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계 박세당의 유교철학 비판, 사변록 1, 제1장 대학에 대한 비판

박세당 지음(탁양현 엮음) | e퍼플 | 2018년 08월 31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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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朴世堂의 儒家哲學 비판, 思辨錄



朴世堂(1629~1703)의 삶의 歷程을 살피다 보면, 어쩐지 前代 李卓吾(1527~1602)나 後代 丁若鏞(1762~1836)의 삶이 overlap된다. 그들은 모두 시대와 不和한 流配旅行者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 공통점은 當代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유가철학에 대한 否定에서 기인한다.
獨尊儒術이라는 표현처럼, 유가철학은 사상적 부정이나 비판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한 자는 그저 斯文亂賊일 따름이다. 그런데 그러한 측면은 人類史에서 작동하는 온갖 이데올로기적 철학사상에 공통한다. 현대사회라고 해서 별다를 게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본주의, 사회주의, 자유민주주의, 공산주의, 전체주의, 독재주의, 친미, 친중, 친일, 반미, 반중, 반일, 종북, 보수, 진보 따위의 온갖 이데올로기적 가치들이 뒤어켜 泥田鬪狗하고 있다.
그러한 이전투구의 가장 근본적인 까닭은 ‘生存의 利得’이다. 인간존재로서 생존을 위해 전쟁마저도 不辭해야만 한다. 게다가 그러한 생존을 넘어서는 이득을 목적케 되면, 이제 그 가혹함과 집요함은 상상을 초월케 된다. 그러한 사례는 인류의 역사가 ‘생존의 이득’을 위한 전쟁의 역사라는 史實로써 쉬이 검증된다.
박세당의 시대는 國內政治의 시대였다. 그러다보니 ‘생존의 이득’의 명분이라는 게 기껏해야, 예컨대 上服을 1년 입느냐, 3년 입느냐의 문제 따위를 빌미 삼아 상대편을 處斷키도 했다.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당최 납득되지 않을 수 있지만, 주자학적 禮治를 이데올로기 삼는 당시에는 마땅히 문제될 수 있다. 더욱이 그 裏面에는 조선왕조의 政權을 左之右之하는 黨派의 문제가 얽혀 있다. 1년을 택하느냐 3년을 택하느냐에 따라 목숨의 與奪이 결정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자학적 올바름’은 현대사회의 ‘정치적 올바람’에 비견될 수 있다. 흔히 PC라고 지칭되는데, 이는 모든 종류의 편견이 섞인 표현을 쓰지 말자는 정치적, 사회적 운동을 의미한다.
PC운동의 ‘Political Correctness’는 흔히 ‘정치적 匡正’, ‘정치적 공정성’, ‘정치적 올바름’ 등으로 번역된다.
문화상대주의와 다문화주의를 사상적 배경으로 삼아, 인종, 성, 성적 지향, 종교, 직업 등에 대한 차별이 느껴질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더불어 차별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것을 골자로 한다.
곧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를 주창하면서, 성차별이나 인종차별에 근거한 언어 사용이나 활동에 저항해, 그걸 바로 잡으려는 운동이다.
미국 중산층의 언어 사용에 주목해, 차별이나 편견에 바탕을 둔 언어적 표현이나, ‘마이너리티’에게 불쾌감을 주는 표현을 시정케 하는 PC운동은, 1980년대에 미국 각지의 대학을 중심으로 전개됨으로써, 성차별적, 인종차별적 표현을 시정하는 데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PC 운동은, 그간 대학에서 가르쳐 온 ‘위대한 책들’이니 ‘걸작’이니 하는 것들이, 모두 서구 백인들의 문화유산이었음을 지적하면서, 소수 인종 문학 텍스트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PC운동은 나이에 대한 차별(ageism), 동성연애자들에 대한 차별(heterosexism), 외모에 대한 차별(lookism), 신체의 능력에 대한 차별(ableism) 등 모든 종류의 차별에 반대한다.
이러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주장이 그릇될 리 없다. 응당 어느 누구라도 차별당하지 않는 것이 옳다. 그러나 세월 안에서 이러한 ‘정치적 올바름’은 또 하나의 새로운 권력으로서 가혹하게 작동하고 있다. 그런 것이 인류사회의 권력이 지닌 기묘함이다.
그러한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불화한 탓에, 이탁오, 박세당, 정약용 등은 죄다 자의든 타의든 유배적 은둔의 삶을 살아내야만 했다. 그런 박세당의 시대에 비한다면, 21세기는 國際政治의 시대다. 국제정치를 조작하는 ‘Great Game’의 양상은 실로 복잡하며 복합적이다. 그러다보니 21세기에는 당최 은둔할 수 있는 시공간마저도 不在하다는 생각이 든다.
