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서, 그녀가 써내려간 감정의 편린들
장 뤽 고다르의 영화 <비브르 사 비>는 영화 역사상 가장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한 여인의 생을 그렸다. 관객으로 하여금 애써 감정적 동화를 유발하려 하지 않고, 감정 이입을 배제한 연출 기법을 선보인 이 작품을 통해 관객은 철저한 관찰자적 시선으로 여인의 삶을 응시한다. 당시 고다르의 아내였던 안나 카리나가 연기한 나나는 다양한 얼굴을 지닌 인물이다. 사랑스럽거나 안타깝거나 천박하거나……. 인간 내면을 비추는 살아 있는 거울인 셈이다. 그리고 여기, 배우이기 이전의 자연인 윤진서 역시 자신의 내면을 고스란히 드러낸 한 권의 책을 발표했다. 표지에 실린 사진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창문 너머 옅은 해무가 낀 바다 위에 홀로 선 작은 섬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동정이나 연민이 느껴지지 않는다. 고다르의 영화 제목에서 차용한 윤진서의 첫 번째 책『비브르 사 비 Vivre sa vie』는 애달픈 사랑에 전율하고, 이별에 몸서리치면서도 시종일관 차분한 어조를 지키며 상념과 감각의 파편을 흘려보내는 한 편의 흑백 영화를 보는 듯하다. 너무 내밀하고 솔직한 나머지 역설적으로 에로틱하기까지 한 윤진서의 언어. 오롯이 홀로 인생을 탐구하며 남긴 그녀의 흔적으로 인해 우리는 미처 깨닫기도 전에 우리 가슴에 촉촉이 스며든 그녀의 문장에 놀라면서도, 이를 증발시키려 하기보다는 더욱 깊이 배어들기를 기대할 것이다.
그렇게 ‘그녀의 인생을 살다 Vivre sa vie’
플라멩코, 이것은 인생을 회고하는 독백이다. 환희에 찬 순간도,
고통에 젖은 시간도 내재되어다가 손끝과 발끝을 타고 음악과
함께 쏟아낸다. 구두에 갇힌 발을 힘차게 구르며 아픔을 짓이겨
삶의 희로애락을 무대 위에 펼쳐 보인다. 사랑의 찬가와도 같은
짧은 환희의 순간이 지나면 독백과도 같은 춤사위가 잦아들며
무희 홀로 무대를 지킨다. 인생은 플라멩코를 닮았다.
- 본문 중에서
한국에서 배우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주변의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는 직업. 자신을 지키되, 다른 인생을 그려내는 자. 그리하여 황홀한 찬사와 가혹한 혹평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애써야 하는 고독한 존재. 스크린 너머 세상에서 숱한 인생을 살아감과 동시에 현실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자기 안에 자리한 진짜 ‘나’를 찾으려 노력하는 이들은 그래서 때로는 자신에게 가혹하게 굴기도 한다.
다행인 것은 학창시절 꾀병을 부려 학교를 빼먹고, 가족들이 모두 출근하기만을 기다려 텔레비전 앞에 앉아 영화의 세계에 빠져들던 소녀가 결국 어엿한 배우가 되어 지난한 외로움과 사투를 벌이며 농익은 여인으로 성장해 스스로 자신을 ‘배우기’로 결심하고 글을 써 세상에 내놓았다는 점이다. 쉽게 답을 찾기 어려운 생각들을 말로 하는 대신, 책상 앞에 앉아 단어와 문장으로 빈 문서를 채우며 자신과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한 윤진서. 그로 인해 마음의 응어리를 하나 둘 풀어낸 그녀는 영화 속 등장인물이 아니라, 온전한 그녀 자신의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설 용기를 냈다. 데뷔 이전의 모습을 시작으로 사랑, 이별, 여행에 관한 무수한 이야기들을 써내려간 문장과 무심한 듯 그렇게 여기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흑백 사진은 지나온 길을 반추하며 나직하게 속삭이는 윤진서의 음성을 떠올리게 한다. 앞으로 더 많은 것을 듣고, 더 많은 것을 보며 살아가고 싶다고 말하는 윤진서는 이로써 오늘도 그녀만의 방식으로 그녀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내 귀에 들리는 게 많았으면 좋겠고,
내 눈에 보이는 게 더 많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채워서 가는 인생이고 싶다.
세상이 좋다는 것에 흔들리지 않고,
내게 가치 있는 것을 찾을 줄 아는 사람이고 싶고,
작은 것도 잘 찾아내어 쉽게 감동하는 마음으로 살고 싶다.
그렇게 스치는 게 많아 가슴에 자국이 많은 사람이고 싶다.
-프롤로그 중
‣ 본문 중에서
시험과 성적, 이성 친구로 고민하는 또래들과 달리 나는 보다 근본적인 고독과 사투를 벌였다. 그로 인해 친구들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행복하고 따뜻했던 가정은 아니었으므로 나는 이를 대신할 세계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학교는 그 세계가 될 수 없었다. 대신 영화야말로 내게 새로운 안식처가 되리라는 것만은 더욱 분명해졌다. 영화의 세상 속에서 나는 자유로웠다. 한 편의 세계가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섰고, 쉼 없이 영화를 봤다. -p.30
낯선 곳에서의 만남, 새로운 경험들은 나를 자유롭게 했고, 나는 그 시간에 흠뻑 취했다. 어떤 이는 그런 나를 두고 ‘자유인’이라 불렀고, 그것은 마치 나의 새로운 이름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되고 싶었다.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자유롭고, 생각과 관념에서 벗어나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 인생을 그려가는 자유인이 되리라고 다짐했다. -p.41
부득이하게 촬영 스케줄이 잡히지 않는 한, 여름이면 모아 놓은 돈이 얼마든 몽땅 챙겨서 계절이 끝날 때까지 바다와 태양을 즐기러 떠난다. (……) 마음을 나누는 친구의 만류도 뿌리차고 떠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바다다. 바다를 만난 후로 나는 뜨거운 태양 아래 펼쳐지는 여름 바다와 함께 하기 위해 나머지 계절을 이겨낼 수 있게 되었다. -p.73
사랑받고 있을 땐 있는지도 몰랐던 부드러운 감각들이 내 안을 박차고 나와 주위 공기까지도 감싸 안는다. 몸은 그것을 기억하고, 한번 기억된 감각들은 내 안의 날카롭고 뾰족한 신경들을 둥글게 다듬는다. 미소는 한결 부드러워지고, 눈빛은 반짝이고, 세상의 가치를 찾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그것이 내게로 온다. -p.91
“지금 네 꿈은 뭔데?”
“죽는 순간까지 내 안의 나를 다 발견하고 가는 것.” -p.115
밤이 되면 이야기는 더욱 깊어졌다. 불어와 한국어를 섞어가며 차례로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밤이 다하도록, 아침 따위 오지 않기를 바라며. 아니, 오더라도 우리만은 비켜가기를 기독하며. 해가 뜨면 우리는 다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겠지. 너는 파리로, 나는 서울로, 미래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잊어버릴 만큼 지나간 시간은 기억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p.136-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