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然人의 철학사상 노장철학
현대인들은 유독 自然人으로서의 삶을 꿈꾼다. 그러한 까닭은 자연으로부터 멀어진 삶의 방식 탓이다. 실상 몇십 년 전만 해도 굳이 자연인의 삶을 동경할 것 없었다.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서민대중의 삶이 자연인으로서 살아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산업화 이후 南韓人들 대부분은 都市人으로서 생존을 도모해야만 한다.
여행자로서 인간존재에게 인생이란 항상 낯선 여행이다. 마치 流配와 같은 고된 여행이다. 그런데 늘 이어지는 日常만 같다. 무수히 삶의 고비를 넘겼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危機다.
누구의 삶이라도 한 번 무너지면 그걸로 끝이다. 이제 그 인간존재는 더 이상 축복받지 못한다. 그래서 인생은 살얼음판을 건너듯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한 순간이면, 이제 누구라도 시나브로 出世間의 脫出을 圖謀케 된다. 그것이 여행의 시작이다.
여행은 다양하지만, 어떠한 여행이라도 죽음으로서 귀결된다. 그 죽음의 樣相이 rapture든 涅槃이든 羽化든, 그런 것은 별반 중요하지 않다. 결국 당사자 이외에는 체감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래서 그런 여행의 마감에 대해 온갖 상상력이 발휘된다. 그런 것이 여행의 끝이다. 여행이 끝나는 순간, 여행자는 자연인이 된다. 자연인의 삶은 지극히 老莊哲學的이며 道家哲學的이다.
그대는 삶의 고난과 역경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一介 庶民大衆으로서는 당최 어찌 할 수 없는 不得已일지라도, 그러한 어려움을 어떻게든 견디어내는 것이 인간존재의 삶 아니던가. 이미 예정된 죽음일지라도, 실제로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는 强者로서 생존하기 위해, 실로 악착같이 泥田鬪狗해야 하는 것이 인간존재의 삶 아니던가.
그런데 실상 삶의 현실을 견디어내지 못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도 없다. 自意에 의해 出生한 것이 아닌 것처럼, 삶이라는 것이 반드시 억지스럽게 살아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니 도무지 살 수 없으면 또 어떤가. 당최 살아낼 수 없는 것 또한 삶의 한 방식일 따름이다.
인간존재의 삶은, 저 먼 古代로부터 現代에 이르도록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그저 생존의 방식이 다소 변화되었을 따름이다. 근대 이전의 시대에 대부분의 서민대중은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다. 농사 이외의 생존방식도 있었지만, 농업사회인 탓에 백성의 절대 다수는 농민이었다.
그러다가 현대에 이르러 산업사회가 되면서 백성의 대부분은 노동자가 되었다. 그래서 노동하여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먹고 산다. 그렇게 한평생을 노동하여 먹고 살다가 죽는다. 그것 뿐이다. 그러니 삶에 아주 예외적인 상황이 到來하지 않는다면, 대부분의 인생살이는 별다를 게 없다.
그런데 그러한 삶이 대다수 농민의 삶보다 크게 나을 것도 없다. 물론 당장에 好衣好食하며 權勢를 누리니 부러울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라서, 항상 누리는 만큼의 스트레스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치는 현대사회 역시 그러하다. 자본주의체제에 적합한 상품성을 인정받아 호의호식하며 권세를 누릴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각종 人氣人이다. 연예인, 운동선수, 예술가, 정치가 등 종류도 다양하다. 여하튼 人氣는 상품의 절대적 척도로서 작동하므로, 인기 있음은 그만큼의 자본이 부여됨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들 역시 그 인기 만큼의 스트레스를 부담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간혹 자살하는 사례도 발생한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富貴와 名譽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존재라면 누구나 선호하는 것이다.
그렇게 선호하는 것을 목적하며 한평생 살아내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 인생에서 예키치 않게 고독의 여행을 떠나게 되는 경우, 그의 삶은 고독을 견디지 못하고 몰락하거나, 고독을 넘어서는 체험을 한다.
여행자는, 십 수 년 동안 대학원에서 중국철학을 전공 삼아 공부했다. 중국철학 중에서도, ‘老子’와 ‘莊子’의 철학사상을 위주로 하는, 老莊哲學이 주된 전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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