국내정치의 경우에도, 21세기 한국사회의 상황을 볼 때, 박세당의 시대에 비해 별반 나아진 게 없다. 保守는 이미 낡아버렸고, 進步는 이미 늙어버렸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보수세력이 유가철학 흉내를 내더니, 진보세력이 執權하고서 세월이 흐르다보니, 이제 진보세력 역시 유가철학 흉내를 내고 있다.
‘고인 물은 썩는 법’이며, 곪은 종기는 결국 터지기 마련이다. 보수가 그러했듯 진보 역시 이내 고이고 곪아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시대의 이데올로기는, 역사를 작동시키는 원동력인 탓에 역사의 本性的 日常이다. 다만, 그런 시대 이데올로기와 불화하여 비판하는 자는, 결국 이탁오, 박세당, 정약용 등과 유사한 삶을 살아낼 수밖에 없다.

저자소개

朴世堂은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문신으로서, 少論의 지도자 중 한사람이다. 西人이 김익훈, 김석주 등의 역모 무고 이후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서자 소론을 택했다.
농촌생활 중 博物學의 영향을 받기도 했고, 농업 서적인 색경 등을 저술하기도 했다. 이경석의 행장을 찬하면서 송시열을 불상인이라 비판한 일로 사문난적 제3호로 몰리고, 그가 지은 비석은 땅에 매몰되고 사변록 등의 저서들은 수난을 겪게 된다.
본관은 潘南, 자는 季肯, 호는 西溪, 潛叟 · 西溪樵叟이며, 시호는 文貞이다. 서계 박세당은 1629년(인조7년) 음력 8월 10일 아버지의 부임지인 전라남도 남원부 관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의정부좌참찬 朴東善이며 아버지는 이조참판 朴炡이다. 어머니는 관찰사 尹安國의 딸인 楊州尹氏이다.
1629년 아버지의 임지인 전라도 남원부 관아에서 출생, 당대의 명문가였으나 박세당이 4살 때 부친이 병사한 이후로 가세가 기울어 10세가 되어서야 글을 배울 수 있었다.
17세 때 의령 남씨 南一星의 딸이자 南九萬의 누이와 결혼하여 泰維와 泰輔, 泰翰 세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소년 시절 고모부인 교관 남사무에게 글을 배운 뒤 처남 남구만, 처숙부 南仁星 등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는 데 힘썼다.
또한 같은 서인이자 온건파 소론이었던 박세채 역시 그의 일족이었다. 4살 때 아버지가 병사하였고, 7살 때에는 큰 형인 朴世圭마저 요절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연이어 병자호란이 발생하면서, 피난 중 재산을 잃고, 조모 · 모친 · 두 형과 함께 강원도 원주 · 충청북도 청풍 · 경상북도 안동을 전전하며 피난생활을 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형편이 어려워 청주·천안 등지로 옮겨다니며 곤궁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1660년(현종 1년) 32세의 나이로 증광 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이후 예조좌랑, 병조좌랑, 사간원정언, 병조정랑, 사헌부지평, 홍문관교리, 홍문관교리 겸 경연시독관 등의 삼사의 요직을 역임한 뒤 함경북도병마평사로 나가기도 했다.
1664년 황해도 암행어사로 나갔다. 1667년 이조좌랑이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杖刑을 받았다. 그 해 동지사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94년 갑술옥사에 승지가 되고, 공조판서를 거쳐 1700년(숙종 26년) 음력 8월엔 이조판서직이 내려졌다

박세당은 소론 출신으로 노론계의 송시열과 대립 관계였다. 이러한 연유로 노론에게 여러 번 비난을 받자 정치에 뜻을 버리고 경기도 양주 석천동으로 물러나 농사를 지으면서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몰두했다.
1702년(숙종 28년) 李景奭의 비문을 지은 것이 계기가 되어 정치적인 박해를 받게 되었다. 비문 속에는 송시열의 인품이 이경석의 인품보다 못하다는 내용이 있어, 노론에게 斯文亂賊으로 몰려 삭탈관직 당하고 玉果로 유배되었다.
일설에는 1703년(숙종 29년) 思辨錄을 저술하여 주자학적인 학풍을 비판하고 독자적인 견해를 발표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사문난적으로 몰렸다고 한다.
비난의 포문은 洪啓迪(1680~1722)이 유생 108명과 함께 열었다. 이들은 박세당의 글이 성인을 업신여겼으며 正人을 욕했다고 단정한 뒤, 이경석 비문과 사변록을 거두어 불태움과 동시에 엄중한 벌을 내려달라고 청했다. 이에 대해 국왕의 조치는 신속하여 즉시 삭탈관직과 함께 문 밖에 내치게 했고 儒臣들에게 조목조목 따져 잘못을 지적한 글을 올리게 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그는 四書는 물론 老子道德經, 莊子의 연구를 통해 주자학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또한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훼손된 孔孟의 본뜻을 밝힌다는 입장에서 思辨錄을 저술하였다. 이러한 학문 태도로 인해 그는 주자학에 경도된 당시의 지배세력으로부터 여러 차례 비난을 받았다.
