周遊天下의 여행자 孔子의 論語와 思辨錄
孔子는, 흔히 기독교의 ‘예수’나 불교의 ‘석가’에 비견되는 인물이다. 그런데 ‘석가’나 ‘예수’가 지극히 종교적인 인물인 데 비해, 孔子는 동아시아 문명을 대표하는 人文學者다. 후대에 그의 철학사상이 儒敎로서 종교적 형태로 정립되지만, 그는 오래도록 政治家로서의 立身揚名을 도모하였고, 직접 정치를 행한 시절도 있다. 하지만 결국 공자는 정치가로서의 삶을 살아내지는 못했다.
그리고 대체로 공자가 현대 중국의 先祖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는 별다른 역사적 근거를 갖지 못한다. 실상 공자는 東夷族의 문화권인 魯나라 사람이다. 노나라(기원전 1046~기원전 256)는 지금의 ‘취푸’市에 위치한 나라로서, 周나라 ‘武王’이 아우인 周公 ‘旦’에게 내린 봉토를, 그의 아들인 ‘伯禽’에게 다스리게 하던 제후국으로 주나라의 혈족국가이다.
春秋時代 초기, 노나라는 동방의 강국으로서, 은공, 환공 시대(기원전 722~기원전 694)에 여러 번 齊나라, 宋나라 등과 싸워서 이겼고, 또 杞나라, 莒나라와 같은 소국에 부단히 침공했다. 춘추시대 중기에 사회가 변혁하여, 정권은 귀족 대신의 수중에 들어갔다. 장기간 실권을 장악한 ‘주요’는 노장공의 세 아우 계우, 숙아, 경보의 자손으로, 계손씨, 숙손씨, 맹손씨 三家라 했다. 혹은 저희가 모두 노환공의 후예이므로, 三桓이라 했다. 곧 소위 ‘정재대부’다.
노나라는 西周의 예법과 제도를 비교적 잘 보존한 나라 중 하나로, 다만 당시 형세의 영향으로, 일련의 변혁활동을 전개했다. 춘추 말기, 노소공이 삼가에게 쫓겨나, 객사하였다. 이후 오래지 않아, 삼가의 가신 ‘양호’ 등이 국정을 전제하여, 한때 ‘배신이 국명을 쥐는’ 국면이 형성되었다. 노정공 시대(기원전 509~기원전 495), ‘양호’ 등은 실패하여 출분하고, ‘삼환’이 다시 새로이 정권을 장악하여, 후의 ‘애공’(기원전 494~기원전 468 재위)은 군권 회복을 도모하여, 삼가 대신들과 충돌이 극해져 마침내 월나라로 망명해 죽었다.
전국시대 초기, 약 원공 시대(기원전 436~기원전 416), 삼환은 점차 세력을 잃고 쫓겨나, 목공(기원전 415~ 기원전 383) 이후, 정권은 다시 국군의 손으로 돌아가기에 이르렀다. 전국시대 힘이 이미 쇠약해, 자주 제나라의 작전에 함께했다. 전국 말년, 초나라가 진나라의 핍박을 받아 동천하면서, 노나라를 공벌하기에 이르렀다.
기원전 256년, 초나라는 노나라를 병탄하고 경공을 폐출하자, 노나라는 멸망했다. 한 평제 시기에는, 경공의 8세손 공자 관을 포로후로 봉하고, 주공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 공자 관이 죽자 시호를 ‘절’이라 하고, 그 아들 공손상여가 습작하게 했다. 왕망이 신 왕조를 세우고, 또 공손상여의 후예 희취를 포로자로 봉했다.
東夷는 중국 동북부지방과 한국 · 일본에 분포한 종족을 중국인이 부르던 명칭이다. 은나라 때는 人方이라는 夷族 집단이 있었고, 竹書紀年을 비롯한 先秦時代의 문헌과 금석문에서 ‘동이’를 뜻하는 다양한 명칭이 발견된다. 여기에 표현된 이족과 동이족은 산둥성 · 장쑤성 북부 일대에 거주한 족속을 말한다. 이들은 단순한 異民族이 아니라, 뒤에 중국민족을 형성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箕子나 孔子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漢나라 이후 쓰여진 史書에 나오는 東夷는, 전국시대까지 중국의 동부지방에서 활약한 ‘동이’와는 전혀 별개의 존재였다. 漢나라 때의 중국인은 변방의 종족을 東夷 · 西戎 · 南蠻 · 北狄이라 불렸는데, 동이는 바로 동쪽에 있던 종족을 가리킨 말이다. 이 시기의 동이족에는 濊 · 貊 · 韓 계통의 우리 민족과 읍루와 왜족이 속하였다.
