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느린 여행길
인생은 코뿔소의 외뿔처럼 홀로 가는 여행길이라는 말들을 쉬이 한다. 그러면서도 정작 홀로 가는 이는 드물다. 혼자서 가는 인생길은 어울려서 가는 인생길보다 몇 갑절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예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홀로 떠나는 코뿔소의 외뿔과 같은 인생길을 애써 외면한다. 애당초 그러한 인생길은 실현될 수 없으며, 실현되어서도 안 되는 것인 양 지레 호들갑을 떨기도 한다.
그런데 그 길은, 고통스러운 고립의 소외가 아니라, 여유로운 고독의 동반이다. 막상 그러한 길을 걸어본 자는 안다.
코뿔소의 외뿔처럼, 홀로 여행하는 자는 여행자다. 떼로 무리지어 다니며 여행하는 자는 관광객이다. 여행자는 결코 관광객의 틈에 끼일 수 없다. 그리고 관광객은 결코 여행자일 수 없다.
그나마 관광객으로서 관광여행이나마 떠나볼 수 있다면 그래도 다행인 축에 든다. 관광여행마저도 훌쩍 떠나볼 수 없는 것이 서민대중의 삶이다. 실로 그런 것이 인생이다.
먼 옛날 노자老子는, 삶의 여행을 마치고 함곡관函谷關을 넘어서며, 인류의 지혜서인 도덕경道德經을 남기고서는 홀연히 영원한 여행길에 올랐다. 공자孔子는, 평생을 혼탁한 세상을 개혁하기 위해 상갓집 개 취급을 받으면서도, 주유천하周遊天下의 여행길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의 탐사여행이나, 김삿갓 김병연金炳淵의 음유吟遊여행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예수Jesus와 사도 바울Paul의 전도傳道여행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의 여행은 전 생애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그야말로 일생 동안을 여행길에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역사 안에는 숱한 여행자들이 등장한다. 그런 여행자들의 여행길을 역사는 기억한다. 그것은 그들의 여행이 누구나 쉬이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원전 500년. 한 젊은이의 여행이 시작된다. 현재에 이르도록 무수한 인류를 아주 느린 여행자로서의 사색과 고뇌 속으로 이끌어 가는 싯다르타Siddhārtha의 여행이다.
붓다인 싯다르타의 여행은 참으로 웅건하며 현묘한 여정이었다. 그래서 여행길의 끝자락에서 싯다르타는 궁극의 깨달음에 이르렀다. 결국 그는 깨달은 자로서의 붓다buddha가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미래의 붓다들이 여행을 시작한다. 여행길에 나선 여행자로서의 삶은 그들을 궁극의 깨달음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여행자가 그러한 궁극의 지점에 도달할 것이라는 아무런 보장도 없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여행길을 두려워한다. 여행자로서 살아내는 일을 꺼린다.
그러다보니 차라리 모른 척 여행의 불안으로부터 정착의 안정 속으로 도피한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늘 여행에의 동경을 지닌다. 그러한 동경은 인간인 탓에 지닐 수밖에 없는 인간존재의 본성이다.
많은 이들은 삶이야말로 가장 빠른 여행길이라는 말을 한다. 맞는 말이다. 이 글을 적어내고 있는 여행자 역시 여전히 유년의 데미안Demian을 추억하고는 있지만, 이미 청춘의 시절은 훌쩍 지나가버렸다.
아침에 눈을 뜨면 누군가는 감옥으로 가고, 누군가는 직장으로 간다. 누군가는 삶으로 가고, 누군가는 죽음으로 간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여행길을 나선다. 새 날을 맞으며 새로이 걷는 법을 배우기 위해, 여행자는 늘 여행길을 나선다. 매 순간 여행길은 여행자에게 새로운 삶의 모습으로 실현된다.
찰나를 담아내는 사진처럼 여행하는 일은 순간의 미학이다. 그래서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자가 아니라면 결코 여행자가 될 수 없다. 매 순간 여행길에 나서는 자는 매 순간을 체험한다.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한다. 이러한 사유思惟와 체험體驗의 차이는 사진의 비유로써 쉬이 설명될 수 있다.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면, 사유는 잘 찍은 사진이고 체험은 좋은 사진이다. 그러다보니 잘 찍은 사진과 좋은 사진의 차이를 아는 자는 시나브로 여행자가 된다. 떼 지어 몰려다니는 관광객이 아니라 홀로 떠도는 여행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