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잠깐 내린 눈
나도 인간, 지도 인간
동등하게 말해야 한다
김순자
동물 살리는 의사에서 사람 살리는 의사로
‘광주교도소 슈바이처’
이성희
날 알아주는 사람이 있는
그곳에 가고 싶다
박순애
배운 사람들 하는 짓 보고
못 배운 걸 한탄하지 않았다
김흥수
아버지는 빨치산한테 죽고
아들은 간첩으로 잡혀가고
김평강
자기 생각 없인 못 사는 사람,
꼭 지켜주고 싶었다
이정미, 고 심진구
열네 살 납북어부,
억울해서 공부하고 돈 벌어 남 주다
김용태
누가 이들을 간첩으로 만들었나?
《폭력과 존엄 사이》에 등장하는 이들은 박정희·전두환 정권의 국가폭력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돼 오랜 세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어왔다. 국가를 장악한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불리한 국면에 있을 때마다 간첩을 만들어냈고, 공포 분위기를 불러일으키며 통치를 해왔다. 검찰, 경찰, 안기부, 사법부 등의 국가기관도 공범이었다. 이런 시대적 맥락 속에서 이들은 ‘임의로’ 끌려가 한순간에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가 되었다. 국가 입장에서 간첩사건은 공안의 명목으로 실행한 단순한 조치들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이들에게 간첩 조작 사건은 씻을 수 없는 상처이자 끔찍한 분기점이 되었다.
국가가 사건을 날조하는 방식은 대단히 교묘하면서도 간단했다.
“모든 폭력이 발생하는 원리가 그렇듯이 가해자는 ‘그래도 되니까’ 조작한 것이고, 피해자는 ‘그래도 되는 사람들’이니까 조작 대상이 됐다. (…) 영장도 없이 국가기관에 끌려가 발가벗겨진 채 발길에 차이고 매질에 피를 쏟고 전기의자에 앉는 고문을 당한다. 초인적 힘으로 버티던 그들은 ‘가족을 데려다 똑같이 고문하겠다’는 협박에 무너지거나 고립의 공포와 밤낮없는 가혹행위에 심신이 허물어져 거짓 자술서에 손도장을 찍는다.“ (서문, p.8~9)
여기에 각 분야의 전문가들도 총출동했다. “사람을 사람 아닌 상태로 비틀어버리고 없는 사실을 있는 사실로 만들어내는 고문 기술자” “그 고문으로 혼절하면 언제든지 달려와 죽지 못하게 살려두고 다시 고문받을 수 있도록 내버려둔 의사” 등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이 모두 간첩 만들기라는 무시무시한 연극에 참여했다. 심지어는 법조계 인물들도 주연배우로 동원됐다. 무엇보다도 사법기관만큼은 국가권력을 견제하고 정의에 위배되는 폭력에 이의를 제기해야 했지만, 그들은 그저 권력의 꼭두각시가 되어 하달받은 명령에 복종했다. 헌법기관만큼은 다르지 않을까, 법정에서는 진실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그들은 이내 그 믿음이 모두 헛되다는 것을 확인했다.
“모든 것이 애매합니다만 사형에 처해주십시오. 검사가 이래요. 아니 모든 게 애매한데 어떻게 사형이냐고.” (김평강, p.9)
“뭘 시인해요. 다 조작인데. 배운 사람들이 그러는 걸 보고 못 배운 걸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김흥수, p.10)
말할 권리는 곧 들릴 권리이다.
간첩 조작 사건은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인 동시에 삶의 심층에 맞닿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 말은 정치적 차원과 분리된 개인의 삶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말이 아니라, 사건이 정치적으로나 법적으로 ‘해결’된다고 할지라도 당사자에게는 결코 ‘해소’되지 않는 지점이 남겨진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이 법적인 절차를 통해 자신의 무고함과 억울함을 밝힌다고 해도, 간첩으로 몰려 살아온 지난 시간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문제가 남는다. 이는 근본적으로 보상이 불가능한 시간이다. 《폭력과 존엄 사이》는 그 간극을 마주하고자 한다. 간첩사건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정작 그 사람들과 그들의 삶에 대해서는 도대체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
“2016년 초 인터뷰집 발간 제안이 들어왔을 때 난 정중히 거절했다.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란 존재가 너무 낯설었다. 그간 살면서 직간접적으로 접점이 없었기에 아무런 상이 잡히지 않았다. 내게 간첩 조작 사건이란 군부독재 시대를 휩쓴 광풍으로, 현대사 역사책에 누워 있는 단어일 뿐이었다. 그런데 인터뷰 작업이 국가폭력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피해자의 사는 이야기, 즉 삶의 질곡을 견디며 살아온 일상 그리고 끝내 무죄를 밝혀내고 존엄을 회복하는 이야기를 담는다는 것, 그리하여 몹시도 팍팍한 현실을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싶다는 기획 의도를 듣고 조심스레 용기를 냈다.” (서문, p.15~16)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이 책은 무엇을 말하기보다 ‘듣기를’ 자처한다. 기본적으로는 르포르타주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좀 더 정직히 말해 이 책은 ‘듣는 작업’에 해당한다. 말하고자 했던, 즉 자신의 말이 누군가에게 들릴 수 있기를 오랫동안 바라왔던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작업 말이다. 국가가 지급하는 형사보상금과 위자료로도 보상될 수 없고 돌이킬 수도 없는 ‘시간’. 어떤 면에서 그들이 가장 희망했던 것은 시스템 내에서 이루어지는 보상이라기보다 자신들이 ‘말할 권리’, 그리고 그 말이 많은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 ‘들릴 권리’였는지 모른다.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은 거예요. 말을 하니 들어주는 사람도 있고 그걸로 책을 쓰려는 사람도 있고 우리를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암울하게만 살았는데 힘이 나더라고요” (김순자, p.41)
실제로 그들이 겪은 고통 중 그들을 가장 괴롭게 한 것은 고문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말을 듣고 믿어준 사람들의 부재와 가족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의 등돌림은 그들에게 감당하기 힘든 정신적 고통을 주었다. 어느 날 갑자기 강제로 끌려가 감금된 그들은 외부세계와 철저히 단절돼 가족들에게조차 억울함을 말할 길이 없었다. 그리고 감옥에서 보낸 세월은 그 어떤 끈끈한 관계와 신뢰도 희미해질 만큼의 오랜 기간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그들은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여전히 삶은 그들의 것이다.
