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 년을 거슬러 온 인연인디, 단번에 끊어지기야 하겄어.’
철없던 고등학교 때는 과외 선생
의욕만 넘치던 학보사 시절엔 사수
월간스톰에 취직하고 나서는 편집장으로
늘 다온의 주변을 자치하고 있던 남자 강태율.
아침마다 커피 셔틀은 기본에, 허구한 날 이어지는 지적질과 잔소리.
원수 같은 강태율의 손아귀에서 옴짝달싹 못 하고 지내 온 세월이 자그마치 9년이다.
다온은 이번에야말로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리라 다짐해 본다.
“기획 기사 제목은 정했어?”
이참에 그냥 확 뒤집고…….
“부제는?”
“마빡으로 대그빡을 그냥…….”
“뭐? 방금 뭐라고 했어?”
차마 저 잘난 머리를,
대그빡이라고 불렀다는 말은 못 하겠다.
“마법으로 대자연을…….”
“똑바로 말해라.”
“마산으로 대리운전을…….”
그러던 어느 날, 천신녀의 말처럼 저를 구제해 줄 동아줄이 나타난다.
“나한테 강태율 사용법이라는 매뉴얼이 있는데 말이야…….”
다온은 인생의 2막이 펼쳐질 거라는 가슴 뛰는 예감이 들었다.
‘딱 기다려, 강태율. 우리의 관계는 지금부터 all over again이다.’
때로는 살벌하고 때로는 상큼한 그들의, 갑과 을의 관계가 다시 정립된다.
<본문 중에서>
“앗, 뜨거.”
비명과 함께 다온이 허리를 뒤로 빼며 펄쩍 뛰었다. 가슴을 타고 내리는 열기에 정신이 없었다. 태율이 뜨거운 커피에 젖은 블라우스를 피부에서 떼어 놓느라 양옆으로 활짝 벌린 것도, 머리에 두르고 있던 타월을 빼앗아 젖은 몸을 닦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떡해. 이거 진짜 비싼 건데…….”
열기가 조금씩 가시면서 어느 정도 정신이 든 다온은 크림색이었던 꽃무늬 레이스가 연한 갈색으로 변해 버린 것을 안타깝게 내려다보았다.
“지금 블라우스가 문제야? 괜찮아? 많이 뜨거워?”
“아니요, 블라우스 말고…… 엄마야!”
다온은 기겁을 했다. 맨살을 더듬는 타월의 존재를 그제야 인식한 것이다. 떨어져 나간 단추 대신 손으로 블라우스를 여미며 태율의 팔을 거칠게 밀쳐 냈다.
“변태. 지금 어딜 주물럭거려요?”
“기자라는 사람이 단어 선택을 해도 꼭…… 니가 물건이냐? 주물럭거리게.”
“지금 이 상황에서 직업이 왜 나와요? 그리고 사람한테도 주물럭거린다는 표현을 쓰거든요.”
“주물럭거리다. 동사. 물건 따위를 자꾸 주무르다, 비슷한 말로는 주물럭대다.”
국어사전을 그대로 외운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반박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온은 잘난 척하는 태율을 새치름하게 노려보았다. 이 와중에 꼭 이렇게 사람 기를 죽이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다. 이게 얼마짜리 브래지어인데. 유명 디자이너의 리미티드 에디션이라며 경은이 취직 기념으로 큰맘 먹고 선물해 준 것이었다. 금실이 곱게 수놓아져 있어서 함부로 물빨래하지도 못하는 고가의 제품이었다. 애인이 생기면 입으려고 고이 모셔 놓고만 있었는데…….
머리를 감지 못한 찝찝한 마음에 기분 전환 차원에서 처음으로 꺼내 입은 것이었다. 강태율 눈요기나 시켜 주려고 차려입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가 막힌데, 더 기가 막힌 것은 태율은 속옷 차림의 그녀를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눈요기는커녕, 도리어 마른 북어포처럼 건조한 눈빛은 그녀를 이성으로조차 인정하지 않는다는 분위기였다.
“선배, 남자 좋아하죠?”
“죽을래?”
“그럼 혹시 내가 남자로 보여요?”
“가슴 달린 남자도 있냐?”
이씨. 보긴 봤네. 다온의 얼굴이 커피에 덴 가슴 부위만큼이나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흠집 날 자존심도 없었다.
“관둬요. 언제는 날 여자 취급이나 했나. 유도장 매트에 날 메다꽂을 때부터 알아봤어. 내가 무슨 짐짝도 아니고, 인정사정없이 퍽퍽.”
“오버하지 마. 위험한 순간이 닥치면 네 몸 하나 정도는 스스로 지킬 수 있으라는 의미에서 그런 거야. 요즘은 그나마도 안 하지? 지난달 마감 때 보니 걸어 다니는 좀비가 따로 없던데?”
태율이 입고 있던 스웻셔츠를 벗었다. 그녀가 씻고 있는 동안 와이셔츠 대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모양이었다. 유도복 너머로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질 가슴은 몇 번 봤지만, 완벽하게 맨살이 드러난 상반신을 눈앞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도자기처럼 매끄러운 피부와 완만한 역삼각형 모양으로 빠진 어깨선이 과히 나쁘지 않았다. 사실 상대가 태율만 아니었다면 근사하다는 표현을 썼을 것이다. 필요 없는 지방은 단 한 군데도 붙어 있지 않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탄탄하면서 근육이 과하지 않은 게 언젠가 미술책에서 본 조각상과 비슷했다.
조각가가 빚어낸 완벽한 피조물. 귀신에 홀린 듯 뻔뻔한 시선은 잘 벼려진 칼날처럼 음영이 새겨진 가슴 라인 아래로 옮겨 갔다. 밑그림을 그려 만든 것처럼 유연하게 빠진 선들을 보며 만지고 싶다는 충동을 애써 누르는데, 아름다운 미술품은 눈으로만 감상하라던 미술 선생님의 직언이 떠올랐다.
“다 봤지? 원하면 만져도 돼. 아니지, 주물럭거려 보든지.”
“마, 말도 안 돼. 내가 언제, 만져 보고 싶다고 했어요?”
“싫으면 말고. 이제 공평하지? 둘 다 서로 벗은 몸 봤으니 딴말하기 없기다.”
속마음을 들켜 버벅거리는 다온을 두고 태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서면서 손에 쥔 스웻셔츠는 그녀의 머리 위로 던졌다.
“우선은 이거라도 입고 있어. 나는 밖에 나가서 화상 연고랑 갈아입을 옷 좀 사 올게.”
부드러운 질감의 천이 완벽하게 시야를 차단했다. 천만다행이었다. 물색없이 달아오른 볼은 도무지 가라앉을 생각을 안 했다. 거실, 침실, 현관. 그가 움직이는 일련의 과정을 소리를 통해 머릿속으로 따라갔다. 문이 닫히며 이는 경미한 진동에 스르륵, 박스 모양의 셔츠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거칠어진 호흡을 힘들게 뱉어 내며, 다온은 서둘러 복숭앗빛 양 볼을 손으로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