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은 무엇인가, 조선왕조의 사문난적 윤휴 박세당 정약용, 불교학 노장학 양명학 천주학

탁양현 | e퍼플 | 2018년 10월 12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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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이데올로기로서 ‘道具的 理性’과 斯文亂賊으로서 저항적 異端



현대사회에서 異端은 흔히 종교적 개념으로서 인식된다. 그러나 본래 이단은 지극히 정치적인 개념이다. 예컨대, 현재의 대한민국의 관점에서 이단이라면, 응당 主體思想이나 北韓을 의미하며, 그것을 추종하는 세력 또한 포함된다. 다만, 역사 안에서 이단에 대한 분별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역사의 흐름을 좇아, 이단이 이데올로기가 되고, 이데올로기가 이단이 되는 변화가, 자연스레 찾아들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21세기 현재의 상황에서, 주체사상이나 북한이 어떤 이데올로기로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작동하는 원리가 그러하다는 의미다. 예컨대, 현대사회를 주도하고 있는 서양문명이나 정치제도는, 조선왕조 말기 대표적인 이단이었다. 그래서 天主學을 이단으로서 처단한 것은 周知의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기독교나 자유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을 주도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그런 것이 바로 역사의 政治性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왕조 말기에 천주학이라는 이단을 추종하던 사람들의 고통은, 결국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일 수밖에 없었다. 기존에 老莊哲學, 佛敎, 陽明學 등을 선택했던 상황 역시 그러했다.
그러니 현대사회에서 從北으로서 주체사상이나 북한을 추종한다거나, 親中이나 親美에 대한 선택 역시, 자기의 책임이 따를 수밖에 없다. 다만, ‘生存의 利得’을 목적하는 절대 다수의 서민대중으로서는, 굳이 어떤 것을 선택할 까닭은 없다. 설령 그것을 선택하여 추종한들, 역사의 수레바퀴는 쉼없이 굴러갈 것이며, 그에 따라 이데올로기와 이단은 이내 변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갓 外交的 레토릭 쯤으로나 인식되는, 人權, 平和, 幸福, 正義, 共存, 主體, 革命 따위의 이데올로기를 좇아, 반드시 어느 편이든 선택하고 싶다면, 그것은 역사에 대한 고찰이 전제되어야 함을 유념해야 한다. 그러한 역사적 이해가 없는 섣부른 선택은, 너무도 큰 고통을 초래할 수 있는 탓이다. 부득이한 탓에, 필자는 전통적으로 이단으로서 분별되던 학문을 주로 공부하였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그에 따른 갖은 배척을 감내해야만 한다. 이제는 그저 그러려니 한다.

조선왕조에서는 이단에 대한 비판이나 배척이 極烈했으며, 그러한 흐름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 조선왕조에서는, 性理學이나 朱子學 이외의 학문적 이데올로기를 異端으로서 배척하였다. 조선왕조에서 기득권층인 왕실과 양반사대부가 추종하는, 통치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학문 이외의 학문을, 斯文亂賊의 학문으로서 규정하고 탄압한 것이다.
이단에 대한 배척은, 非但 조선왕조만의 현상은 아니다. 저 먼 古代로부터 現代에 이르도록, 현실세계를 작동시키는 가장 유용한 動力 중 하나가 곧 異端論理이다. 이단의 개념이나 대상은, 시대와 상황을 좇아 변화되면 족하다. 그렇게 시의적절한 개념을 정립하고서, 그에 해당하는 대상을 배척하는 것이다. 반대로 먼저 그 대상을 결정하고서, 그에 상응하는 개념을 정립하는 경우도 있다.
이단에 대한 배척은 지극히 정치적인 행위이다. 그런데 이단의 문제가 종교적인 행위로서 드러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는, 종교적 포용마저도 일단의 이단에 대한 배척이 전제됨을 반증한다.

