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東諸國記는 1443년(세종 25)에 書狀官으로 일본에 다녀온 申叔舟(1417~1475)가, 1471년(성종 2) 왕명을 받아, 그가 직접 관찰한 일본의 정치·외교관계·사회·풍속·지리 등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기록한 책으로서, 15세기의 한일관계와 일본 사회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申叔舟는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화려한 경력과 중요한 업적을 이룬 조선 전기의 대표적 名臣이다. 그러나 ‘숙주 나물’이라는 표현이 상징하듯이, 그는 절개를 저버리고 영달을 선택한 변절자의 한 표상으로 지목되어 상대적으로 폄하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신숙주의 본관은 高靈으로 자는 泛翁, 호는 保閑齋 또는 希賢堂, 시호는 文忠이다. 아버지는 공조참판(종2품)을 지낸 申檣(1382~1433)이고, 어머니는 知成州事 鄭有의 딸이다.
참판이라는 벼슬이 보여주듯 신장은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세종실록’에 실려 있는 그의 卒記에는 그가 인품이 온후하고 詞章과 초서ㆍ예서에 뛰어났지만, 술을 너무 좋아한 것이 단점이었다고 적혀 있다.
그의 능력을 아낀 세종이 절주를 당부했지만, 과음은 결국 그의 死因이 되었다(세종 15년 2월 8일). 그러니까 신숙주는 16세 때 아버지를 여읜 것이다.
‘숙’이라는 이름이 나타내듯이, 신숙주는 申孟舟, 申仲舟, 申松舟, 申末舟로 이어지는 5형제 중 셋째였다. 신숙주는 젊은 시절부터 발군의 능력을 보였다. 21세 때인 1438년(세종 20) 생원ㆍ진사시를 동시에 합격했고, 이듬해 문과에서 3등의 뛰어난 성적으로 급제한 것이다.
이때부터 세종대가 끝날 때까지 그는 집현전 부수찬(종6품), 응교(정4품), 직제학(정3품)과 사헌부 장령(정4품), 집의(종3품) 등의 주요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이 시기의 경력에서 중요한 장면은, 우선 26세 때인 1443년(세종 25) 書狀官으로 일본 사행에 동참한 것이었다.
서장관은 正使와 副使를 보좌하면서 사행을 기록하고 외교 문서의 작성을 맡은 중요한 직책으로서, 당시의 가장 뛰어난 젊은 문관(4~6품)이 맡는 것이 관례였다.
상당한 정도의 신병을 무릅쓰고 출발했지만, 신숙주는 일본 본토와 대마도를 거치면서 文名을 떨치고 여러 외교 사안을 조율했다. 특히 대마도주를 설득해 歲遣船의 숫자를 확정한 것은 중요한 성과로 평가된다.
다음으로는 1450년(세종 32) 중국에서 倪謙과 司馬恂이 사신으로 왔을 때, 그들을 접대하면서 뛰어난 문학적 능력을 발휘한 것도 특기할만하다. 예겸은 자신이 지은 雪霽登樓賦에 신숙주가 걸어가면서 운을 맞춰 화답하자 “屈原과 宋玉 같다”면서 감탄했다.
이때는 成三問(1418~1456)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는데, 그는 신숙주보다 한 살 적었지만 문과 급제는 한 해 빨랐다. 그 뒤 전혀 다른 인생의 궤적을 밟은 두 사람이었지만, 그 경력과 나이는 매우 흡사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중요한 轉機는,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신숙주도 그러했다. 그에게 가장 큰 전기를 제공한 사람은 얼마 뒤 세조로 등극하는 首陽大君(1417~1468)이었다.
두 사람은 동갑이었다. 그전에도 서로 알고 일정한 교류는 있었겠지만, 운명이라고 말할 만큼 친밀도와 중요성이 급증한 계기는 35세 때인 1452년(문종 2)이었다.
그때 수양대군은 謝恩使로 중국에 파견되기 직전이었다. 그 사행은 야심이 큰 수양대군을 중앙에서 일정하게 격리시키려는 좌천의 의미가 큰 조처였다. 다시 말해서 수양대군에게는 어떤 결단이 필요한 중대한 시점이었다.
