichiro Nakaya,なかや うきちろう,中谷 宇吉郞
1900년 이시카와현에서 태어나 1962년에 사망한 물리학자이자 수필가. 홋카이도제국대학 이학理學부 교수가 된 1932년 무렵부터 눈雪 결정結晶 연구를 시작했고, 1936년에 대학교 저온실험실에서 세계 최초로 인공눈 제작에 성공하는 등 저온과학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또한 과학을 주제로 한 수필도 다수 남겼다. 저서로 『겨울 꽃』, 『입춘의 알』 등이 있고, 국내 번역서로는 『눈』(지만지고전천줄, 2014)이 있다.

저 : 코바야시 타끼지
Takiji Kobayashi,こばやし たきじ,小林 多喜二
20세기 초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의 대표적 작가. 아끼따 현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에 홋까이도오로 이주, 백부의 빵 공장 일을 도우며 통학했다. 졸업 후 홋까이도오 척식은행에 다니면서 글쓰기를 시작했고 1920년대 중반부터 하야마 요시끼, 막심 고리끼 등을 읽으며 프롤레타리아 작가로서 자각을 지니게 된다. 1928년, 사회주의 이론가인 쿠라하라 코레히또를 만나 그의 예술론에 크게 영향받았으며, 그해 『1928년 3월 15일』을 내놓으며 세상에 알려진다. 1929년에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게 가공선』을 발표하는데, 먼 바다를 떠도는 거대한 배를 무대로 자본주의의 착취 구조를 드러내고 노동자의 자각과 투쟁을 역동적으로 그려내어 그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읽힌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수준을 사상의 영역으로까지 끌어올렸을 뿐 아니라 일본 근대문학에도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밖에 『부재지주』 『공장세포』 『당 생활자』 등의 소설과 다수의 산문을 집필했다. 일본공산당에 대한 혹독한 탄압이 계속되면서 지하조직으로 옮겨가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집필과 헌신적 활동을 계속하다 1933년 2월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사망한다. 경찰 당국은 사인을 정확히 규명하기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2차대전 종전 후에도 그의 작품들을 금서 취급하는 등 사후에도 철저하게 박해받았다. 최근 경제위기로 인해 노동 현실이 척박해지면서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 『게 가공선』이 다시 인기를 끌며 새로이 주목받았다.

저 : 가타야마 히로코
Hiroko Katayama,かたやま ひろこ,片山 廣子
시인, 수필가, 아일랜드문학 번역가. 외교관의 장녀로 도쿄 아자부에서 태어났다. 아일랜드문학에 매력을 느껴 예이츠, 존 싱, 그레고리 부인 등의 작품을 번역했다. 자기 삶의 소소한 단상을 절제되고 우아한 문체로 엮은 만년의 수필집 『등화절』은 근대여성의 아름다운 산문으로 이름이 높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깊은 문학적 교류를 통해 서로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도 했는데, 아쿠타가와가 『어느 바보의 일생』 「나보다 나은 사람」 편에서 “재능 면에서 나와 겨룰 수 있는 여자를 우연히 만났다”며 “어찌 내 이름을 아낄까, 아껴야 할 것은 그대 이름인 것을”이라 노래한 대상으로 알려졌다.

저 : 나카하라 추야
Chuya Nakahara,なかはら ちゅうや,中原 中也
시인, 번역가. 야마구치현 의사 집안의 맏이로 태어났다. 부모는 그가 의사로 가업을 잇기 바랐으나 추야는 훗날 그의 자전적 수필 「시적 이력서」에서 어릴 때 죽은 동생을 그리며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랭보 시집을 번역했으며 자비출판한 데뷔 시집 『산양의 노래』로 주목 받았다. 결혼 후 두 살 난 아들을 잃고 심신이 급격히 미약해져 서른 살에 가마쿠라에서 급사했다.

저 : 다카무라 고타로
Kotaro Takamura,たかむら こうたろう,高村 光太郞,본명 : 다카무라 미츠타로
조각가, 시인. 목조 조각가 다카무라 고운의 장남으로 뛰어난 조각가이자, 시집 『치에코 이야기(智?子抄)』 등이 큰 사랑을 받으면서 문학사에도 족적을 남긴 시인이다. 이 시집에는 그의 아내이자 영원한 사랑인 치에코를 처녀시절부터 죽기까지 30년에 걸쳐 곁에서 지켜보며 쓴 시와 산문이 수록돼 있다.

저 : 마사무네 하쿠초
Hakucho Masamune,まさむね はくちょう,正宗 白鳥
소설가, 평론가, 수필가. 일본 근대문학사에서 메이지시대와 다이쇼시대, 쇼와시대에 이르기까지 누구보다 긴 시간에 걸쳐 문학가로 활동했다. 요미우리신문에 문학, 미술, 음악, 연극, 종교 등 다양한 분야의 평론을 썼으며 「어디로」, 「포구 근처」, 「올해 가을」 등 자연주의 경향의 소설을 썼다. 특유의 절제되고 초탈한 문체로 니힐리즘에 가까운 수필을 많이 남겼으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에서 안도 슈사쿠에 이르기까지 문인들이 사랑한 작가들의 작가였다.

