熱河日記 : 연암 박지원의 중국 여행기 3
모름지기, 현대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학문체계는 과학이다. 그러다보니 어떠한 학문일지라도, 결코 과학적인 사유방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인문학 역시 그러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문학 고유의 특성이 훼손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러해서도 안 된다. 다만, 무작정 인문학의 고유성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과학적인 사유방식의 가장 큰 특성 중 하나는, 어떠한 가치부여에도 초연하다는 점이다. 그것은 곧 가치중립적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과학적인 판단을 하게 되면, 그것은 대체로 가장 합리적이며 가장 효율적인 판단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문학은 이러한 과학의 특성을 닮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과학과 동일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렇더라도 가치중립성은 어떠한 학문이든 지켜야 하는 보편적인 지향점인 것으로 여겨진다.
삶의 과정 안에서, 인간존재라면 누구라도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식으로 언행하게 된다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우리가 유념해야 할 대목은,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것이 육체가 지닌 본래성이지만, 그것은 어떤 정지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팔이 안으로만 굽은 상태에서 정지되어버린다면, 그것은 일종의 장애이며, 온전한 팔의 작용을 할 수 있는 상태일 수는 없다. 어쨌거나 안으로 굽는 팔은, 이미 바깥으로 펴질 것을 동시적으로 예상하고서 작동하는 것이, 몸의 본래성이다. 나아가 그런 것이 곧 ‘천지자연의 자연스러움[無爲自然]’이기도 하다.
그러한 자연스러움 안에서, 한 가지쯤의 일을 평생 동안 줄곧 해 내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이내 새로운 일을 찾아 다양한 삶을 꾸려내는 사람도 있다. 어떠한 삶의 방식이 낫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저 삶의 모양에 차이가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라면, 필자는 후자에 속하는 부류다. 어릴 적부터 필자는 늘 새로운 일을 찾아나서는 타입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비슷한 연배에 비한다면, 아주 다양한 삶의 체험을 갖게 되었다. 어쩌면 그래서 시나브로 여행자의 삶을 살게 되어버린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느 정도 여행하는 삶이 익숙해진 이후에는, 이제 굳이 목적지마저도 정하지 않는다. 실로 떠도는 나그네로서의 여행방식을 실행하게 된 것이다.
처음 여행을 시작하던 시절에는 누군가 이끌어주는 여행이었다. 그러다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다니는 여행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철저히 홀로 떠도는 홀가분한 여행자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이것이 여행자의 본색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어차피 인생은 홀로 가는 여행길이라고 하지 않던가.
어느 시대든, 상대적으로 소유하지 못 한 자들의 삶은 버겁기 마련이다. 그것은 첨단의 21세기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필자의 생활 역시, 사회적으로 최하층인 계층에 소속되어서 근근이 생계를 꾸리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가난의 상황은, 죽음의 순간까지도 별반 달라지지는 않을 듯하다.
그러다보니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일이, 마치 살얼음판을 건너는 것과 같을 수밖에 없다. 어제도 그러하고, 오늘도 그러하며, 내일도 그러할 듯하다. 여하튼, 이러한 상황에 내던져진 서민대중으로서, 그나마 필자에게 가장 큰 위안이 되어주는 것은, 바로 여행이다.
그러한 삶의 여정 중에,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숱한 체험을 한다. 오늘도 아주 많은 일들이 쉴 새 없이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 나는 늘 적잖은 선택의 순간에 세워진다. 그런데 그 선택은 늘 생존을 지향한다. 그것이 인간존재로서 죽음의 순간까지 지닐 수밖에 없는 본성의 명령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매순간의 선택이라는 근심을 해소해 가는 일, 아마도 그런 것이 인생이리라.
흔히 여행자의 삶을 유목민의 삶에 빗대며, 그 반대의 경우를 말하기도 한다. 실로 유목민의 삶은, 그 자체가 여행이며 이동이므로 마땅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유목민은 철저히 생존을 위해 이동하는 것이며, 여행자처럼 노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유목민의 이동’과 ‘여행자의 노닒’이라는 차이를 인식할 필요는 있다. 곧, ‘생존을 위한 이동’과 ‘노닒을 위한 이동’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한 차이는 ‘열하일기’ 안에서도 쉬이 드러난다. ‘열하일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대부분은, 유목민의 경우처럼 생존이나 생계를 위해 이동하는 부류다.
