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연표
첫 번째 마당
4월혁명 덕에 권력 잡은 민주당,
‘혁명 과업’ 수행은 미적미적
두 번째 마당
들불처럼 일어난 통일 운동,
분단 장벽에 도전하다
세 번째 마당
박정희 주장대로
4월혁명 시기는 혼란기였나
네 번째 마당
억세게 운 좋은 박정희,
그의 과거는 비밀이었다
다섯 번째 마당
장면 정부가 정군 안 해 쿠데타?
권력욕과 진급 문제가 직접적 원인
여섯 번째 마당
박정희의 ‘혁명 이념’,
식민 사관과 한국적 민주주의
일곱 번째 마당
쿠데타 막지 못하게 한 양대 걸림돌,
양다리 걸친 장도영과 진압 막은 윤보선
여덟 번째 마당
좌익 경력 때문에 박정희 꺼렸다?
미국이 쿠데타를 묵인한 이유
아홉 번째 마당
정치 깡패 이정재는
진정 죽어 마땅했나
열 번째 마당
장준하는 왜 5·16쿠데타 직후
“군사 혁명”이라 했나
열한 번째 마당
5·16쿠데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장면 정부 따라 한 군사 정권
나가는 말
5·16쿠데타가 만든 테러·감시·가위질의 시대
한국의 민주주의는 퇴행했고, 양심과 사상의 자유도 제약을 받았다
혁명? 5·16은 반혁명 쿠데타일 뿐!
한국 현대사의 문제적 인물 박정희 성찰하기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5권의 주제는 ‘제2공화국과 5·16쿠데타’이다. 서중석 교수는 이 책에서 4월혁명 이후의 제2공화국과 5·16쿠데타가 일어난 상황까지를 다루고 있다. 대체 왜 쿠데타가 일어난 것일까? 왜 장면 정권의 제2공화국은 쿠데타를 막지 못한 것일까? 미국은 왜 쿠데타를 눈감았던 것일까? 당시 대한민국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사의 문제적 인물이다. 그가 죽은 지 오래되었지만, ‘박정희’라는 이름은 아직도 한국 현대사의 논란거리이다. 반신반인(半神半人)이라는 낯 뜨거운 말로 찬양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박정희 세력이 끼친 폐해를 직시해야 한다며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다. 이처럼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 그런데 이런 평가가 과연 올바른 형태로 진행되고 있을까? 박정희가 어떤 삶을 살았고, 왜 쿠데타를 일으켰는지, 그 당시 한국 상황은 어땠는지, 그리고 그의 집권기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먼저 성찰하면서 평가가 이뤄져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그래 보이지는 않는다. 박정희를 과도하게 떠받드는 세력들에 의해 그의 우상화가 하나씩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2017년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벌써부터 혈세를 쏟아부어 100주년 기념사업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엿보인다. 구미시는 당장 28억 원가량을 들여 박정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창작 뮤지컬을 제작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비판과 성찰은 없이 일방적인 미화와 우상화가 여기저기서 진행되고 있다.
제2공화국의 등장, 4월혁명이 끝나자 모든 것이 뒤집어졌다
4월혁명이 끝나자 모든 것이 뒤집어졌다. 1959년 진보당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조봉암이 재평가되기 시작했고, 혁신 세력이 진보정당을 꾸려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이승만 집권기 때 무고하게 목숨을 잃은 집단 학살 문제가 다시 수면 위에 떠올랐고, 여기저기서 진상 규명 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김구 암살 사건도 재조명됐다. 김구는 부활해 독립 운동과 민족주의, 통일의 상징이 됐다. 교원 노조가 결성되는 등 노동 운동도 활발해졌다. 데모 규제법과 반공임시특별법에 반대하는 2대 악법 반대 투쟁도 일어났다. 또한 통일 운동과 더불어 반미 운동도 일어났다. 이 당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그 유명한 구호가 나왔다. 그러나 장면 정부는 이런 4월혁명의 분위기를 이어가지 못했다. 4월혁명의 과실을 대부분 차지한 민주당은 자유당과 마찬가지로 보수 세력이었고, 분단·반공 세력일 뿐이었다. 더군다나 민주당 정권은 부정 선거 원흉이나 발포 책임자, 부정 축재자, 반민주 행위자를 처단하기 위한 특별법인 혁명 입법을 만드는 데 대단히 소극적이었다. 서중석 교수는 장면 정부가 비록 4월혁명의 분위기를 이어가지는 못했지만, 9개월의 짧은 집권 기간 동안 경제 정책을 세우고 공무원을 공채로 뽑은 점, 경찰을 대폭 숙정해 물갈이한 점, 국군 숫자를 대폭 줄여 국방비를 경제 발전에 돌려쓰려고 했던 점은 뛰어난 성과라고 말한다. 1961년에 들어서면서 장면 정부는 점차 안정되지만 곧 쿠데타가 일어나 제2공화국은 막을 내리게 된다.
