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주의 정치철학, 율곡 이이 에드먼드 버크

탁양현 | e퍼플 | 2018년 10월 19일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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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從俗主義的 事大主義’와 ‘現實主義的 資本主義’



‘율곡 이이’는 朝鮮을 대표하는 保守主義者다. 그리고 ‘에드먼드 버크’는 영국을 대표하는 보수주의자다. ‘율곡 이이(1537~1584)’와 ‘에드먼드 버크(1729~1797)’ 두 사람 사이에는, 2백 여 년에 가까운 시공간적 間隙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시공간적 간극을 넘어서서, 두 사람은 동일한 보수주의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렇지만 그들의 保守主義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두 가지 보수주의의 차이는, ‘從俗主義的 事大主義’와 ‘現實主義的 資本主義’로서 분별될 수 있다. 이에, 두 가지 보수주의의 차이에 主眼하여 論述하였다. 이로써,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의 보수주의는, 하나의 參照的 指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保守主義는 當代의 時代精神을 의미한다. 말 그대로 그 시대에 보존하여 지킬만한 것을 주장하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정신에 대항하여 등장하는 精神性은, 흔히 進步主義로서 지칭된다. 그래서 진보주의는 시대의 급격한 변화를 요구한다. 따라서 역사 속 시대정신은,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로 大別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保守主義(conservatism)’는, 흔히 政變이나 革命 등의 급격한 변화를 피하고, 현체제를 유지하려는 사상이나 태도를 의미한다. 대체로 進步主義에 대응하는 개념으로서 인식된다. 주로 이데올로기적인 근대 서양문명의 정치사상의 특정 조류를 가리키는데, 사회심리학적 의미에서 인간의 어떤 본래적인 심리적 태도 또는 性向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굳이 근대에만 한정하여 사용하는 개념인 것은 아니다.
다만, 兩者는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명확히 구별되어야 한다. 그래서 ‘H. 세실’은, 인간존재의 특정적 심리태도를 의미하는 보수주의를 ‘자연적 보수주의’라 하여, 그것을 小文字로 썼고, 특정의 사상적 조류를 의미할 때는 ‘정치적 보수주의’라 하며 大文字를 사용하였다.
‘K. 만하임’도 심리적 보수주의를 傳統主義라 하였으며, 사상적인 것을 保守主義라 불렀다. 실제로 ‘정치적 進步主義者’가 사생활 영역에서는 보수적 행동을 취한다거나, ‘정치적 保守主義者’가 사생활 영역에서는 진보적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즉, 어떤 개인의 심리적 태도는 반드시 그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현대 대한민국의 경우, 대체로 진보주의자로 분별된다면, 공산주의나 주체사상에 대한 지향을 지니며, 親中․親北하며 反美․反日하는 것으로 판단한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자기의 자녀들은 미국으로 유학보낸다거나, 강남의 좋은 학군으로 보내기 위해 위장전입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는, 분명한 ‘정치적 진보주의자’이지만, 사생활에서는 지극히 보수적인 행태를 보이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아주 보수적인 집안에서 성장한 엘리트 계층으로서, 어쨌거나 ‘정치적 보수주의자’의 입장을 堅持할 것 같은 상황인데, ‘江南左派’의 경우처럼 진보주의자로서 생활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정치적 태도와 실생활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보수주의는, 미지의 것을 두려워하고, 변화를 싫어하여, ‘지금 이대로 영원히’ 하는 식으로, 자기가 익숙한 것에 집착하는 점에서, 변화를 좋아하고 낡은 것을 버리고 싶어하는 진보주의와 대립된다. 즉, 한쪽은 現象을 고집하는 데 반하여, 다른 한쪽은 현상의 변화를 요구하는 심리적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는, 모든 개인이 많든 적든 나타낼 수 있는 것으로서, 대개 기계적인 반사행동으로 나타나며, 그러한 행동형식은 미리 예측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느 고장에 철도가 신설된다고 할 때, 그 고장의 보수적인 사람들이 나타낼 심리적 반응은 거의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
심리적 태도로서의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는 서로 대립되는 것이지만, 상호 간의 작용에 의하여, 사회생활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사실상 이러한 심리적 태도는, 여러 濃度로 존재하고 있어, 反動主義와 急進主義의 양극 사이에, 保守主義와 進步主義가 스펙트럼의 빛과 같이, 제각각의 뉘앙스를 가지고서 끼여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 ‘反動主義(極右)’와 ‘急進主義(極左)’는, 모두 現象의 과격한 변화를 바라는 심리적 태도이지만, 전자는 ‘뒤쪽을 바라보는 변화’를, 후자는 ‘앞쪽을 바라보는 변화’를 바란다는 차이가 있다.
