革命的 理想主義者 孟子와 思辨錄
현대사회의 戰爭은 모름지기 금융이나 에너지에 얽힌 資本的 전쟁이며, 그러한 자본을 조작하는 情報的 전쟁이다. 그러다보니 현재 진행 중인 미국과 중국의 전쟁 역시 자본전쟁이며 정보전쟁이다. 美中戰爭의 핵심은 중국의 자본의 기틀이 될 中國夢的 一帶一路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프로젝트를 결코 坐視할 수 없으며, 나아가 반드시 擊破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세계 제1의 覇權國이라는 位相에 異常이 招來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혹여 이러한 자본전쟁이 과거처럼 武力的 暴力에 의하지 않으므로 다소 人間主義的이라는 착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차라리 폭력에 의한 전쟁이라면, 폭력에 저항하다가 당최 승리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항복하면 된다.
그러나 자본전쟁은 애당초 마땅히 항복할 만한 꺼리나 대상 자체가 不在하다. 그래서 외려 더 가혹하다. 예컨대, 사무라이 식으로 敵의 머리를 댕강 잘라버리는 것이 아니라, 마취된 빨대를 꽂아두고서 말라죽지 않을 만큼 생존시키며 그 津液을 쪽쪽 빨아대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美中 자본전쟁 혹은 패권전쟁에 온통 銳意注視해야만 한다. 미중 패권전쟁의 틈바구니에서 南韓이나 北韓의 입장은 참으로 尖銳하며,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식으로, 강대국의 곁에 있는 약소국은 금세 작살나버릴 수 있는 탓이다.
혁명 역시 자본적 혁명이며 정보적 혁명이다. 그러니 현대사회에서 자본과 정보를 지니지 못한다는 것은, 과거사회에서 武力과 宗敎를 지니지 못한 바와 같다. 그러한 것들을 지니지 못한 세력은 결코 권력을 쟁취할 수 없으며, 권력을 쟁취할 수 없음은 곧 ‘생존 자체의 불안’을 惹起한다.
근대에 이르러 우리 민족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혁명은 메이지 유신이다. 메이지 유신에 의해 조선왕조가 멸망하고, 우리 민족의 산하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흔히 革命은,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 국가 기초, 사회 제도, 경제 제도, 조직 따위를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 이전의 왕통을 뒤집고 다른 왕통이 대신하여 통치하는 일, 이전의 관습이나 제도, 방식 따위를 단번에 깨뜨리고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급격하게 세우는 일 등을 의미한다.
혁명과 유사한 개념으로서, 變革, 義擧, 쿠데타 등을 말할 수 있다. 변혁은 급격하게 바꾸어 아주 달라지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의거는 정의를 위하여 개인이나 집단이 의로운 일을 도모하는 것을 말한다. 쿠데타(coup d’État)는 武力으로 정권을 빼앗는 일이며, 지배 계급 내부의 단순한 권력 이동으로 이루어지므로, 체제 변혁을 목적으로 하는 혁명과는 구별된다.
따라서 메이지 유신은 변혁에 가까울 수 있다. 그러나 王權이 天皇에게 부여되었을 뿐, 그 裏面의 작업들은 변혁보다는 혁명에 근접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때문에 메이지 혁명이라고 지칭해도 무방하다고 여겨진다.
明治維新은 막번 체제를 해체하고, 王政復古를 통한 중앙 통일권력의 확립에 이르는 광범위한 변혁 과정을 총칭한다. 메이지 유신은 학문상 명칭이며, 당시에는 ‘고잇신(御一新)’ 등으로 불렸다. 메이지 유신의 개시 시기는 대체로 ‘덴포(天保)’ 시기로 일치하지만, 종료 시기는 1871년 廢藩置縣, 1873년 地租改正, 1877년 ‘세이난 전쟁(西南戰爭)’, 1889년 헌법 발표 등 여러 설이 있으며, 정설은 확립되지 않고 있다.
에도 막부는 외교에 관한 권리를 독점하고, 일본인의 출입국과 무역을 관리, 통제, 제한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쇄국 체제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1856년부터 1860년에 걸친 아편 전쟁 이후, 동아시아로 진출하려는 서구 제국주의의 물결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1853년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매슈 페리’ 제독이 ‘밀러드 필모어’ 미국 대통령의 개국 요구 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왔다. 이에 막부는 1854년 미일화친조약에 이어, 1858년에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와 굴욕적인 통상조약(안세이 5개국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막부 정부에서 칙허 없이 처리했다는 점 때문에, 이에 반발한 반막부 세력이 일어나, 막부 정부와 대립하는 혼란기를 겪는다. 그러다가 260여 년이나 내려오던 ‘도쿠가와’ 막부가 1866년 ‘사카모토 료마’를 내세우는 ‘삿초’ 동맹에 패배하였고, 1867년에는 대정봉환과 왕정복고가 이루어진다.
1866년 ‘사쓰마’ 번의 지도자 ‘사이고 다카모리’와 ‘조슈’ 번의 ‘기도 다카요시’ 사이의 ‘삿초’ 동맹으로 메이지 유신이 이뤄졌다. 이 두 지도자는 ‘고메이’ 천황을 지지하였다. 이들은 ‘사카모토 료마’에 의해 천거되었는데, ‘도쿠가와’ 쇼군의 지배에 도전하여 천황의 권력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1866년 12월 25일 ‘고메이’ 천황이 세상을 떠나자, 1867년 1월 9일 ‘메이지’ 천황이 뒤를 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주로 구미 열강 국을 따라 잡기 위해, 개혁을 모색하였다. 학제, 징병령, 지조개정 등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고, 부국강병의 기치 하에, 유럽과 미국의 근대 국가를 모델로 하여, 민주화와 인권 운동을 탄압하고, 천황이 주도하여 일방적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적 강화에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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