흔히 異端(heresy)은, 어떤 종교집단의 내부에서, 正統敎理에서 크게 벗어나는 주장에 대하여, 正統主義者 側에서 부르는 배타적 호칭이다. 여기서 정통주의자는 時流를 주도하는 이데올로기를 도구로 삼는다.
근대 서양문화에서 횡행하던 ‘도구적 이성’은, 그 대표적 사례라고 할 것이다. 道具的理性(instrumentelle Vernunft)은, Max Horkheimer가 사용한 용어로서, 근대에 이르러 인간의 해방과 자유를 가져오고, 사물의 본질을 인식하던 理性이, 이론적인 계산을 토대로, 목적에 적합한 수단을 제시하여, 인간 및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 도구화되어버린 상태를 가리킨다.
본래 서구문명에서 인간존재의 이성은, 神의 역량에 버금하는 르네상스를 실현케 한 의대한 역량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한갓 권력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人類史에서 이러한 현상은 지극히 자연스런 것이다. 혁명과 같은 거대한 변화를 초래하는 이데올로기는, 애당초 절대적 진실을 주장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그것이 당최 그릇될 리 없다.
그런데 최초의 이데올로기가 권력을 얻어 세월이 흐르다보면, 恣意的으로 변질되기 시작한다. 본래의 순수한 진실은 오염되어버리고, 그저 시대의 권력을 유지하고 존속시키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 역시 인류사에서 非一非再하다. 따라서 그러한 오염된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세력이 등장하게 된다. 그들이 대체로 異端으로서 분별된다.
흔히 世俗의 종교조직에서도, 정통적 信條에 대해, 異說을 내세워 파당을 짓는 자를 가리켜 이단이라고 부르며, 자기 편으로서 한 동아리가 아니라고 보는 것을, 異端視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한 종교집단의 내부에서, 옳고 그름의 대립이 있을 때, 정통파에서 쓰는 말로, 다른 종교나 종파를 가리키는 異敎와는 의미가 다르다. 그러나 宣敎者의 경우, 자기의 宗旨를 옳다고 하고, 다른 종교나 분파를 異端邪宗이라고 하는 수도 있으나, 이것은 예외적인 용법이다.

중국에서는 論語에서 처음으로 보이는 말로, 정확하지 않은 학설이라는 뜻이다. 韓愈가 불교나 도교를 이단으로서 배격한 이후, 新儒敎(朱子學)에서는 ‘聖人의 道’에서 벗어난 학설이나 가르침을 이단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래서 陽明學 左派에 철저했던 李卓吾(李贄)는, 대표적인 이단으로 몰려 옥중에서 자살하기도 했다.
李卓吾(1527~1602)는 明나라의 사상가이다. 이탁오야말로, 중국 역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유교적 권위에 맹종하지 않고, 자아중심의 혁신사상을 제창하였다. 금욕주의와 신분차별을 강요하는 禮敎를 부정하며, 남녀평등을 주장했다. 反儒敎的이라는 이유로 박해를 받아 죽임을 당한다.
이탁오는, 1527년 10월, 명나라 泉州府 晉江縣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상업에 종사 하였는데, 元나라 때 선조들은 해상무역, 통역관 등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원나라가 멸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주원장은 쇄국정책으로 나라의 문호를 닫아버렸다. 명분은 해상에 출몰하는 왜구를 막고, 북으로는 오랑캐의 침입을 막는다는 것이었지만, 중국은 세계적인 조류에서 뒤쳐지는 계기가 되었다.
무역의 길이 막히자, 李贄(李卓吾)의 집안은 가난을 면치못하게 되었다. 이지의 초명은 林載贄였으나, 장성하여 종가의 姓을 따라 李贄라고 개명했다. 별호로는 宏甫, 卓吾子, 李和尙, 禿翁, 百泉居士 등이 있다. 집안의 어려운 살림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지역을 전전하다, 관직에 나아가는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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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전통적으로 獨尊儒術을 闡明하는 儒學에서는, 正學에서 벗어난 사상이나 종교를 이단시하는 경우가 있다. 그 근대적 실례로서, 天主敎가 조선에 들어왔을때, 조정과 노론계 보수유학자들이, 천주교는 정학인 유학에 반하는 邪學이라고 하면서 박해하였다.
조선왕조에서 대표적으로 斯文亂賊이자 異端으로서 규정된 두 사람이 있다. 尹鑴와 朴世堂이다. 재미나게도 이 두 사람은 동시대의 인물이다. 그러니 그 시대와 상황이, 이데올로기가 유독 횡행하던 시절로 인식할 수 있다. 그 시대의 이념대립이 유독 잔혹했던 것이다.
斯文亂賊이란, 朱子學的 儒敎에 대한 교리를 다르게 해석했던 선비를 비난하기 위해 사용한 말이다. 원래 유교 반대자를 비난하는 말이었으나, 조선 중엽 이후 당쟁이 격렬해지면서부터, 그 뜻이 매우 排他的이 되어, 유교의 교리 자체를 반대하지 않더라도, 그 교리의 해석을 朱子의 방법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사문난적으로 몰았는데,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았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는 경전 원본보다, 주자가 내린 해석을 더욱 중시하고, 맹목적으로 따랐던 경직된 조선 중기의 사상을 보여준다. 당시 중국에서 성행하던 陸象山, 王陽明의 心學 같은 사상도, 주희의 사상에 매몰된 조선시대에는 용납되지 않았다.
南人이 몰락하면서, 송시열이 주도하는 老論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더욱 심화되었으며, 주희가 경전을 해석한 것은, 절대적으로 따라야만 하는 권위를 지녔었다. 肅宗 때의 대학자인 尹鑴가, 유교 經典을 주자를 따라서 해석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해석했다 하여, 송시열에 의해 사문난적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윤휴의 학문을 새로운 해석으로 평가했던 윤선거와 윤증 부자는, 少論으로 분파되었다.
송시열은, ‘주자가 모든 학문의 이치를 이미 밝혀놓았는데, 윤휴가 감히 자기 의견을 내세워 억지를 부리니, 진실로 사문난적이다.’라고 평했다. 당시 윤휴는, 북벌론을 주장하며, 개혁적인 성향의 南人(淸南)이었는데, 서인과 정치싸움에서 패배하여, 결국 유배지에서 死藥을 받아 賜死되었다.

