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근현대사 최고의 재무장관이자
현대 미국의 설계자 알렉산더 해밀턴의 일대기를
2만 2,000페이지에 달하는 고증자료와
50여 편의 사설을 바탕으로 세밀하게 써내려간 대작!
미국 건국의 아버지, 미국 초대 재무장관, 뉴욕의 설계자, 미국 경제의 아버지, 현대 자본주의 미국을 만든 정치가….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 앞에 붙는 수식어다. 하지만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다른 인물 모두가 자신의 명성을 더욱 빛내주는 수 권짜리 전기를 지닌 데 반해, 오직 해밀턴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엄청난 재능을 지닌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애와 업적이 후대로부터 마땅한 대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미국의 대표적인 시사평론가 중 한 명이자 최고의 비즈니스 전기작가로 명성이 높은 론 처노(Ron Chernow)가 재조명한 해밀턴의 전기(傳記)다. 처노는 2만 2,000페이지에 달하는 편지, 일기, 법적․사업적 문서 등 고증자료와 50여 편의 사설을 바탕으로 해밀턴의 일대기를 세밀하게 써내려갔다. 서인도제도 세이트크로이 섬에서 보낸 혹독한 유년기부터 시작해 22세의 나이로 조지 워싱턴의 참모가 되어 미국 독립혁명을 승리로 이끌고 연방정부의 형태를 주도하던 시절, 그가 펼친 계몽적인 폐지론,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존 애덤스(John Adams) 등 유명 정적들과 겪었던 불화들, 그리고 에런 버(Aaron Burr)를 상대로 한 1804년 7월의 결투에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해밀턴이 거쳐온 삶을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더불어 해밀턴의 맹렬한 저널리즘을 잘 보여주는 미공개 사설 50여 점과 해밀턴이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쓴 흥미로운 미공개 편지들 다수가 실려 있다.
미국이라는 신생국에 충격요법을 던지고 영감을 불어넣은 역사상 가장 건설적인 정치가. 알렉산더 해밀턴의 일대기를 다룬 이 작품은 수많은 다른 전기들의 바이블이 될 것이다.
◎ 추천사
“알렉산더 해밀턴은 이상하리만치 저평가되는가 하면 때로는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론 처노가 신중한 조사를 통해 놀라울 만큼 완전하고 멋들어지게 내놓은 이 전기를 통해서라면 해밀턴에 대해 저질러진 결례들도 곧 과거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월스트리트 저널」
“뛰어난 연구서다! 처노의 책은 해밀턴의 사상과 행동을 놀라울 정도로 색안경 없이 바라본다. 이 책에는 언제나 실제로 행동했고, 언제나 쉽지 않은 목표를 추구했으며, 계속해서 자신을 괴롭히는 악마들에게 시달리던 한 남자의 소용돌이가 담겨 있다. ‘해밀턴은 훌륭한 사람이었으나 훌륭한 미국인은 아니었다’는 말이 있지만, 처노가 그린 해밀턴은 훌륭한 사람이자 훌륭한 미국인이다.”
에드먼드 모건, 「뉴욕 도서 리뷰」
“알렉산더 해밀턴은 조지 워싱턴이나 토머스 제퍼슨 등 그가 모셨던 여타 건국의 아버지들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론 처노의 훌륭한 이 전기는 확실히 그 판도를 바꾸어놓을 것이다.”
존 프리먼, 「타임아웃 뉴욕」
“론 처노가 이 위대한 전기에서 지적하듯, 해밀턴은 초기 미국 정치의 신동이었다.”
「이코노미스트」
“계몽주의자이자 반동자였던 건국의 아버지 해밀턴의 놀라운 생애! 『알렉산더 해밀턴』은 훌륭한 글솜씨와 수많은 매력들이 넘쳐나는 책이다. 오늘날 출판된 최고의 해밀턴 전기이자 모든 전기 작가들의 모범이 될 책.”
「키르커스 리뷰」
“『금융 제국 J. P. 모건』 『바르부르크 가문』 『부의 제국 록펠러』와 존 D. 록펠러 전기의 저자인 론 처노는 근대 미국을 건설한 다른 그 누구보다도 많은 일을 해낸 건국의 아버지 해밀턴에게 생동감을 불어넣어주었다. 이 책은 해밀턴을 무게 있게 담아낸 전기다.”
