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 사회가 가지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하게 산 덕분에 대기업 계열사에서 일하는 시언. 신입사원인 시언은 곽재희 과장을 보조해서 회사 쇼핑몰에 최고급 브랜드 더 블루 라벨을 입점시키기 위한 프로젝트를 거의 성사시킨다. 그러나 폭압적이고 이기적인 팀장과 곽 과장 사이에 충돌이 벌어지고 능력 있고 거칠 것 없는 곽 과장은 팀장에게 한 방을 날리고 퇴사를 한다. 그녀의 퇴사 이후, 더 블루 라벨 측에서는 시언의 회사와의 계약을 파기하겠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하고, 그것을 수습하는 임무가 시언에게 맡겨진다. 신입사원으로서 도저히 불가능한 임무와 팀장의 폭언, 압박 속에서 절망한 시언은 무심코 마주친 술집에 들어가고, 생전 처음보는 칵테일들을 접한다. 그리고 그의 옆에 앉은 남자 차신우와 같이 술을 마시고, 몽롱한 정신으로 그와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술에 취해서 보낸 원나잇이 회사일을 망치고, 가족과 사회에 짓눌러 항상 주눅이 든 젊은이가 조금씩 성장하면서 자신을 찾아가는 짧은 이야기. '흔들릴지언정 가라앉지는 않는다.'
시간과 비용은 줄이고, 재미는 높여서 스낵처럼 즐기는 BL - 한뼘 BL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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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팀장이 고함을 질렀다.
"빨리, 빨리! 너네 밥 굶을래? 짤리기 싫으면 일하라고!"
아부로 팀장직을 얻었고, 갑질로 권력을 얻었지만. 알코올 중독과 담배로 얻은 군살은 박 팀장도 어찌할 수 없었다. 박 팀장은 늘씬하고 곱상한 정 대리를 특히 미워했다.
박 팀장이 정 대리를 퉁퉁한 손가락으로 삿대질하며 침을 튀겼다.
"야, 정종선이! 너 빨랑빨랑 안 하냐?"
"노력하겠습니다! 팀장님!"
윗사람 앞에서는 비굴한 척, 아랫사람 앞에서는 제가 왕이라도 되는 듯이. 그런 주제에 '가족 같은 회사'를 앞으로 내세운다.
- 그래. 가 '족' 같은 회사겠지.
"어휴... 쯧. 야, 김시언 얘는 언제까지 어리바리냐, 쯧. 너네 엄마가 회사에서 챙겨줄 줄 알았냐? 너는 또 뭐하고 있는 거야, 엉? 쓸데없는 짓꺼리를."
"팀장님,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팀장님."
방금 전 박 팀장이 맡긴 업무였다. 김시언은 눈물을 꾹 삼켰다.
"다들 제대로 좀 해! 블랙 프라이데이가 금방이라고! 우리 회사 매출에 큰 덩어리를 차지하는 대목이다, 그거야."
"네! 팀장님!"
예신그룹의 유통사가 런칭한 신생 쇼핑몰 '아인'. 젊은 세대를 타깃한 브랜드다. 아인은 신세대의 트렌드를 꿰뚫은 기획으로 어마어마한 성장률을 보이고 있었다.
"거, 내가 다 아인을 키운 거야. 이사장님이랑 어? 예신유통 시절부터, 내가 다 엉? 너희들은 다 나한테 감사해야 돼. 요즘 젊은 것들은 노력할 줄을 몰라요. 다 편한 대로만 하려고 하지. 우리 세대에는 어땠는지 알아, 엉?"
곽 과장이 김시언과 눈을 마주쳤다. 팀의 홍일점이다. 트렌디함을 지향하는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게 굉장히 보수적인 사내 문화를 가진 아인에서, 여성 직원이라는 것은 엄청난 차별과 고생을 의미했다.
곽 과장이 빙그르르, 시언을 보고 눈을 돌렸다.
쿡. 시언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곽 과장은 대단한 능력자.
가부장적인 간부들조차 뭐라고 하지 못할 정도였다.
곽 과장은 팀의 막내 시언을 굉장히 귀여워했다. 줄곧 업무도 가르쳐주고, 밥도 사주고는 했다. 학자금 대출에 허덕이는 시언의 마음을 꿰뚫은 것처럼.
뭐랄까, 외동으로 자란 시언이 언제나 바랐던 누나 같은 사람.
"야, 곽재희, 너 내 말 귓등으로도 안 듣지?"
"아닙니다, 팀장님. 업무 생각하느라 잠시 놓쳤습니다, 팀장님. 죄송합니다."
"곽재희, 너도 거, 그 김치녀인가 그거 아니야?"
"...예?"
팀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거, 다 자란 처녀가 어, 정숙치 못하게. 치마가 저게 뭐야? 가방은 또 저거, 그 뭐시라. 남자 친구한테 뜯어낸 거 아니야? 비싸 보이는데? 저건 또 어디 거야?"
곽 과장이 입술을 깨물었다.
"'더 블루 라벨'의 '시안 카레리나' 라인의 2018 한정 핸드백입니다, 팀장님."
"거, '더 블루 라벨'?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비싼 거 맞지? 와, 나 그렇게 생각 안 했는데. 곽 과장 김치녀였네? 김치녀. 그런데 어디서 말대꾸야?
"팀장님께서 아인의 영입 1순위라고 하셨던 패션 브랜드입니다, 팀장님. 한국 브랜드 파워 1위, 디자이너들이 협업하고 싶은 브랜드 1순위. 성장률 3년 연속 400%."
"야, 곽재희. 너 나한테 반항하냐? 내가 그런 거 너한테 말하라 한 적 있어?"
곽 과장이 박 팀장의 얼굴에 핸드백을 냅다 던졌다.
"*발, 저 미친년 뭐야? 잡아! 안 잡아? 너네 잘리고 싶어?"
다들 머뭇거리면서도 곽 과장을 제지하지는 못했다. 박 팀장의 공포보다는 속이 시원하다는 마음이 더 센 것.
'사이다!'
김시언이 속으로 경악했다.
"팀장님, 저 남자 친구 없어요. 팀장님이 365일 주말에도 공휴일에도 수당도 없이 불러내셨잖아요. '더 블루 라벨', 팀장님이 계약 따내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던 그 브랜듭니다. 5분마다 아직도 그걸 못 땄냐고, 저희 부모님 건강 거론하시던 분이 그걸 기억 못하세요?"
곽 과장이 검은 하이힐으로 박 팀장의 의자를 걷어찼다. 퍽, 안 그래도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박 팀장의 육중한 몸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아악!"
"제 한 달치 월급값이에요. 저 핸드백. 그걸 들고 나가서 더 블루 라벨의 미팅에서 예스를 받아냈습니다. 제 사비였어요."
곽 과장이 쓰게 웃었다.
"제가 무슨 노빈지, 돈 받아내겠다고 이렇게 노예처럼 사는 나도 환멸 나고. 팀장님 면상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요, 저는 김치녀에 능력도 없는 년이니까 그만두겠습니다. 사직서 받아주세요."
그 말과 함께.
정장 재킷 안의 꾸깃꾸깃한 종이봉투가 박 팀장의 얼굴로 날아갔다.
"야, 곽재희! 너 죽고 싶냐! 미쳤어? 어디서 저년이 어른한테!"
박 팀장이 각종 욕설을 쏟아냈지만.
곽 과장은 굽이 부러진 하이힐을 신고 우아하게 걸어 나갔다.
잠적이 내려앉은 사무실에는 또각거리는 굽 소리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