그 뒤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과 그의 가장 핵심적인 신하가 되는 신숙주의 만남을, 실록은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8월 10일 세조는 鄭守忠이라는 인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신숙주가 집 앞을 지나갔다. 세조는 “申修撰”이라고 그를 불렀고, 집으로 초대해 술을 마셨다. 그때 신숙주는 수찬이 아니라 직제학이었지만, 세조가 그렇게 불렀다는 사실은, 그 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술잔을 기울이며 두 사람은 의미 깊은 대화를 나눴다.
세조는 “옛 친구를 어째서 찾지 않는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지 오래였다. 사람이 다른 일에는 목숨을 아끼더라도 사직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고, 신숙주는 “장부가 아녀자의 손 안에서 죽는다면 ‘집에서 세상 일을 모르는 것’이라고 말할 만합니다”고 화답했다. 세조는 즉시 말했다. “그렇다면 나와 함께 중국으로 갑시다.”(단종 즉위년 8월 10일)
이 짧은 대화는, 세조와 韓明澮의 만남과 함께, 개인의 운명뿐 아니라 조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결정적 사건이었다고 말할 만하다.
그 뒤 서장관으로 수행한 사행에서 세조와 신숙주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당연히 흉금을 터놓고 국가의 대사를 논의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강구했던 ‘구국의 방안’들은, 한 해 뒤인 1453년(단종 1) 10월 10일 癸酉靖難으로 구체화된다.
계유정난이 일어났을 때 신숙주는 외직에 나가 있었지만, 세조가 정권을 장악한 이후, 그야말로 화려한 출세를 거듭했다.
그는 1454년(단종 2) 도승지를 시작으로 병조판서, 좌우찬성, 대사성을 거쳐 40세의 젊은 나이로 우의정에 올랐으며(1457년, 세조 3) 5년 뒤에는 최고의 지위인 영의정에 임명되었다(1462년, 세조 8).
예종이 즉위하자 한명회, 具致寬과 함께 院相에 임명되었고, 예종이 급서하고, 성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등극하자, 다시 영의정에 제수되어 4년 가까이 재직했다(성종 2년 10월 23일~성종 6년 7월 1일, 45개월).
어린 국왕의 갑작스러운 즉위로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이 시행된 이때의 정황은, 마치 단종 때의 국면처럼, 왕위 계승을 둘러싼 격렬한 투쟁이 재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숙주는, 한명회를 비롯한 여러 훈구대신 들과 함께, 혼란에 빠질 수도 있는 국정을 안정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처럼 화려한 관력 외에도 그는 정난(2등), 좌익, 익대, 좌리(이상 1등)공신에 책봉되는 유례 없는 勳歷을 누렸다. 이런 관력과 훈력은 당시 그와 함께 가장 중요한 대신이었던 한명회와 더불어, 아마도 한국사 전체에서 가장 화려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의 경력에서 주목할 또 다른 사항은, 폭넓은 해외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적 지식과 안목을 가졌다는 측면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미 그는 젊은 시절 서장관으로 일본과 중국에 다녀왔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불편한 교통과 통신 수단이 작동하던 그때, 그런 여행은 전 세계를 체험한 것과 동일한 의미였을 것이다.
세조가 즉위한 뒤에도, 신숙주는 다시 중국에 奏聞使로 파견되어 임명 교서를 받아왔으며, 관직 생활 전체에 걸쳐 중요한 외교문서를 대부분 작성하고 검토했다.
이런 폭넓은 국제적 안목이 산출한 중요한 업적은 海東諸國記의 저술이다. 그 책은 앞서 1443년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왔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의 지형과 국내 사정, 외교 절차 등을 지어 세종에게 올린 것으로, 1471년(성종 2)에 간행되었다.
‘해동의 여러 나라’는 일본 본토와 큐슈, 쓰시마(대마도), 이키도(壹岐島), 류큐국(琉球國)이다. 저술된 내용 외에도 9장의 지도를 포함해 시각적 효과를 높인 그 책은 조선 전기와 일본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 시대의 한일 관계에서 가장 정확하고 기초적인 사료로 인정받고 있다.
세조는 이런 그를 당 태종의 명신인 魏徵에 견주었고, 실록의 卒記에서도 “신숙주는 인품이 고매하고 너그러우면서도 활달했다. 經史를 두루 알아 의논할 때 항상 대체를 파악했고, 대의를 결단할 때는 강물을 터놓은 듯 막힘이 없었다”고 격찬했다(성종 6년 6월 21일).