尹鑴(1617∼1680)는, 조선 후기의 文臣이자 학자이다. 그는 개혁적인 성향의 淸南 領袖였고 북벌론자였다. 종래의 朱子의 해석방법을 비판하고, 경전을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당대 가장 혁신적인 학자이자 정치가로 평가되었다.
본관은 南原이고, 字는 希仲, 號는 白湖, 夏軒이다. 1617년 경주에서 출생하였고, 부친은 대사헌을 지낸 尹孝全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출중했고, 거의 독학으로 상당한 수준의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다.
1635년, 당시 士林의 실력자로 군림하던 宋時烈을 만나, 주자학을 두고 대담하였고, 송시열로부터, ‘나의 30년 독서가 참으로 가소롭다’는 칭송을 받았다.
그는 독학으로 수학하고, 여러곳을 옮겨가며 살았기에, 특정한 당색에 예속되지 않았다. 현종이 죽고 숙종이 등극하자, 그는 才學으로 천거되어, 1656년(효종7), 宗簿寺 主簿를 거쳐, 持平, 禮賓寺正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右參贊, 吏曹判書, 大司憲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윤휴는, 종래의 朱子의 해석방법을 비판하고, 論語, 孟子, 中庸, 大學, 孝經 등, 경전을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章句와 註를 수정하여, 독자적인 해석을 내렸다. 그의 이런한 학문적 성향은, 당시 송시열을 중심으로 朱子學的 이데올로기를 절대적으로 맹신하던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 때문에, 송시열과는 정치적으로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고, 결국 송시열에 의해 유학을 어지럽히는 斯文亂賊으로 몰렸다. 1659년(현종), 궁중의례를 두고 1차 예송논쟁이 일어났을 때, 西人의 영수 송시열과 대립하였으나, 패하여 윤휴의 남인 세력이 몰락했다.
1674년(현종15) 때, 2차 예송논쟁을 일어났고, 이때는 南人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숙종이 등극하자 예송문제가 다시 불거져, 남인이 승리하며, 윤휴는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정계에 등장한 뒤, 五家作統事目, 紙牌法을 실시, 稅法의 개혁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문란한 군정을 바로잡기 위해, 常平倉, 戶布法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또 備邊司를 폐지하고, 體府를 신설하여, 북벌에 대비하게 하였으나, 결과가 나빠 모두 폐지되었다.
윤휴가 정계에 나서 개혁을 시도했지만, 남인은 기존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濁南과, 새로운 정계 개편을 시도하는 淸南으로 분열되었다. 신진세력이었던 청남 윤휴는, 자신의 뜻을 펼치기에는, 정치적 세력이 취약하였다.
1680년(숙종6), 麟坪大君의 아들 福善君을 왕으로 추대한다는 역모사건으로, 庚申換局이 일어나자, 남인은 하루아침에 몰락했으며, 윤휴는 유배령을 받았다가, 賜死되고 말았다. 그는 사사되기 직전에, ‘유학자가 싫으면 안쓰면 그만이지, 죽일것까지는 없지 않는가?’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1689년(숙종15)에 伸寃되어,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주요저서에는 讀書記가 있는데, 이는 주용, 대학, 예기, 춘추 등에 자신의 독특한 주석을 달아 편찬한 저술이며, 조선유학사에서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되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그 외에 周禮說, 中庸大學後說, 中庸說 등이 있고, 1927년에 발간된 문집 白湖文集이 있다.