마부나 하인들의 경우는 물론이며, 사신 일행에 벼슬아치로서 참여한 자들 역시 그러하다. 그들 대부분은 자기에게 부여된 업무이며, 그러한 업무를 수행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암’의 경우는 다르다. ‘연암’은 굳이 그 여정에 참여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 물론 그것이 양반사대부로서의 특권을 지닌 자이기에 가능하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함은 분명하지만, 양반사대부라고 해서 죄다 ‘연암’과 같은 결정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연암’이 지닌 여행자로서의 기질에 대해 인식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그런 탓에, 필자는 노니는 자로서의 ‘연암’의 미학적인 삶에 대한 상고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대체로 미학적인 삶을 살아내는 자들은 다분히 예술가적인 기질을 생래적으로 지닌 자들이다. ‘연암’ 역시 그러하다고 판단된다.
지금 가만히 회상해 보면 필자의 지난 삶은, 그 과정이 자의반타의반이었을망정 이렇게까지 지속적으로 학문적 활동을 할 만한 상황은 전혀 아니었다. 그래서 30대 초반에서야 어렵사리 대학원에 진학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시작된 공부는, 이제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면, 대학원에서의 체험이 필자의 여행자로서의 삶을 이끈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석사와 박사과정 동안 늘 연구의 주제가 되었던 ‘장자미학(莊子美學)’은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장자철학’이 논변하는 ‘소요유(逍遙遊)’야말로 두 말할 나위 없는 여행자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여행자는 매순간 배회하며 고뇌하는 존재다. 그래서 여행자에게는 유별난 과거도 없고, 별다른 미래도 없다. 다만 ‘지금 여기’에서 여행자로서 노닐 따름이다. 그렇게 ‘지금 여기’를 노닐며 살아 낸다는 것은, 곧 ‘장자’가 논변하는 ‘소요유’와 다름 아니다.
또한 여행자의 노닒으로서의 여행은, 한없이 낮은 곳으로 임하는 것이다. 이는 곧, 지극히 상식적인 여론을 좇는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예컨대, 예로부터 민의(民意)를 외면하면서 지속될 수 있었던 권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흔히 권력이라고 하면, 아주 거창한 정치학적 개념쯤을 상상하지만, 굳이 권력은 그런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의 현실세계에서 각 인간존재들이 생존할 수 있는 자격이나 역량 그 자체가 곧 권력이다. 그러니 필자의 삶 역시, 늘 권력 그 자체의 유지이며 지속이었을 따름이다. 그러한 권력 안에서 살아냄에 있어, 주변의 여론을 좇는다는 것은 참으로 부득이한 것이다.
예컨대, 이렇게 자연스런 권력의 지속을 가장 선명하게 천명한 철학자가 바로 ‘노자(老子)’다. ‘노자’의 철학사상을 대변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야말로, 민의를 거슬러 억지로 하지 않으며, 다만 천지자연의 자연스런 흐름을 좇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물며 ‘노자’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필자로서, 억지스런 삶을 지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름지기 민의나 여론이라는 것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표출되기 마련이다. 다만 그것에 대해서 민감하게 지각할 수 있는가의 여부가 문제될 뿐이다.
때문에 필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항상 삶의 상황 안에서 아주 민감하게 깨어 있으려고 노력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을 죄다 깨어 있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은 잘 안다. 그렇더라도 필자로서는 나름의 최선을 다 하고자 한다.
그런 까닭에 필자는, 늘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으며, 해야 할 일이 무언가를 고심한다. 그리고 그것은 늘 주변인들의 여론에 적극적으로 민감하게 깨어 있는 상태에서의 고심이다. 그렇게 고심이 거듭되다가, 필자는 늘 동일한 어느 지점에 이르게 된다. 바로 여행길이다.
필자의 판단으로서는, 주변의 여론을 거스르지 않으며, 타자들에게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으며, 자기 나름의 성취감이나 만족감을 가질 수 있는 일이, 바로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미 십 수 년 동안이나 여행을 지속하고 있다. 그렇게 여행길을 계획하거나, 여행길에 나설 때면, 여행은 늘 필자로 하여금, 주변인들의 마음에 대해 다시 한 번 사려토록 한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늘 죄스런 마음이 앞선다.
