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계 박세당의 유가철학 비판, 사변록 4, 제4장 맹자에 대한 비판

박세당 지음(탁양현 엮음) | e퍼플 | 2018년 08월 31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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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革命的 理想主義者 孟子와 思辨錄



현대사회의 戰爭은 모름지기 금융이나 에너지에 얽힌 資本的 전쟁이며, 그러한 자본을 조작하는 情報的 전쟁이다. 그러다보니 현재 진행 중인 미국과 중국의 전쟁 역시 자본전쟁이며 정보전쟁이다. 美中戰爭의 핵심은 중국의 자본의 기틀이 될 中國夢的 一帶一路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프로젝트를 결코 坐視할 수 없으며, 나아가 반드시 擊破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세계 제1의 覇權國이라는 位相에 異常이 招來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혹여 이러한 자본전쟁이 과거처럼 武力的 暴力에 의하지 않으므로 다소 人間主義的이라는 착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차라리 폭력에 의한 전쟁이라면, 폭력에 저항하다가 당최 승리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항복하면 된다.
그러나 자본전쟁은 애당초 마땅히 항복할 만한 꺼리나 대상 자체가 不在하다. 그래서 외려 더 가혹하다. 예컨대, 사무라이 식으로 敵의 머리를 댕강 잘라버리는 것이 아니라, 마취된 빨대를 꽂아두고서 말라죽지 않을 만큼 생존시키며 그 津液을 쪽쪽 빨아대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美中 자본전쟁 혹은 패권전쟁에 온통 銳意注視해야만 한다. 미중 패권전쟁의 틈바구니에서 南韓이나 北韓의 입장은 참으로 尖銳하며,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식으로, 강대국의 곁에 있는 약소국은 금세 작살나버릴 수 있는 탓이다.
혁명 역시 자본적 혁명이며 정보적 혁명이다. 그러니 현대사회에서 자본과 정보를 지니지 못한다는 것은, 과거사회에서 武力과 宗敎를 지니지 못한 바와 같다. 그러한 것들을 지니지 못한 세력은 결코 권력을 쟁취할 수 없으며, 권력을 쟁취할 수 없음은 곧 ‘생존 자체의 불안’을 惹起한다.
근대에 이르러 우리 민족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혁명은 메이지 유신이다. 메이지 유신에 의해 조선왕조가 멸망하고, 우리 민족의 산하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흔히 革命은,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 국가 기초, 사회 제도, 경제 제도, 조직 따위를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 이전의 왕통을 뒤집고 다른 왕통이 대신하여 통치하는 일, 이전의 관습이나 제도, 방식 따위를 단번에 깨뜨리고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급격하게 세우는 일 등을 의미한다.
혁명과 유사한 개념으로서, 變革, 義擧, 쿠데타 등을 말할 수 있다. 변혁은 급격하게 바꾸어 아주 달라지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의거는 정의를 위하여 개인이나 집단이 의로운 일을 도모하는 것을 말한다. 쿠데타(coup d’État)는 武力으로 정권을 빼앗는 일이며, 지배 계급 내부의 단순한 권력 이동으로 이루어지므로, 체제 변혁을 목적으로 하는 혁명과는 구별된다.
따라서 메이지 유신은 변혁에 가까울 수 있다. 그러나 王權이 天皇에게 부여되었을 뿐, 그 裏面의 작업들은 변혁보다는 혁명에 근접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때문에 메이지 혁명이라고 지칭해도 무방하다고 여겨진다.
明治維新은 막번 체제를 해체하고, 王政復古를 통한 중앙 통일권력의 확립에 이르는 광범위한 변혁 과정을 총칭한다. 메이지 유신은 학문상 명칭이며, 당시에는 ‘고잇신(御一新)’ 등으로 불렸다. 메이지 유신의 개시 시기는 대체로 ‘덴포(天保)’ 시기로 일치하지만, 종료 시기는 1871년 廢藩置縣, 1873년 地租改正, 1877년 ‘세이난 전쟁(西南戰爭)’, 1889년 헌법 발표 등 여러 설이 있으며, 정설은 확립되지 않고 있다.
에도 막부는 외교에 관한 권리를 독점하고, 일본인의 출입국과 무역을 관리, 통제, 제한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쇄국 체제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1856년부터 1860년에 걸친 아편 전쟁 이후, 동아시아로 진출하려는 서구 제국주의의 물결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1853년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매슈 페리’ 제독이 ‘밀러드 필모어’ 미국 대통령의 개국 요구 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왔다. 이에 막부는 1854년 미일화친조약에 이어, 1858년에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와 굴욕적인 통상조약(안세이 5개국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막부 정부에서 칙허 없이 처리했다는 점 때문에, 이에 반발한 반막부 세력이 일어나, 막부 정부와 대립하는 혼란기를 겪는다. 그러다가 260여 년이나 내려오던 ‘도쿠가와’ 막부가 1866년 ‘사카모토 료마’를 내세우는 ‘삿초’ 동맹에 패배하였고, 1867년에는 대정봉환과 왕정복고가 이루어진다.
1866년 ‘사쓰마’ 번의 지도자 ‘사이고 다카모리’와 ‘조슈’ 번의 ‘기도 다카요시’ 사이의 ‘삿초’ 동맹으로 메이지 유신이 이뤄졌다. 이 두 지도자는 ‘고메이’ 천황을 지지하였다. 이들은 ‘사카모토 료마’에 의해 천거되었는데, ‘도쿠가와’ 쇼군의 지배에 도전하여 천황의 권력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1866년 12월 25일 ‘고메이’ 천황이 세상을 떠나자, 1867년 1월 9일 ‘메이지’ 천황이 뒤를 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주로 구미 열강 국을 따라 잡기 위해, 개혁을 모색하였다. 학제, 징병령, 지조개정 등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고, 부국강병의 기치 하에, 유럽과 미국의 근대 국가를 모델로 하여, 민주화와 인권 운동을 탄압하고, 천황이 주도하여 일방적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적 강화에 노력하였다.
-하략-