노론 김창흡 등이 가장 먼저 팔을 걷고 서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박세당의 제자인 수찬 李坦과 李仁燁 등이 구명소를 올려 반박했다. 이탄은 후일 서계의 연보를 작성한 사람이며, 이인엽은 상소로 서계가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도록 한 이다.
그는 소론파의 거두였던 윤증, 같은 반남 박씨인 朴世采, 처숙부 南二星, 처남 南九萬 등과 교유하였고, 우참찬 李德壽, 함경감사 李坦, 좌의정 趙泰) 등의 제자를 양성하였다. 박세당의 제자인 수찬 이탄 · 이인엽 등의 소청으로 석천동으로 돌아왔으나 귀환한 지 3개월 만에 죽었다.
그의 학문과 행적에 대한 논란은 사후에도 계속되어, 1722년에 文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가 1723년(경종 3년) 文貞으로 개시되었다.
당시의 정국을 주도하던 노론계의 반대입장에서 주자학을 비판하고 독자적 견해를 주장하였다. 학풍과 사상 연구에서 벗어난 실사구시적 학문 태도를 강조하였으며 사변록을 저술하였다.

학문적 태도는 귀납적 방법론(下學而上達)과 실용적 경향성이 특징이다. 귀납적 방법론은 그의 저작인 사변록과 新註道德經, 南華經註解刪補 등에 잘 나타나 있으며, 실용적 경향성은 농사 방법에 대해 논한 穡經에서 잘 드러난다.
주자성리학 밖의 일체 학문에 대해 이단시하던 당시 상황에서 도덕경이나 남화경을 주석한 것에서부터 벌써 그의 학문의 독자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더욱이 그는 사변록에서 四書에 대한 주자의 주석을 고쳐 쓰며 특히 대학과 중용에 이르러서는 그 章句의 편차마저 뜯어 고치는 과감성을 보이고 있다.
한마디로 박세당은 고루하고 진부한 전통에 대항한 비판적 지식인이자 올곧은 선비였으며, 또한 당대 최고의 반열에 오를 만한 뛰어난 학자였다.
현종 1년(1660)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예조좌랑 · 병조좌랑 · 정언 · 홍문관 교리 겸 경연시독관 · 북평사 등을 역임하였다.
1667년에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을 때는 應求言疏를 올려 신분제도의 모순에 따른 사대부들의 무위도식을 비판하고, 외교정책에 있어서는 실리주의 정책을 펼 것과 백성을 위한 법률의 혁신, 정치 · 사회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1668년에는 이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있다가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후 당쟁에 혐오를 느껴 관료생활을 그만두고 楊州 石泉洞(지금의 도봉산 아래 다락원)으로 물러났다.
그뒤 숙종 23년(1697) 4월에 한성부판윤을 비롯하여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 수차례 관직이 주어졌지만, 모두 부임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만 주력하였다.
그가 생존했던 시기는 宋時烈을 축으로 한 老論系가 정국을 주도하였고 있었기 때문에 反朱子學的 입장에 섰던 그로서는 정치적으로 많은 제약을 받았다.
예를 들면 병자호란 당시 송시열이 청태종공덕비문을 지은 李景奭을 비판한 것에 대해, 1702년 이경석의 神道碑銘을 찬술하면서, 송시열이 이경석을 비판한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하여 노론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조선의 성리학이 중국 중심적 학문 태도를 보이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1703년에는 思辨錄을 저술하여 주자학을 비판하고 독자적 견해를 밝혀 노론에게서 斯文亂賊으로 몰렸다. 박세당은 관작을 삭탈당하고 玉果로 유배형을 받았으나, 李寅燁의 상소로 유배형이 집행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곧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으면서 아들에게 “장례를 지낸 후에, 아침 저녁으로 올리는 上食을 설치하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이 말은 조선후기 성리학자들의 행동양식 표준으로 인식되어 오던 禮論의 근간을 흔드는 것으로서, 당시 정치세력에게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이와 같이 그는 당대 조선조 유학을 지배하던 朱子說의 절대화된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각적인 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程朱學的 학풍과 사상이 강요되던 테두리에서 벗어나 實事求是的인 태도로 고전의 본뜻을 찾아보고자 하였기 때문에, 관념화된 성리학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사상은 이후 진보적인 학문을 촉진시키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정치적으로 少論系와 빈번하게 교류하면서, 소론의 거두인 尹拯을 비롯하여 朴世采, 처숙부 南二星, 처남 南九萬, 崔錫鼎 등과 교유하였다. 그리고 우참찬 李德壽, 함경 감사 李坦, 좌의정 趙泰億 등을 비롯한 제자를 길렀다.
