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夷文明(遼河文明)과 黃帝國 高麗
韓民族은, 만주대륙을 비롯한 중국대륙 東部地域에 대해, 항상 아련한 노스탤지어를 지니고 있다. 이는 다분히 生來的인 것이다. 굳이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저절로 갖게 되는 鄕愁다. 본래 그곳이 우리 한민족의 영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親中主義나 事大主義인 것으로 自己誤解할 수 있다. 그러나 그곳이 본래 우리 민족의 영토이므로, 향수를 갖는 것과는 명료히 분별되어야 한다. 비록 朝鮮王朝 이후 중국에게 빼앗겨버렸지만, 언제라도 그곳은 收復해야 할 우리의 영토이다.
그 故土는, 漢族이 차지하기 훨씬 이전부터, 한민족의 始祖인 東夷族(東夷族 聯盟)의 영토였다. 중국인들은 흔히 黃河文明(西紀前 2,500)이라는 신석기문명이 漢族의 시조이므로, 중국대륙이 중국인들의 영토라는 식으로 주장한다.
그런데 동이족은 遼河文明(西紀前 5,500) 시절부터, 그곳을 영토로 삼았다. 그래서 그 故土에 대한 鄕愁가 遺傳的으로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이후 이어지는 古朝鮮, 夫餘, 高句麗, 渤海 등에 의해, 여전히 그곳은 한민족의 영토로서 지배되었다.
그러다가 조선왕조 이후, 불과 6백여 년 정도, 수천 동안 지배하던 그곳을 중국에게 빼앗긴 상태이다. 그러니 현재 대한민국헌법 제3조에서,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것은, 국제정치의 틈바구니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공동체를 국제법적 질서로써 존속시키기 위한 不得已일 따름임을 인식해야 한다.
만약 그런 선언을 하지 않는다면, 다른 나라들이 한반도를 자기의 영토라고 선언한다고 해도, 국제법적으로 대항키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역사를 살핀다면, 응당 ‘대한민국의 영토는 만주대륙과 한반도로 한다’는 것이 마땅하다.
나아가 東夷族과 百濟의 영토였던 중국대륙 동부지역과, 新羅와 伽耶의 영토였던 일본열도 서부지역까지도, 우리 영토임을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엄혹한 현실 속에서, 그러한 속내를 결코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이를 빌미로, 植民史觀을 지닌 親日主義者들이나, 事大主義史觀을 지닌 親中主義者들은, 어떻게든 韓民族의 疆域을 韓半島로 한정하려고 劃策한다. 더욱이 한민족이 현재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영토는, 한반도 내에서도 남한지역에 한정되며, 북한지역은 傀儡政府에 의해 불법적으로 强占된 상태이다.
북한지역의 人民들이 韓民族임은 자명하지만, 남한지역에서 自由民主主義와 資本主義를 추종하는 대한민국으로서는, 主體思想과 共産主義를 추종하는 북한의 勞動黨政府를 결코 인정할 수 없다. 이러한 일련의 판단에는, 우선 역사적 지식이 토대가 되어야 한다.
黃河文明은, 중국의 황허강 중하류 지역에 성립한 옛 문명의 총칭이다. 문명의 성립이란, 일반적으로 國家·靑銅器·文字의 성립 등이 요소가 되는데, 이런 의미에서 황하문명의 성립기는, 수메르문명(메소포타미아문명, 西紀前 3,500)나 인더스문명(西紀前 3,000)보다 늦은, 西紀前 2,500년 경이라 말하고 있다.
예전에는 세계 4대 문명으로 분류되었지만, 현재는 長江文明(西紀前 3,500) 등, 다양한 문명이 중국 각 지역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4대 문명에 황하문명만을 채택하지는 않으며, ‘黃河 및 長江文明’이라 한다.
黃河文明은, 黃河流域에서 나타난 중국의 고대 문명을 통틀어 나타내는 말로서, 揚子江文明과 함께 중국의 고대 문명을 대표한다. 新石器 시대에 나타난 仰韶文化와 竜山文化 등을 거쳐, 商과 周의 青銅器 문화로 발전하였다.