보수주의가 반동주의에 접근하는 것은, 미지의 것보다는 익숙한 것으로 향하려는 ‘뒤쪽을 바라보는 변화’를 택하는 경향을 가졌기 때문이다. 심리적 보수주의가 현상을 고집하려는 것은 안정을 바라기 때문이며, 그것은 ‘A.B. 울프’가 말하였듯이, 安全第一主義를 본질로 하는 것이다. 예컨대,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는 것과 같다.
본래 인간존재는, 관례에 따라서 행동하기 위하여 안전을 구하려 하고, 그 안전을 그의 생활환경의 현상유지에서 찾아내는 성향이 강하다. 따라서 심리적 태도로서의 보수주의는, 합리적인 태도라기보다는 차라리 감정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현상에 대한 감상적인 애착 또는 현상에 대한 어떤 종류의 가치감정에 동기가 있고, 그 감정은 습관에 의하여 형성되며, 공포심에 의하여 자극되는 것이다. 이 습관과 공포심은, 보수주의의 두 가지 심리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어떤 개인에게 주어진 생활환경이, 그를 만족시키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며, 심리적 태도로서의 小數主義는, 인간의 생활환경에 대한 調整과 適應의 과정에서 생긴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특정적인 교육이나 연령의 영향에 따라서 강화된다. 특히 老齡이 육체의 쇠약에 따라 非融通性이나 幻滅感과 같은 심리적 변화를 초래하여, 보수주의적 태도를 강화한다는 것은, 周知의 사실이다.

근대 유럽的 정치사상의 특정 조류로서의 보수주의는, 앞에서 말한 심리적 태도를 기반으로 하여 생겼다. 즉, 역사의 어떤 단계에서, 각자가 가진 보수주의적인 심리적 태도가 표면에 떠올라, 특정한 사상적 조류를 凝集시키는 중심이 되어, ‘이데올로기로서의 보수주의’가 생긴 것이다.
각자의 보수주의적 심리태도는, 각각 특정된 개인적 또는 계급적 이익과 무관하게 부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生存의 利得’이 동기가 되어 부상한다. 그것은 ‘所有의 안전을 바라는 欲望’에 뿌리를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財産權과 市場이 작동하게 된다.
또 ‘이데올로기로서의 보수주의’가 생긴 다른 이유는, 인간의 또 하나의 심리적 태도인 進步主義를 기반으로 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진보주의’의 성립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즉, 진보주의라는 사상적 조류가 성립되자, 그때까지 잠들어 있던 각자의 심리적 태도가 능동적인 것이 되어, 의식적으로 그런 사상적 조류에 반대하는 운동으로서 보수주의가 성립된 것이다.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는, 각각 ‘秩序의 黨’과 ‘進步의 黨’으로 나뉘어 대립되나, 그 관계는 역사적 제반조건에 따라, 제각기의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이데올로기로서의 보수주의’는, 근대 시민계급의 대두와 사회구조의 변화를 전제로 하여, 1789년 프랑스혁명 발전과정에서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市民階級이 당시의 進步主義인 自由主義 또는 民主主義의 역군으로서 등장한 데 대하여, 貴族階級이 保守主義라는 개념으로 총괄되는 사상적 조류를 낳았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조선왕조의 士大夫 ‘율곡 이이’가 生來的 보수주의자 임을 확인할 수 있다. 분명히 ‘율곡 이이’는 무언가를 保守하려는 세력이었으며, 진보적으로 변화하려는 세력이 아니었음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귀족계급은 그들의 사회적 토대인 토지소유의 영향 하에, 이미 심리적 태도에 있어서 보수주의의 寶庫였다고 할 수 있으나, 그 토대에 동요를 느끼게 되자, 능동적인 공포심에 쫓겨서, 의식적으로 시민계급의 진보주의에 대하여 보수주의를 취하였다.