그가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伸老되었으나 20년이 지난 1722년(경종 2)에 文節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현재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水落山 중턱 石林寺 옆에 그의 묘소가 있다.
저서로는 西溪先生集, 思辨錄, 新註道德經 1책 및 南華經註解刪補 6책과 농서인 穡經이 전한다.
4살 때 아버지가 죽고 편모 밑에서, 원주·안동·청주·천안 등지를 전전하다가 13세에 비로소 고모부인 鄭思武에게 수학하였다. 1660년(현종 1)에 증광 문과에 장원해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고, 그 뒤 예조좌랑 · 병조좌랑 · 정언 · 병조정랑 · 지평 · 홍문관교리 겸 경연시독관 · 함경북도 兵馬評事 등 내외직을 역임하였다.
1668년 書狀官으로 청나라를 다녀왔지만, 당쟁에 혐오를 느낀 나머지 관료 생활을 포기하고 양주석천동으로 물러났다. 그 뒤 한때 통진현감이 되어 흉년으로 고통을 받는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힘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맏아들 朴泰維와 둘째 아들 朴泰輔를 잃자, 여러 차례에 걸친 출사 권유에도 불구하고, 석천동에서 농사지으며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만 힘썼다.
그 뒤 죽을 때까지 집의 · 사간 · 홍문관부제학 · 이조참의 · 호조참판 · 공조판서 · 우참찬 · 대사헌 · 한성부판윤 · 예조판서 · 이조판서 등의 관직이 주어졌지만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702년(숙종 28)에는 李景奭의 神道碑銘에서 宋時烈을 낮게 평가했다 해서 老論에 의해 斯文亂賊으로 지탄되기도 하였다.
학문과 사상은 성장기의 고난과 청·장년기의 관리 생활을 통한 개혁 의식, 그리고 당쟁의 와중에서 겪은 가족의 수난과 어려운 농촌에서 지낸 경험 등을 통해서 형성된 사회 현실관의 반영이라 하겠다.

박세당이 살았던 시기는 보기 드문 민족적 시련과 정치적 불안정 및 민생의 곤궁이 매우 심하였다. 즉 병자호란의 국치와 당쟁의 격화로 말미암아 국력은 약화되고 민생이 도탄에 허덕이던 시기인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내외의 현실을 직시하며 국가를 보위하고 사회 개혁을 통한 민생의 구제를 목표로 하는 사상적 자주 의식을 토대로 해서 학문과 경륜을 펼쳤던 것이다.
박세당의 근본 사상에 대해서는 유학의 근본 정신을 추구했다는 견해가 있고, 주자학은 물론 유학 자체에 회의해 老莊學으로 흐른 경향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학문의 근본 입장은 당시 통치 이념인 주자학을 비판하고 중국 중심적 학문 태도에 회의적이었다고 보는 데는 이론이 없다.
그 만이 아니라, 17세기 우리 나라의 사상계는 국내외적 시련에 대한 극복을 위해 사상적 자주 의식이 제기되어 이의 수정과 사회적 개혁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입장도 주자학에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사상적 반성이 싹튼 것은 16세기에 비롯했지만, 주자학에 대한 정면 도전이 표면화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이 때문에 주자학의 열렬한 신봉자들인 송시열 등은 주자학 비판자들을 사문난적이라 하며 이단으로 배척하였다. 이러한 배척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 박세당과 尹鑴·尹拯 등이었다.
이들은 주자학 비판에 있어서는 공통적이었지만 학문 연구의 입장은 달라 대략 세 방향을 띠었다. 첫째는 고대의 유학, 특히 漢나라 때의 유학을 빌어 통치 이념을 수정하려는 윤휴와 같은 南人 계통의 학파이고, 둘째는 명나라 때 王陽明의 유학을 도입해 채용해보려는 崔鳴吉·張維 등 陽明學派이며, 셋째는 老莊思想을 도입해 새로운 시각을 모색하려는 박세당 계통이었다.
박세당은 당시의 학자들이 꺼려한 道家思想에 깊은 관심을 보여, 스스로 老莊書에 탐닉하면 되돌아올 줄 모르고 심취하게 된다고 고백할 정도이었다.
이러한 학문 경향을 지니게 된 배경에는 젊었을 때 지녔던 정치와 사회에 대한 개혁적 사고 때문이었고, 또 백성의 생활 안정과 국가 보위에 있어서 차별을 본질로 하는 儒家思想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海西地方의 암행어사와 함경북도병마평사를 역임한 뒤, 홍문관수찬으로 있으면서 應求言疏를 올린 적이 있다. 그 내용은 양반 지배 세력의 당쟁과 착취로 비참한 경지에 이른 백성들의 생활 안정책과 무위도식하고 있는 士大夫에 대한 고발이었다.