박정희는 누구인가? “정말 대운을 타고난 사람”
그렇다면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누구인가? “많은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이 18년이나 집권했기 때문에 적어도 박정희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잘 알 것 아니냐’고 생각한다. 그렇지가 않다. 우선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박정희는 국민에게 너무나도 생소한 사람이었다. 언론계나 지식인층도 잘 몰랐다. 국회의원들도 ‘박정희가 누구야?’ 하고 서로 얘기했다고 그런다.” 서중석 교수의 말처럼 당시 박정희는 그 누구도 정체를 모를 만큼 무명의 군인이었다. 사실 군인 시절에도 박정희는 눈에 띄게 활동한 게 없었다. 한국전쟁 때도 별다른 활약상이 없었다. 당시에도 그랬지만 그 이후에도 박정희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 박정희의 창씨개명 이름인 오카모토 미노루, 다카키 마사오도 1970년대 후반, 1980년대에 들어와서 알려졌다.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두 번째 응모하면서 했던 말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의 굳건한 결심입니다”도 2009년에서야 밝혀졌을 만큼 박정희의 과거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런 박정희가 쿠데타를 성공했다. 1961년 5·16쿠데타 과정을 되짚어보면 보안이 철저하지도 않았고, 쿠데타 당일 병력 동원도 매끄럽게 이뤄지지 않았다. 쿠데타군 자체가 그리 많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박정희는 한 나라를 손에 쥐는 데 성공했다. 서중석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그전엔 안 그랬는데 요 근래 박정희 정권에 관해 강의할 때 빠지지 않고 얘기하는 게 있다. ‘박정희는 정말 대운을 타고난 사람이다. 운이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다’, 그런 얘기를 한다. 쿠데타에 성공할 때도 여러 가지가 겹치면서 정말 운이 좋았고, 경제 발전 문제만 해도 그렇다. 국내외 조건이 그야말로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시기에 경제 발전을 이룩해낼 수 있었다. 중화학 공업화를 할 때에도 선진국에서 사양 산업이 된 일부 중화학 공업을 넘겨주기 시작하는 시기와 맞물렸다. 또 정부에서는 중화학 공업에 매진했지만 기업들이 투자를 꺼렸던 1970년대 후반에 중동 건설 경기가 갑자기 일어난 것도 굉장히 운이 좋은 것이다.”
쿠데타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서중석 교수는 쿠데타를 가능케 한 배경으로 다음 두 가지를 꼽고 있다. 하나는 당시 한국군이 굉장히 비대했다는 것. 이승만 대통령은 군인 숫자를 늘리는 게 국방력을 갖추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1953년에 벌써 60만이 넘었고, 나중에는 72만 명까지 늘어났다. 또 하나는 다른 어떤 집단보다도 군인들이 엘리트 의식이 강했다는 것. 당시 어지간한 장교는 모두 미국에서 훈련을 받고 돌아왔다. 박정희, 김종필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미국 유학이란 큰 부자, 특권층이 아니면 갈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 미국을 다녀온 군인들은 강한 엘리트 의식을 갖게 되었고 정권을 넘볼 힘도 갖추게 되었다. 실제로 1959년 미국 콜론 연구소에서 작성한 보고서는 한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하층 경제 계급 출신의 유망한 청년 장교가 한국에서 다수 생겼고, 이들은 특권적 관리나 정치가에게 분노를 품게 된다. 이것이 폭발할 우려도 있다.”