1921년, 중국의 河南省 澠池縣 仰韶에서, 신석기 시대의 대규모 취락지가 발굴된 뒤, 黄河 유역에서는 新石器와 靑銅器 시대와 관련된 고고학적 발견이 잇달아 이루어졌다. 그 뒤 학계에서는, 黄河文明을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로 꼽으며, 중국 문명이 黄河流域에서 시작되어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그 뒤, 중국의 각 지역에서, 다양한 유형의 신석기 문화가 발견되면서, 이러한 학설은 비판을 받았다. 특히 1973년, 浙江省 寧紹 평원의 河姆渡에서는, 벼농사와 高床式 건축물 등의 遺蹟이 발굴되어, 揚子江 유역에서 仰韶 문화와 비슷한 시기에, 黃河文明과는 다른 계통의 수준 높은 신석기 문화가 발달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東北 지방의 遼河流域에서도, 黃河文明과 다른 계통의 신석기 유적들이 발굴되었다. 그것이 바로 遼河文明이다. 이 요하문명은 분명하게 韓民族의 始祖에 의한 東夷文明이다. 이에 대해서, 중국은 東北工程으로써 역사를 조작하고 있다.
대체로 先史時代 中國人의 생활구역은, 黃河流域 지대의 산기슭에 있는, 물이 솟아나는 지대에 많으며, 수해를 피하기 위하여, 段丘 위에 거주했다. 나일 강이나 인더스 강 유역에서는, 하천의 정기적인 범람으로 인한, 비옥한 흙의 퇴적을 이용한 관개 농업이 성립했으나, 이 점은 중국 농업의 성립 조건과는 다르다.
黃土는 잿빛이 나는 황색의 石英이나 長石 등의 微粒의 퇴적으로서, 빗물 속의 석회질을 모아, 땅이 비옥하고 부드러워서, 농경 생활을 하기에는 아주 적합했다. 이 황토 지대에서, 농업 생산력의 발전을 기초로 문명은 성립된 것이다.
長江流域에 古文明이 성립하지 않은 이유는, 高溫多濕하기 때문에 초목이 무성하여, 철기시대 이전에는 개간이 곤란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최근 장강 中·下 유역의 문화 유적의 발굴 조사가 진척 중이어서, 그 결과가 주목된다. 황하문명의 하부 문화는 다음과 같다.
‘페이리강 문화(裴李崗文化, 西紀前 7,000?~西紀前 5,000?)’의 대표 유적은 허난성 화 현의 페이리강 유역에 있다. 이들은 원형·방형의 움집에 살았으며, 조 등의 밭농사 농업을 하고 있었다. 홍갈색의 陶器나 磨製石器 등을 특색으로 한다.
‘라오관타이 문화(老官台文化, 西紀前 6,000?~西紀前 5,000?)’의 대표 유적은 샨시성 화 현(웨이난 시)의 老官台이다. 이들은 원형의 움집 주거에 살며, 조 등의 밭농사 농업을 하고 있었다. 암적색의 협사도기를 특징으로 한다.
‘베이신 문화(北辛文化, 西紀前 6,000?~西紀前 5,000?)’의 대표 유적은, 산둥성 텅저우 시의 베이신이다. 황갈색의 도기를 특징으로 한다.
‘츠산 문화(磁山文化, 西紀前 6,000년~西紀前 5,000?)’의 대표 유적은, 허베이성 우안 시의 츠산이다. 이들은 원형, 타원형의 움집 주거에 살며, 조 등의 밭농사 농업을 하고 있었다. 홍갈색의 협사도기를 특징으로 한다.
‘양사오 문화(仰韶文化, 西紀前 4,800?~西紀前 2,500?)’는, 1921년 허난성 몐츠 현 양사오촌에서 발견된, 붉은 바탕에 채색 한 토기(칠무늬토기)를 특색으로 하는 문화이다.
前期(西紀前 4,800)는, 紅陶가 주류로 대표 유적은 산시성(섬서성) 시안 시 반파, 양샤오 반파 유형 문화라고 불린다. 모계 제도로 농촌의 계층화가 보인다. 기원전 4000년경에, 녹로의 사용을 볼 수 있는 양사오 묘저구유형 문화가 나타났다.