신숙주와 관련해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단종을 저버리고 세조를 선택한 결정일 것이다. 세조의 정난은 도덕적 명분이 희박한 정치적 야심의 소산이 분명했다.
복잡한 이해 관계가 상충하는 현실과 정연한 논리가 지배하는 이상은 거의 언제나 대립한다. 인간의 선택은 그러므로 대부분 그 사이에서 이뤄진다.
계유정난이 일어났을 때 외직에 나가 있었다는 사실은, 신숙주가 그 모의에서 비교적 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의 재능이 그런 무력적 거사에는 적합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가장 주도적으로 모의하고 성공시킨 사람은 다 알 듯이 한명회였다.
신숙주에게 세조의 집권은 자신의 의지와는 비교적 멀리 떨어졌던, 그러니까 움직일 수 없는 현실로 주어진 운명에 가까웠다. 그것을 거스르는 것은 공식적 삶의 포기와 같은 의미였다. 탁월한 재능을 가진 30대 후반의 인재에게 그런 선택은 참으로 어렵고, 어쩌면 무의미한 결정이기도 했을 것이다.
앞서 간단히 살펴본 그의 경력은, 아부나 언변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탁월한 학식과 실무적 능력과 국제적 감각이 조화되어야만 가능한 업적일 것이다. 그의 선택은 일차적으로는 그의 삶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조선의 발전에도 도움이 된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된다.
申叔舟는, 1438년(세종 20) 사마양시에 합격하여 동시에 생원·진사가 되었다. 이듬해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典農寺直長이 되고, 1441년에는 집현전부수찬을 역임하였다. 1442년 국가에서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게 되자 서장관으로 뽑혔다.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참가하여 공적이 많았다. 중국음을 훈민정음인 한글로 표기하기 위하여, 왕명으로 成三問과 함께, 유배중이던 명나라 한림학사 黃瓚의 도움을 얻으러 요동을 13차례나 내왕하였는데, 언어학자인 황찬은 신숙주의 뛰어난 이해력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1447년 중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집현전응교가 되고, 1451년(문종 1)에는 명나라 사신 倪謙 등이 당도하자, 왕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시짓기에 나서 東方巨擘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 해 掌令·執義를 거쳐, 직제학을 역임하였다.
1452년(문종 2)수양대군이 謝恩使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으로 추천되어 수양대군과의 유대가 이때부터 특별하게 맺어졌다. 1453년 승정원동부승지에 오른 뒤 우부승지·좌부승지를 거쳤다. 같은 해 수양대군이 이른바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외직에 나가 있었으며, 수충협책정난공신 2등에 책훈되고, 곧 도승지에 올랐다.
1455년 수양대군이 즉위한 뒤에는 同德佐翼功臣의 호를 받고 예문관대제학에 超拜되어 高靈君에 봉하여졌다. 이어 奏聞使로 명나라에 가서 새 왕의 誥命을 청하여 인준을 받아온 공으로 土田·노비·鞍馬·의복을 함께 받았다.
1456년(세조 2)에 병조판서로서 국방에 필요한 외교응대의 일을 위임받아, 사실상 예조의 일을 전장하게 되었다. 곧이어 判中樞院事가 되어 判兵曹事를 겸하고, 우찬성이 되어서는 대사성까지 맡았다.
1457년 좌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오르고 1459년에는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 무렵 동북 방면에 野人의 잦은 침입으로, 강경론을 폈다.
1460년에 강원·함길도의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야인정벌을 위하여 출정하였다. 군사를 몇 개 부대로 나누어 여러 길로 한꺼번에 진격하는 전략을 펼쳐 야인의 소굴을 크게 소탕하고 개선하였다.
1462년에 영의정부사가 되고, 1464년에 지위가 너무 높아진 것을 염려하여 사직한 적이 있으며, 1467년에 다시 예조를 겸판하였다.
이듬해 예종이 즉위함에 遺命으로 승정원에 들어가 院相(어린 임금을 보좌하던 원로대신)으로 서무를 參決하였다. 같은 해 이른바 南怡 옥사를 처리하여 輸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듬해 겨울에 예종이 승하하자, 대왕대비에게 後嗣의 택정을 서두를 것을 건의하여 大統의 승계에 공이 컸다.
성종이 즉위함에 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의 호를 받고, 영의정에 다시 임명되었다. 老病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고, 1472년(성종 3)에는 世祖實錄·睿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세조 때부터 작업을 해온 東國通鑑의 편찬을, 성종의 명에 의하여 신숙주의 집에서 총관하였다.
