流配旅行者 勉菴 崔益鉉
면암 최익현의 시대는 중세국가인 조선왕조가 근대국가인 서구세력이나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支離滅裂해가는 상황이었다. 조선이 君臣의 동맹을 맺고서 의지하는 淸나라 역시 그러했다. 그러한 시대에 면암 최익현의 삶은, 不得已 나라의 붕괴를 감내해야 하는 士大夫로서, 온갖 旣得權을 박탈당한 流配의 형태로서 점철된다.
면암은 ‘梁大集 在成의 書室에 씀’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記述한다.
“西洋은 하나의 禽獸이다. 그들은 父子ㆍ君臣ㆍ夫婦ㆍ長幼의 질서와, 禮樂ㆍ文物ㆍ節烈ㆍ衣冠의 융성함을, 등에 난 가시나 눈에 생긴 못처럼 여길 뿐만 아니다.
기필코 더럽히고 욕보일 것을 생각하여, 마침내 우리가 쇠약해진 것을 편승하고, 우리가 욕심대로 방종하는 것을 엿보더니, 방자하게 우리에게 호령하기를, 어찌 너희의 黻冕(슬갑과 면류관 즉 제복)과 珪璋(옥으로 만든 예물)을 없애 버리고, 너희의 남녀와 상하의 구분을 없애 버리고, 우리의 간편함을 따르지 않느냐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스스로 예의에 구속함을 싫어하고, 저들의 개방된 행동을 좋아하여, 처음에는 주저하다가 끝내는 노골적으로 그들과 합류한다. 그리하여 돼지로 길러 去勢하여도 성낼 줄 모르고, 소로 길러 코를 뚫어도 심상하게 여기다가, 급기야 國母를 시해하고 머리를 깎는 변이 천지를 뒤흔들어도 조금도 괴이하게 생각지 않는다.
이리하여 天性이 바뀌고 습관이 되었으니, 어찌 온 천하가 금수로 변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면암의 서양 인식은 當代 엘리트 지식인의 것이다. 이는 조선왕조 말기 국제정세에 대한 조선인들의 이해를 傍證한다.
또 면암은, ‘魯城 闕里祠에서 講會할 때 誓告한 條約’에서는 이렇게 기술한다.
“中華와 오랑캐의 큰 경계와 사람과 짐승의 큰 한계는, 진실로 천지의 떳떳한 법이며, 고금의 공통된 의리이므로 옮기거나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중화의 중화가 된 까닭은 예의와 문물이 있기 때문이다.
문물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은 衣冠만한 것이 없는데, 옷은 반드시 옷깃과 소매를 중히 여기고, 冠은 반드시 비녀와 상투가 있으니, 혹시라도 형체와 의복을 毁傷하여, 머리를 깎거나 검은 옷을 입는다면, 비록 짐승이 되는 것을 숨기고 싶어도 어떻게 될 수 있겠는가.
이번에 일본놈들이 오니, 여러 역적들이 저들의 일등공신이 되고 싶어, 멋대로 호령하여 먼저 우리에게 검은 옷을 입히고, 다시 머리를 깎으려 하였다.
가령 저들의 명령하는 것이, 간혹 옛 성인의 制作을 모방하여 의리에 그다지 해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임금을 협박하여 멋대로 호령하는 처지에는 마땅히 죽음으로써 맹세하고 따르지 않아야 한다.
하물며 중화가 되고 오랑캐가 되며, 사람이 되고, 짐승이 되는 판가름이 여기에 있음에랴.”
孔子로부터 이어지는 수백 년의 禮治 전통은 조선왕조를 지탱하는 勤幹이었다. 면암은, 그러한 것을 포기함은, 국가공동체를 팔아넘기는 賣國奴와 같은 지경에 이르는 것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그는 죽는 순간까지 衛正斥邪의 이념을 고수하게 된다.
그에게 있어 올바름은 전통을 고수하는 것이고, 사악함은 문호를 개방하는 것이다. 제아무리 외부세력이 막강하더라도, 그들의 문명 수준은 한갓 禽獸나 오랑캐에 불과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高宗은 그저 왕실만이라도 다소의 기득권을 보장받을 수 있기만을 바랐고, 開化派들은 개혁을 선도할 만한 역량을 지니지 못하고 있었다.
면암은, 결국 乙巳條約이 체결되고서 조선왕조가 붕괴하자, ‘魯城 闕里祠에서 先聖에게 고한 글’에서 이렇게 기술한다.
“崇禎(明毅宗의 연호) 287년, 을사(1905, 광무 9) 12월 초하루, 기해 26일 갑자에 후학 崔益鉉은 통곡하며 先聖 孔夫子께 고합니다.
