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周易철학
흔히 인간존재의 삶은 고통이라고들 한다. 출생 이후 죽음의 순간까지 생로병사生老病死에 얽매인 채, 고달픈 생존을 유지해야 하는 삶의 과정 자체의 고통스러움이야, 굳이 말할 바 없다.
그런데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살아내는 동안 이런저런 인연으로 인해 관계를 맺게 되는 주변의 온갖 인간존재들로부터, 인간존재에게 본래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어떤 잔혹함을 체험하게 될 때이다.
만약 인간이 다만 동물적 차원에 머무는 존재라면, 그러한 잔혹함이 별반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 그저 자기自己의 이득을 위해 손해되는 온갖 대상을 적敵으로 삼고서 잔혹하게 제거해버리면 될 테니까.
하지만 인간은 그러한 동물적 차원을 넘어서야 하며, 적어도 넘어서려고 하는 탓에 인간일 수 있는 것 아니던가.
삶의 과정 안에서 인간존재가 만나게 되는 대부분의 타자他者들은, 본성적인 잔혹함을 결국은 드러낸다. 자기의 생존을 위해 그렇게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이, 또한 삶의 부득이不得已다.
그런데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자기와 타자가 죄다 애당초 지니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본래적인 본성이다. 그래서 결국 삶을 살아내는 동안 모든 인간존재는 숱한 몸과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된다.
그런 것이 인간존재로서 어찌 할 수 없는 삶의 부득이라면, 이제 인간존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근현대의 가장 유력한 심리학자 중의 한 사람인 칼 융Carl Gustav Jung은, ‘상처 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는 동안 크고 작은 마음의 상처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마음의 상처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따라 삶의 모습은 달라진다.
예컨대 철저히 개별자個別者나 주관적主觀的인 관점에서 마음의 상처를 초월하거나 승화할 수도 있다. 또는 철저히 집단자集團者나 객관적客觀的인 관점에서 마음의 상처를 억제하거나 억압할 수도 있다.
이러한 두 가지 방법론은 마음(정신)의 심리적인 상처에 대한 치유책으로서 가장 일상적이며 일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방법론만으로는 결코 바람직한 철학(인문)치료자의 태도를 갖기는 어렵다.
개인을 우선하는 주관적인 태도나 집단을 우선하는 객관적인 태도는 모두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갖는다. 하지만 마음에 상처를 입은 존재자는 개별자나 공동체의 관점보다는, 그 마음 안에 자신의 관점만이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치료자는 이미 규정되어 있는 기존의 어떤 관점을 제시하려는 억지스런 의도보다는, 내담자來談者 스스로가 자신의 상처를 성찰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유도해주어야 한다.
마음에 상처 입은 존재자들은 적어도 그 상처를 서로 공유하기만 하여도 충분히 치유될 수 있다. 누군가 단 한 사람만이라도 자신의 말을 진실로 경청해주면서 그 속내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준다면 대부분의 상처는 나아질 것이다.
현대적인 마음의 병들은, 대부분 각 개별자로서의 인간존재가 서로 소통할 수 없다는 데에 가장 큰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서로 소통할 수 없다는 현상은, 각 개인들의 성격이나 성품이나 인격에서 비롯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는 사회구조 자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각 개인의 문제는 스스로 대안을 모색하고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는다지만, 사회구조적인 문제는 개인의 힘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不得已]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체로 심리학이나 종교학이나 정신의학 등은 개인의 개별적인 문제에 대해서만 관심을 둘 뿐,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마땅한 해명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회학이나 정치학이나 경제학 등은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만 해명할 뿐, 개인의 개별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 외의 많은 분과 학문들 역시 이러한 형태의 한계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 하다.
그렇다면 사회라는 공동체를 떠나서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진 시대와 상황 속에서, 각 개별자로서의 개인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철학의 바깥에 있지 않다.
현대철학의 가장 유력한 실존주의자인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철학입문Einleitung in die philosophie에서 아래와 같은 발언을 한다.
우리가 결코 철학의 바깥에 있지 않음은, 우리가 철학에 관한 어떤 지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철학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 해도, 우리는 이미 철학 안에 있다. 왜냐하면 철학은 우리 안에 있으며, 우리 자신에게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우리가 항상 이미 철학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는 철학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굳이 철학하지 않아도 이미 철학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가끔 철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으로 실존하는 한 언제나 필연적으로 철학한다. 인간으로서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은, 곧 철학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동물은 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God은 철학할 필요가 없다. 만약 신이 철학한다면, 그 신은 이미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의 본질은 한 유한 존재자로서의 인간존재의 유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존재는 이미 ‘철학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발언처럼, 인간으로서의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적이든 그렇지 않든 이미 철학 안에 들어서 있다.
그런데 인간존재는 서로 상이한 가능성과 다양한 깨어 있음의 단계와 정도를 가진다.