그리고 세조 때 편찬하도록 명을 받은 國朝五禮儀의 개찬·刪定을 위임받아 완성시켰다. 또한 여러 나라의 音韻에 밝아, 여러 譯書를 편찬하였으며, 또 일본·여진의 산천 要害를 표시한 지도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海東諸國記를 지어 일본의 정치세력들의 강약, 병력의 다소, 영역의 원근, 풍속의 異同, 私船 내왕의 절차, 우리측 館餽(객사로 보내는 음식)의 형식 등을 모두 기록하여, 일본과의 交聘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신숙주는, 이러한 많은 업적을 남기고서, 1475년(성종 6)에 일생을 마쳤다. 세조는 일찍이 “당태종에게는 위징, 나에게는 숙주”라고 할 정도로 세조와의 관계가 깊었다. 이러한 관계는 사육신·생육신을 추앙하는 道學的 분위기에서는 항상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나, 당대에서의 신숙주의 정치적·학문적 영향력은 큰 것이었다.
신숙주를 좋게 평가하는 표현으로는 ‘항상 大體를 생각하고 소小節에는 구애되지 않았다.’든가, ‘큰일에 처하여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江河를 자르듯 하였다.’는 것과 같은 것이 있다.
과거시험의 試官을 13차례나 하여, 사람을 얻음이 당대에서 가장 많았고, 예조판서를 십 수년, 병조판서를 여러 해 동안 각각 겸임한 것은 드문 일이었다.
이러한 특별한 배려는 외교·국방면에서 신숙주의 탁월한 능력에 따른 것으로서, 저술 대부분이 이에 관계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대교린의 외교문서는 거의가 신숙주의 윤색을 거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글씨를 잘 썼는데, 특히 송설체에 뛰어났다고 한다. 전하는 필적으로는 송설체의 유려함을 보여 주는 夢遊桃源圖의 贊文과 晉唐風의 고아한 느낌을 주는 해서체의 和明使倪謙詩稿 등이 전한다.
현재 국내에서 공개되어 전하는 海東諸國記의 간본으로는, 5장 분량의 초주갑인자본(국립중앙도서관 소장)과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 초(선조말기) 훈련도감에서 목활자로 간행한 을해자체 목활자본, 그리고 근대에 들어와 1923년에 후손 신용휴가 간행한 목활자본 등이 있는데, 이 가운데 안숙자 소장본은 17세기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을해자체 목활자본이다.
燕山君日記를 보면, 1501년(연산군 7) 1월 22일자 기사에 해동제국기와 관련된 기록이 있는데, 병조판서 이계동이 “류큐(琉球)의 풍토·인물·세대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므로, 成希顏으로 하여금 상세하게 물어서 해동제국기의 끝에 이를 써서 후일에 대비할 것”을 요청하자 왕이 이를 따랐다는 내용이 있다.
안숙자 소장본 제2책의 말미에도, “成化九年(1473년)九月初二日 啓”에 이어 류큐(琉球)의 지리와 풍속 등에 대한 내용과 語音飜譯 등이 5장에 걸쳐 추가되어 있다.
1933년에 조선사편수회에서 영인 간행한 海東諸國記의 해설에 따르면, 당시 “전하는 간본은 4종이 있었는데, 3종은 연산군 말년부터 중종초년까지, 곧 1506년경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일한 판본이었고, 나머지 한 종은 인조 초년(1623년)에 인쇄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었다.”고 하였다.
3종의 동일한 판본의 간년을 1506년으로 추정한 근거는, “부록이 첨가된 연대와 내사기” 등이었다고 한다. 이 때 영인한 저본은 조선사편수회가 당시 소장하고 있던 것이었는데, 목판본이 아니라 初鑄甲寅字로 찍은 금속활자본으로 추정된다.
이 책 역시 권말에 “弘治十四年(1501년)四月二十二日/ 啓下承文院”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연월표시는 승문원에 알린 시기를 말한 것이지만, 간행시기를 짐작하게 하는 기록이다.
그런데,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 초(선조말기)에는 훈련도감에서 병사들이 새긴 목활자로 여러 책을 찍어내었는데, 이 책 역시 훈련도감에서 만든 (을해자체) 목활자로 찍어 낸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권말에 있는 어음번역의 우리말 표기는, 조선사편수회에서 간행한 초주갑인자본 영인본에 수록된 어음번역과 서로 동일하다.
