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 보니것 주니어 (Kurt Vonnegut Junior, 1922 - 2007)은 미국의 작가이다. 그의 작품 세계는, 풍자와 블랙 코미디, 공상 과학을 기반으로 한 휴머니즘을 특징으로 한다. 그 자신이 살던 시대와 미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견지한 보니것은 사후에도 미국 휴머니즘 협회의 명예 회원으로 추대되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뉴욕 타임즈의 기사는 "카운터컬처 소설가의 죽음"이라는 헤드라인으로 시작되었다. 인디애나 주 인디아폴리스에서 출생한 보니것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모두 MIT 출신의 건축가였다. 그리고, 그의 형 버나드 보니것은 인공 구름을 생성하는 데 필수 화합물인 은-요오드 화합물을 발병한 기상 과학자이다. 독일계 이민자 출신으로서 보니것의 가족은, 그를 제외하고는 엔지니어링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가족 전통에 따라서, 코넬 대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하던 보니것은 2차 대전의 발발로, 육군에 징집되어, 카네기 대학과 테네시 대학에서 군 위탁 교육생으로 기계 공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전투 인력이 부족해 지는 상황이 되자, 1944년 프랑스 전선의 보병으로 배속되었다. 프랑스 배속 이전이던 그 해 여름, 짧은 휴가로 고향을 방문한 보니것은 바로 그 날 수면제를 먹고 자살한 어머니를 발견하고 심적인 충격을 받게 된다. 1944년 12월 보니것은, 히틀러의 마지막 반격인 벌지 전투에서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포로가 된 것은, 그와 그의 부대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그의 부대가 최후의 순간까지 퇴각을 하지 않고 다른 부대의 후위를 방어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포로가 된 보니것은 드레스덴 포로 수용소로 옮겨지는데, 여기에서 "드레스덴 폭격"을 겪게 된다. 훗날 그는 그 폭격을 "완전한 파괴", "이해할 수 없는 대학살" 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그 폭격은, 히틀러의 전의를 꺾기 위해서 정치적 목적으로 행해졌는데, 영국과 미국의 폭격기가 3 일에 걸쳐 유서 깊은 도시인 드레스덴에 대규모 폭격을 가했고, 폭격과 화재로 25,000 여명의 일반 시민 사망자를 낳으며, "독일의 피렌체" 로 불리던 드레스덴 전체를 철저하게 파괴한 폭격이었다. 이러한 대규모 폭격에서 살아 남은 경험은 미국 현대 소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제 5 도살장"에 깊숙이 반영되어 있다. 러시아 군대에 의해서 포로 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된, 보니것은 미국으로 돌아 와, 시카고 대학 인류학과에 대학원생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러나, 전문 학자나 교수를 목표로 하지 않았던 보니것은 인류학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GE의 홍보 부서,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기자, 아이오와 대학 작가 워크샵의 강사, 사브 자동자의 대리점 등의 직업을 거친다. 1963년 "고양이의 요람"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전문 작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하였다. 그 후 "제 5 도살장" (1969), "챔피언의 아침 식사" (1973)이 상업적으로, 문학적으로나 성공을 거두게 되면서, 미국 현대 소설의 중요한 작가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 외에도 "타이탄의 사이렌", "로즈워터 씨에게 신의 축복을", " 자동 피아노", "마더 나이트" 등의 작품이 인정 받고 있다. "제 5 도살장"과 "챔피언과의 아침 식사", "마더 나이트" 등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특이하게도 보니것은 자신의 소설 속 삽화를 직접 작업했는데, "제 5 도살장", "챔피언의 아침 식사", "뒤 돌아 본 아마겟돈의 시간" 등에 그가 직접 그린 삽화들이 게재되어 있다. 그 후 실크 스크린 기법에 흥미를 보이면서 다수의 작품을 창작하게 되었고, 1980년에는 뉴욕 마르고 페이든 갤러리를 통해서 공식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그 자신의 평가에 의하면 보니것의 그림들은 "아주 드문 외국 우표"와 같은 작품들이다. 평생에 걸쳐서 보니것은 모두 7명의 아이들을 기르게 되는데, 3명은 전 부인과의 아이들이었고, 3명은 암으로 죽은 누이 동생의 아이들, 그리고 가장 어린 딸은 입양을 한 아이였다. 그 아이들은 대부분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2007년, 계단에서 넘어져 생긴 머리의 상처로 인해서 삶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