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가 대중화 되어 ‘개인의 기록’을 대표하게 되는 과정은 어느 나라나 ‘근대화’와 깊은 관련을 맺는다. 따라서 일기는 작자 ‘개인’과 그 주변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내면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으며, 동시에 그와 그가 속한 집단이 겪은 ‘근대화’를 비교․탐구할 수 있는 좋은 사료라 할 수 있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인문한국) 한국문화연구단 산하 ‘개인의 전통과 근대’ 기획연구팀은 이 ‘일기’를 주된 자료로 삼았다. 개인을 중심축으로 ‘근대화’ 과정을 재검토하면서 주체의 삶에 밀착하여 ‘근대’와 ‘전통’의 의미를 되묻기 위한 연구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물로서 일기를 통해 본 전통과 근대, 식민지와 국가(소명출판, 2013)가 출간되었다.
세계 곳곳에서 확산되는 개인의 일기
개인의 일기는 세계 곳곳에서 나타났다. 날짜별로 무언가를 적는 일기는 인류의 오래된 기록 양식이지만, 점차 그 내용은 관청이나 가문의 공적인 것보다 개인의 사적이고 내면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필자층은 사회 상층에서 중․하층으로 확산되었다. 서양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16세기경 시작되어 18, 19세기에 이르면 대세(大勢)가 된다.
일본도 비슷하다. 이미 17세기경이면 모든 신분층에서 개인적인 일기를 쓰는 사람이 나타났고 후대로 갈수록 그 수는 많아졌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이르면 일기장이 상품화되고 학교에서는 일기가 교육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이 시대는 ‘일기의 시대’라 할 만큼 일기 쓰기가 대중화되었다.
한국에서도 16세기 이후 개인의 일기가 늘어났는데, 필자는 대부분 지배층에 속하는 문인(文人)이었다. 그러면 언제부터 한국에서 개인의 일기가 대중화되었을까? 이 책에서 다루는 일기 중 하나는 일제강점기인 1933년도 경상남도 함안군의 22세 남자 주(周)씨의 일기이다. 그는 경제난을 겪는 ‘보통 사람’으로, 일기에 지루한 일상을 적었을 뿐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내용은 거의 없다. 그의 일기장은 일본 하쿠분칸[博文館]이 시판한 것으로, 최근 여러 사료기관에서 수집한 일기를 보면 일제강점기 학생과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시판 일기장에 쓴 것이 제법 있다. 일본과 유사한 방식으로 식민지 조선에서도 일기의 대중화가 서서히 이뤄진 것 같다. 물론 일본은 초등학교 취학률이 이미 1907년에 97%에 도달했지만, 식민지 조선은 1942년까지도 50%에 못 미쳤다. 그만큼 식민지 조선쪽의 일기 문화가 협소했을 것이다. 이렇게 개인의 일기는 지역이나 국가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시기에 유사한 과정을 밟으면서 확산되었다.
근대와 에고도큐먼트
에고도큐먼트(Ego-document)란 독일어로 자기 증언(Selbstzeugnis)을 말한다. 다시 말해 개인이 주체가 되어 생산한 기록들을 통합하여 부르는 개념이고 일기, 편지, 회고록 등이 이에 속한다. 이 책의 서론격인 첫 번째 주제 ‘에고도큐먼트와 역사’는 유럽에서의 에고도큐먼트 연구를 개관하며 새로운 접근들을 소개하였고, 에고도큐먼트 중 일기에 집중하여 근대 국민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살펴보며 일기를 통해 본 전통과 근대, 식민지와 국가의 전체적인 방향을 가리킨다.