徭役과 병역의 균등화를 주장했고, 모든 정치·사회 제도가 문란하므로 개혁하지 않을 수 없고 모든 법률이 쇠퇴했으므로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국민 가운데 公私賤民이 6할, 사대부 양반이 2할, 평민이 2할인데, 사대부 양반은 8∼9할이 놀고 먹으니 이는 俸錄만 받아먹는 나라의 커다란 좀[蠹]이라고 하였다.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중국 대륙의 세력 변동에 주체적으로 적응하는 실리주의를 주장하였다. 고대 삼국 가운데 국력이 가장 미약했던 신라가 당나라에게 망하지 않은 원인이 외교 정책의 현실주의적 실리 추구에 있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고려 말 鄭夢周와 자기의 선조 朴尙衷에 관한 평가도, 고려에 대한 충절보다는 원나라 · 명나라 교체의 국제적 변동에 대처하려는 대외 정책으로 신흥 명나라를 섬기고 원을 배척할 것을 주장한 실리주의자로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당시 시대 분위기가 崇明排淸이 풍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현실적 생존과 국가의 보위를 위해 국제 사회에서의 주체적 적응이란 입장에서 尊明事大의 명분을 버리고 민족 자존의 실리를 위한 親淸政策을 주장했던 것이다.
대내외 정책에 대한 개혁 의식을 가졌던 박세당은 관직을 버린 뒤 論語 · 孟子 · 大學 · 中庸 등 사서와 道德經 및 莊子의 연구를 통해 주자학적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려는 학문적 지향을 취하였다.
박세당은 六經의 글은 그 생각이 깊고 취지가 深遠해, 본 뜻을 흐트러뜨릴 수 없는 것인데, 후대의 유학자들이 훼손했으므로 이를 바로잡아 孔孟의 本旨를 밝혀야 한다는 뜻에서 思辨錄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박세당의 학문은 자유분방하고 매우 독창적이었다. 예를 들면, 유가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仁에 대해, 공자가 말하는‘인’이란 인간과 동물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自然調和의 심정이 아니라 동물에 대한 인간 중심적인 사랑이며, 사람과 동물에 차별을 두지 않는 순수한 사랑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맹자의 인에 대하여도, 맹자의 차마 할 수 없는 심정인 不忍之心으로서의 ‘인’이란 도살장과 부엌을 멀리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 고작일 뿐, 역시 살생을 배격하지 않는 잔인성을 그대로 말한 것이라고 꼬집는다.
또한, 맹자가 ‘王道’란 민심을 얻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고 말했지만, 민심을 얻는 데만 뜻을 먼저 둔다면 이는 覇者의 행위이고 왕도는 아닐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주자가 帝王權體制를 강화하기 위해 설정한 모든 만물의 근원적 原因者로서의 太極에 대한 이해에도 이의를 제기하였다.
주자는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현실적 차별이 이러한 현상에 앞선 원인자인 태극에서 연유한다고 주장해, 인간이 帝王權에 복종하는 것은 거역할 수 없는 당연한 도리라고 보았다. 또 인간이 감각적 욕구를 추구하는 것은 人欲 또는 人心으로서 惡行이라고 피력하였다.
그러나 태극에 대한 이해의 부족과 함께 감각적 욕구를 작용시키는 感性도 인간의 불가피한 기능임을 지적하였다. 道心 못지않게 인욕의 충족도 중요시했던 것이다. 이는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명분론보다도 의식주와 직결되는 실질적인 학문이 필요하다는 실학 사상을 나타낸 것이라 보겠다.
도를 밝히는 것은 지식과 언어에 있지 않고 실천에 있으며, 백성들이 실질을 떠나서 허위의 비현실적인 가치관만을 배우게 되면 이는 다스리려 해도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백성의 생활 가치를 신장시키는 것에 학문의 목표를 두었기 때문에, 이단시되던 노장학까지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노장학도 본질면에서 보면 세상을 바로잡는 길에 보탬이 되고 버릴 것이 없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도가 사상이 차별 사상이 아니고 민중 중심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지배 욕구의 포기를 근본으로 하는 것이 道德經의 정신이라고 주장하였다. 노자의 無爲란 일하지 않는 不事가 아니라, 사사로운 욕구에 얽매이지 않는 無欲의 정치 태도라고 보았다.
장자의 無爲自然도 자연을 벗삼아 사는 것이 아니라 治者에게 과도한 지배 욕구를 버리고 백성들의 생활권을 신장시키는 데 힘쓸 것을 요청한 무욕의 뜻이라고 이해한 것이었다.
스스로 무욕을 실천하는 생애를 보냈지만 정치와 사회 현실에 전연 무관심하지 않고, 비교적 혁신적 사고를 지녔던 少論派와 빈번하게 교류하였다.