마이클 린드, 「워싱턴포스트」
◎ 출판사 서평
뮤지컬 〈해밀턴〉의 역대급 대흥행!
미국은 왜 지금 알렉산더 해밀턴에 열광하는가?
미국의 초대 재무부 장관이었던 알렉산더 해밀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것도 아니었고 자신의 업적을 빛내줄 번듯한 전기 한 권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그의 생애가 사후 200년이 훨씬 지난 지금,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그의 일대기를 그린 뮤지컬 〈해밀턴〉이 2015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이후, 뮤지컬·연극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토니상 11개 부문 수상을 비롯해 그래미상, 퓰리처상, 에미상 등을 휩쓸며 역대급 흥행을 기록하는 중이다. 뉴욕, LA, 워싱턴, 런던 등 공연하는 도시마다 예매 시작 24시간도 채 되기 전에 매진 사태가 이어지고 있으며, 온라인 대기자만 해도 10만 명이 넘는다. 오바마 전 대통령 부부도 재임 시절 두 번이나 관람한 것으로 알려졌다.
도대체 무엇이 미국을 넘어 세계인들을 알렉산더 해밀턴에 열광하게 만들었는가? 알렉산더 해밀턴은 누구인가?
다른 그 어떤 건국의 아버지들도
한 국가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국력에 대해
이토록 명확하고 선지적인 전망을 내놓지 못했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미국 역사상 대통령에 오르지 않은 정치적 인물들 중 가장 중요한 존재일 뿐 아니라, 심지어 수많은 역대 대통령들보다 더 크고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정치인이었다. 영국과의 전쟁으로 빚더미에 올라 있었던 신생국가의 살림을 떠맡아 예산제도와 조세제도 정비, 중앙은행 설립, 장기채 발행, 연안 경비대 창설 등 헌법 제정과 재무 구조의 기초를 놓았으며, 헌법해설문 ‘연방주의자The Federalist’를 직접 집필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도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 카리브 해의 작은 섬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그는 독립전쟁에 참전해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의 최측근 참모로 활약한 후 변호사가 됐고, 정계에 진출하여 오로지 자수성가로 ‘건국의 아버지’ 대열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49세의 나이로 정적이었던 에런 버와의 결투에서 총에 맞아 숨지기까지, 토마스 제퍼슨과 더불어 워싱턴 내각을 이끄는 양대 축이자 강력한 중앙정부를 지지하는 ‘연방주의자’로서 야심과 비전이 가득했던 삶을 살았다.
현대 자본주의 미국을 만든
역사상 가장 건설적인 정치가,
알렉산더 해밀턴의 삶을 재조명한다
론 처노의 『알렉산더 해밀턴』은 브로드웨이 최고의 화제작 뮤지컬 〈해밀턴〉에 영감을 준 작품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시사평론가 중 한 명이자 미국 최고의 비즈니스 전기작가로서 명성이 높은 론 처노는, 『알렉산더 해밀턴』을 통해 알렉산더 해밀턴의 격동적인 삶을 재구성했다.
2만 2,000페이지에 달하는 편지, 일기, 법적․사업적 문서 등 고증자료와 50여 편의 사설을 포함하여 다수의 미공개 편지들을 바탕으로 세밀하게 써내려간 이 책은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으며, 조지워싱턴 도서상 수상, 미국도서관협회 ‘올해 주목할 만한 책’ 선정,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최종 후보작 노미네이트 등 미국 전역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알렉산더 해밀턴이 사망한 뒤 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애쓴 토머스 제퍼슨과 존 애덤스 때문에, 미국의 다른 ‘건국의 아버지’들과는 달리 제대로 된 전기가 없었던 그의 생애를 재조명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더욱 깊다.
