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獨尊儒術을 闡明하는 儒學에서는, 正學에서 벗어난 사상이나 종교를 이단시하는 경우가 있다. 그 근대적 실례로서, 天主敎가 조선에 들어왔을때, 조정과 노론계 보수유학자들이, 천주교는 정학인 유학에 반하는 邪學이라고 하면서 박해하였다.
조선왕조에서 대표적으로 斯文亂賊이자 異端으로서 규정된 두 사람이 있다. 尹鑴와 朴世堂이다. 재미나게도 이 두 사람은 동시대의 인물이다. 그러니 그 시대와 상황이, 이데올로기가 유독 횡행하던 시절로 인식할 수 있다. 그 시대의 이념대립이 유독 잔혹했던 것이다.
斯文亂賊이란, 朱子學的 儒敎에 대한 교리를 다르게 해석했던 선비를 비난하기 위해 사용한 말이다. 원래 유교 반대자를 비난하는 말이었으나, 조선 중엽 이후 당쟁이 격렬해지면서부터, 그 뜻이 매우 排他的이 되어, 유교의 교리 자체를 반대하지 않더라도, 그 교리의 해석을 朱子의 방법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사문난적으로 몰았는데,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았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는 경전 원본보다, 주자가 내린 해석을 더욱 중시하고, 맹목적으로 따랐던 경직된 조선 중기의 사상을 보여준다. 당시 중국에서 성행하던 陸象山, 王陽明의 心學 같은 사상도, 주희의 사상에 매몰된 조선시대에는 용납되지 않았다.
南人이 몰락하면서, 송시열이 주도하는 老論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더욱 심화되었으며, 주희가 경전을 해석한 것은, 절대적으로 따라야만 하는 권위를 지녔었다. 肅宗 때의 대학자인 尹鑴가, 유교 經典을 주자를 따라서 해석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해석했다 하여, 송시열에 의해 사문난적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윤휴의 학문을 새로운 해석으로 평가했던 윤선거와 윤증 부자는, 少論으로 분파되었다.
송시열은, ‘주자가 모든 학문의 이치를 이미 밝혀놓았는데, 윤휴가 감히 자기 의견을 내세워 억지를 부리니, 진실로 사문난적이다.’라고 평했다. 당시 윤휴는, 북벌론을 주장하며, 개혁적인 성향의 南人(淸南)이었는데, 서인과 정치싸움에서 패배하여, 결국 유배지에서 死藥을 받아 賜死되었다.
尹鑴(1617∼1680)는, 조선 후기의 文臣이자 학자이다. 그는 개혁적인 성향의 淸南 領袖였고 북벌론자였다. 종래의 朱子의 해석방법을 비판하고, 경전을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당대 가장 혁신적인 학자이자 정치가로 평가되었다.
본관은 南原이고, 字는 希仲, 號는 白湖, 夏軒이다. 1617년 경주에서 출생하였고, 부친은 대사헌을 지낸 尹孝全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출중했고, 거의 독학으로 상당한 수준의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다.
1635년, 당시 士林의 실력자로 군림하던 宋時烈을 만나, 주자학을 두고 대담하였고, 송시열로부터, ‘나의 30년 독서가 참으로 가소롭다’는 칭송을 받았다.
그는 독학으로 수학하고, 여러곳을 옮겨가며 살았기에, 특정한 당색에 예속되지 않았다. 현종이 죽고 숙종이 등극하자, 그는 才學으로 천거되어, 1656년(효종7), 宗簿寺 主簿를 거쳐, 持平, 禮賓寺正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右參贊, 吏曹判書, 大司憲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윤휴는, 종래의 朱子의 해석방법을 비판하고, 論語, 孟子, 中庸, 大學, 孝經 등, 경전을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章句와 註를 수정하여, 독자적인 해석을 내렸다. 그의 이런한 학문적 성향은, 당시 송시열을 중심으로 朱子學的 이데올로기를 절대적으로 맹신하던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 때문에, 송시열과는 정치적으로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고, 결국 송시열에 의해 유학을 어지럽히는 斯文亂賊으로 몰렸다. 1659년(현종), 궁중의례를 두고 1차 예송논쟁이 일어났을 때, 西人의 영수 송시열과 대립하였으나, 패하여 윤휴의 남인 세력이 몰락했다.
