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의 혼란, 도시화와 산업화라는 거대한 사회적 물결을 소설을 통해 일상생활의 밑그림으로 승화시킨 1960년대 소설 연구(소명출판, 2013)가 출간되었다. 본서는 1960년대 소설을 통해 드러난 생활상을 바탕으로 그 당시,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인식과 인간의 삶에 대하여 차분하게 그려내고 있다.
전후세대의 자화상; 방관적․수동적 자기인식 ---
전후소설의 한 경향으로 ‘피해자 의식’을 꼽는다는 것은 타자에 의해 주체가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상황을 극복하려는 의지나 생활에 대한 의욕 등, 휴머니즘적 가치로 묶일 수 있는 주제를 다룬 소설 역시 비슷한 시기에 발표되고 있다는 점에서 전후소설에 속하는 모든 작품이 피해자 의식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최인훈의 「가면고」에서 다뤄지고 있는 것처럼, 전쟁의 피해에 대한 일종의 보상심리로서 성급하게 전쟁의 상처를 극복했다고 믿었다가 좌절하는 전후세대의 자화상은, 휴머니즘을 내세운 선우휘, 오상원 등의 전후작가가 놓인 위치를 반성적으로 점검할 수 있는 지점을 제공한다. 「가면고」의 결말은 그 보상심리가 피해자 의식의 변형된 형태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구체적인 작품 분석 이전에 추상적인 차원에서 말하면, 피해자에게는 죄의식이 존재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자기가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전적으로 타자에 의해 결정되는 상황에서는 선악의 구별, 나아가 죄의 인식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할 때, 타자의 가해를 불가피하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였을 뿐인 피해자에게 죄나 윤리의 문제를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전쟁과 전후의 절박한 상황이 제시하는 사건의 타자성은 손창섭과 장용학의 소설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거니와, 예컨대 폭탄이 저기가 아니라 여기에 떨어져 죽을 수도 있었던 자기가 지금 살아있다는 것은 자기로서는 도저히 개입할 수 없는 속수무책의 문제이다.
이런 점에서 1960년대 소설에서 타자성에 대한 인식과 죄의식의 자각이 함께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타자에 의해 결정되는 자기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자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되지 않는 자기에 대한 동시적 이해를 심화시킨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역사적 의의를 판단하기 전에 그 자체만으로 본다면 4․19 역시 해방이나 전쟁과 같이 예측하기 어려웠던 사건의 하나로 상정할 수 있다. 물론, “4․19도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는 8․15, 6․25 등과 같은 범주로 보려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다른 것들은 역사적으로 밖에서 주어진 사건임에 비추어 4․19는 본질이 상당히 다른 부류의 것으로 역사의 밖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형성된 것”이라는 지적은 정당하다. ‘밖에서 주어진 것-내부로부터 형성된 것’의 관계가 ‘타율-자율’을 의미한다면, 4․19에 대해 문학 내부에서는 대표적으로 김현과 백낙청에 의해 ‘4․19세대’와 ‘미완의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자율성을 강조하는 역사적 해석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후 해석의 반대편에 방관적, 수동적 입장에서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서의 4․19를 맞았다고 증언하는 문인, 작가들의 회고가 있다. 이와 같은 4․19의 양면성은 1950년대의 타율 일변도의 상황에서 벗어나 자율-타율의 의미를 탐색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4․19와 근대화, 그리고 그 속에서의 자의식
1960년대에 급격하게 진행되었던 근대화에 대해서도 비슷한 맥락에서 접근할 수 있다. 근대화라는 과제에 대해서도 서구 편향적이거나 일부 엘리트에 의해 주도되는 것만이 아니라 “한국적이면서 동시에 민중적이어야 한다”는 이중의 자율성이 강조되었지만, 그 기대가 쉽게 성취되었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근대화가 문학 영역에서는 자율성에 대한 위기로 받아들여졌는데, 이는 순수․참여 논쟁의 당사자인 이어령과 김수영이 경제발전을 최우선 과제로 삼은 1960년대의 근대화가 자유를 위협한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60년대 한국 사회를 규정하는 두 요소로서의 4․19와 근대화는 타자성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의식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자의식은 자율적 주체로서의 자기를 구성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해 죄의식을 수반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러한 죄의식은 구체적인 잘못(죄)에 대한 것을 넘어 주체가 자유롭지 못한 상태 자체에 대한 것이다. 다시 말해, 마땅히 자유로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타율적인 상황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이 주체에게 죄의식을 유발한다.
따라서 죄의식은 주체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이다. 그런데 죄의식은 또한 주체가 자유롭지 못한 상태를 스스로 죄로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죄의식은 어떤 윤리적 태도와 만나게 된다. 이러한 윤리적 태도는, 민감한 자의식을 드러내는 1960년대 소설이 단지 당시의 타율적 사회에 대한 자기 폐쇄적 주체의 불안을 반영하고 있다는 부정적 평가를 넘어설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근대화의 연속, ‘1960년대식’ 삶과 자기 탐구---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 현대적 혹은 근대적이라고 불릴 만한 삶이 출현한 시기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더 앞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지만, 도시화와 산업화가 전국적으로 급격하게 확대되기 시작한 1960년대라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삶과의 연속성을 고려해 본다면 그 시기에 한국 현대 사회의 삶과 풍속이 규정된 바가 크며, 그렇기 때문에 1960년대 소설 역시 현대 생활에 대한 밑그림을 제공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1960년대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대학생 주인공의 정서가 보편적 감성의 위치를 획득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작품들이 인구의 대부분이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생활하면서 부딪치는 타인들과의 관계를 선도적으로 포착했기 때문일 것이다.1960년대를 살아본 적 없는 저자가 그때 쓰이고 읽힌 소설에 그리 낯설지 않게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반세기쯤 전의 소설 속에 묘사된, 화창하기보다는 오히려 어둡고 죄의식에 민감한 내면을 가까이 느낄 수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저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60년대식’(김승옥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다)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한 자기’ 따위에 대한 값어치가 현격히 추락하고 조롱받기조차 하는 21세기 포스트모던 사회의 도래 앞에서 ‘60년대식’ 인간 삶에 대한 연구는 현대 삶의 근간과 중심점을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그 시기 소설 속에 드러난 인물과 그들의 삶을 통하여 우리 몸 속 깊이 마치 유전형질처럼 아로새겨진 죄의식과 애도, 가족애 등을 차분하면서도 심도 있게 그려내고 있다. 그렇기에 이 1960년대 소설 연구는 독자들에게 보다 큰 울림을 선사하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