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 독자를 감동시킨 〈현문우답〉 예루살렘 기행 완결편
정양모 신부, 길희성 교수, 고진하 목사 추천!
인간을 품은 신이자 신을 품은 인간 예수가 우리에게 전하는 신의 속성
예수의 눈은 깊다.
현상 속의 본질을 본다.
우리의 눈은 그 반대다.
본질이 아니라 현상만 본다.
그래서 예수는 말한다.
“네 마음의 눈을 돌려라.”
◎ 도서 소개
제1회 한국기독언론대상, 제 19회 불교언론문화상 수상작가
백성호의 〈현문우답〉 예루살렘 기행 완결편
정양모 신부, 길희성 교수, 고진하 목사 추천!
예수의 눈은 깊다. 현상 속의 본질을 본다.
우리의 눈은 그 반대다. 본질이 아니라 현상만 본다.
그래서 예수는 말한다. “네 마음의 눈을 돌려라.”
성경에서 배우는 삶의 이치, 행복의 원리
《중앙일보》에서 연재하고 있는 〈현문우답〉을 통해 일상 구도자로서 내면 탐색을 이어온 백성호 기자가 성경 속 예수의 자취를 따라가는 여행을 완성했다. 예수의 말씀에 담긴 이치를 만나기 위해 이스라엘로 떠난 저자는 기행을 시작하며 ‘예수는 누구인가’, ‘어떻게 예수에게 다가갈 수 있는가’, ‘십자가를 지고 걸었던 죽음과 부활의 장소에서 예수는 어떤 의미인가’ 하는 물음을 던졌다.
예수의 말씀 속에 담긴 숨은 이치를 사유했던 『흔들림 없이 두려움 없이』(‘2017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도서)에 이어 심화된 질문을 이어간다. 예루살렘 성, 갈릴래아 호수, 골고타 언덕,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걸었던 길,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곳, 부활한 장소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숨결이 남은 현장을 직접 보고 듣고 느끼며 예수의 말씀에 몸과 마음을 열고 귀 기울였다. 이스라엘을 기행하며 현장을 담은 사진에 더해, 성경의 메시지에 영감을 받은 거장의 회화들은 성경 속 말씀을 더욱 생생하게 전한다.
종교 담당 기자로서 종교의 벽을 넘어 수많은 종교인들을 만나고 그들을 통해 ‘이치’를 궁구해온 백성호 기자는 열린 시각으로 예수의 말씀을 탐구한다. 성경 구절을 앞에 두고 고뇌할 때 때로는 불교의 경전이, 때로는 틱낫한 스님의 시가, 때로는 이슬람 영성가 루미의 시가 깨달음의 동반자가 된다.
기독교적인 해석을 넘어 하나의 이치로서 예수의 말씀을 읽어보고 싶다면, 인간이자 신이고 신이면서 인간인 예수의 존재를 만나고 싶다면, 이 책은 성경을 품고 떠나는 순례길에 좋은 동반자가 될 것이다. 비교도들도 종교적 관점에 대한 부담과 어려움 없이 예수의 삶과 행적, 성경을 통해 심화된 마음공부를 할 수 있다.
인간을 품은 신이자 신을 품은 인간, 예수가 우리에게 전하는 신의 속성
『예수를 만나다』는 3부로 나뉘어 있다.
1부 ‘욕망 속에서 예수를 만나다’에서는 예수의 이적으로 알려진 일화들을 중심으로 이 이야기들이 전하는 진리를 찾아본다. 성경에는 예수가 행한 많은 이적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한 예수의 이적이 과학적 사실인가 아닌가를 두고 논란이 되어왔다. 저자는 그러한 논란을 넘어, 물 위를 걷고 하혈하는 여인을 치유하고, 죽은 소녀를 되살리고, 마귀 들린 자들에게서 마귀를 쫓아내고,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인 예수의 이적이 진정으로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우리에게 어떤 이치를 전하는지 깊이 묻고 그 답을 찾아본다.