저 : 마사오카 시키
Shiku Masaoka,まさおか しき,正岡 子規
하이쿠시인, 수필가. 근대 하이쿠 예술을 집대성한 인물. 시키 혹은 호토토기스라 불리는 두견새는 목에서 피를 토하도록 운다는 중국설화 때문에 폐결핵을 상징하는 새가 됐다. 대학시절 폐결핵이 발병한 이래 줄곧 병상을 멀리 떠나지 못했던 그는 필명을 시키라 짓고 하이쿠 연구와 창작에 몰두했다. 그가 만든 하이쿠 잡지 『호토토기스』는 하이쿠시인을 위한 창작의 장이 됐고 시키와 평생의 벗이었던 소세키의 작품이 처음 발표되기도 했다. 수필집 「병상육척」은 고통스런 일상을 위트 있고 아름다운 문체로 써낸 산문으로 이름이 높다.

저 : 오다 사쿠노스케
Sakunosuke Oda,おだ さくのすけ,織田 作之助
다자이 오사무, 사카구치 안고와 함께 사회통념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저작활동을 펼친 전후 무뢰파 작가. 스탕달의 영향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폐결핵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이미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아 건강을 해친 상태였다. 오사카에서 나고 자란 오다사쿠(애칭)는 왁자한 오사카 풍경과 저잣거리 사람들의 삶과 사랑을 생생하게 묘사한 장편소설 『메오토젠자이(부부 단팥죽)』로 큰 사랑을 받았다. 한편 「수필 오사카」, 「오사카의 얼굴」, 「오사카의 발견」 등 오사카의 감수성을 유쾌하고도 시니컬한 필체로 써내려간 산문을 다수 남겼다.

저 : 이쿠타 슌게쓰
Shungetsu Ikuta,いくた しゅんげつ,生田 春月
시인, 번역가. 돗토리현 출생. 『감상의 봄』, 『영혼의 가을』 등 아름다운 시집을 남겼으며, 하이네의 시를 사랑하여 시집을 번역하고 일본에 가장 먼저 그를 알렸다. 오사카에서 벳부로 향하는 뱃길 여행 중 세토내해에서 투신자살했다.

편역 : 정수윤

새로운 문체를 찾아 떠난 일본에서 그들의 자유분방한 문학세계에 매료됐다. 다자이 오사무 전집 중 『만년』 『신햄릿』 『판도라의 상자』 『인간 실격』,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문예적인, 너무나 문예적인』, 오에 겐자부로의 『읽는 인간』, 이노우에 히사시의 『아버지와 살면』, 미즈노 루리코의 『헨젤과 그레텔의 섬』 등 소설, 시, 희곡, 수필에 걸쳐 가장 적극적인 읽기인 번역을 즐거이 업으로 삼고 있다.

목차소개

1
나쓰메 소세키, 「자전거 일기」「고양이의 무덤」「나와 만년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피아노」「귤」「나의 스미다강」
이즈미 교카, 「따뜻한 물두부」, 모리 오가이, 「사프란」
마사오카 시키, 「램프 그림자」, 오카구라 덴신, 「고우야, 외롭니」
가타야마 히로코, 「여행길 봇짐의 구성」「계절이 바뀔 때마다」「다섯 송이 장미」
마사무네 하쿠초, 「꽃보다 경단」「한 가지 비밀」
다카무라 고타로, 「촉각의 세계」
나카야 우키치로, 「눈을 만드는 이야기」
미야자와 겐지, 「영국 해안」「쇠락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2
미야모토 유리코, 「도서관」
고바야시 다키지, 「감방 수필」
오다 사쿠노스케, 「오사카의 우울」「가을에 오는 것」
다자이 오사무, 「아, 가을」「온천」「그날그날을 가득 채워 살 것」
하야시 후미코, 「나의 스무 살」「나폴리의 일요일」「저는 인간을 좋아합니다」
이시카와 다쿠보쿠,「모래 한 줌」
요사노 아키코, 「출산 이야기」
나오키 산주고, 「가난뱅이의 기록」
오카모토 가노코, 「복숭아가 있는 풍경」「갈색의 구도」
나카하라 추야, 「산보 생활」
하기와라 사쿠타로, 「나의 고독은 습관입니다」
사카구치 안고, 「온천마을 엘리지」
가지이 모토지로, 「벚나무 아래는」
이쿠타 슌게쓰, 「실내여행」
하라 다미키, 「불의 아이」「염원의 나라」

엮고 옮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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