론 처노는 “오늘날은 이미 오래전 미국의 자본주의 혁명을 예언했던 해밀턴의 삶을 재평가하기에 딱 좋은 시기”라고 말한다. 해밀턴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대에서 당대로 전령이나 다름없으며, 현재의 우리는 그가 예견했던 무역과 산업, 증권거래, 은행들이 복잡한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현대 자본주의 미국의 설계자일 뿐 아니라, 세계 근현대사 최고의 재무장관으로 평가받는 알렉산더 해밀턴. 그는 이제 20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전략가로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 책 속에서
분명한 것은 알렉산더 해밀턴은 미국 역사상 대통령에 오르지 않은 정치적 인물들 중 가장 중요한 존재일 뿐 아니라, 심지어 수많은 역대 대통령들보다 더욱 크고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이다. 해밀턴은 건국의 아버지들 중에서도 손꼽힐 만큼 여러 역할을 해냈다. 그는 사상가임과 동시에 행동가였고, 재기 넘치는 이론가임과 동시에 수완 좋은 집행자였다. (중략) 제퍼슨이 미국 정치 담론의 정수가 될 만한 시를 썼다면, 해밀턴은 미국이라는 국가의 경영에 대한 산문을 쓴 인물이다. 다른 그 어떤 건국의 아버지들도 장래 미국의 정치적・군사적・경제적 국력에 대해 그토록 명확하고 선지적인 전망을 내놓지 못했으며, 국가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그토록 기발한 메커니즘 역시 제시하지 못했다.
- p.18-19, 프롤로그
해밀턴의 친가와 외가 모두는 불안정한 서인도제도 중산층의 삶을 살았다. 위로는 플랜테이션 귀족들에게 치이고, 아래로는 거리의 폭도들이나 제멋대로 구는 노예들에게 시달리는 삶이었다. 평생 사생아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던 해밀턴이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렸던 것도 이해할 만하다. 그는 ‘나의 출생은 가장 굴욕적인 범죄의 산물’이라며 고통스러운 고백을 뱉기도 했다. 해밀턴은 어린 시절의 가족사를 금기처럼 취급했고, 오로지 수수께끼 같은 편지들 두어 장에서만 이에 관한 암시를 넌지시 남겼을 뿐이다
- p.26, 제1장 표류자들
세인트크로이 섬의 노예무역이 그로 하여금 평생 노예제를 혐오하고 훗날에도 폐지론자로 활동하게 만들었다는 점은 누가 봐도 명백하다. 그러나 그의 의식 속에는 한층 더 깊은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토록 계층화된 사회에서 겁 많은 농장주들은 언제나 노예들의 반란을 두려워하며 살았고 그것을 피하기 위해 군사 체제를 강화했다. 아메리카로 건너간 후에도 해밀턴은 무정부 및 무질서 상태에 대한 큰 두려움을 계속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그의 마음속에서 자유에 대한 열렬한 사랑만큼이나 큰 비중을 차지했다. 해밀턴의 소년기가 그에게 남겨준 유산은 다소 모호하게 정의될 수도 있겠다. 그는 농장주들과 그들의 압제적 지배가 낳은 폭압을 혐오하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불만을 품은 노예들이 일으킬 수 있을 반란도 두려워했다. 이후 폭정과 무정부라는 두 개의 망령은 평생 그를 괴롭혔다.
- p.73, 제2장 표류자들
전투 이후, 조지 워싱턴은 지휘권 행사를 위해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로 향하던 도중 뉴욕에 잠시 들렀다. 6월 25일, 호보컨 (허드슨 강 연변에 위치한 항구도시_역주) 연락선을 타고 허드슨 강을 건너온 그는 백마들이 끄는 마차를 타고 브로드웨이를 따라 행차했다. 이 웅장한 승리의 행렬은 킹스칼리지 또한 스쳐 지나갔다. 그 영광스러웠던 여름날의 오후, 알렉산더 해밀턴은 채 2년도 지나지 않아 자신이 지금 처음으로 목도한 저 인물의 부관으로 일하게 될 것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구경꾼들 사이에 서 있었다. 조지 워싱턴은 푸른색 제복에 보라색 띠를 매고 예의 깃털 장식이 달린 모자를 쓴 채 필립 스카일러 소장과 함께 웅장하고 빠르게 그를 지나쳤다.
