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의 서녀인 현주에서 폐서인으로, 종국에는 관비로까지.
맑고 아름다운 옥을 뜻하는 ‘청근’이라는 귀한 이름을 얻고도
태생부터 고단하기만 한 인생이라.
“이제야…… 아무도 남지 않았네요. ……다행입니다.”
종국에는 저마저 남김없이 모두 놓아 버리고자 할 적에
지극한 연심을 드러내며 그녀를 붙드는 이가 있으니.
“절 가련히 생각하신다면……
단 하루라도 저를 위해 살아 주시면 아니 되는 것입니까?!”
청근에게 한 자락 따스한 볕이 되길 소망하는 자, 현령 홍서익.
그에게 있어 그녀는 늘 감히 꿈꾸지 못할 저 하늘 높이 떠 있는 별이요,
지근에 자리한 그림자보다도 잡히지 않는 꿈이었다.
청근의 서글픈 사연은 끝 간 데 없이 이어질 뿐이니
단 한 번의 마주침이 드리운 그리움은 더욱 깊기만 하여라.
함께하길 소망할수록 애달프고 슬픈 미련은 쌓여만 가고.
언제쯤 맘껏 불러 보려나,
그 단정하고 아름다운 현주 자가의 존함을.
누가 알세라 별칭만 마음속으로 애타게 부르짖을 뿐이니.
‘옥돌아, 옥돌아.’
<본문 중에서>
길어지던 늦장마에 가려져 있던 하늘은 그사이 가을빛을 띠어 높아져 있었다. 여름이 가는 줄도 몰랐는데, 어느새 가을이 오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그리고 세월이 스쳐 가듯 마음에 품은 불순한 것들도 흐릿해져 갔으면 하였다.
얇게 썬 호박을 넓게 펼쳐 두고 다시 한 번 고개를 들었던 청근은, 그 바람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했다.
“선비님을 뵈러 왔습니다.”
언제 오셨는지, 벌써 사립문 안으로 들어서 계신 사또로부터 전해지는 단호함은 그 뒤의 가을 하늘만큼이나 아득하도록 높고 단단해 보였기 때문이다.
“아버님께서는 아직 출타 중이십니다.”
평상에서 내려서서 반쯤 그를 등진 채로 현주께서 하시는 말씀은 지난밤처럼 냉랭하였다. 돌아가라는 말씀이셨다.
“기다리겠습니다.”
서익은 집주인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들어왔던 대로, 성큼 마루로 향했다. 그에 척하니 걸터앉아 부채를 펴 들고 보니, 현주께서는 난감해하시는 빛이 역력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내외의 법도를 지키기보다 그의 얼굴을 보기 싫다는 말씀 같았다. 하지만, 서익도 지난밤 마음먹은 것이 있었다.
“오랜만의 햇살이 반가워 나선 길이니, 이리 있겠습니다.”
연이은 그의 고집에, 현주께서 평상 위에 있던 도마며 칼을 주섬주섬 챙기시는 것이 아무래도 일터를 옮기실 작정인 듯했다. 부채 너머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사람 때문에 자리를 옮기시는 것이라면 불편하여 또 들르겠습니까? 선비께서 함께 고사에 대해 논하자 청하셔서 공무 때문에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낸 것인데요.”
현주께서는 잠시 머뭇거리셨지만, 아무리 마땅찮은 손님이라도 그에 대한 예를 갖추어야 한다 여기셨는지 그의 의도대로 다시 평상에 앉으셨다. 부채에 가려진 그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 내려왔다.
이윽고 도마에 칼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를 써는 소리도 그를 써는 주인의 뒷모습처럼 단정하다 하면 그의 눈에 콩깍지가 단단히 씐 것이겠지?
그럼에도 백성들의 수확을 도와줄 한낮의 햇살도 반가웠고 좁은 어깨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것 또한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