물론, 필자가 어떤 특별한 범죄행위를 자행해서가 아니다. 그저 천지자연과 인류의 자연스런 배려를 인식하지 못 하고서, 잠시잠깐 이기적이거나 극단적인 외곬의 마음을 지녔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또한 현실세계의 인간은, 어쨌거나 홀로이면서도 결코 홀로일 수 없는 탓에, 항상 ‘이중적 동시성’을 사려해야만 하는 존재인 탓이다.
역사 안에서 민의의 여론을 거스르는 경우, 그 결말은 늘 비극적이기 마련이었다. 이를 잘 아는 필자로서, 여하튼 여론을 거스르는 언행을 자행할 순 없는 노릇이다.
또한 그것이 지금껏 노장(老莊)철학을 전공 삼아 공부한 필자로서는, 비록 필자가 한없이 가난하고 더없이 고독한 존재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죽음의 순간까지 어겨서는 안 될 신념이라고 판단한다. 그러한 인식마저도 지니지 못 한다면, 지난 시절의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금으로서는, 단지 서얼이라는 이유만으로, 필자보다도 더욱 가혹한 상황으로 내몰렸던 ‘연암’의 삶을 회고하면서, ‘지금 여기’에서의 고단함을 잠시 잊어볼 따름이다.
필자는 ‘열하일기’를 번역하면서, 아주 재미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연암’의 학문 수준이, 여정이 진행되는 동안 만나게 되는 대부분의 중국인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이다. 혹자는 이에 대해 별반 이상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자. 분명히 ‘연암’은 조선인이다. 그리고 한자는 분명히 ‘중국’의 문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암’의 한자 실력은 물론이며, ‘중국’의 학문에 대한 이해 역시 여느 중국인을 능가하고 있다.
비록 한자가 오랜 세월동안 우리 민족의 문자로서 사용되고 있다지만, 어쨌거나 중국인들에게는 모국어이고, 우리 민족에게는 외국어이지 않은가.
이에 대해서는 여러 측면에서의 이해가 가능할 텐데, 필자로서는 외국의 문자를 현지인들보다 더 능란하게 사용하는 수준에 이른다는 것이, 어쩌면 참으로 지독한 노릇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조선인’들의 사대주의(事大主義)의 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상황은 19세기까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20세기에는, 우리 민족의 고유 문자인 한글이 그나마 대접을 받았던 시대인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지금의 21세기는, 말할 나위 없이 또 다시 영어라는 외국어가 득세하는 시절이다.
아마도 이러한 현상은, 한글이 세계 언어로서의 위상을 얻지 못 하는 한 지속될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다보니, 이런저런 생각 속에서도 여전히 한자로 된 선조의 텍스트를 한글로 번역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이러한 작업이 다소 씁쓸함을 갖도록 한다.
다만 필자의 작업은, 한자를 위한 작업이 아니라 한글을 위한 작업임을 밝혀두고 싶다. 필자로 하여금, 동양학을 공부하는 동안 늘 불만 섞인 한숨이 새어나오도록 했던 일은, 기존의 번역서들 대부분이 한글을 위한 번역이 아니라 한자를 위한 번역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정작 한글임에도 불구하고 한자 투인 탓에 당최 알 수 없는 문장들이 허다했다. 때문에 그런 것을 번역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생각마저도 든다. 따라서 앞으로도, 필자의 번역작업은 당분간 지속될 듯하다.
프로야구 경기를 보면, 아주 결정적인 기회인데도 결국 그 기회를 점수로 만들어 내지 못 하거나, 설상가상으로 병살타를 쳐버리는 선수들이 있다. 그럴 때면, 관중들 대부분은 그 선수를 비난하곤 한다.
그런데 정작 그 선수의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어쨌거나 정작 그 상황에서, 어떻게든 득점타를 치고 싶은, 가장 강렬한 열망을 지닌 사람은, 두 말할 나위 없이 바로 그 선수일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은 비단 프로야구 경기에만 한정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삶을 살아내는 대부분의 인간존재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늘 제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 하면서 자기의 삶을 꾸리기 마련이다.