- p137, 제4장 펜과 검
해밀턴은 평생 동안 역사적인 사건들에 끊임없이 연루되는 재주가 있었는데, 1780년 9월에는 베네딕트 아널드 장군의 반역을 목도하게 되었다. 코네티컷 주 노위치에서 태어난 아널드는 젊은 시절엔 약제사와 도서 상인을 거쳐 모험심 강한 사업가로 거듭나기도 했었다. 용감한 군인이자 전쟁사를 공부하는 학생이었던 그는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수차례 두각을 드러냈으며, 겨울의 퀘벡 전투에서는 총상을 입기도 했다. 그가 새러토가 전투에서 또 다시 부상을 입어가며 너무나도 용맹하게 싸웠기 때문에 해밀턴을 포함한 많은 이들은 그를 승리 뒤에 숨겨진 일등공신이자 진정한 영웅이라고 생각했다.
- p268~269, 제7장 상사병에 걸린 중력
연안경비대를 창설하면서 해밀턴은 엄격한 전문성과 흠잡을 데 없는 행동을 고집했다. 그는 만일 밀수감시정의 선장들이 다른 선박을 수색할 때 오만불손한 태도를 보인다면 그런 고압적인 행동으로 대중의 지지를 잃을 수도 있음을 잘 알았다. 이에 해밀턴은 선장들에게 자제된 단호함을 요구하면서 ‘동포들은 자유 시민이며, 압제적 정신의 기미가 아주 약간이라도 보이는 그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임을 언제나 잊지 말라. 그러므로 자네들은 (중략) 외견상의 오만이나 무례, 혹은 모욕을 자제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외국 선박의 승선에 대해 해밀턴이 남긴 지시는 너무나도 훌륭해서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까지도 적용될 정도였다.
- p.627, 제17장 미국 최초의 타운
레이널즈 사건이 미칠 악영향을 해밀턴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이유들 중 하나는 어쩌면 미국이 고압적인 프랑스와 곧 전쟁에 돌입할 수도 있겠다는 불길한 예감이었다. 해밀턴은 만일 그러한 갈등이 벌어진다면 그 안에서 요직을 맡고자 했고, 이 때문에 추문이 암시되는 상황을 간과할 수 없었다. 수많은 공화파 인사들이 예상했듯이, 프랑스는 밀수품들을 싣고 영국 항만으로 향하는 미국 선박들을 자국의 사나포선으로 약탈하는 방식을 통해 제이 조약에 대한 보복을 가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신흥 군 세력으로 떠오르자, 해밀턴은 그의 부대가 유럽 전역에 전제 정치를 퍼뜨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메리쿠스(Americus)’라는 이름으로 글을 썼던 해밀턴은 1797년 초 ‘인류를 계몽하고 국가 제도를 개혁한다는 허울 좋은 가식은 사람들을 예속하려는 진정한 의도를 번지르르하게 포장한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프랑스가 ‘만국의 공포이자 골칫거리’가 되리라고 예상했다.
- p.1002, 제31장 지옥의 도구
이튿날 해밀턴의 총알을 찾기 위해 결투 현장으로 돌아온 펜들턴은 그곳 주변의 한 삼나무 가지에 박혀 있던 총알을 발견했다. 삼나무는 결투장에서부터는 12피트(약 3.6미터_역주) 떨어져 있고, 버가 서 있던 곳과도 역시 4피트(약 1.2미터_역주)쯤 거리가 있었다. 즉, 절대 버의 근처는 아니었던 것이다(펜들턴은 그 삼나무 가지 전체를 잘라내 존 바커 처치에게 전달했는데 이는 법적 증거물로 제출하거나 해밀턴의 죽음을 기리고자 간직하기 위해서였다). 해밀턴이 먼저 발포한 것이 사실이라면 해밀턴은 미리 예고했던 그대로 엉뚱한 곳에 총을 쐈던 것이다. 만약 펜들턴이 주장한 대로 버가 먼저 발포했다면 해밀턴이 고통으로 인한 경련 반응으로 저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겼고 이때 발포된 총알이 나무에 박힌 것이다. 어느 쪽이든 해밀턴은 에런 버를 겨냥해 총을 쏘지 않았다
- p.1285, 제31장 치명적인 나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