동방을 夷라 한다고 하는데, 夷라는 말은 산둥반도로부터 淮泗 유역에 분포된 민족 집단이 한족과 접촉하는 殷 시대부터 역사에 등장한다. 그후 중국인들에게 여러 종족 개념과 방위개념 그리고 음양오행 사상이 발달함에 따라, 서융(戎), 남만(蠻), 북적(狄) 등의 명칭이 나타났다. 東夷란 특정한 민족 개념이 아니라, 방위개념이 첨가된 한족에 대한 상대적 개념의 동방 이민족의 범칭이다. 이 시기의 동이족에는 濊 · 貊 · 韓 계통의 우리 민족과 읍루와 왜족이 속한다.
한편, 과거에 상고시대 중국 동북방에 거주한 동이족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한 줄기는 산둥 방면으로, 다른 한 줄기는 랴오둥과 한반도지역으로 흘러들어 갔다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동이족 이동설에 근거하여, 箕子朝鮮의 실체를, 동이족의 일파인 기자족이 고조선으로 이동하여 건국한 나라로 이해한 견해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동이족 이동설은 고고학적인 증거로 뒷받침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부정하는 견해도 많다.
또한 東夷는, 秦나라의 통일 이전에는 황하, 회하 유역을 중심으로 한 중국 동북부와 기타 지역에 거주하는 북방 몽골리안계 종족을 지칭하였다. 그러나 진나라 통일 이후에는, 산둥반도의 일부가 중국 역사에 흡수됨으로써, 발해만을 끼고 만주와 한반도에 분포한 한, 예맥 등을 동이로 지칭하였다. 즉 동이족의 범위가 상당히 동쪽으로 축소 이동한 것이다.
현대 중국은 물론이며, 현대의 중국인으로서 분별되는 漢族의 역사는 근대 文化革命 이후에나 실제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 이전의 대부분의 中國歷史는 북방 외래민족의 역사이다. 그러한 역사의 桎梏을 인식한 ‘마오쩌둥(毛澤東)’은, 문화혁명으로써 일부러라도 아주 가혹하게 기존의 전통을 말살해버린 것이다. 그래야만 名實相符 한족의 국가공동체가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화혁명(Cultural revolution)은 마르크스주의에서 아주 중요시하는 사회적 변화 단계이다. 마르크스주의에 의하면, 사회주의 혁명에 있어서 특히 문화혁명이 중시되는 것은, 종래의 혁명과 달리 사회주의 혁명에서는 전 민중이 사회의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종래 문화와 그 창조가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것이고, 민중은 그것에서 멀어지는 것이었다면, 사회주의 사회는 민중이 문화와 그 창조에 직접적으로 참가하고 경제, 사회, 정치를 스스로 움직인다.
그로부터 교육제도의 대규모 개조에 의한 인민대중의 교육수준의 향상, 사회주의적 인텔리겐차의 육성, 인류가 형성하여 온 적극적인 문화유산의 계승과 발전, 부정적인 문화유산의 가능한 한 신속한 청산, 그것들에 의한 새로운 사회주의 문화의 확립, 이러한 것이 계급사회에서 떨어져 나와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데 있어, 완수되어야 할 객관적 조건이 될 뿐 아니라, 이 문화혁명을 수행함으로써 공산주의적 인간이 형성되고, 도시와 농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차이를 없애고 공산주의를 실현하는 주체적 조건이 이루어지게 된다.
文化大革命은 ‘마오쩌둥’에 의해 주도된 운동으로, 전근대적인 문화와 자본주의를 타파하고 사회주의를 실천하자는 운동이다. 전통적인 중국의 유교문화가 붕괴되었고,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대중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마오쩌둥’은 1950년대 말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정치적 위기에 몰리게 되자, 문화대혁명으로 중국공산당 내부의 정치적 입지를 회복하고 반대파들을 제거하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하였으며, 혁명은 공산당 권력투쟁으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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