다만 그러한 노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기도 하고, 때론 당최 시운(時運)이 따르지 않는 탓에, 결국 일정한 성취에 이르지 못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삶의 노력 자체가 문제될 일은 아니다.
예컨대, ‘지금 여기’에서 생계를 꾸려내고 있는 거의 모든 서민대중들은, 그 삶을 유지하기 위해 실로 치열할 만큼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현실세계에서 생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은, 저 먼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도록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이 천지자연 안에서, 공짜란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전히 필자의 작품에 대해서, 어떻게든 해코지를 하려는 자들이 적잖다.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으며, 일면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필자의 텍스트들을 검색하고서는 무작정 해코지를 해대니, 당최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저 그러려니 할 따름이다. 아마도 필자가 여행자로서의 삶을 살아내기로 결정하고서, 그것을 실제로 실행에 옮기면서부터는, 늘 그러했던 것 같다.
살다보면, 세상 사람들이나 세상일들이, 결코 제 마음처럼 되지는 않는 법이며,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다. 어쩌다가 필자의 언행이 몇몇의 비위를 건드린 모양이지만, 그렇더라도 필자로서는 마땅히 대처할 방편이 없으며, 굳이 반응할 까닭도 없다. 필자의 삶이 그런 자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작동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체로 그런 자들 대부분은, 인터넷 바다의 허망하고 천박한 일군의 누리꾼들처럼, 어떠한 빌미로든 꺼리를 만들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족속들이지 않은가.
그런 자들의 면면이 다소 추측되기는 하지만, 그저 그럴 시간에 제 나름의 삶의 공부에 진력하라는 당부쯤을 해볼 수 있을 뿐, 필자로서는 그들의 삶에 대해 별다른 관심도 없으며, 실상 관심을 가질만한 자격 또한 없다.
다만, 당장이라도 그 악연의 끈을 홀가분하게 싹둑 잘라버리고 싶지만, 살아내는 동안이라면 그런 자들과 부득이하게 얽힐 수밖에 없다는 것이야말로, 인간존재의 삶에 내재된 본래적인 업(karma)일 것이다.
불교식으로 말한다면, 그러한 업은 인간존재의 죽음 이후에도 지속될 테지만, 실천적 현실주의자인 필자로서는 그러한 이론을 그다지 수긍하진 않는다.
어느 뇌 과학자는, 아주 고도의 인공지능이 개발된다면, 그 순간이 곧 인류가 멸망하는 순간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아주 고도로 발달되어서, 인간의 지능을 넘어서는 어떤 지능적 존재가 탄생된다면, 이내 이 지구별 안에서 인간존재가 설 자리는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최초에 지구별에서 자기만의 영역을 점유하기 시작한 계기라면, 흔히 언어나 도구의 사용을 거론한다. 맞는 말이다. 그럼으로써 인류는 의식적인 노동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노동의 결과로서, 21세기에 이르도록 대단한 인류의 문명은 유지되고 발전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그러한 노동을 대체하게 된다면 어찌 되겠는가? 아주 속편한 누군가는, 그렇게 인공지능존재에게 노동의 영역을 전가시키고서, 인류는 더욱 고상하고 아름다운 작업을 수행하면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정도의 인공지능을 지닌 기계들에 의해 인류의 노동에 대한 대체는 지속적으로 증대되고 있다. 그리고 여러 공상과학영화의 흔한 스토리처럼, 그런 인공지능 기계들은 결국 스스로 진화를 거듭하고서는, 어쩌면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게 될는지 모른다.
어쨌거나, 실상 이 천지자연은 인류에게 별다른 애정을 갖지 않는다. ‘노자’의 주장처럼, ‘천지자연은 결코 인자하지 않은 존재[天地不仁]’일 따름인 것이다.