그러나 보수주의가 ‘1789 이념’에 비하여, 하나의 사상적 조류로서 확고한 지위를 가지게 된 것은, 19세기 초의 王政復古時代이다. 그 무렵, 보수주의라는 말이 비로소 정치적 용어로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즉, 1818년 王黨主義運動의 기관지가 ‘Le Conservateur’라고 명명되면서부터, 보수주의라는 말이 정치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는, 곧 유럽 전체에 퍼졌고, 그것이 ‘1789 이념’에 대항하는 反革命的 운동의 구호가 되었다. 영국에서 ‘토리당’을 ‘보수당’이라 칭하게 된 것은, 다소 세월이 흐른, 1835년의 일이었다.
-하략-

저자소개

-상략-
‘이데올로기로서의 보수주의’를 思想史的으로 보면, 프랑스혁명 이후의 역사적 단계에서 성립된 특정 사상 조류이고, 그 세력은 封建貴族階級이었다는 점을 특색으로 들 수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는, 귀족계급의 사회적 기초가 붕괴됨과 동시에, 보수주의의 역사적 의의도 상실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근대에 있어서, 보수주의의 역사적 기원을 찾는 뜻에서는 타탕한 말이라 할지라도, 그 후의 사정은 달라졌다. 특히 1848년 이후로, 종전의 進步主義였던 自由主義 또는 民主主義가, 社會主義의 대두에 따라 보수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다.
또한 19세기 후반부터는, 시민계급을 세력으로 하는 새로운 보수주의가 재생되었기 때문에, 이데올로기로서의 보수주의를 단순히 귀족계급의 사상적 조류라고 한정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이 지점에서, 조선왕조의 보수주의와 ‘近代 保守主義’는 큰 차이를 갖게 된다.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시민계급적 보수주의는 결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근대 보수주의’라는 사상적 조류를 최초로 정식화한 사람은 ‘에드먼드 버크’이고, 그 후 보수주의자들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버크’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버크’의 저서 ‘프랑스혁명의 고찰’(1790)을 비롯하여, ‘새로운 휘그주의자의 옛 휘그주의자에 대한 어필:Appeal from the New to the Old Whigs’ 등 일련의 저서는,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받은 영국의 급진적 민주주의운동에 대한, ‘능동적인 공포심’에 쫓긴 결과로 쓰여진 것이다.
그것들은 ‘1789 이념’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이었을 뿐만 아니라, 보수주의 최초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이었다. 보수주의는 원래 어떤 특정적인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응답으로서 나온 것이므로, 그 본래의 모습은 방어적인 것이다.
그것은 사회구조의 현상유지를 위하여, 현체제에 대한 도전에 방어의 態勢를 취하는 것이다. 따라서 보수주의가 이데올로기라는 면에서 문제되는 것은, 현제도가 어떠한 제도이건, 그 제도 자체를 정당화하려는 점에 있다.
보수주의가 現制度를 방어하려는 이유는, 조상들이 걸어온 길을 벗어날 경우에는, 안전이 위협을 받기 때문인 것이고, ‘安佺(安保)’ 그 자체는, 특정인이나 계급의 ‘생존의 이득’과 결부된 것이었다. 따라서 보수주의자의 現制度 방어는, 주어진 역사적 상황에 대한, 조정과 적응의 과정에 불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F.J.C. 헌쇼’가 지적한 바와 같이, 보수주의적인 消極性과 그 綱領의 불확실성이 드러난다. 그것은 ‘이데올로기로서의 보수주의’가 일관된 사상체계를 가지지 못하고, 無體系性을 특징으로 한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율곡 이이’나 ‘에드먼드 버크’의 경우는, 확고한 사상체계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 의미나 가치는 아주 인상적이다.