‘예수는 왜 수천 명의 군중에게 빵과 물고기를 건넸을까. 한 끼 굶는다고 해서 사람들이 죽는 상황도 아니었다. 더구나 예수는 스스로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빵과 물고기를 통해 예수가 진정으로 건네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본문 중에서
2부 ‘예수의 눈으로 진리를 보다’에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성경 구절들 앞에서 물음을 던진다. 예수의 말씀 중에 쉽게 이해되지 않는 구절들이 있다. 혹자는 “의심하지 말고 무조건 믿으라”고 하지만, 저자는 끝내 그 구절들 속에 숨겨진 비밀을 풀고자 예수의 눈을 따라가며 물음을 던진다. 예수의 말씀은 정확하고, 그 안에 진리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분명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왜 마태오 복음서 10장 34절에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했을까. ―본문 중에서
3부 ‘예수의 부활과 나의 부활’에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시공간을 재구성하며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찾아본다. 예수가 일으킨 기적 가운데 무엇보다 논란이 되는 것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한 사건일 것이다. 저자는 골고타 언덕을 오르며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시공간을 재구성해본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지금 현재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지 그 답을 구한다.
예수가 부활하는 곳은 진정 어디일까. 온갖 고고학적 지식을 총동원해 찾아가는 이 언덕의 땅속 어디쯤일까. 아니면 골고타 언덕의 꼭대기일까. 그런 유적지 속일까. 아니다. 예수가 부활했던 곳, 지금도 부활하는 곳, 앞으로도 부활할 곳은 거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의 내면이다. 나의 고집이 무너진 자리에 신의 속성이 드러난다. ―본문 중에서
『예수를 만나다』는 예수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공간과 성경의 배경이 된 실제 장소들을 저자가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며 진짜 예수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았다. 예수가 머문 곳에서 예수가 머문 만큼 저자도 머물며 ‘예수의 펀치’를 묵상하고 ‘내 맘대로 스케줄’을 수행하며 깨달은 감동과 전율을 담았다. 신앙적 순례, 교리 연구와는 다른 끊임없는 물음 속에서의 체험과 여정인 것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일종의 대화록이다. 기행하며 끊임없이 예수에게 물었고, 예수는 답했다.
수태고지 교회 앞 석류주스 노점에서 길을 지나가는 나자렛의 중학생들을 보며 예수의 사춘기를 떠올렸고, 갈릴래아 호수와 골란 고원을 적시던 비를 맞으며 후두둑 내리꽂는 예수의 빗줄기에 몸을 맡겼으며, 바람이 불면 예수의 산상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의 마음에 불었던 바람을 상상했다. 예수의 속성은 사라지는 순간이 아니라 우리 곁의 영원으로 깃들어 있음을 온몸으로 체감한 시간이었다.
예루살렘 숙소에 머물며 저자는 시차 때문인지 새벽에 눈을 떴다. 창밖으로 올리브산이 보이고 멀리 동이 터오는데 “꼬끼오!” 하고 닭이 울었다. 2000년 전 베드로가 들었던 닭 울음도 이런 소리였겠구나. 그런 식으로 백성호 기자는 예수의 삶을, 시대를 만났다. 마음 순례를 떠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도 『예수를 만나다』는 ‘거함’의 여정 어딘가에 놓이는 작은 징검다리가 되어줄 것이다.
◎ 추천사
자칫 무겁고 편향적일 수 있는 종교 이야기를 누구나 쉽게 신앙의 세계로 접근할 수 있도록 간결하고 분명하게 깊이 있고 재미나게 썼다. 백성호의 예리함이 엿보이는, 참으로 흥미로운 글이다.
—정양모(신부·성서학자)
백성호의 복음서 읽기는 매우 독특하다. 복음서에 나오는 수많은 기적 이야기는 접하는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지만, 백성호는 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특유의 ‘영적 읽기(lectio divine)’를 통해 돌파해 들어간다. 2000년의 세월이 지나도 자연은 의구하다는 말이 참인 것 같다. 그는 갈릴래아 호수 등 예수님과 제자들의 활동 무대였던 지역들을 거닐면서 이야기들의 의미를 곰곰이 곱씹어본다. 자신을 과거화하는 가운데 과거가 현재화된다. 흔히 기적 이야기들은 기복 신앙을 부추기지만, 이야기들의 세세한 부분을 예사롭게 넘기지 않고 파고드는 그의 영적 독서를 주도하는 것은 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불교의 마음공부이다. 결국 모든 것이 현대를 사는 우리들 자신의 문제로 귀착된다.
