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역시 중국인 黃開基가 쓴 梅泉續集 서문이다.
“箕子가 周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고, 朝鮮으로 온 뒤로부터 洪範九疇의 道가 동방에서 이루어졌다.
그 뒤로 그 遺風과 餘澤이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아, 歷代로 내면이 어질고 외면이 훌륭한 인물들이 연이어 나왔다.
지금의 韓國 사직에서는, 또 창강과 매천의 문장이나 절의를 통해, 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창강은 幾微에 밝고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라, 관직을 버리고 남쪽으로 갔다가, 國運이 다해 갈 즈음에, 마침내 中華民國에 籍을 두고서, 스스로 少昊金天氏의 가문을 다시 열어, 그 망국의 슬픔을 잊고자 하였다.
그 결과 내가 그와 교유하며, 학문과 도를 논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저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나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매천의 경우에는 따져 보면, 나와 같은 黃帝의 후손인데, 창강을 따라 옛 本籍으로 돌아오지 않고, 寒貧한 布衣之士로서 도리를 지키는 일을 힘써 자임하였다.
그리하여 엿처럼 달게 독약을 마심으로써, 자신을 개결하게 지켰으니, 이는 불행 중에 더욱 큰 불행이라 하겠다.”
황개기(1790~1856)는 청나라의 정치가로서 중국인이다. 그런 그가 황현에 대해서 위와 같은 발언을 하는 것은, 아주 印象的이다. 황개기는, 기자가 주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고, 朝鮮으로 책봉되어 온 일을 거론한다. 그렇게 기자가 홍범구주를 전해 줌으로써, 조선에서 홍범구주의 정치가 실현된 것이라고 판단한다. 이러한 이해는 조선왕조에서도 일반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황현과 자신이 黃帝 軒轅氏의 동일한 후손임을 주장한다. 이는 지극히 中華主義的 思惟方式의 發露라고 할 수 있다. 황제 헌원씨는 중국인에게 마치 ‘조선의 檀君’과 같은 존재다. 그런데 황현의 성씨가 黃氏라는 사실만으로 황제 헌원씨의 후손이라고 한 것이다. 여하튼 이는, 황현이 중국이라는 문명권에 편입되어야 할 인물이면서도, 마치 기자처럼 조선에서 생을 마쳤음을 비유함이다. 적어도 황현의 수준 정도는 되어야 문명적인 중국인일 수 있음을 내포하는 비유라고 할 것이다.
또한 황현이 조선의 멸망을 보면서, 스스로 자결한 忠節을 鼓舞的인 행위로 평가하며 칭송한다. 황현의 행위는 實利가 아닌 名分을 선택한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명분을 위해 충절을 선택하는 것은, 조선왕조가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대표적인 정치철학적 지향이었다.
조선왕조에서도 황현의 경우처럼, 적어도 자기의 목숨까지 바칠 정도라면, 나름대로 명분을 추구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외의 경우 대부분, 명분은 그저 실리의 도구로써 작동하기 십상이다. 현대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자기의 이득을 위한 삶은, 지극히 본성적인 차원에서 작동하는 심리기제이기 때문이다.
황현의 행위는 洪範九疇의 정치철학체계에서는, 後代에 군주의 권력을 標榜하는 모델로서 흔히 제시되는, 皇極의 원리를 좇는 행위인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세계의 정치적 상황이 황현이나 황개기의 바람과 같은 것은 아니다.
때문에 현재에 이르도록, 정치적 판단에 있어 명분과 실리는 여전히 늘 문제가 된다. 더욱이 조선왕조의 性理學的 정치철학은 지나치게 명분에 치중하며, 실리를 조화시킬 만한 정치이론이 정립되어 있지 못 하다.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實學이 등장하기도 한다.
檀君朝鮮과 箕子朝鮮 등에 얽힌 古代史의 문제들은, 현대에 이르러 특히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그만큼 그 문제에 내재된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단군조선이나 기자조선에 관한 上古史 재정립의 문제는, 역사문제라는 것이 결국은 정치철학의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케 한다.
조선왕조에서는 기자조선을 역사적 事實로 규정했다. 그래서 기자의 홍범을 國是로서 활용했던 것이다. 그러한 政治史的 史實에 대해서, 조선왕조가 멸망하고 수십 년이 지난 후, 기자조선의 실체 자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고려왕조나 조선왕조에서는, 단군조선이나 기자조선의 眞僞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고려왕조는 역사적 史料에 대한 인식이 다소 부족했다지만, 조선왕조는 역사에 대해 각별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러한 인식 탓에 예컨대, 세조 때는 受書令으로써 古記로 분류되는 일련의 서적들을 강제로 수거하여 없애버린다.
세조의 수서령은, 주로 기자조선의 역사를 事實로써 확정하는 데 장애가 되는 내용을 담고 있는 歷史書를 대상으로 시행된 것이었다. 受書 대상 텍스트의 목록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古朝鮮秘詞, 大辯說, 朝代記, 周南逸士記, 誌公記, 表訓三聖密記, 安含老元董仲三聖記, 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文泰山ㆍ王居仁ㆍ薛業等三人記錄, 修撰企所 一百餘卷, 動天錄, 磨蝨錄, 通天錄, 壺中錄, 地華錄, 漢都讖記 等이다.
현재로서는 당시 逸失된 서적들에 기술되었던 내용을 확인할 방법은 없으며, 지목된 서적들의 제목으로써 유추할 때, 그 서적들의 대부분이 우리 민족의 上古史에 관련된 歷史書인 것으로 추정된다. 흔히 이러한 문제들은 역사적 史實의 문제이므로, 역사학의 所管인 것으로 판단하기 쉽다. 그러나 역사라는 것은, 역사학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정치철학의 문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어떠한 역사적 事實이 歷史書에 史實로서 기술되어, 하나의 歷史가 정립되는 과정은 지극히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선왕조의 半島史觀, 日帝의 植民史觀, 중국의 東北工程 등에 의한 역사는, ‘역사를 위한 역사’가 아니라 ‘정치를 위한 역사’임은 周知의 사실이다. 흔히 조선왕조의 반도사관을 日帝 식민사관의 일종이라고 인식한다. 그러나 요동 정벌 명령에 抗命하며 위화도 회군이라는 정치적 결정을 하고, 중국에 대한 事大主義를 선언할 때 작동한 史觀이야말로 반도사관이다. 본래 우리 민족의 영토이던 요동을 포기하고서, 우리 영토를 ‘록강 이남의 韓半島로 국한시켰기 때문이다.
일제는 그러한 조선왕조의 전통적인 歷史觀에 반도사관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따라서 ‘조선왕조의 반도사관’과 ‘식민사관 중의 반도사관’은 뭉뚱그려질 수 없는 별개의 개념이므로, 명확히 분별하여 살피는 것이 타당하다.
식민사관은 19세기 말 도쿄제국대학에서 시작되었는데, 神功皇后의 新羅征服說과 任那日本府說, 滿鮮史論 등을 내세우다가, 20세기 초 朝鮮侵略이 본격화되자 日鮮同祖論, 他律性論, 停滯性論, 黨派性論 등을 제시하고 있다.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이마니시 류(今西龍)’, 李丙燾 등이 대표자들이다.
일제의 朝鮮史編修會에 재직하던 申奭鎬는, 解放 이후 국사편찬회의 회장이 된다. 이후 이러한 계통을 잇는 植民史學派는 현재까지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美軍政, 左右對立, 韓國戰爭 등의 이유로 인해, 친일파 處斷을 엄정하게 실현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