생각하옵건대, 인민도 오래되었고, 순박한 풍속도 오래되었으며, 三皇ㆍ五帝ㆍ三王 같은 표준을 세운 성인도 가신지 오래되었으니, 세대의 치란과 道의 흥망이 氣數의 성쇠로 번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때문에 周의 말엽에 하늘은 집대성한 성인을 내어 春秋의 권한을 빌려, 亂臣賊子를 죄주고 王道를 바르게 했으니, 이것이 곧 우리 夫子의 道가 옛 성인을 계승하고 후학을 열어 주어, 堯舜보다 더 어질게 된 것입니다.
그후 다시 覇道에서 떨어져 오랑캐가 되고, 오랑캐에서 다시 떨어져 짐승이 되었으며, 楊墨(楊朱와 墨翟)은 변하여 老佛(道敎와 佛敎)이 되고, 노불이 다시 변하여 陸王(陸象山과 王陽明)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천하를 변역한 것이 그 수를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만, 亞聖ㆍ大賢들이 전후에 번갈아 나서, 道를 호위하고 邪說을 막는 책임을 지고, 尊周攘夷의 공을 세운 때문에, 道學이 다 떨어지지 않고 衣裳도 다 찢어지지 않아 중화의 전통을 보전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陽秋(春秋의 별칭)의 한 가닥 맥이 線같이 海東의 한 지방에 오히려 존재해 있었으니, 이는 곧 碩果不食으로 천하의 志士들이 바라던 바입니다.
요사이 서양의 鬼物들이 날뛰어, 利瑪竇 같은 예수[耶蘇]들의 邪說이 점점 물들어 고질이 되었고, 끝내는 동쪽 오랑캐가 몰아 잡아먹어, 인류가 거의 다했습니다.
우리를 비린내 나게 하고, 우리의 머리를 깎고, 목에 쇠사슬을 채워,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 우리를 臣妾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鬱鬯酒를 맡던 종주국이 위태로워 종묘ㆍ사직이 폐허가 되었고, 부자의 말씀을 외고 본받던 선비들이 스스로 금지하여, 선비의 복장이 깨끗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道는 전수할 데가 없게 되었고, 聖靈은 의탁할 곳이 없게 되었으니, 아, 하늘이여.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이는 실상 저희들이 우매하고 용렬하여서, 禍의 기틀이 싹터 움직일 적에 대책을 세워 막지 못하고, 惡의 불꽃이 치열할 때 성토하고 멸망시키지 못하여, 春秋의 법을 끝내 받들어 행하지 못하였으니, 천지의 죄인인 동시에 부자의 죄인입니다.
경건하게 뵈옵는 마당에, 가슴이 찢어지고 정신이 떨려서, 통곡하고 죽고 싶을 뿐이기에 삼가 고하옵니다.”
上記에서 드러나듯, 면암의 삶은 痛恨으로 점철된다. 그 근본적 원인은 王朝와 文明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勉菴으로서는, 오랑캐에 불과한 일본과 금수에 불과한 서양세력에 의해 박탈되었음이 더욱 견딜 수 없는 羞恥였다.
일본과 서양세력이 등장하기 전에도, 斯文亂賊으로서 楊墨(楊朱와 墨翟), 老佛(道敎와 佛敎), 陸王(陸象山과 王陽明) 등은 존재했다. 그러한 온갖 걸림돌을 죄다 제거하면서 지탱해 온 왕조였다.
그런데 ‘Matteo Ricci(利瑪竇)’의 예수[耶蘇]를 앞세우며 새로이 등장한 서양세력이 침투하는 과정은, 기존의 사문난적들과는 그 樣相이 전혀 달랐다. 어차피 철학사상이나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근원은, 인류문명의 始原으로부터 전해진 것이므로, 살펴보면 공통점을 모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서양세력이 지닌 과학기술이나 군사력은, 당시 朝鮮王朝로서는 당최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이는 이념의 차원에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제아무리 견고한 이념을 지녔더라도, 그것을 지탱할 실제적인 物理力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 이념은 결국 멸망하게 된다. 그러한 사실은 최익현의 시대 이후 이어지는 공산주의 이념에서 검증된다.
人類史에서 共産主義者들이야말로 종교적 신앙심에 버금하는 강력한 이념을 지녔다. 실로 공산주의자들의 이념은 조선왕조 衛正斥邪主義者들 못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이념은 經濟力이라는 물리력을 상실하면서 죄 몰락해버렸다.
물론 그 결과는 20세기 末에 이르러서야 드러나므로, 최익현으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다보니 면암의 삶은, 굳이 실제적인 流配는 아니더라도, 여전히 심리적인 유배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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