때문에 그에 따라 철학 그 자체는 감추어져 있거나, 문학이나 예술이나 종교나 정치나 경제 등의 각종 다양한 방편으로써 드러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경우 일반적인 철학으로서 인식되지 않을 따름이다.
‘철학’이라는 대상과 ‘철학함’이라는 행위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쨌거나 인간존재가 철학하려는 까닭은 철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한 철학의 바탕 위에서 철학하는 행위 자체가 ‘철학함’임은 자명하다.
따라서 이 둘은 경중輕重이나 우열優劣이나 선후先後 따위의 이분법적 도식으로써 배치되어서는 안 된다.
이 둘은 서로 분리되지도 않으며 분리될 수도 없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하나이지만 하나이지 않고 둘이지만 둘이지 않은’ 비동시적 동시성의 지평 위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현실세계의 온갖 ‘철학함’은 아무런 사전 전제도 전제하지 않는 무전제無前提로부터 시작된다.
주역周易의 사유 역시 그러한 무전제로서의 무극無極인 태극太極으로부터 시작되어서, 다시 무극으로 되돌아가는 순환과 변화의 과정 안에서, 결코 아무런 전제도 하지 않는다.
이는, 혹자들이 왜곡하여 오해하듯이, 요행을 바라거나 우연에 기대는 운명론이나 숙명론을 추구하는 결과가 아니다. ‘스스로·저절로 그러하는’[自然] 천지자연이라는 이 우주 자체의 법칙적 원리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주역의 원리는, 주역철학周易哲學이나 삼현철학三玄(易․老․莊)哲學으로써 철학(인문학)적인 상담·치료를 추구하며 실현코자 하는 철학치료자에게는 반드시 요구되는 사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세계에는 흔히 세 가지 형태의 시공간이 존재한다.
이데아와 같은 이상향적理想鄕的 시공간과 이미지와 같은 초세적超世的 시공간과 실제적 현실세계인 세속적世俗的 시공간이 바로 그것이다.
이상향의 시공간은 ‘텅 빔’[無]의 토대다. 인간존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고향이라서 이상향理想鄕이다. 또한 어디에도 실재하지 않는 유토피아Utopia이므로 ‘텅 빔’[無]이다.
유토피아라는 개념 역시 그리스어의 없는ou- 또는 좋은eu-에 장소toppos라는 말을 결합하여, 토머스 모어Thomas More가 만들어낸 개념인데, 세상 어디에도 없는 좋은 장소란 의미다.
반면에 세속의 시공간은 유有의 토대다. 세계가 실제적으로 이어지는 곳이라서 세속世俗이며, 실재하여 나타나므로 현실現實이다. 그런데 과연 이 셋 중에서 인간존재가 실제로 머무르는 시공간은 어디일까?
아마도 대부분은 쉬이 실제적 현실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누구라도 잠시만 되짚어 생각해 보면, 인간존재는 결코 현실적인 세속의 시공간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세 인식하게 된다.
분명 실제적으로는 현실의 세속에 속하면서도, 심리적으로는 이상향을 꿈꾸는 동시적이며 이중적인 실제와 초월의 사이적[間的] 시공간에 머물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인간존재는 세속의 시공간에만 있는 것이라고 단언한다면, 그는 분명 정신(마음)과 육체(몸)를 분리하여 사유하는 것이다.
정신으로부터 분리된 육체라면 충분히 세속의 시공간에만 머물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정신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실재하지 않으니 없는 것인가?
몸과 마음으로서의 인간존재는, 없음도 아니며, 없지 않음도 아니고, 있음도 아니며, 있지 않음도 아닌, 그 사이[間]에 머문다. 부득이하므로 몸의 현실에 토대를 두면서도, 늘 영혼의 이상향으로 비상하는 이중적 사이의 시공간에 있는 것이다.
또한 삶과 죽음 사이, 시간과 공간 사이, 사람과 동물 사이, 아이와 어른 사이, 신과 악마 사이, 하늘과 땅 사이. 그러한 온갖 변화와 순환 사이에나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인간존재들은 자신이 그러한 사이에 있다고 생각되면 아주 불편해 한다. 적어도 시작이 있었다면 반드시 끝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사이에서의 선택과 불안보다는 소속에서의 확신과 안정 속에 머물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편에도 확고히 소속하지 못한/않은 채 사이를 떠도는 자라면, 누구라도 이내 방랑자나 이방인으로 간주해 버린다. 사이의 시공간은 아무래도 잠시 떠도는 곳이지, 오랫동안 머무는 곳은 아니라고 여기는 탓이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 안에서 생성적이며 창조적인 변화는 오히려 그러한 사이에서 비롯하였다. 때문에 그러한 사이를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주역의 원리를 깨닫는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마음(동시적인 몸)에 상처를 입어 상담이나 치유를 필요로 하는 내담자들의 대부분은 늘 그러한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으므로, 특히 철학상담자나 철학치료자는 그런 모든 사이를 배려하는 인식이 요구된다.
이는 곧 철학적(인문학적) 상담·치료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