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 온 것이다. “
— 김구
2019년 백범 김구 선생 서거 70주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3·1운동 100주년 기념
역사·정치 분야 전문가가 김구의 발자취를 찾아 떠난 역사 여행기
멀고도 험난한 노정이었다. 길도, 안내인도, 등불도 없었다. 백범은 스스로 길을 내고 등불을 밝히며 고단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소원하며 보이지도 않는 저 아득한 곳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조국의 산하와 중국 대륙 곳곳에 피땀으로 얼룩진 얼과 혼을 새겼다. 우리는 그 길을 되밟기로 했다. 발자취를 더듬고 흔적을 헤아리며 백범의 숨결과 체온을 느끼려 했다. “진실은 현장에 있다”는 신념으로 백범이 걸어간 길 위에서 당시의 시대상과 그의 행동, 그리고 사상을 되짚어 보려 했다.
-「발간사」 에서
◎ 도서 소개
행동하는 이상주의자, 꿈꾸는 리얼리스트
백정범부의 길에서 삶의 이정표를 만나다
2019년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년,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이자 스스로 민족의 문지기가 되고자 했던 김구가 서거한 지 70주기가 되는 해이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나라 없는 백성으로 억압과 설움을 겪어야 했던 우리 민족에게 김구는 독립운동의 상징이자 대표로 우뚝 자리매김하고 있다. “18세에 붓을 던진” 이후 시종 유랑생활을 하며 조국과 민족의 독립운동에 헌신해 온 백범 김구. 그래서 김구의 발길은 조국의 산하 구석구석에 이르렀으며 드넓은 중국 대륙을 종횡무진 활보하였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었으나 단지 개인 자격으로 환국한 이후, 미소 냉전으로 재편되는 복잡한 세계 질서와 해방 후의 혼란한 국내 정세 속에서 국토의 분단을 막고자 애썼던 그의 행보는 삼팔선 이남은 물론 이북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해방 이후 남북에 각기 다른 정부가 들어선 뒤, 김구가 고심하고 해결하려 한 남북 분단의 상황은 김구의 서거 70주년이 되어 가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남북정상회담이 희망의 기운 속에서 성사되고 미국과 북한의 대표가 65년 만에 만난 역사적인 이 시기에, 당시 김구가 바랐던 나라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냉전 시기를 한참 지나 왔지만 이제야 얼어붙어 있던 남북 관계가 회복되어 가는 듯하다. 이러한 역사의 한 장면 속에서 『백범의 길』의 필자들은 김구가 걸어간 길 위에서 당시의 시대상과 그의 행동과 사상을 돌아보았다. 이는 김구라는 한 인물을 통해 우리의 근현대사를 조망해 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낮은 곳에 임하며 높은 이상을 지녔던
김구라는 인물의 크고 깊은 그늘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 리를 간다”는 말이 있다. 영향력이 큰 것이 먼 데까지 미친다는 뜻이다. 『백범의 길』을 보면 우리의 근현대사는 김구라는 한 인물의 그늘에 깃들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백정과 범부를 지향하는 한 인물의 크기와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음을 확인하게 된다.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이라는 한 궁벽한 골짜기에서 시작한 그의 발자취는 충청도 보은 장안의 대도소에서 동학의 교주 해월 최시형,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의 안태훈 진사와 그의 아들 안중근으로 이어지고, 만주의 의병 김이언 부대를 거쳐,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 했던 치하포사건을 통해 고종과 명성황후에게로 이어진다. 인천감옥과 탈옥, 은신과 방랑의 길을 거쳐 마곡사의 승려 생활, 다시 전덕기, 이동녕, 최재학 등과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뒤이어 교육운동에 투신한다.
안악사건, 105인사건 등 크고 작은 역사의 현장에서 우리는 김구라는 인물을 확인할 수 있으며 1919년 3‧1운동 이후에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경무국장이 된다. 이후 김구는 임시정부의 여러 직책을 맡아 임시정부를 통한 독립투쟁을 전개하였고, 그야말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문지기로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문패를 환국하는 날까지 지켜왔다. 임시정부의 주석이지만 미국의 압력으로 개인 자격으로 환국하여 74세에 경교장에서 눈을 감기까지 어느 한 순간 개인적인 평온함과 안정을 추구한 적이 있었을까, 김구의 인생은 그야말로 역사적인 공인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위태롭고 엄격한 삶이었다. “나라를 위해 왜놈이 죽을 일은 했어도 내 민족에게 죽을 일은 안 했다”라고 말했던 김구는 같은 민족인 국군 장교 안두희의 흉탄을 맞고 눈을 감았다.