—길희성(서강대학교 종교학과 명예교수)
하늘에 대한 경외심을 잃어 우주를 장터로 만드는 시대에, 백성호는 예수의 삶의 행적과 말씀을 따라가며 하늘을 우러르며 사는 맑고 향기로운 영성의 오솔길을 열어놓고 있다.
—고진하(시인·한살림교회 목사)
◎ 책 속에서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이 말을 듣고서 고개 들지 않을 욕망이 있을까. 이 말을 듣고서 청하고 싶지 않은 욕망이 있을까. 그래서 사람들은 청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앞에서 자기 안의 욕망을 청한다. 그런 광경을 볼 때마다 나는 물음이 올라온다. ‘그리스도교는 영성의 종교인가, 아니면 욕망의 종교인가?’ ―14쪽
삶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한쪽은 에고를 키우는 길이고, 다른 쪽은 에고를 줄이는 길이다. 한쪽은 ‘나의 뜻’을 따르는 길이고, 다른 쪽은 자신의 뜻이 무너진 곳으로 드러나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길이다. 예수는 후자를 따랐다.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은 채 그 길을 따랐다. 예수가 설한 그리스도교는 ‘욕망의 종교’가 아니라 ‘영성의 종교’였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 길이 싫은 걸까. 왜 자꾸만 거꾸로 가고 싶을까. 어째서 영성의 종교가 아니라 욕망의 종교를 따르고 싶은 것일까. ―14쪽
예수는 인간을 품은 신이자 신을 품은 인간이다. 다시 말해 100퍼센트 신이자 100퍼센트 인간이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겪는 희로애락을 예수도 겪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예수도 공유했다. 어릴 적에는 엄마의 젖을 먹다 토하기도 하고, 걸음마를 하다 몇 번이나 넘어지기도 했을 것이다. 사춘기 때는 옆집에 사는 또래 소녀를 생각하며 가슴이 뛴 적도 있지 않았을까. 만약 그런 과정이 없었다면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았을까.
세상의 모든 현자들은 인간으로서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깨달음을 얻는다. 자신이 직접 ‘인간’을 경험하지 않으면 인간을 온전히 알 수가 없다. ‘인간’을 알지 못하면 그들에게 이치를 전할 수도 없다. 어둠을 지나온 사람이 어둠을 안다. 어둠을 지나오지 않은 사람은 어둠을 알지 못한다. 어둠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 빛을 일깨우려면 먼저 어둠을 알아야 한다. ―53~55쪽
누군가에게는 성서가 ‘나의 이야기’이고, 누군가에게는 성서가 ‘남의 이야기’이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성서에 담긴 예수의 메시지는 화살이다. 이런저런 일화를 통해 예수는 끊임없이 활시위를 당긴다. 그 화살이 과연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예수가 당기는 활시위가 열두 제자나 동시대 유대인들을 향한다고 생각하면 성서는 남의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과녁이 그쪽이기 때문이다. 반면 예수가 당기는 활시위를 돌려 자기 가슴 앞에서 멈추는 이도 있다. 그런 사람은 예수의 과녁이 되기를 자처한다. 그럴 때 예수가 쏘아대는 화살이 어디에 꽂힐까. 그렇다. 나의 몸, 나의 마음에 꽂힌다. ―62쪽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어찌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돛을 올릴 수도 없고, 노를 저을 수도 없을 때. 그런데 파도마저 거세게 몰아친다. 인생이라는 배는 때때로 그런 위기를 맞는다. 그 속에서 허둥대는 우리를 향해 예수는 말한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84쪽
예수 앞에 양 한 마리가 나타났다. 양이 구덩이에 빠져 목숨이 위태롭다. 안식일이지만 양은 쉴 수가 없다. 그 모습을 보는 예수의 마음은 어땠을까. 예수도 쉴 수가 없다. 그런 양이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떨까. 세상 역시 쉴 수가 없다. 그러면 그 모두를 품고 있는 우주는 어떨까. 마찬가지다. 내가 쉬지 못할 때는 우주도 쉬지 못한다. 내가 쉴 때 비로소 우주도 쉰다. 예수가 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쳤는지 이제 그 이유가 보인다. 예수야말로 안식일을 지켰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의 껍데기를 지킬 때 예수는 홀로 안식일의 알맹이를 지켰다. 예수의 눈에는 이 모 든 우주가 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안식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진정 으로 안식일을 지킨 사람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예수였다. ―115쪽
