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혹하고 우아한 그녀의 뜨겁고도 차가운 이야기,
일상 곳곳에 내재한 폭력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은 한 여성의 이야기
언제나 당당하고 매력적인 여인 미셸의 집에 어느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이 침입한다. 경찰에 신고하라는 주변의 조언을 무시한 채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간 미셸. 하지만 계속되는 괴한의 접근에 위기감을 느끼고, 곧 자신만의 방식으로 범인을 추적해 나간다. 그리고 다시 괴한의 침입이 있던 날, 감추고 있던 그녀의 과거와 함께 복수를 향한 욕망도 깨어난다. 「엘르」는 강간범과 사랑에 빠지는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강간은 소설을 운행하는 시동장치일 뿐. 「엘르」는 일상 곳곳에 내재한 폭력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는 한 여성에 관한 이야기다. 「베티 블루」(1985년)를 비롯해 23권의 장편소설을 출간한 필립 지앙의 19번째(2012년) 장편소설이자, 폴 버호벤 감독?이자벨 위페르 주연의 영화 <엘르>의 원작.
■ 책 소개
「엘르」는 1982년 첫 장편 「지옥처럼 푸른」을 출간한 이후, 36년 동안 「베티 블루」(1985년)를 비롯하여 23권의 장편소설을 출간한 필립 지앙의 19번째(2012년) 장편소설이다. 소설은 “뺨이 부어오른 것 같다”로 시작된다. 필립 지앙에 따르면, 이야기나 화자가 결정되기 전에 이 문장을 쓴 뒤 숙고 끝에 화자를 여자, 즉 영화제작사 대표 미셸로 결정했다고 한다. 소설의 첫머리에 미셸은 뺨이 부어올랐고, 쓰러져 있으며, 옆에는 꽃병이 깨져 있다. 그녀는 집에 침입한 괴한에게 강간을 당했다. 복면을 쓰고 집으로 침입한 괴한은 미셸을 광폭하게 범하고 현장을 떠난다. 그런데 이상하다. 미셸은 경찰에 전화를 걸지도, 가까운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한참 만에 일어나 어수선해진 집안을 정리하고 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스시를 주문한다. 변변한 일자리가 없는 아들 벵상이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만삭의 약혼녀와 집으로 식사하러 올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녀는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행동한다. 미셸을 범한 자는 누구인가? 미셸은 왜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가? ‘그 여자’(Elle)라는 제목처럼, 독자들은 미셸이라는 범상치 않은 여인의 욕망을 들여다보게 된다.
강렬하면서도 충격적인 시작과 달리 미셸의 일상은 적어도 겉으로는 평온하다. 하지만 그녀를 둘러싼 관계와 상황은 녹록하지 않다. 재능이 결여된 채 자부심만 드높은 시나리오 작가인 전 남편 리샤르는 불가능한 시나리오를 시도 때도 없이 들이민다. 일흔다섯 살의 모친 이렌느는 미셸 또래의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 한다. 미셸과 동업자이자 절친인 안나의 남편 로베르는 미셸과의 불륜 관계를 청산할 생각이 없다. 수십 명의 아이들을 살상한 살인마 아버지는 감옥에서 임종을 앞두고 있다. 무엇보다 자신을 늘 감시하는 듯한 강간범의 위협은 현재진행형이다. 이런 생활 속에서 ‘호감남’으로 다가온 이웃집의 파트릭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발기가 되지 않는 변태다. 무엇보다 그가 바로 강간범이다.