『백범의 길』은 김구라는 한 인생의 역정을 더듬어 감으로써 사람 냄새 나는 그의 모습을 젊은이들에게 보여 주고자 마련된 전기이자 답사기이다. 충무공 이순신과 세종의 뒤를 이어 젊은이들이 가장 존경하는 한국사의 위인으로, 김구는 왜 우리의 가슴에 그리 깊이 각인되었는가? 서문을 쓴 신복룡 선생은 그의 삶과 투쟁이 훌륭한 바도 있지만 『백범일지』라고 하는 불후의 자서전이 “사료라기보다는 철학서요, 경세서이며 고백 문학의 백미”로서,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한 민족지도자의 사료적 가치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 시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작품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백범의 길』 여덟 명의 필자들은 김구의 발끝에서 시작해 정신으로 다져진 그의 인생 역정을 보여 주는 이정표가 될 책이 되길 바라며 이 역사 여행기를 썼다.
김구가 살아온 길과 걸어온 길
백범의 궤적을 좇는 역사 탐방기
『백범의 길: 조국의 산하를 걷다』에는 김구와 관련한 역사학계와 정치학계의 전문 연구자 여덟 분이 참여하였다. 연구자들은 저마다 권역을 나누고 사진도 직접 찍으며 김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 김구의 체취가 서려 있는 곳을 찾아 나섰다. 『백범의 길: 조국의 산하를 걷다』는 국내 편으로 기획되어 서울‧경기‧인천 지역을 다루는 1권, 강원‧충청‧전라‧경상 지역을 다루는 2권으로 구성된다.
『백범의 길: 조국의 산하를 걷다』 1권에서는 서울과 인천, 경기 지역에서 찾을 수 있는 김구의 흔적은 거의 모두 다루었다. 김구의 삶에서 1945년 환국 이후의 시기는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맞게 된 미소 양국의 이데올로기 대립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김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이라는 입지를 가지고 정치적인 행보에 나섰다. 그토록 바랐던 통일 정부를 수립하는 데 실패했다 하더라도, 김구는 집무실과 미군정청을 오가며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사람들을 설득하고 힘을 모으는 데 힘썼다. 서울 지역은 그러한 김구의 노고가 오롯이 새겨져 있다.
또한 민족주의자로서 그가 지켜내고자 했던 독립정신은 효창공원에 모신 삼의사 묘에 남았으며, 청년 김창수 시절에서부터 독립운동가 김구에 이르기까지 그가 고통의 시간을 보냈던 인천감옥, 서대문형무소는 그 장소를 돌아보는 우리에게 그의 강인함을 돌아보게 하는 산교육장이 되었다. 식민지의 국민이라는 치욕은 벗었지만 가난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젊은 세대를 위해 교육을 통한 구국 운동을 펼쳤던 김구의 애민정신을 백범학원과 창암학원의 흔적에서 찾을 수 있고, 단국대학교, 건국대학교, 성균관대학교, 홍익대학교에서 그가 세운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국내 편에 이어 김구 선생 서거 70주기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2019년에는 한국과 중국 학자들의 합작으로 중국 편을 낸다. 또한 남북 관계가 개선되면 김구가 태어나고 자랐으며 망명 전까지 머물면서 일제에 항거했던, 또 환국 이후 통일을 열망하며 삼팔선을 넘었던 북녘 땅 답사기를 낼 계획이다.
◎ 책 속에서
1949년 6월 26일 일요일, 아들 신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옹진지구 시찰을 수행하기 위해 새벽같이 경교장을 떠났다. 오전 11시 30분경 포병 소위 안두희가 방문하여 김구를 뵙기를 청했다. 안두희는 45구경 권총을 차고 있었지만 일전에 한국독립당 조직부장 김학규의 소개로 이미 경교장을 찾은 바 있었기에 그대로 방문이 허락되었다. 12시 40분을 조금 지난 시각, 식모 아주머니가 오찬으로 준비 중인 만둣국이 다 되어 간다고 말했다. 그 순간, 안두희가 올라갔던 2층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났다. 안두희가 손에 권총을 든 채 고개를 숙이고 내려왔다. 그는 권총을 계단에 떨어뜨리며, “선생님을 내가 죽였다”고 자백했다.
암살 위협 속에서 “나라를 위해 왜놈이 죽일 일은 했어도 내 민족에게 죽을 일은 안 했다”라고 말했던 김구는 같은 민족, 그것도 한때는 그를 따랐던 33세 국군 장교의 흉탄을 맞은 것이다. 김구의 사망 진단은 성모병원 원장이자 그의 주치의였던 박병래가 맡았다. 김구의 유해는 경교장 2층 침대 위에 모셔졌다. 주치의 박병래는 적십자병원에 연락해서 김구의 데스마스크를 뜨게 했다. 김구의 장례는 한국독립당이 주장한 민족장과 대한민국 정부가 고려한 국장을 절충한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백범김구선생국민장위원회 위원 등이 중심이 되어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가 만들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교장-반탁의 중심에서 서거의 현장으로」 (29~31쪽)
1948년 3월 12일 오전 9시 45분 김구는 군사재판이 열리는 미군정청 제1회의실로 미군 헌병에 인도되어 법정 한가운데에 있는 증인석에 자리를 잡았다. 오후 4시 30분까지 이어진 증인 심문에서 김구는 “나는 왜놈 이외에는 죽일 리가 없다”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1948년 3월 15일 두 번째로 소환되어 증인 심문을 받는 자리에서 김구는 답변을 거절했다. 자신을 죄인이라고 보면 기소하여 체포하든지, 증인이라고 보면 자신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니 퇴정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김구로서는 장덕수가 피살된 데 대해 누구보다도 자신이 더 분하게 생각하는 마당에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하는 것에 대해 기가 막힌다는 심정에서 한 말이었다. 법정을 나온 김구는 증인으로 소환되어 심문받게 된 것에 대한 소감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과거 수십 년 해외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분투하던 김구는 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로 고국에 돌아왔으니 삼천만 동포 앞에 허물을 받음이 마땅하거늘, 도리어 해외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보다도 안일한 생활을 하게 되고 국내 동포로부터 과분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하느님이 꾸짖으시며 징계하시는 뜻으로, 나로 하여금 미군 법정에 나가서 과거에 내가 왜놈의 법정에서 당하던 단련을 다시 한 번 맛보게 하시는 뜻으로 생각하고, 마음속에 많이 뉘우치게 되었다.