우선 쿠데타 모의는 김종필, 김형욱 등 육사 8기들에서 시작된다. 왜 육사 8기가 쿠데타를 도모했나? 이들은 군 상층의 부패에 불만이 많았고 이를 거세해야 한다고 봤다. 그러면서 군 상층부를 바로잡자고 정군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진급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5·16쿠데타가 날 때까지 극소수만 대령 진급을 했고, 좀 괜찮다고 하는 사람들 정도가 중령에 머무르고 있었다. 후에 이들은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를 장면 정부의 부패, 군의 부패 등을 들었지만, 서중석 교수는 권력욕과 진급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 등이 가장 직접적인 요인이었을 거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역시 이전부터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던 박정희를 끌어들였고, 결국 쿠데타를 성공시킨다.
5·16쿠데타, 막을 수는 없었을까
쿠데타 세력이 꿈꾼 나라는?
쿠데타는 분명 막을 수 있었다고 서중석 교수는 말한다. 하지만 장면 정부의 인사 실책과 윤보선의 묵인 때문에 결국 막지 못했다고 진단한다. 우선 장면은 이종찬을 국방부 장관에서 내리고 현석호를 새로 임명했다. 이종찬은 군인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에 적극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신임 육군 참모총장에 장도영을 앉혔다. 장면은 이전부터 쿠데타가 일어날 것이란 소문을 몇 차례 들었지만, 그때마다 장도영은 ‘염려할 것 없다’면서 박정희를 치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장도영만큼이나 쿠데타에 기여한 사람은 윤보선 대통령이었다. 장면과 감정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윤보선은 쿠데타군을 진압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군 일부에서 쿠데타군을 진압하려 하자 하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곧 쿠데타를 묵인하고 만 것이다.
결국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일행.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어떤 나라를 꿈꾸었을까? 서중석 교수는 단호하게 말한다. 그들에게는 정치적 이념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 “쿠데타를 성공시켰지만 이들은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지에 대한 상은 없었다. '반공 체제를 재정비, 강화'한다는 게 혁명 공약 1번이었을 뿐 어떤 정치적 이념도 보이지 않았다. 반공을 제외하면 무(無)이데올로기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박정희에겐 사상이 있었는가. 서중석 교수는 박정희의 생각은 일제 식민 사관에 기반을 둔 저열한 민족성론, 식민지 노예근성을 고쳐야 한다는 주장, 극단적인 반공 노선 같은 것밖에 없다고 말한다. “혼란과 무질서를 물리력으로 뿌리 뽑겠다는 파시즘적 질서관, 그리고 일제 시기의 청년 장교들이 가졌던 군국주의, 국수주의나 군인 정신 같은 것도 조금은 엿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주 낡은,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것을 아주 강렬하고 과격하게, 단정적으로 표현하면, 일제 유산이 청산되지 못하고 비민주적·파쇼적 사고나 행태가 횡행하는 사회에서는 혁신적이거나 개혁적인 느낌을 갖거나 그것을 신선하고 민족적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었다. 파시즘 이념이나 행동이 유럽에서 일부 층에 영향을 끼친 것처럼, 또 일제 군국주의 청년 장교들의 정치 이념이 상당수의 일본인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처럼 그럴 수 있었다. 어쨌건 구부러진, 기이한 ‘민족의식’이 당시 존재할 수 있었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곧 쿠데타 세력의 사상이란 식민 사관과 극단적인 반공 노선, 군인 정신이 결합된 것일 뿐 내용은 없었다는 것이다.