‘K. 만하임’에 의하면, 보수주의의 무체계성은 思考形式의 문제이다. 즉, 근대의 사회구조 변화에 대하여, 진보주의자는 그것을 긍정하여, 현존 제도의 전체적인 개조를 생각하기 때문에, 그 사고형식은 필연적으로 추상적이고 체계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는 변화를 부정하고, 現制度에서 만족을 느끼며, 그것을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의 思惟方式은 구체적일 뿐, 체계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보수주의는 개개의 구체적인 사실만을 문제로 삼아, 기껏해야 그것을 다른 개개의 사실로 바꾸어 놓을 뿐이므로, 그들에게는 ‘유토피아’가 없다.
보수주의자에게는 ‘지금 여기’만이 유일한 現實世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측면은, 지극히 儒家哲學的인 사유방식이다. 심지어 儒敎는 죽음 이후에 대한 思惟마저도 지니지 않는다. 유교를 대표하는 祭祀 역시, 엄밀히 말한다면,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산 자’를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 또한, ‘율곡 이이’가 보수주의자일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여하튼, 그러한 의미에서 ‘이데올로기로서의 보수주의’는, ‘S.P. 헌팅턴’이 말한 바와 같이, ‘제도지향적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보수주의의 내용을 간단히 定式化할 수는 없지만, 형식적으로 보면 세 가지 원리, 즉 현재에 대한 변화를 부정하는 ‘保存의 원리’, 과거의 것을 현대에 이용하려는 ‘逆行의 원리’, 현재의 것에서 유기적으로 생기는 ‘進步의 원리’를 결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시민계급 세력에 의한 보수주의가 재생한 것은, 사회구조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보수주의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동시에, 보수주의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문제를 던지고 있다. 보수주의는 종래에 주로 역사적 기원에 착안하여, 귀족계급의 이데올로기로서, 시민계급의 ‘進步主義(自由主義)’와 대립되는 것으로 생각하여 왔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는, 그러한 대립이 반드시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헌쇼’가 지적한 바와 같이, 현대에는 ‘시민계급(中産層)의 보수주의’와 ‘노동자계급의 진보주의(社會主義)’가 대립되고 있다. 최근 미국에서 논의되고 있는 보수주의 문제도, 그러한 견지에 입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左右對立도,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이와 같은 대립 樣相의 변화는, 과거에 시민계급세력이던 自由主義가, 새로운 역사적 상황 하에서, 保守主義로 이행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 ‘헌팅턴’은 보수주의를 ‘位置 이데올로기’라 하여, 그것이 어떤 ‘사회집단(계급)의 이익’을 반영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어떤 사회집단이 다른 집단에 대하여 가진, 특수한 관계의 존재를 반영하는 이데올로기라 생각하고 있다.
향후 ‘이데올로기로서의 보수주의’의 기능은, 그 성격이나 사고형식과 더불어, 좀더 규명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율곡 이이’와 ‘에드먼드 버크’를 保守主義의 場에 동일하게 배치함은, 그 의미가 크다고 할 것이다.
적잖은 현대의 한국인들은, 조선왕조를 지워버려야 할 汚辱의 역사쯤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역사는, 그것이 好不好를 좇아 取捨選擇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좋든 싫든, 그러한 역사를 통해, ‘現在의 나’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 모른 척하며 忘却해버린다고 해서, 조선왕조나 대한제국의 역사가 사라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오히려, ‘율곡 이이’에 대하여 현대적인 보수주의 관점에서 재해석 함은, 그 의미가 더욱 각별하다고 할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보수주의’는, 1945년 광복 이래로, 정치적 自由民主主義와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치러진 韓國戰爭과 국제적인 冷戰對立으로 인해 강화된 反共主義 및 韓美同盟, 제5공화국과 1997년 외환위기로 확산된 新自由主義 등, 4가지를 주요한 구성요소로 삼고 있다.