통일된 자주독립 국가를 수립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괴감을 이같이 토로한 김구는 법정에서 나오는 길로 효창공원에 모신 삼의사 묘소에 참배하고, 선열의 영 앞에서 참회의 묵도를 올렸다. 그리고 다시는 미군정청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미군정청-조선총독부에 뒤이은 새로운 권력으로」(97~99쪽)
김구가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를 다녀오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김구에게는 정치적으로 무척 어려운 시기였으며, 김구가 있는 경교장은 찾아오는 사람이 격감하여 적막하였다. 그해 연말인 12월 31일, 김구는 서울 시내 각처를 순례하며 집 없이 굶주림에 떨고 있는 빈궁한 동포들에게 총9 0만 원의 거금을 희사하였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이후 김구는 가정의 현안 문제들을 연달아 처리하였다. 8월 20일 어머니 곽낙원 여사, 부인 최준례, 맏아들 김인 3인의 유해 봉환식, 1948년 10월 7일 이 3인의 묘비 제막식이 있었으며, 12월 18일에는 남대문교회에서 차남 김신의 결혼식이 있었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1948년 연말에 희사한 90만 원의 돈은 곽낙원, 최준례, 김인 3인의 유해 봉환식에 들어온 부의금과, 둘째 아들 김신 결혼식 축의금의 일부라고 한다.
「백범학원과 김구주택-어리오나 저의 4백여 백범이 또 있아오니」(157쪽)
이날 김구는 지난날 생사를 함께하다 먼저 순국의 혼백이 된 동지 삼의사의 유골을 받들고 서울로 향하면서 국민에게 다음과 같은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 세 사람을 죽으라고 내보낸 것은 바로 나입니다. 그러나 그 세 사람을 보내고 나만이 살아 있으면서 아직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삼열사에 대하여 부끄럽기 한량없고, 회고를 금할 수 없습니다. 조국을 위하여 심령을 바치고 지하에 잠드신 선열과 충의지사가 어찌 삼열사뿐이리오만 대담무쌍히 왜적의 심장을 향하여 화살을 던져 조선 민족의 불멸의 독립 혼을 중외에 떨친 것은 아마 이 세 분이 으뜸일 것입니다. 나는 지금 유골을 모시면서 스스로 부끄러운 생각을 억제할 수 없으며 그들[과 함께] 지하에 불귀의 손이 된 몇만 몇천 명의 동지들의 사심 없는 애국의 지성을 본받아 하루 바삐 통일된 우리 정부의 수립이 실현되도록 삼천만과 같이 분골쇄신 노력하겠습니다.
「삼의사 천장식-태고사에서 효창공원에 이르는 길」(247~249쪽)
인천항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기 직전, 김구는 장티푸스에 걸려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했다가 겨우 살아난 만신창이 상태로 간수의 등에 업혀 경무청으로 들어갔다.
인천항 전체에 큰 파장을 몰고 온 김구에 대한 신문 내용은 『백범일지』에 매우 드라마틱하게 기록되어 있다. 1896년의 인천감리서 경무청에서 열린 첫 신문이 그만큼 김구 자신에게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1929년 『백범일지』 상권에서는 이 재판정에서 김구가 조선인 관리를 통렬하게 꾸짖는 기개를 보여 주었다. 제2차 신문도 옥문 밖의 경무청에서 진행됐는데, 첫 번째 재판 소식이 알려져 “길에는 사람이 가득 찼고 경무청 안에는 각 관청의 관리와 항구의 유력자들이 다 모인 모양이었다. 담장 꼭대기와 지붕 위까지 경무청 뜰이 보이는 곳은 어디나 사람들이 다 올라가 있었다”고 『백범일지』에서 묘사하였다. 김구는 세 번째 신문은 감리서에서 했다고 기록했는데, 이재정이 친히 신문을 하고 왜놈은 보이지 않았는데, 신문서 꾸민 것을 보고 고치게 한 후 서명을 해서 신문을 마쳤다고 했다.
「인천감옥-22세에 사형수가 되다」(2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