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멧」 _진형민
「단추인간 보고서」 _최영희
「유리의 세계」 _구병모
「거울 속에 있다」 _오문세
「어디에도 있는」 _최상희
「나딸_상실한 구역」 _김진나
「마법이 필요한 순간」 _송미경
[수록 작품 소개]
「헬멧」 _진형민
건당 삼천 원. 수수료 떼면 이천오백 원.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오토바이로 미친 듯이 쏘면 은주와 나눌 커플링쯤은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종민이 시작한 배달 대행업체 아르바이트는 상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오토바이엔 사이드미러가 없고, 헬멧 쓰라고 구박하는 사람도 없고, 밥 먹었냐고 밥 먹으라고 더 먹으라고 지겹도록 말하는 사람도 없다. 심지어 기름값, 밥값, 오토바이값 내고 나면 남는 것도 없다. 위태롭게 이어지는 종민의 질주. 그 끝엔 무엇이 있을까.
「단추인간 보고서」 _최영희
지유의 귀밑에 두 개의 똑딱단추가 일렬로 돋아났다. 단추 사이의 피부는 슬쩍 벌어져 있었다. 마치 두 단추를 뜯으면 투둑, 허물을 벗을 수 있을 것처럼.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무엇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기에 지유는 만만한 방과 후 영어 선생님 메건을 찾아간다. “기억해. 단추는 누가 뭐래도 네 거야.” 메건의 시시껄렁한 조언과 “뭐든 해결 방법을 찾으면 되니 잠적하진 마.” 반 친구 김루의 구태의연한 조언을 뒤로하고, 마침내 지유는 결심한다. 단추를 푸는 최초의 ‘단추인간’이 되기로…….
「유리의 세계」 _구병모
언제부터 이 세계의 모든 땅이 유리 블록으로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사람들은 검은 흙과 용암이 내려다보이는 투명한 대지 위에서도 더할 나위 없는 안전감을 느끼며 살아 왔다. 도로의 유리 네 장이 느닷없이 부서지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딛고 선 땅이 무너져 버릴 수도 있다는 불안이 퍼져 나가며 완전해 보였던 세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유리 공방의 수석 장인 라로는 사건을 해결하려 애쓰던 중 공방의 어린 소년 문에게서 수상한 점을 발견하는데…….
「거울 속에 있다」 _오문세
보이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보이지 않는 건 그냥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이 전부다. 그러니 잘생긴 나를 ‘엘프’라 부르며 모두가 찬양하는 거겠지. ‘트롤’이라 불리는 엄마 친구 아들의 삶을,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거울 너머 내 얼굴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호의적이기만 했던 세상이 악몽으로 변해 간다. 되찾아야만 한다. 거울 속에 마땅히 있어야 할 모습을, 어쩌면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르는 그 모습을.
「어디에도 있는」 _최상희
인상적인 데라곤 없는 P시의 기숙학교에 입학하게 된 건 부모님의 돌연한 귀농 결정 때문이다. 느닷없이 딸기 농사를 짓겠다니. 아빠의 말은 뜬구름을 잡는 듯 모호하기만 하다. 기숙사에서 룸메이트의 얼굴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같이 쓰는 방은 마치 아무도 없는 듯 깔끔하고, 내가 남기는 흔적은 자꾸만 지워진다. 기숙학교에서, 단톡방에서 숫자로만 존재하던 친구들마저 어느 순간 모습을 감춘다. 모두 어디에 있는 걸까? 아니, 깎여 나갈 때야 자세히 보이는 손톱처럼, 어디에나 있는 회색 추리닝처럼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건 내가 아닐까?
「나딸_상실한 구역」 _김진나
선름은 모랑 아줌마의 집에 산다. 모랑 아줌마는 무척 친절하지만, 집에 선름이 발 디딜 곳은 없다. 작은 인형에도 원산지가 적혀 있는데 선름에게는 원산지가 없다. 어느 날, 선름은 모랑 아줌마의 손에 이끌려 방문한 나딸의 교도소에서 기묘한 흥분과 갈망을 느낀다. 지도에도 없는, 세상의 끝과 같은 곳, 나딸. 그곳 출신이라는 죄수에게서 선름이 느낀 감정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선름은 자신의 전율을 미처 이해하지 못한 채 모랑 아줌마의 조카 주주와 만나기 시작한다.
「마법이 필요한 순간」 _송미경
별다른 꿈도 의욕도 없이 수능을 준비하던 은희는 우연히 들어간 마술 모임에서 작은 위안을 찾는다. 일찌감치 학교를 마치고 바리스타로 일하는 조지는 마술처럼 쓸모없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은희가 못마땅하기만 하다. 거리가 유난히 시끄럽던 어느 날, 은희가 ‘모든 시끄러운 것을 사라지게 하는’ 주문을 외우자 세계가 멈춰 버렸다. 오직 은희와, 고양이로 변한 조지만이 움직이는 채로 6년의 시간이 흐르는데……. 어떤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때, 그리고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때. 우리에게 마법이 필요한 순간은 언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