우리 마음은 꾸깃꾸깃하다. 수시로 구겨진다. 온갖 세상사를 감당하느라 마음의 도화지는 구겨진 종이 뭉치가 된 지 오래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구겨진 마음만큼 우리 삶도 뻣뻣해진다. 그래서 안식이 없다. 예수는 그런 우리를 향해 말했다. “네 마음을 뻗어라.” 구부러진 것을 펴고, 오그라든 것을 펴고, 접힌 것을 펴라는 말이다. 그렇게 본래로 돌아오라는 뜻이다. ―116~117쪽
나는 이 대목에서 ‘예수의 눈’을 읽는다. 바리사이들은 사람의 겉모습을 봤다. 그 사람은 어디 출신이고, 직업은 무엇이고, 신분은 어떠하며,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그런 것을 따졌다. 그래서 세리와는 식탁에 함께 앉지도 않았다. 예수는 달랐다. 그런 것들은 모두 무시했다. 율법주의 사회였던 2000년 전의 이스라엘에서 예수의 행동은 상당히 도발적이고 혁명적이었다. 예수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한 예수의 말 속에 답이 있다. 예수는 사람의 겉모습을 보지 않았다. ―180~181쪽
성경을 펼칠 때마다 가슴이 멎는다. 예수는 정확하다. 참 놀랍다. 더 하는 일도 없고 빼는 일도 없다. 예수 당시에도 ‘메시아’를 자처하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남의 눈에서 티를 빼려 했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내가 네 눈 속의 티를 빼주겠노라.” 이런 장면이 예수의 눈에는 얼마나 희극적이었을까. 큼직한 들보가 박힌 눈으로 남의 눈을 훑으며 티끌을 찾으니 말이다. 비단 ‘가짜 메시아’들만이 아니다. 예수의 지적은 들보가 박힌 눈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된다. ―186쪽
예수의 메시지도 그렇다. 물음이 풀려야 메시지도 풀린다. 그럴 때 성경은 길이 되고, 예수를 만나는 통로가 된다. 그러므로 물음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자기 안에서 올라오는 물음을 끝없이 좇아야 한다. 그래야 예수의 메시지를 뚫을 수 있다. 성경 속 예수의 메시지가 뚫릴 때 나 자신도 뚫린다. 그렇게 ‘내’가 뚫릴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를 만난다. ―204쪽
사람들은 반박한다. 어떻게 집착 없이 사랑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그런데 큰 사랑에는 집착이 없다. 작은 사랑에는 집착이 있다. 예수는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과 딸을 사랑하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큰 사랑으로 그들을 대하라고 했다. 그래서 칼을 내려치라고 했다. 집착하는 사랑은 작은 사랑이다. 집착하는 평화는 작은 평화다. 결국 사라지고 만다. 그러니 합당할 수가 없다. 예수의 평화는 큰 평화 , 영원한 평화이기 때문이다. ―212쪽
무너진 바위 위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심판이란 무엇일까. 사람들은 심판을 거론할 때 주로 ‘종말’ 혹은 ‘사후 심판’을 떠올린다. 그래서 천국에 가느냐, 지옥에 가느냐를 따진다. 그런데 그게 전부일까. 심판은 우리가 신의 속성에서 벗어났을 때 감당해야 하는 결과물이다. 그것이 심판이다. 그러므로 심판의 순간은 우리가 살아가는 매 순간에 있지 않을까. 신의 속성을 등지고 에고의 속성을 따름으로 인해 삶 에서 감당해야 하는 온갖 파도들 말이다. 그런 파도들이야말로 심판의 흔적이 아닐까. 그런 파도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한다. 돌아가라고, 신의 속성으로 돌아가라고 말이다. ―221~223쪽
‘그렇다면 2000년 세월이 흐른 지금은 어떨까. 예수가 다시 이 땅에 온다면 어떨까. 성전 대신 곳곳에 세워진 교회를 둘러본다면 어떨까. 예수는 과연 모든 집을 ‘기도의 집’이라 부를까. 아니면 그중 많은 집 들을 향해 ‘강도들의 소굴’이라 꾸짖을까.’