다음 주제 ‘전통과 근대’는 이 책 모든 글에 포함되는 부분이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전통과 근대 사이에서 자라난 개인(성)에 초점을 맞춘 글을 실었다. 18세기 조선의 지식인 유만주의 일기, 18~19세기 독일어권 일기들을 분석하였는데, 일기의 내용과 이를 다루는 연구방법은 다르지만 유사하게 ‘자아’의 분열에 도달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또한 ‘식민지화’라는 이름 아래 각각 승려, 한국주차군 차모장, 조선헌병대사령관으로서 식민지화에 깊이 관여했던 일본인들의 일기를 분석한 글들은 주목할만 하다. 그들의 일기를 비롯한 개인 자료는 구체적인 지배정책의 추진과정과 내밀한 지배의식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1890~1910년대까지 식민지화가 심화됨에 따라 정책과 의식이 어떻게 변화하고 조응했는지 알 수 있고 그들이 맺은 조선인과의 관계를 통해 한정된 범위나마 조선인 사회를 엿볼 수 있다.
‘국경을 넘나드는 생활권’에선 이를 경험했던 조선인의 일기를 분석하였다. 일본의 식민지배로 인해 조선인의 ‘이촌향도’는 ‘국경’을 넘어 전개되었으며 상당수가 일본에서 어렵사리 생활 기반을 잡았고, 이렇게 형성된 생활권에 의지하여 많은 조선인이 조선과 일본을 넘나들었다. 오사카에 직업을 구하러 간 농촌 청년과 교토로 유학을 간 학생의 일기를 통해 생생한 실업(失業)과 고학(苦學) 생활은 물론, 당시 오사카와 교토의 재일조선인 사회를 살펴보았다.
마지막 ‘해방과 국가’에선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은 그렇게 가까이에 생활난, 전쟁 그리고 국가폭력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몰랐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한 노동자의 일기를 통해 해방 직후 일상과 해방의 의미를 밝히고, 한국전쟁 시기 가족의 학살을 체험한 유족의 자서전과 전기를 통해 그들이 정체성을 자각․표출하고, 국가폭력에 저항하는 주체로 나서는 과정을 분석하였다.
필자
정병욱鄭昞旭, Jung, Byung Wook_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교수
이타가키 류타板垣竜太, Itagaki, Ryuta_도시샤同志社대학 사회학부 준교수
클라우디아 울브리히Ulbrich, Claudia_베를린 자유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니시카와 유코西川祐子, Nishikawa, Yuko_교토분쿄京都文敎대학 문화인류학과 교수 역임
김하라金何羅, Kim, Ha Ra_서울대학교 강사
이사벨 리히터Richter, Isabel_비엔나대학교 현대사학과 대리교수
야마모토 조호山本淨邦, Yamamoto, Joho_붓쿄佛敎대학 문학연구과 박사후기과정
마쓰다 도시히코松田利彦, Matsuda, Toshihiko_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연구부 준교수
이형식李炯植, Lee, Hyoung Sik_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오타 오사무太田修, Ota, Osamu_도시샤同志社대학 글로벌스터디즈 연구과 박사후기과정 교수
김무용金武勇, Kim, Moo Yong_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문화동역학 라이브러리 문화는 복합적이고 역동적인 구성물이다. 한국 문화는 안팎의 다양한 갈래와 요소가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해왔고, 변화해 갈 것이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이 주관하는 이 총서는 한국과 그 주변 문화의 복합적이고 역동적인 양상을 추적하고, 이를 통해 한국 문화는 물론 인류 문화에 대한 새로운 통찰과 그 다양성의 증진에 기여하고자 한다. 문화동역학(Cultural Dynamics)이란 이러한 도정을 이끌어 가는 우리의 방법론적인 표어이다.
역사 자료 중에서 ‘일상생활의 긍정’이 충실히 담겨 있는 것을 꼽자면 바로 개인의 일기가 아닐까 한다. 그 자체가 ‘일상생활의 긍정’ 없이는 등장하거나 남겨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18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긴 시기의 일기를 개인의 삶에 밀착하여 역동적인 비교 연구를 통해 한국형 근대, 각국의 근대를 고찰한 일기를 통해 본 전통과 근대, 식민지와 국가는 개인의 삶에 밀착한 전통과 근대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