저자소개

-샹략-
맹자에게 있어 하늘은 天理이자 동시에 만물의 근원이며, 또한 우주의 주재자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뜻, 즉 天意의 발동자였다. 따라서 사람은 본성 속에 하늘을 지각하고 따르는 속성이 있다고 인정했다. 즉 맹자는 말했다. “영명한 본심을 극진하게 계발하면 본성을 알 수 있고 나아가서는 하늘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영명한 본심을 잘 간직하고 본성을 잘 배양하면 천도를 따라 섬길 수가 있다.”
결국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하늘과 일치 즉, 천인합일하게 마련이며, 동시에 하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자이므로 천명을 따르게 되어 있으니, 사람이 할 일은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을 가다듬고 자기에게 주어진 명수를 잘 받아, 자기의 책임을 다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공자의 道는 맹자에 이르러서 더욱 선양되고 빛났다. 맹자는 도의 근원을 요 · 순으로부터 시작하여 우 · 탕 · 文武(文王과 武王) · 周公 그리고 공자를 거쳐서 자신에 이르기까지, 道의 정통을 세움으로써 유교의 체계를 확립시켰다.
사람의 본성이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으로 그 본성 속에는 다른 사람의 불행이나 고통을 차마 보아 넘길 수 없는 惻隱之心인 仁을 비롯해서, 옳지 않은 것을 미워하고 부끄러워하는 羞惡之心인 義, 어른을 공경하고 다른 사람에게 겸손하는 辭讓之心인 禮, 선악을 식별하는 是非之心인 智 등 四端이 존재하며, 인간의 이 본성은 공통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성은 本善이라는 성선설을 주장하였다.
천진난만한 어린이가 잘못하여 우물로 빠져 들어가려는 광경을 발견했을 때, 경악과 측은한 감정이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것을 금치 못하는 것은 사람의 공통적인 것이라는 것을 들어 성선설을 증명하고 있다.
한편 선한 본성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맹자는 선한 본성의 발단과 적극적인 확충, 선의 본성을 잃는 일을 막자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논하고, 인간만사를 선한 본성에 따라서 처리할 것을 권했다.
사람은 누구나 선한 본성을 다 지니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을 적극적으로 확충해 나가게 되면 성인에 못지않은 경지에까지도 도달할 수 있지만, 만약에 그것을 잃어버리면 본래부터 선한 본성이라고는 없었던 것처럼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인간으로 타락해 버린다는 점을 시사한 것이라 하겠다.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인간이 선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무한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고 동시에,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발전을 지향하도록 줄기차게 고무해 주는 힘이 있다.
맹자의 인생관이나 윤리관은 한 마디로 이상주의적 도덕주의에 서 있다. 맹자는 말했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 부모님을 모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 천지에 죄 될 일이나 부끄러운 일을 안 한 것, 천하의 수재들을 모아 교육하는 것이다. 그 중에 임금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끼지 못한다.”