나는 여전히 궁금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도 ‘교회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환전을 하고 비둘기를 팔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244쪽
그렇다면 진정한 가나안은 무엇이고 또 어디일까. 오랜 세월 광야를 떠돌아야 했던 유대인들에게는 ‘나의 땅, 나의 조국’이 가나안이었으리라. 식민지 시절, 대한제국 백성에게 해방된 조국이 하나의 ‘가나안’이었듯이 말이다. 그런데 막상 해방된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떤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살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지금도 ‘가나안’을 찾고 있다. 약속의 땅, 낙원의 땅을 갈구하고 있다. ―254~255쪽
누구나 삶의 이유가 있다. 예수는 자신이 사는 이유를 간결하게 풀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I come into the world, that I should be testifying to the truth).” 그랬다. 예수가 이 세상 속으로 들어온 이유는 하나였다. 우리가 사는 땅으로 걸어 들어온 이유는 하나였다.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진리(眞理)’란 무엇일까. 진실한 이치다. 예수는 그것을 증언하고 증명했다. ―307쪽
끝없이 뻗는 가로와 끝없이 뻗는 세로. 영원히 만날 것 같지 않은 둘이 만난다. 딱 한 번 만난다. 거기가 바로 십자가다. 신과 인간도 그렇게 만난다. 예수가 못 박힌 곳. 바로 그 십자가 위에서 신과 인간이 만난다. 인간과 신이 만난다. 둘이 하나가 된다. 사람들은 묻는다. “그럼 우리도 그렇게 사형을 당해야 하나? 그래야만 우리도 신을 만날 수 있나?” 그렇지 않다. 예수는 우리에게 “각자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다. 그리하지 않는 이는 자신의 제자가 아니라고 했다. 십자가가 뭘까. 그것이 과연 이스라엘의 골고타 언덕 위에만 있는 것일까. 아니다. 소소하고 번잡한 우리의 일상 속에 그런 십자가가 숨어 있다. 내가 꺾지 못하는 나의 고집, 나의 잣대가 바로 내가 짊어질 십자가다. ―332쪽
어떤 사람에게 예수의 부활은 물리적 부활이다. 그들은 예수의 육신이 죽었다가 되살아났다고 믿는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수의 부활 이라고 여긴다. 골고타 언덕에 서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왜 우리는 그게 믿고 싶을까. 영혼이 아닌 육신이 되살아났다고 믿고 싶을까. 어쩌면 거기에는 ‘나의 욕망’이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이 몸뚱이를 가지고 영원히 살고 싶다는 은밀한 기대. 예수의 육신이 부활했으니 예수를 믿는 나의 육신도 부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은밀한 욕망 말이다. 그런 욕망이 우리의 믿음, 그 아득한 밑바닥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은 아닐까. ―348쪽
진정 어디일까.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예수가 묻힌 곳 말이다. 나는 그곳이 골고타라는 물리적 공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수가 묻힌 곳, 그리고 되살아나는 곳. 그곳은 바로 ‘내 안’이다. 나의 가슴이다. 그곳이야말로 진정한 부활의 공간이다. ―3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