윤휴는, 아버지의 임지인 경주부의 관사에서 晩得子(늦게 낳은 자식)로 태어났으며, 6년 위의 庶兄 尹鍈이 있었다. 두 돌 못 미쳐 아버지를 여의고, 서울로 돌아와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李适의 亂 때에는, 여주의 옛집으로, 두 차례의 정묘·병자호란 때에는, 보은 三山의 외가로 가서 피란하였다.
亂 뒤에는, 한 때 선영이 있는 공주 柳川으로 들어가, 학문에 전념하기도 했으나, 주로 여주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장년에는 서울 雙溪洞의 하헌에 거처를 잡고, 여주를 자주 왕래하였다. 윤휴의 집안은 선비 가문으로서, 高祖父인 尹子寬은 趙光祖의 문인으로서, 己卯士禍에 연루되었다. 曾祖父는 성균관 생원으로 벼슬에 나가, 이조참판에 이르고, 할아버지는 李仲虎를 사사하였다.
윤휴의 아버지는, 徐敬德의 문하인 閔純에게 수학하고, 1617년(광해군9) 대사헌으로서 대비의 유폐를 반대하다가, 경주부윤으로 밀려났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아버지의 계열인 小北이 자멸하자, 당색에 구애받지 않는 입장이 되었다.
어린 시절의 학업은 외할아버지의 훈도가 있었을 뿐, 거의 독학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윤휴의 학문은, 1635년(인조13) 19세 때에, 이미 10년 연장자로 당대의 석학이던 宋時烈과 속리산 福泉寺에서 만나, 3일간의 토론 끝에, 송시열이 “30년 간의 나의 독서가 참으로 가소롭다.”고 자탄할 정도로 높은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權諰와 처남인 權儁 그리고 張沖涵, 李澥 등, 남인계 인사들과 교분이 특별했으며, 서인측 인사들과도, 1659년(효종10) 43세 무렵의 기해예송 이전까지는 친교가 잦았다. 유천 시절부터 송시열, 宋浚吉, 李惟泰, 兪啓, 尹文擧, 尹宣擧 등, 서인 계열의 명유들과 교분을 나누었으며, 閔鼎重, 維重 형제는 특히 여주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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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소개

▣ 목차



1. 고려왕조의 불교라는 이단 / 동사강목
2. 이단 ‘일연’에 관한 글 / 동사강목
3. 이단의 불교행사에 관한 글 / 동사강목
4. 이단 서적에 관한 글 / 동사강목
5. 이단에 대한 ‘이색’의 상소 / 동사강목
6. 이단의 정치참여를 비판하는 글 / 동사강목
7. 이단 ‘달가’에 대해서 올리는 글 / 동문선
8. ‘노자’와 ‘부처’라는 이단 / 동문선
9. 이단에 대한 개념 규정 / 국조보감
10. ‘양명학’이라는 이단 / 해행총재
11. ‘공자’ 이외는 모두 이단이다 / 기언
12. 외도와 이단의 폐해 / 기측체의
13. 귀신과 길흉화복이라는 이단 / 기측체의
14. 서양종교라는 이단 / 기측체의
15. 이단 ‘양명’과 ‘백사’에 관하여 / 녹문집
16. 불교와 도교에 관하여 / 담헌서
17. 서양학문에 관하여 / 담헌서
18. 불교철학과 도가철학에 관하여 / 담헌서
19. ‘노자’에 관하여 / 동명집
20. ‘부처’에 관하여 / 박초
21. ‘도가’에 관하여 / 동춘당집
22. 서양문물에 관하여 / 매천집
23. 이단에 대한 비판 / 사계전서
24. ‘장자 제물론’에 대한 비판 / 상촌집
24. ‘노자도덕경’에 대한 비판 / 상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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