미국은 왜 쿠데타를 눈감았나
5·16쿠데타 때 CIA 국장이던 앨런 덜레스는 나중에 “재임 중 CIA의 해외 활동으로서 가장 성공을 거둔 것은 이 혁명이었다”라고 증언한다. 미국 정부는 ‘처음부터 쿠데타를 지지했다’고까지 얘기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그것에 개입해야 한다’는 노력도 보이지 않았다. 미국은 왜 이런 태도를 취했을까? 주한 미국 대사관에 오래 근무했던 그레고리 헨더슨은 미국 정부가 쿠데타 지지로 나선 건 케네디 정부의 쿠바 침공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 큰 요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미국은 장면 정부를 상당히 불안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것은 민간인 정부에 대한 불신이었다. 민주와 자유를 어느 정도 지키는 민주주의 정부가 과연 한국에 적합한가 하는 것이었다. 4월혁명 후 진보 세력이 등장해 통일 운동과 전후 학살을 비롯한 과거사 진상 규명 운동을 강하게 하자, 미국은 이를 상당히 두려워했다. 그러면서 장면 정부 대신 자기들이 정말 믿는, 탄탄한 반공 권력이 들어서는 것을 생각했을 수 있다. 다만 쿠데타를 직접 지원하지는 않은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적어도 쿠데타가 진행되는 것을 막을 필요를 못 느꼈다는 것은 확실하다.
곧 미국은 처음부터 박정희를 노골적으로 지지한 건 아니지만 사실상 박정희의 쿠데타를 묵인했다. 주한 미군과 미국은 박정희를 인정했다. 박정희를 잘 알지 않으면 그런 일이 생길 수가 없다고 서중석 교수는 말한다. “5·16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미국은 박정희가 이승만 못지않게 반공 정책을 철저히 수행할 것임을 확신했다고 본다. 남로당 프락치로서 한 박정희의 배신적 행위, 기회주의자로서 면모, 권력에 대한 강한 집착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 더 짚을 것은, 한 번 배신한 사람은 거기 다시 안 붙는다는 걸 하우스만이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미국 측에서 그간 보니 공산당을 배신한 자들이 공산당에 다시 가는 건 못 봤다’, 이런 점을 강조하더라.”
5·16쿠데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서중석 교수는 5·16쿠데타의 평가는 “쿠데타 세력이 어떤 국가, 어떤 사회를 만들려 했는가에 따라” 이뤄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5·16 반혁명 쿠데타”로 부르는 게 제일 정확한 용어라고 말한다. 서중석 교수는 혁명이냐 반혁명이냐의 문제는 다음의 질문을 던져보면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자유 또는 민주주의와 관련해 어떤 역할을 했는가. 사회적 혁명, 경제적 혁명을 과연 하려고 했는가. 분단 고착화인가, 통일 지향인가. 이 질문을 놓고 보았을 때 쿠데타 권력은 확실히 반혁명 세력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쿠데타 이후 자유와 민주주의는 억압되었다. 정기 간행물 1,200종을 폐간시키는 등 언론의 자유도 퇴행했다. 양심과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도 제약받았다. 반공법이 통과되면서 내면의 자유까지 짓눌렸다. 예술가들도 가위질의 공포에 항상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국가보안법을 개정하면서 혁신계의 통일 운동을 반국가 행위로 철저히 처단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진보 세력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지방 자치도 완전히 뿌리 뽑혔다. 노동조합이 해산되고 많은 노조 간부가 구속되었다. 이때부터 노조는 권력에 종속되고 노동 운동을 하기 어려운 상태가 된다. 서중석 교수는 5·16쿠데타는 한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분단을 더욱 고착화시킨 반혁명 쿠데타일 뿐이라고 말한다. “5·16쿠데타는 중남미 쿠데타처럼 기득권 세력을 보호하고, 현상 변화나 현상 타파 즉 혁명을 예방하겠다는 반동적이고 반혁명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봐야 하지 않겠나. 5·16쿠데타의 의도는 전 세계적 규모의 냉전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통일 세력, 진보 세력에 타격을 가하겠다는 것, 역사의 정상적인 진행에 제약을 가하겠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