1674년(현종15) 때, 2차 예송논쟁을 일어났고, 이때는 南人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숙종이 등극하자 예송문제가 다시 불거져, 남인이 승리하며, 윤휴는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정계에 등장한 뒤, 五家作統事目, 紙牌法을 실시, 稅法의 개혁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문란한 군정을 바로잡기 위해, 常平倉, 戶布法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또 備邊司를 폐지하고, 體府를 신설하여, 북벌에 대비하게 하였으나, 결과가 나빠 모두 폐지되었다.
윤휴가 정계에 나서 개혁을 시도했지만, 남인은 기존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濁南과, 새로운 정계 개편을 시도하는 淸南으로 분열되었다. 신진세력이었던 청남 윤휴는, 자신의 뜻을 펼치기에는, 정치적 세력이 취약하였다.
1680년(숙종6), 麟坪大君의 아들 福善君을 왕으로 추대한다는 역모사건으로, 庚申換局이 일어나자, 남인은 하루아침에 몰락했으며, 윤휴는 유배령을 받았다가, 賜死되고 말았다. 그는 사사되기 직전에, ‘유학자가 싫으면 안쓰면 그만이지, 죽일것까지는 없지 않는가?’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1689년(숙종15)에 伸寃되어,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주요저서에는 讀書記가 있는데, 이는 주용, 대학, 예기, 춘추 등에 자신의 독특한 주석을 달아 편찬한 저술이며, 조선유학사에서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되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그 외에 周禮說, 中庸大學後說, 中庸說 등이 있고, 1927년에 발간된 문집 白湖文集이 있다.
윤휴는, 아버지의 임지인 경주부의 관사에서 晩得子(늦게 낳은 자식)로 태어났으며, 6년 위의 庶兄 尹鍈이 있었다. 두 돌 못 미쳐 아버지를 여의고, 서울로 돌아와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李适의 亂 때에는, 여주의 옛집으로, 두 차례의 정묘·병자호란 때에는, 보은 三山의 외가로 가서 피란하였다.
亂 뒤에는, 한 때 선영이 있는 공주 柳川으로 들어가, 학문에 전념하기도 했으나, 주로 여주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장년에는 서울 雙溪洞의 하헌에 거처를 잡고, 여주를 자주 왕래하였다. 윤휴의 집안은 선비 가문으로서, 高祖父인 尹子寬은 趙光祖의 문인으로서, 己卯士禍에 연루되었다. 曾祖父는 성균관 생원으로 벼슬에 나가, 이조참판에 이르고, 할아버지는 李仲虎를 사사하였다.
윤휴의 아버지는, 徐敬德의 문하인 閔純에게 수학하고, 1617년(광해군9) 대사헌으로서 대비의 유폐를 반대하다가, 경주부윤으로 밀려났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아버지의 계열인 小北이 자멸하자, 당색에 구애받지 않는 입장이 되었다.
어린 시절의 학업은 외할아버지의 훈도가 있었을 뿐, 거의 독학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윤휴의 학문은, 1635년(인조13) 19세 때에, 이미 10년 연장자로 당대의 석학이던 宋時烈과 속리산 福泉寺에서 만나, 3일간의 토론 끝에, 송시열이 “30년 간의 나의 독서가 참으로 가소롭다.”고 자탄할 정도로 높은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權諰와 처남인 權儁 그리고 張沖涵, 李澥 등, 남인계 인사들과 교분이 특별했으며, 서인측 인사들과도, 1659년(효종10) 43세 무렵의 기해예송 이전까지는 친교가 잦았다. 유천 시절부터 송시열, 宋浚吉, 李惟泰, 兪啓, 尹文擧, 尹宣擧 등, 서인 계열의 명유들과 교분을 나누었으며, 閔鼎重, 維重 형제는 특히 여주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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