소론의 거두인 윤증을 비롯해 같은 반남박씨로 곤궁할 때 도움을 준 朴世采, 처숙부 南二星, 처남 南九萬, 崔錫鼎 등과 교유하였다. 그리고 우참찬 李德壽, 함경감사 李坦, 좌의정 趙泰億 등을 비롯한 수십 인의 제자를 키우기도 하였다.
1623년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들이 협력하여 이루어진 인조반정 이후 조선 후기 사상계는 주자성리학 중심으로 재편되어 갔다. 이 과정에서 주자학 이외의 사상이나, 주자의 주석을 따르지 않는 해석은 극렬하게 배척되었다.
‘사문난적’이라는 용어는 주자학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한다는 명분에서 나왔지만, 실제로는 반대 정파를 탄압하는 무기로 활용되었다. 박세당은 조선 후기 사상계가 점차 경직화되어가는 시기에 독자적인 학풍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명문가로 손꼽히는 반남 박씨는 박세당의 10대조인 朴尙衷(1332~1375)에 이르러 비약적인 성장을 하였다. 박상충은 정몽주ㆍ이색 등과 더불어 고려말 신진 사대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9대조 朴訔은 태종의 즉위에 공을 세우고 좌의정에 올랐다. 박세당의 고조 朴紹는 초야에 은둔한 채 생을 마쳤으며, 증조 박응천은 司宰監正을 지냈다. 조부 朴東善은 좌참찬을 지냈으며, 부친 朴炡은 1623년의 인조반정에 참여한 공으로 靖社功臣에 책훈되고 錦洲君에 봉해졌다.
박정은 楊州 윤씨와의 사이에 4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인 世圭는 요절하였고, 世堅ㆍ世垕ㆍ세당이 뒤를 이었다. 세견과 세후는 후사가 없어서 박세당의 차남인 태보가 세후의 養子로 갔다. 박세당은 박정의 4남이었지만, 형들이 후사가 없었기에 가문의 실제적인 계승자가 되었다.
박세당은 1629년(인조7) 8월 19일 南原에서 태어났으나, 4세 때 부친이 7세 때에는 큰형이 사망하면서 어려움이 시작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모와 모친을 모시고 피란길에 올라 원주ㆍ청풍ㆍ안동 등지를 전전했다. 17세에는 의령 남씨 남일성(南一星)의 딸과 혼인하여 관례대로 처가살이를 하였다.
의령 남씨를 위해 쓴 묘지명에도 “박씨는 아버지 잃고 집안이 가난하여 자립하지 못한 나머지 10여 년 동안 처가살이를 하다가 벼슬길에 오르고 나서야 처가를 나와 따로 살림을 꾸렸다.”고 하여 당시의 어려웠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처가살이 기간에 박세당은 처남인 남구만과, 처숙부 남이성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박세당은 의령 남씨와의 사이에서 泰維와 泰輔를 낳았는데, 박태유와 박태보는 소론의 핵심으로 활동하다가 정쟁으로 부친보다 일찍 사망하여 박세당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박세당의 집안은 서인에서 소론으로 이어지는 가문의 핵심이 되었고, 소론 인사들과의 혼맥도 두드러졌다. 朴世采는 박세당의 8촌 아우였고, 박세당의 셋째 형인 朴世垕는 윤증의 아버지인 尹宣擧의 사위가 되었다.
朴泰輔는 윤증의 대표적인 제자가 되면서, 윤선거 집안과의 두터운 교분을 이어갔다. 조선 후기 소론의 핵심인 박세당, 박세채, 윤증은 혈연관계와 사제관계가 중첩되면서 소론의 정치적ㆍ사상적 입지를 굳혀 갔다.
윤증의 문집인 ‘명재유고’와 박세당의 문집인 ‘서계집’에는 윤증과 박세당이 서로에게 보낸 서신이 각각 22편, 26편이 수록되어 양인간의 친분을 확인할 수가 있다.
박세당은 32세가 되던 1660년(현종1)에 증광 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11월에 典籍(성균관의 정6품 관직)이 되었다. 박세당이 과거 급제를 한 때는 1659년부터 시작된 己亥禮訟으로 서인과 남인의 정치적ㆍ사상적 대립이 치열했던 시기였다.
박세당은 “오늘날 典禮를 다툼으로 인하여 종통이 밝지 못하다는 설을 고집하는 자들은 아마도 不仁함이 심할 것이다. 아마도 상대를 공격하려고 고의로 빌린 설일 것이며, 상대를 배제하려고 고의로 빌린 명칭일 것이니, 그 마음씨가 아, 또한 험악하고도 위험하도다.”고 하여 예송논쟁이 정쟁으로 비화되는 것을 경계하였다.