더불어 美國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의 절대적 영향력으로 인해, 親美的인 성격과 反共主義가 강하다. 이로 인해, 한국의 보수주의는 한국 특색의 보수주의라기보다는, 美國的 保守主義의 하나의 分派라고 부를 수 있는 측면이 있다.
그런데 조선왕조의 중국에 대한 事大主義가 비판의 대상이듯이,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 역시 비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현대의 대한민국이 과거에 비해 나아진 측면은, 패권국과 君臣關係로서 작동하던 ‘조선왕조의 事大主義’가, 패권국과 同盟關係로서 작동하는 ‘대한민국의 同盟主義’로 변화되었음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親美主義者가 되어서 무작정 미국을 옹호한다면, 그것은 ‘조선왕조의 事大主義者’와 별다를 게 없다. 親中主義者의 경우도 매한가지다. 현대의 국제정치의 場에서, 분명한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國家의 존속이며, 이를 위해 ‘생존의 이득(國益)’을 도모해야 함이다.
21세기의 국제사회는, 과거에 비해 武力的 戰爭보다는 經濟力을 활용하여 분쟁을 해소하는 경우가 許多하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죽거나 다치지 않으므로, 아주 人權主義的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어찌보면 훨씬 잔혹한 방편이, 경제적(물질적)으로 서서히 말라죽이는 經濟戰爭(貿易戰爭)이다. 그러니 이러한 泥田鬪狗의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自國의 ‘생존의 이득(國益)’을 반드시 지켜내야 함은, 실로 不得已다.
영국은 보수주의의 기원이기 때문에, 많은 보수주의 정치가를 배출했다. ‘에드먼드 버크’ 이후, 대표적으로 ‘벤저민 디즈레일리’, ‘윈스턴 처칠’, ‘마거릿 대처’ 등이 꼽힌다.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제국주의와 결합된 보수주의를, ‘윈스턴 처칠’은 소련에 대항한 반공주의와 결합한 보수주의를 추구했다.
그리고 ‘마거릿 대처’는, 정치적으로는 反共主義를 추구했으며, 경제적으로는 親市場主義的 경제정책을 도입하여, 영국의 福祉病을 해결하고자 했다. 장기간의 노동자 파업을 진압하고, 주요 국영 기업을 민영화였으며, 사회 복지 혜택을 감축했다. 외교적으로는 영국의 ‘유럽 공동체(EC)’ 가입을 거부하는 입장이었다.

조선왕조의 理想主義는 道德主義로써 통치했다. 그러한 바탕에는 중국이라는 覇權國에 대한 事大主義가 작동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패권국을 능가할 만한 역량을 지니지 못했다면, 그 나름의 방편으로써 ‘생존의 이득’을 도모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국가공동체의 멸망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現實主義는 資本主義로써 통치한다. 그러한 바탕에는 미국이라는 패권국에 대한 事大主義가 작동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사대주의는 조선왕조의 것과는 다르다. 조선왕조는 유교철학적 군신관계에 의한 사대주의였다. 그러나 현대의 사대주의는 동맹관계에 의한 것이다.
다만, 사대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패권국은, 자기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언제라도 폭력을 사용할 수 있는 탓이다. 자본주의는 ‘생존의 이득’을 목적하는 경제체제이다. 그러한 시대에 조선왕조의 ‘이상주의적 도덕주의’를 대비시킴은, 좋은 대조가 된다.
결국 조선왕조가 멸망에 이르는 역사적 과정을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도덕주의가 주도하는 사회는 오히려 폭력적이며, 전혀 이상적이지 못하다. 그에 대한 역사적 사례를, ‘율곡 이이’와 ‘에드먼드 버크’를 통해 검증할 수 있다.