이렇듯 필립 지앙은 미셸이, 아니 우리 시대의 여성이 얼마나 다양한 유형의 폭력에 노출된 채 살아가는지를 숨기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을 무참히 살해한 연쇄살인범 아버지, 더 이상 원하지 않는 육체적 관계를 요구하는 친구의 남편, 또 다시 새로운 남자를 바꾸어 집에 들인 어머니, 경제적 능력도 없으면서 여자 친구가 낳은 다른 남자의 아이를 키우겠다고 대드는 아들……. 작가는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폭력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그것이 삶의 일부가 되도록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폴 버호벤 감독, 이자벨 위페르 주연,
영화 「엘르」의 원작 소설
이 책은 「토탈 리콜」 「원초적 본능」 「블랙북」의 폴 버호벤 감독의 동명의 영화(2016년)의 원작이기도 하다. 강인하면서도 나약하고 신중하면서도 충동적인 미셸은 이자벨 위페르가 연기해서 평단과 관객들의 극찬을 이끌어냈다. 2017년 칸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 제74회 골든글로브시상식 여우주연상 및 외국어영화상의 성과가 이를 증명한다. 무엇보다 「엘르」가 흥미로운 까닭은 ‘강간’이라는 특수한 소재답게 시종일관 긴장된 문체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그 긴장을 유지하기 위해 장(章) 구분 없이 한 호흡으로 서술을 쏟아낸다. 때와 장소를 따로 명시하지 않은 장면이 툭툭 튀어나오기도 한다. 선정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뜨거운 소재를 차갑게까지 느껴지는 절제된 언어의 리듬으로 정제시키기. 그 속에서 인물의 균열은 더욱 선명해진다. 「엘르」는 강간범과 사랑에 빠지는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강간은 소설을 운행하는 시동장치일 뿐이다. 「엘르」는 일상 곳곳에 내재한 폭력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는 한 여성에 관한 이야기다. 「엘르」가 아름다운 이유다.
■ 본문 속으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햇살이 놀라우리만치 아름답고 부드럽다. 어떤 위협의 기운도 감지되지 않는다. 이토록 찬란한 날에 저 푸른 하늘이 내게 겪게 한 일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욕실이 태양의 홍수에 잠겼다. 멀리서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와 아우성이 들려온다. 반짝이는 지평선이 보인다. 새들이며 다람쥐들……. 이렇게 좋을 데가. 이 목욕은 기적에 가깝다. 나는 눈을 감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모든 것을 깨끗이 지웠다고 할 순 없지만, 정신만큼은 완벽하게 추슬렀다. 예견된 두통도 오지 않았다. 나는 음식점에 전화를 걸어 스시를 주문했다.
-오후 5시 무렵, 다시 강간범에 생각이 미쳤다. 불과 48시간 전, 바로 이 무렵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놈은 내가 마르티에게 정신이 팔린 틈을 노려, 상자에서 악마가 튀어나오듯 문을 벌컥 밀치며 내 집에 침입했다. 불현듯 놈이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는 깨달음이 머리를 스쳤다. 놈은 호시탐탐 적기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감시했던 것이다.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나는 사무실에 들러 우편물을 챙기고 메모를 확인한 뒤, 전화 몇 통을 돌려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다. 안나가 찾아 업무상 논의를 마치고 나서 말했다. “그런데 자기 얼굴이 영 이상하네.” 나는 어리둥절한 체했다. “무슨 소리. 컨디션이 최상인걸. 오늘 날이 얼마나 화창해, 햇살은 또 얼마나 눈부시고.” 안나가 미소 지었다. 만일 내가 누군가와 의논하기로 마음먹는다면 안나는 분명 가장 적절한 상대다. 우리는 오랜 세월 알고 지냈으니까. 하지만 내 안의 무언가가 나를 저지했다. 내가 안나의 남편과 관계를 가졌기 때문일까?