박세당은 32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ㆍ홍문관 등을 거쳐 관직생활을 이어나갔지만 40세를 기점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그는 수락산 남쪽 골짜기 石泉洞으로 내려와 몸소 농사를 지으면서 관직에 응하지 않았다.
직접 농사를 지은 경험을 바탕으로 1676년(숙종 2) 穡經을 저술하기도 했다. 박세당은 수락산 일대에서 학문 연구와 저술에 힘을 다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논어ㆍ맹자ㆍ중용ㆍ대학ㆍ상서ㆍ시경을 주해한 思辨錄이었다. 사변록은 주자의 주석을 벗어나 독자적인 해석을 가했다는 이유로 사문난적으로 공격받는 대표적인 저술이 된다.
저술활동에 매진하는 기간에도 조정에서는 박세당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대사헌ㆍ예조판서ㆍ이조판서 등의 관직을 제수했지만, 박세당은 모두 거부하였다. 관직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지만 士林에서 박세당의 위상은 날로 높아졌으며, 특히 소론의 구심점이 되었다.
박세당이 활동한 17세기 후반은 서인에서 분열된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ㆍ사상적 대립이 특히 치열했던 시기였다. 이 시기 반남 박씨 가문은 소론의 중심이었고, 박세당은 그 중에서도 핵심이었다. 당쟁의 칼날이 결코 그를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1702년(숙종 28) 박세당은 이경석의 후손으로부터 신도비명 撰述을 부탁 받고 자신의 마지막 글을 지었다. 이경석은 삼전도비문을 지었다는 이유로 송시열로부터 가혹한 비난을 받았고, 노론 세력에게는 최고의 경계 대상이었다.
박세당이 이경석의 신도비명 찬자로 결정되자, 노론은 촉각을 곤두세우며 박세당을 주시했다. 박세당은 이전부터 송시열과 악연이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현종대에 公義ㆍ私義 논쟁이 제기되었을 때 박세당은 송시열의 사의론을 비판하며 공의론을 앞세운 서필원을 옹호하였고, 이것은 송시열의 깊은 반감을 샀다. 송시열 일파는 박세당을 三奸五邪 중 한 명으로 지목하였다. 이경석의 신도비명을 지을 당시 송시열은 이미 죽었지만, 그 문인들은 여전히 정계를 주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박세당은 소신껏 이경석의 신도비명을 찬하였다. 박세당은 “[서경]에 이르기를, ‘老成(많은 경험을 쌓아 세상일에 익숙함)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라’하였으니, 노성한 사람의 중요함이 이와 같다. 노성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자가 있다면 천하의 일 가운데 이보다 더 상서롭지 못한 것이 없고, 상서롭지 못한 일을 행하는 데에 과감한 자에게는 또한 반드시 상서롭지 못한 과보가 따르기 마련이다. 이는 하늘의 이치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글을 짓는 시작부터 송시열을 노성한 사람(이경석)을 업신여긴 자로 규정하였다.
이어서 비명 마지막에, 올빼미를 송시열에게, 봉황을 이경석에게 비유하면서 이경석을 군자라 칭송하였다.
노론은 박세당이 송시열을 모욕했다며 분노하였고, 1703년(숙종 29) 봄에 성균관 유생들은 박세당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 유생들의 배후에는 박세당을 제거하려는 김창협ㆍ김창흡 등 노론의 핵심부가 있었다.
노론은 이경석의 비문뿐만 아니라, 사변록의 저술에도 깊은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송시열의 주자 절대주의를 계승한 노론들은 주자학의 이론 체계에 도전하는 사변록의 간행을 좌시할 수 없었다.
1703년 노론 세력은 박세당의 사변록 편찬 사실을 접하였고, 결국 박세당에게 斯文亂賊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이경석 신도비명에서 송시열을 모욕한 것에 더해져서, 노론은 박세당이 사변록을 저술한 ‘불순한 인물’임을 크게 부각시킨 것이다.
이건창의 당의통략에도, “이때 이르러 박세당이 이경석의 묘갈명을 찬술하여 말하길, 거짓을 행하고 그른 것을 따르는 세상이 그 사람을 도우려 하니 올빼미와 봉황은 종류가 달라서 성내기도 하고 화내기도 한다” 했다.
이에 김창흡이 이덕수에게 편지를 주어 이경석과 박세당을 극력 비난하였다. 또 성균관 유생 홍계적으로 하여금 상소하여 변척하여 말하길 “지금 시열을 정사를 어지럽히는 少正卯로 삼는다면 이는 효종의 정치가 어지럽다고 하는 것입니다. 고 했다.”고 기록하여, 노론들이 박세당에 대해 거당적인 대응을 했음이 나타난다.