목차소개

▣ 목차




序說: ‘從俗主義的 事大主義’와 ‘現實主義的 資本主義’
제1장. ‘栗谷 李珥’의 保守主義
1. 性理學者 ‘율곡 이이’
2. ‘10만 양병설’은 後代의 歷史造作이다
3. 엘리트 士大夫 가문에서 태어나다
4. 親母 申師任堂과 庶母 權氏
5. 타고난 神童이며 빼어난 孝子였던 ‘율곡 이이’
6. 忠孝라는 통치 이데올로기
7. ‘牛溪 成渾’을 만나다
8. ‘우계 성혼’에 대해 냉혹한 평가를 하다
9. ‘退溪 李滉’을 만나다
10. 理와 氣에 대해 논변하다
11. 四端七情 論爭
12. ‘支配者의 道德’과 ‘被支配者의 苦痛’
13.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15. ‘니부어’의 ‘기독교 현실주의’
16. ‘뱀의 지혜’와 ‘비둘기의 순진성’
17. ‘4가지 마음’과 ‘7가지 감정’
18. 理(이념)이 먼저냐, 氣(물질)이 먼저냐
19. 朱子語類 이후
20. 李滉과 奇大升
21. 李珥와 成渾의 四七論爭
22. 人心과 道心
23. 嶺南學派와 湖南學派
24. 尹元衡과 乙巳士禍
25. ‘良才驛 壁書 事件’과 丁未士禍
26. 尹元衡이 鄭蘭貞을 첩으로 삼다
27. 沈通源을 탄핵하다
28. 西人의 領袖로 추대되다
29. 虛禮虛飾을 비판하다
30. ‘花潭 徐敬德’을 비판하다
31. 下級武士 집안에서 태어난 ‘서경덕’
32. 獨學과 思索으로써 학문을 이루다
33. 己卯士禍 세력의 몰락을 예견하다
34. 仁宗이 短命할 것을 예견하다
35. 고독한 은둔자 ‘서경덕’
36. 스승 없이 학문을 이룬 ‘서경덕’
37. ‘진보주의자 徐敬德’과 ‘보수주의자 李珥’
38. ‘花潭의 氣’와 ‘老子의 道’
39. 徐敬德과 황진이
40. 李滉과 曺植을 비판하다
41. 조선의 선비 ‘南冥 曺植’
42. 己卯士禍의 피해를 당하다
43. 曺植의 스승은 아버지 曺彦亨이었다
44. 政治官僚의 삶을 체념하다
45. 曺植의 名聲이 알려지다
46. 處士로서 삶을 마감하다
47. 文定王后를 寡婦라고 칭하다
48. ‘진보주의자 彫飾’과 ‘보수주의자 李滉’
49. 曺植의 수제자 鄭仁弘이 仁祖反正 때 처형당하다
50. 曺植의 제자들 중에 義兵將이 많다
51. 晋州民亂의 進步主義的 토대가 되다
52. 냉혹한 人物評을 宣祖에게 올리다
53.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하다
54. 黨爭을 조정하려고 했으나 실패하다
55. 兩是兩非論과 保合調劑論을 제시하다
56. 變法更張論을 주장하다
57. 책과 부싯돌 몇 개를 남기고 떠나다

제2장. ‘Edmund Burke’의 conservatism
1.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다
2. 영국 政治界에 입문하다
3. ‘프랑스혁명에 관한 고찰’을 저술하다
4. ‘保守主義의 아버지’로서 알려지다
5. ‘萬人의 支配는 萬人의 獨裁’다
6. 정치가를 ‘행동의 場에서의 철학자’라고 인식하다
7. 經驗的 美學에 바탕하는 現實主義 政治哲學
8. 고독한 天才
9. ‘숭고함과 아름다움의 기원에 관한 철학적 탐구’
10. 美學과 政治學의 連接을 실현하다
11. ‘權力의 아름다움’과 ‘生存의 利得’
12. ‘保守主義의 自由民主主義’와 ‘進步主義의 人民民主主義’
13. 政治的 保守主義를 완성하다
14. 合法性이 전제되어야 한다
15. 攝理가 전제되어야 한다
16. ‘토마스 페인’의 비판
17.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18. 無神論者로서 비난의 대상이 된 ‘토마스 페인’
19. 理神論으로써 異端叛逆者가 되어버리다
20. 異端이란 무엇인가
21. ‘미국 例外主義’를 闡明하다
22. ‘에드먼드 버크’는 保守主義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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