인류가 제아무리 어떤 신적인 존재적 이미지를 창조하여서, 억지로 인류에 대한 신의 사랑이나 자비를 강변하더라도, 그런 것은 결국 지극히 인간 중심주의적인 주장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실상 지극히 수더분한 상식에 의하더라도, 도대체 하늘이나 땅이 무슨 까닭으로, 아주 특별히 인간만을 사랑한단 말인가. 이야말로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유아적(幼兒的/唯我的) 착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물론, 필자 역시 인간인 까닭에, 이 천지자연이 지구별 안에서 가장 특별한 역량을 지닌 인간존재만을 각별히 사랑해 주기를 바라며, 이러한 바람은,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인지상정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말 그대로 그저 인간존재만의 바람일 따름이다. 제아무리 인류가 억지를 부려도, 천지자연은 늘 그러하게 만물을 대할 따름이다. 그래서 천지자연은 굳이 인자한 척 하지 않으므로, 이것을 사랑하고 저것을 미워하는 법이 없다. 이것을 선택하고 저것을 버리는 법도 없다. 그런 것이 천지자연의 실상 그 자체인 것이다.
필자로서는, 굳이 천지자연에게 사랑을 애걸하지 않을 만큼 홀가분해 질 수 있을 때, 인공지능의 고도화에 대한 문제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인간존재의 지능적인 마음이, 천지자연에 대해 초연해 질 수 있게 된다면, 그러한 마음으로 제작하는 인공지능 역시 그러한 마음을 닮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인류가, 인류의 멸망 이전에 그러한 마음을 실현할 수 있을까?
그 실현여부는 불투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지도 않는다. 그렇게 인류의 마음이 본연의 본래성으로 회귀된 상태를, ‘노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고 천명했다.
‘무위자연’은 말 그대로, 어떠한 억지스러움도 없는 자연스러움을 의미한다. 그러할 때, 현대의 인류가 불안해하는 미래적 재앙은 다소나마 감소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무위자연’의 상태에 다가설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론으로서, 필자는 여행을 말하고 싶다. 그런데 그 여행은, 홀로인 서로들이 동시적 이중성의 시공간 안에서 복합적으로 어우러질 수 있어야 하는 여행일 것이다. 그러니 현대인으로서는 쉬이 실행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느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이 지구별의 모든 것들이 죄다 파괴되는 미래를 이미 예견하면서도, 망연히 손 놓고 있다거나, 지난 역사 동안 지나치게 일그러져버린 온갖 가치체계들이 무조건 옳다며 억지를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솔직히 필자로서는, 인류의 미래가 그다지 희망적인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군의 페미니스트나 니힐리스트들의 주장처럼, 그저 암담하기만 한 것으로 판단되지도 않는다. 어차피 인간은 늘 어떤 사이[間]에나 머무는 존재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열하일기’ ‘일신수필’의 ‘장대기’에서 ‘연암’은 이렇게 말한다.
“대개 ‘장대’에 오를 때에는, 그저 앞만 보고서 층계 하나하나를 밟고 올라가므로, 그 위험함을 알지 못 하다가, 내려오려고 눈을 한번 들어 밑을 내려다보면, 저절로 현기증이 일어나게 되니, 그 허물은 죄다 눈에 있는 것이다.[蓋上臺時, 拾級而登, 故不知其危, 欲還下則一擧目而臨不測, 所以生眩, 其崇在目也.]
벼슬살이라는 것도, 역시 이와 같아서, 바야흐로 위로 자꾸만 올라갈 때에는, 한 계단의 절반이라도, 남에게 뒤질세라 두려운 나머지, 간혹 남을 밀어젖히면서까지 앞서려고 다툰다.[仕宦者, 亦若是也, 方其推遷也, 一階半級, 恐後於人, 或擠排爭先.]
그러다가 마침내 몸이 높은 곳에 이르면, 그제야 두려운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다.[及致身崇高, 懾心孤危.]
하지만 이미 외롭고 위태로워서 앞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길이 없고, 뒤로는 천 길이나 되는 절벽이어서, 다시 올라갈 의욕이 사라질 뿐 아니라, 내려오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 법이다.[進無一步, 退有千仞, 望絶攀援, 欲下不能.]