맹자는 가장 높은 작위를 天爵이라 했고, 인간 정치사회에서의 爵祿을 人爵이라 하여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렇게 정치보다도 도를 더 존중했기 때문에 맹자는 인생의 가치를 “인을 이루고 의를 따르는” 데 두었으며, “의를 살리고 목숨을 버리라”고 했다. 나의 생명보다도 仁義를 중요시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인의가 우주의 대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맹자는 대도의 윤리와 덕목을 지키는 사람을 여러 가지로 불렀는데 그 중에서 ‘대장부’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仁, 즉 천하의 넓은 집에 몸을 두고, 義 즉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서 천하의 大道를 간다. 뜻을 얻으면 백성과 함께 인의의 대도를 구현하고, 뜻을 못 얻으면 자기 하나만이라도 대도를 간다. 부귀에도 타락하지 않고, 빈천에도 절개를 바꾸지 않으며, 어떤 권세 앞에도 굴복하지 않으니 그런 사람이 바로 대장부이니라.” 이러한 대장부는 至大至剛하고 천지에 대통하는 浩然之氣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호연지기를 키우는 바탕은 바로 存心養性이다.
한편, 맹자는 자기향상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자기 격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리고 자기향상의 목표를 堯舜 같은 성인에 둘 것을 말했다. 그리고 大丈夫로 큰 뜻을 실현시키고자 한다면 시련을 극복하고 유혹을 물리치는 굳센 신념이 있어야 함을 말했다.
孟子의 性善說이나 王道政治는 현재에 이르도록 단지 理想主義에 불과함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무능한 권력자를 易姓革命으로써 顚覆하는 일이 정당하다는 주장은 현대사회에서도 유효하다. 하지만 혁명이라는 것이 이념에 의해 작동하는 것이므로, 어떠한 이념을 좇는가에 대해 명료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人類史에서 가장 거대한 이상주의 혁명은 모름지기 共産主義革命이다. 실상 공산주의는 아주 아름다운 이상주의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이상주의가 현실세계의 인간존재에게는 당최 적용키 어렵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그토록 찬란히 역사에 등장했던 공산주의혁명에 의한 국가공동체들 대부분이 역사의 뒤안으로 소멸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對蹠點에 배치된 자본주의가 완벽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현실세계는 철저히 現實主義에 의해 작동함을 명심해야 한다. 제아무리 美麗한 이상주의일지라도, 그것은 결국 허황된 꿈에 불과함을, 공자와 맹자의 역사를 통해 배워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현실세계에는 온갖 이상주의가 횡행하고 있다. 어쨌거나 이상주의는 상상력의 산물이며, 애당초 구체적인 실현을 목적하지 않는다. 하물며 구체적인 실현을 목적하여 현실주의적 관점에 의해 구상된 것도 그 실현 여부를 장담할 수 없는 법인데, 이상주의라면 말할 나위 있겠는가.
박세당의 시대에 조선왕조를 지배하던 이념 역시 聖人君子의 道德政治를 목적하는 禮治 이상주의였다. 박세당은, 그러한 이상주의의 기원이 儒敎哲學, 특히 孔孟에게 있음을 자각하고서, 思辨錄으로써 四書를 비판한 것이다. 이러한 박세당의 비판정신은, 美中 覇權戰爭의 틈새에 끼인 21세기의 한국인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미국은 現實主義的으로 실제적인 세계 제1의 覇權國이다. 반면에 중국은 理想主義的으로 패권국의 미래를 ‘중국의 꿈[中國夢]’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하는가. 응당 현실주의적 선택을 해야 한다. 이상주의 허망함은 이미 孔子와 孟子의 例로써 익히 검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목차소개

▣ 목차





제4장 맹자에 대한 비판
1. 양혜왕 상
2. 양혜왕 하
3. 공손추 상
4. 공손추 하
5. 등문공 상
6. 등문공 하
7. 이루 상
8. 이루 하
9. 만장 상
10. 만장 하
11. 고자 상
12. 고자 하
13. 진심 상
14. 진심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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