이를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17세기 초기에 훈련도감에서 목활자(을해자체)로 이 책을 간행하면서, 약 100년 전에 찍은 초주갑인자본의 내용과 동일하게 만든 것이다.
안숙자 소장본의 해동제국기는, 17세기에 간행된 을해자체 목활자본이기는 하지만, 완전한 초주갑인자본이 발견되지 않고 있는 현재, 가장 오래된 해동제국기 판본이고, 또한 근대 이전 시기의 유일한 목활자본이며, 보존 상태도 온전하므로 문화재로 보존할 가치가 매우 크다.
‘해동제국’이란 곧 일본의 본국·구주 및 대마도·이키도(壹岐島)와 琉球國를 총칭하는 말이다. 찬술 당시의 내용은 海東諸國總圖·일본의 本國圖·西海道九州圖·이키도도(壹岐島圖)·대마도도(對馬島圖)·류큐국도(琉球國圖) 등 6매의 지도와 日本國紀·琉球國紀·朝聘應接紀 등이었다.
그 뒤 2, 3편의 追錄이 첨가되어, 1473년 畠山殿副官人良心曹饋餉日呈書契가 권말에 附錄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3월 예조좌랑 南悌가 三浦倭戶의 失火를 賑恤할 때, 왕명을 받들어 삼포의 지도를 모사하고, 또 恒居倭人의 戶口를 조사한 결과로 만들어진 熊川薺浦圖·東萊釜山浦圖·蔚山鹽浦圖 3매가 권두의 지도에 첨가, 삽입되었다.
또한, 1501년(연산군 7) 류큐국의 使者가 우리 나라에 내빙할 때 병조판서 李季仝의 건의로 宣慰使 成希顔이 국정을 詳問列記한 것이 이 책 끝에 부록되었다. 이와 같이, 수차의 추록이 있었으나 원내용에 대해 補修한 흔적은 없다.
이 책의 찬자인 申叔舟는, 세조 때의 重臣으로서 일찍부터 국가의 樞機에 참여한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세조의 명령에 따라 영의정으로서 예조의 사무를 겸장, 事大交隣의 외교 정책을 전담하였다. 그리고 성종 즉위 이후 舊規를 정비하고 新制를 立案, 해동제국 使人應接의 사례를 개정해 외교상의 면목을 일신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해동제국기는 그의 견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그 당시 일본에서 전래된 문헌과 往年의 견문, 예조에서 관장한 기록 등을 참작해, 교린 관계에 대한 후세의 軌範을 만들기 위해 찬술한 것이다. 따라서 추록된 부분도 연산군대의 것을 제외하고는 그가 직접 첨가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책은 한일 관계의 역사적 변천과 朝聘應接 규정의 연혁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상당히 정비되어 있어 교린 관계의 先規로서 오랫동안 참고되어왔다. 그러나 古刊本 또는 古寫本이 아직 국내에서는 발견되지 못했고, 일찍이 인조 때 중간된 것이 예조 소속의 나이 많은 관리 집에서 겨우 1本만이 保藏되었을 뿐이었다.
중간된 뒤에도 1782년(정조 6) 4월의 外奎章閣形止案과 같은 藏書目錄에서나, 또는 金慶門의 通文館志와 安鼎福의 列朝通紀와 같은 인용 서목에 책명만 보일 정도이다. 더욱이 그 내용도 지도를 제외한 全文이 海行摠載에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이에 비해 일본에서는 고사본 2, 3본이 알려져 있다. 즉, 고간본도 東京의 ‘나이가쿠문고(內閣文庫)’ 소장의 ‘구사에키모리씨고조쿠재장본(舊佐伯毛利氏江粟齋藏本)’, 동경대학 史料編纂所 소장의 舊養安院藏書本 등 몇 종류가 있다.
이 책은 조선 초기와 일본 ‘무로마치막부시대(室町幕府時代)’의 한일외교 관계에 있어서 가장 정확하고도 근본적인 사료이다.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에도시대(江戶時代)’ 한일관계 연구의 유일한 사료로 폭넓게 이용되어왔다.
우리 나라에서는 1933년 朝鮮史編修會에서 朝鮮史料叢刊 제2집으로 영인, 간행하였다. 그리고 1974년 民族文化推進會에서 海行摠載를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