-까만 자동차 한 대가 집 근처에 은밀하게 주차되어 있다. 나무에 아직까지 끈질기게 붙어 있는 무성한 이파리들로 반쯤 가려졌다. 이틀 연속이다. 어제는 감히 용기를 내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오늘은, 준비되었다. 좀 전에 자동차가 주차되었을 때 해가 완전히 떨어졌고 나는 쌀을 헹구느라 창문 앞에 있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차 안의 아무것도 식별되지 않을 만큼 사위가 어둡다. 달도 하늘 높이 드리워진 구름의 베일에 가려 한 귀퉁이만 모습을 드러낸 채 가늘고 파리한 빛만을 내뿜고 있다. 차종도 가려낼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운전석에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의 신경이 내게 향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맹렬히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마음이 차분해진다. 나는 정신을 집중한 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두렵지 않다. 그동안 수차례 경험을 통해 더는 물러설 수 없을 때 두려움도 사라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 내가 그 상황이다. 나는 결연하다. 기다리고 있다. 그가 내게 오기를. 나는 어둠 속에 자리 잡은 채 그가 차에서 내리기를 기다렸다. 그를 맞을 준비가 됐다
-침실 창가에서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귀가하는 그를 지켜보았다. 그가 차에서 내렸을 때, 노트북마저 끈 채 망원경으로 그를 관찰했다. 그는 우리가 원만한 이웃의 징표로서 가벼운 손짓만을 주고받았던 때 내가 받았던 인상보다 훨씬 괜찮다. 그가 첫인상으로 내게 남긴 그 억지웃음의 사내보다 훨씬 쾌활하고 박력 있다! 나는 시선으로 그를 좇았다. 손쉬운 해결책이라는 걸 알고 있다. 시내로 나가서 보다 폭 넓은 선택을 하는 편이 훨씬 신중하다는 걸. 파트릭은 모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이랄까. 꾸민 태도의 서글서글한 유형. 나르시시즘적이고 스스럼없으며 랄프 로렌을 입는 부류. 더 나은 상대를 찾기란 어렵지 않겠지만 그런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더러 손쉬운 해결책이야말로 지혜의 징표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는 침실의 어둠 속에서 남자를 염탐하며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_
-내 손이 아직 입을 막고 있었을 때, 누군가 내게 왈칵 달려들며 나를 그대로 바닥으로 ?카펫이 깔린? 넘어뜨렸다. 침입자와 함께 추락하며 나는 책상에 있던 전등을 잡아당겼고 그 바람에 방 안이 어두컴컴해졌다. 내가 비명을 지르자 턱으로 주먹이 날아왔다. 침입자는 복면을 썼다. 나는 다소 얼떨떨한 상태였지만 더 한층 악을 쓰며 전력을 다해 도망쳤다. 이번엔 그가 힘을 잘 쓰지 못했다. 아니, 그보다는 내가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날뛴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끝내 그가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고야 말았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나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그의 무기소지 여부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그가 온힘을 다해 나를 짓누르며 내 목을 졸랐다. “사람 살려! 도와줘!”라고 악을 쓸 때마다 얼굴로 손이 날아왔지만 실신하기에는 분노가 너무 거셌다. 그가 내 바지를 내리려 하는 동안 나는 책으로 가득 찬 계단의 난간을 붙들고서 등으로 땅을 밀며 그 반동으로 그의 정수리를 발로 찼고, 그렇게 그의 압박에서 몸을 빼낼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어떻게 그런 추악한 놀음을 수락할 수 있었는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섹스로 모든 것이 설명되지 않는 한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확실하지 않다. 사실 나는 내가 지나치게 강인한 동시에 지나치게 나약할 뿐이지, 그리 이상하거나 복잡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놀랍기 짝이 없다. 고독의 체험, 지나간 시간의 체험이란 놀랍기 짝이 없다. 자아 체험이라고 할까. 가장 담대한 자들이 비틀거리는 법. 나는 비틀거린 것 이상이었다. 인정한다. 이따금 우리의 부둥킴을 다시 보기도 한다. 왠지는 몰라도 마치 내가 땅바닥을 구르며 격투를 벌이는 두 성난 남녀의 몇 미터 위에 붕 떠서 그 장면을 목도하는 기분이 된다. 나의 활약과, 나의 분노와, 나의 무시무시한 비명에는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바로 그 비명 때문에 벵상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고, 벵상이 내가 숨이 넘어가는 중이라고 착각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