이 책은 간첩 조작 사건에 관한 책이 아닌 ‘그 사람들의 책’이다. 간첩사건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고는 있지만, 사건 자체에 관한 이야기는 일부분에 불과하다. 간첩사건이 이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든 파국 그 자체였을 것이라는 얄팍한 예상과 달리, 이 책에서 그 당시는 피해자들이 자신의 뜻으로 오롯이 살아낸 삶의 ‘한때’로서 등장할 뿐이다. 국가는 폭군처럼 등장해 그때껏 그들이 일구어 온 모든 것들을 앗아갔지만, 그럼에도 삶은 여전히 그들의 것이었다. 감옥에서도 삶은 결코 중단되지 않았고, 때론 새로운 생명력으로 꽃을 피웠다. 삶이 중단되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하나도 당연하지 않다. 누군가의 불공정하고 무자비한 폭력으로 삶이 짓밟힌 상황에서 도대체 어떻게 삶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내 별명이 책 할머니야. 유명했어. 책 담당하는 일. 책 목록이 있어. 그걸 각 방에 넣어줘. 내가 가면 나한테 뭔 책 읽는다고 말하면 책을 줘. 나중에 회수하고 몇 번이 뭔 책 가져갔다 적어놓고. 독방에 있는 사람하고도 나는 말을 할 수 있어. 책을 주고받으니까.”(박순애, p.97~98)
“건축기사 2급 취득하고 2년간 경력 쌓으면서 건축기사 1급을 봤는데 필기 실기 다 한 번에 붙었어요. 수능시험 공부하면서는 옆에 사람들 빨래를 한 달 동안 해주고 책 한 권 구하고 그랬어요. 광주교도소에서는 자리가 잡히니까 모범수 한 명 선정하는데 내가 뽑히고. 그때 되니까 내가 필요한 책을 구하기가 수월했죠.” (김용태, p.216)
“그 안에 안 죽고 산 것이 참말로, 아이고 나는 이 판결 나기 전에 죽을 줄 알았어. 무엇을 가지고 저세상으로 떠날 수 없으니까 있는 걸 베풀고 살아야 해. 형사 보상금 나와서 자식들 나눠주고 감옥에서 30년 살다 나온 사람들에게도 100만 원씩 보냈어.” (이성희, p.77)
우리는 차마 상상할 수도 없을 고통의 시간을 이들은 공부의 계기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자신보다 더 안쓰러운 사람을 돕는 계기로 오롯이 채워냈고, 결과적으로는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게 됐다. 자신의 인생 역정을 한바탕 풀어놓으면서 그들은 하나같이 사건을 겪기 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말한다. 또한 겪지 않았으면 좋을 끔찍한 시간이었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새로운 나를 발견한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고 회상한다. 뼈아픈 이별을 경험한 만큼 그들은 자신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준 새로운 인연들도 얻었다. 그렇게 자신의 말을 온전히 듣고 믿어준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다시 일어설 수 있었고, 풍랑 속에서도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는 감옥도 살 만하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장소의 여건보다 관계의 질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아무리 궁궐 같은 집이라도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 때 인간은 불행을 느낀다. 그러나 자신의 결백함을 알아주는 동료가 있고, 말이 통하는 벗과 책이 있고, 내가 가진 것을 남들과 나눌 수 있을 때 그들은 감옥이지만 살 만하다고 느꼈고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켜낼 수 있었다.”(서문, p.16~17)
그들이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간첩의 누명을 썼기 때문이 아니라, 이제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 눈떴기 때문이다. 그들은 제도에는 시효가 있어도 진실을 향한 투쟁에는 시효가 없음을 깨닫고, 나아가서는 이름이 다른 수많은 참사들의 본질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그렇게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투쟁, 보이지 않는 투쟁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서사는 대문자 역사가 미처 담아내지 못한 개인들의 역사이다. 이들은 화자이면서 자기 삶의 소설가이자 역사가가 된다. 국가가 함부로 난입해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삶의 서사를 다시 쓰고자 한다. 《폭력과 존엄 사이》라는 책으로 결실을 맺은 이 인터뷰 작업이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면, 형편없이 날조된 엉터리 소설을 고쳐 쓸 수 있는 하나의 장이자 방편이 되었다는 것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