노론은 박세당을 사문난적으로서 처벌하고 사변록을 兇書로 규정해 소각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상소를 올렸다. 결국 숙종은 사변록과 이경석 신도비명을 불태우도록 지시하였고, 박세당은 ‘공인된’ 사문난적이 되었다. 노론이 정계와 사상계를 주도하는 정국에서 소신 있는 학자의 양심을 보인 박세당의 행동은 ‘불순’으로밖에 치부될 수 없었다.

1666년(현종 7) 5월 부인 남씨가 사망하자, 박세당은 이듬해 광주 정씨와 재혼하였다. 1668년 박세당은 관직에서 물러난 후 양주 수락산 石泉洞으로 들어갔다. 수락산 일대에는 부친 박정이 인조반정의 공을 인정받아 정사공신이 되면서 받은 賜牌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세당은 수락산 기슭 西溪의 아름다운 풍광을 사랑했다. 아예 호를 西溪樵叟라 하고, 서계의 골짜기 이름을 石泉洞이라 하였다. 石泉洞記에는 석천동에 얽힌 사연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석천동은 潛叟(박세당의 호)가 사는 곳이다. 잠수가 조정에서 侍從으로 벼슬한 지 10년이었는데, 어느 날 병으로 물러나 仙鳧峯 아래에 은거하고는 사는 곳의 샘물을 ‘石泉’이라 이름하고, 이어 그 골짜기를 ‘석천동’이라 이름하였다.
이 지역이 도성의 동쪽에 해당되기 때문에 또 그 산등성이를 ‘東岡’이라 하고, 시내를 ‘東溪’라 하였으며, 또 이곳에 잠수가 산다고 하여 그 물을 ‘潛水’라 하고 언덕을 ‘潛丘’라 하였다.
‘석천’이라 이름한 까닭은 산속의 뭇 샘물이 모여 이 시내가 되었고, 온 산이 모두 바위인데 시냇물이 구불구불 흘러서 바위를 따라 오르내리며 潭이 되기도 하고 폭포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석천’이라 이름한 것이다.
맑은 샘물이 바위 위로 흐르고 하얀 바위가 샘물에 씻겨 샘물은 바위 때문에 더욱 맑고 바위는 샘물 때문에 더욱 희니, 아름답고 즐겁도다. 잠수가 사는 곳이여.
잠수는 날마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끌며 아침저녁으로 水石 사이를 소요하는데, 질병과 우환이 있지 않으면 이곳에 거닐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그야말로 즐거워 늙음이 닥쳐오는 줄도 모르는 자라 하겠다.

박세당의 집 근처로 흐르던 개울은 원래 東溪였지만, 그의 호가 서계였기 때문에 서계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또한 은거의 뜻을 표방하여 潛水라 했고, 개울가 언덕은 潛丘라 불렀다. 그는 자신이 묻힐 곳은 樂丘라 하였는데, 결국 박세당은 이곳에 묻혔다. 박세당이 석천동에서 가장 사랑한 곳은 聚勝臺였다.
박세당은 ‘취승대기’에서, “정사 남쪽에 있는 개울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른다. 그 위에 네 곳의 석대가 있다. 개울을 끼고 물길을 나누며 각기 동서남북 한곳씩 차지하고 있지만 멀고 가깝고 높고 낮은 것이 비슷하다. 이를 모두 취승대라 이름하고 陰臺라고도 하였다. 이들 모두가 개울가의 바위이다.
주인은 角巾에 野服을 하고 지팡이를 짚고 끌면서 바위에 걸터앉아 발을 씻었다. 아침에 노닐고 저녁에도 노닐었다. 동대에서 놀지 않으면 서대에서 놀고 남대에 오르지 않으면 북대에 올랐다. 이 네 곳의 석대는 아침저녁 노니는 장소에 그치지 않는다. 사시사철 즐거움이 모두 이곳에 있다.”고 하여 취승대에서 사계절의 경치를 즐기는 자신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박세당의 墓表에는,
“물가에 집을 지을 때 울타리를 치지 않고 복숭아나무, 살구나무, 배나무, 밤나무를 집 주위에 둘러 심고, 오이를 심고 밭을 개간하고 땔감을 팔아 생활하였다. 농사철에는 늘 밭에서 지냈으며, 가래를 메고 쟁기를 진 자들과 어울려 다녔다.
처음에는 간간이 조정의 명에 나아가기도 했지만, 뒤에는 누차 불러도 가지 않고 30여 년을 살다가 생을 마치니, 나이 70이 넘었다. 머물던 집 뒤쪽으로 백 수십 보 되는 곳에 안장하였다.”라고 하여,
석천동에서 말년의 삶을 보낸 박세당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목차소개

제1장 대학에 대한 비판
소서
서문
1. 경1장
2. 전수장
3. 전2장
4. 전3장
5. 전4장
6. 전5장
7. 전6장
8. 전7장
9. 전8장
10. 전9장
11. 전10장
대학석경고본
대학고본
대학장구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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