이는 고금을 막론하고서 모두 그러하다.[千古皆然.]”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서, 높이 오른 자들은 불안한 법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렇게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어떠한 짓을 자행했으며, 자기의 자리를 노리는 자들 역시, 자기가 그랬던 것처럼 어떠한 짓이라도 자행할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선’을 강점하고서 수십 년간 높은 지위에 군림하던 ‘일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조선인’들을 결코 신뢰하지 않았다고 한다. 저항세력은 물론이며, 일반 백성들이나 심지어 ‘일제’에게 아주 우호적이었던 친일파에 대해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잠시만 생각해 보면, 응당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라는 판단을 해볼 수 있다. 남의 나라를 강제로 빼앗고서 주인노릇을 하고 있으니 항상 불안했을 것이므로, 설령 그가 친일파일지라도 어떻게 믿을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맞은 놈은 발 뻗고 자도, 때린 놈은 발 뻗고 잘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발 뻗고 자기 위해, 맞으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굳이 때릴 일도 아닐 것이다. 정신적인 장애로 인해 극단적인 폭력성을 지닌 자가 아니라면, 남을 때리는 일이 어찌 맘 편한 일이겠는가.
이러한 상황은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늘 되풀이되곤 했다. 다만,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역사적으로 ‘중국’은 늘 선진국이며 강대국의 지위에 있었고, ‘한국’이나 ‘일본’은 후진국이며 약소국의 지위에 있었다. 더욱이 ‘일본’은 항상 ‘한국’보다도 뒤처지는 입장이었다.
그러다보니 ‘한국’에게 있어, ‘중국’은 천자의 나라라고 하여 받들어 섬기는 사대(事大)의 대상이 되었고, ‘일본’은 왜구(倭寇)쯤으로 불리며 오랑캐 중에서도 오랑캐인 족속으로 비하되었다.
그러던 상황이 근대에 이르며 서구 제국주의와 얽히면서 반전되었고, 그래서 ‘한국’은 물론이며 ‘중국’도 침략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양차대전이 끝난 후, 패망했던 ‘일본’은 이내 경제대국이 되었고, ‘남한’ 역시 경제부국이 되었다. 이제는 ‘중국’도 예전의 영화를 되찾으려고 하는 시절이다.
여하튼, 전통적으로 ‘중국’은 늘 ‘때리는 놈’의 지위에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일본’에게 크게 한 방 맞고 말았다. 크게 한 방을 휘두른 후, ‘일본’은 이제 어떻게든 ‘때리는 놈’의 지위에 있고 싶어 한다. 그런데 ‘한국’은 여전히 ‘맞는 놈’의 지위에만 있으며, 어쨌거나 맞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쓸 따름이다.
이러한 국가 간의 역학관계는 개인들의 관계에서도 별반 다를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때리는 놈’과 ‘맞는 놈’이라는 두 부류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간혹 ‘노니는 놈’도 있기 때문이다. 여행자는 말할 나위 없이 대표적인 ‘노니는 놈’이다.
현실세계의 인간존재들은, 출생 이후 줄곧 ‘때리는 놈’과 ‘맞는 놈’밖에 생존할 수 없는 세상이라는 식으로 훈육 받는다. 그런데 오롯한 필자의 체험에 따른다면, ‘노니는 놈’으로서도 얼마든지 생존할 수 있으며, 그 삶이 다른 놈들에 비해서 더욱 충만하며 행복할 수 있다고도 여겨진다.
물론 이러한 세 부류 이외에도, 어떤 놈이든 존재할 수 있으며, 그런 놈으로서 주변인들에게 해코지 않으며 살아내고 있다면, 또한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도 든다.
‘연암’의 여정을 좇아 이런저런 상념에 젖는다. 며칠 동안 소나기가 마음을 심란케 하더니, 오늘은 모처럼 맑게 개었다. 말 그대로 가을 초입의 하늘이다. 파란 하늘을 보니, 당장이라도 여행길을 나서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하지만 당분간은 꼼짝없이 매인 몸이다. 게다가 어느 정도의 여비도 마련되어야 한다. 제아무리 필자의 여행길이 최소한의 비용으로 가능하다고 한들, 대부분 타국 땅에서의 여행인 탓에, 그 최소한의 비용 역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오늘도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나는 모양이다. 지금으로서는 ‘열하일기’의 번역을 마치고서, 조속한 시일 내에 직접 그 루트를 답사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리고 그 여정은 21세기 방식으로 새로이 기록될 것이다. 그야말로 ‘21세기 열하일기’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