後期(西紀前 3,500)에는, 반파 후기 유형, 시왕촌 유형, 대사공 유형, 진왕색 유형의 4종의 문화로 크게 분류되어, 빈부의 차이가 보이는 사회 분업, 계층화가 진행되었다.
‘허우강 문화(後岡文化, 西紀前 5,000?~西紀前 4,000?)’의 대표 유적은, 허난성 안양 시 허우강이다. 베이신 문화를 계승 발전했다.
‘다원커우 문화(大漢口文化, 西紀前 4,300?~西紀前 2,400?)’는, 1959년 산둥성 닝양현 보투오 촌에서, 유적이 처음 발견되었다. 후에 산둥성 타이안시 타원커우에서도 유적이 발견되고, 이쪽이 대표 유적이 되었다.
전기는 홍도가 주류를 이루었지만, 후기에는 흑도, 회도가 주류로 나타났다. 후기의 란곡흑도의 고병배 무늬도기는, 정교하고 아름다워 산둥 룽산문화에 계승된다.
‘룽산 문화(龍山文化, 西紀前 2,500?~西紀前 2,000?)’는, 중국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에 의해서, 1930년 산둥성 장추시 룽산진에서 발견된 흑도(흑색 토기)나 회도를 특색으로 하는 문화이다. 흑도는 얇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흑색의 토기로, 제작에는 소성 온도는 약 1,000도 이상 되는 녹로가 사용되었다.
후기에는 청동기의 주조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중원 룽산 문화(섬서 룽산문화, 진난 요서 룽산문화, 허난 룽산문화)와 산둥 룽산문화로 나뉜다. 중원의 룽산문화는, 양사오 후기 문화를 계승해 灰陶가 주류를 이루며, 뼈가 갈라진 특징을 가진다. 산둥의 룽산 문화를 계승하여, 黑陶가 주류를 이룬다.
‘얼리터우 문화(二里頭文化, 西紀前 2,000?~西紀前 1,600?)’는, 1959년 허난성 옌스시 얼리터우에서 발견되었다. 유적은 약 2km 사방에서 뻗어있고, 중심부에는 두 개의 궁전 자취가 있다. 이 유적의 사람들은, 진난 요서 룽산문화, 허난 룽산문화를 계승하였으며, 청동 주조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上記한 문화들이, 대체로 黃河流域과 長江流域을 중심으로 형성된, 中國文明의 始原이다. 그런데 황하문명과는 전혀 다른 고대문명이 등장한다. 그것이 바로 遼河文明이다. 그것은 韓民族의 始祖인 東夷族 聯盟에 의한 東夷文明이다.
‘훙산 문화(紅山文化, 西紀前 9,000)’는 중국 만리장성 북동부에 존재했던 신석기 시대의 문화이다.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네이멍구 자치구 츠펑시와 랴오닝 성 조양시 일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큰 특징인 玉器는, 한반도 강원도 고성군 패총에서 출토된 옥 귀걸이(7천년 전)와 전남 여수 안도리(6천년 전) 등지에서 발견된 옥 장신구, 귀걸이와 유사점이 있어, 古朝鮮 등 한반도 초기 역사와도 관련이 있다.
홍산문화는 1908년 일본의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는데, 연대는 西紀前 9,000년 경으로, 지금까지 赤峰, 凌源, 建平, 朝陽 등 500여 곳의 유적을 찾아내어, 발견 지역은 옌산 산맥의 北 랴오허 지류의 西 랴오허 상류 부근에 널리 퍼져 있다.
중국은 1980년대부터 본격적인 발굴을 하면서, 興隆窪文化, 紅山文化, 趙寶溝文化, 新樂遺跡 등의, 요하 일대의 신석기문화를, 문화(culture)의 단계를 넘어선 새로운 문명(civilization)으로 간주하여, 遼河文明으로 명명하여 부르고 있다.
현재 중국은, 요하문명을 東北工程으로써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고 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영토를 빼앗기고서, 역사까지 빼앗기는 상황에 이르고 만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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