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忠孝라는 통치 이데올로기
이와 같은 에피소드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왕조의 체제 이데올로기 중심에는 忠孝가 있다. 여기서 忠은 임금에 대한 忠誠이다. 그런데 조선의 임금은, 중국 天子의 諸侯이다. 그러니 事大主義 체제 하에서 충성은, 결국 중국에 대한 충성이게 된다.
그러한 충성을 도모하는, 가장 기초적인 文化思想的 바탕이 바로 孝다. 그래서 孝道를 잘 실행하는 인간존재의 집합체로서 家가 결성되고, 그러한 家들이 모여 國家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절차적 과정을 표현하는 개념이 修身齊家治國平天下이다.
그런데 여기서 平天下는, 세계를 지배한다고 上程되는 覇權國으로서 中國 天子만의 고유한 덕목이므로, 조선왕조의 입장에서 忠孝는 修身齊家治國에 한정된다. 현대의 국제정치적 상황에서라면, 제1의 패권국인 美國만이 평천하를 도모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는, 단지 논리적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하다.
7. ‘牛溪 成渾’을 만나다
1548년, 이이는 13세 때, 進士 初試에 장원 급제하여, 시험관은 물론 부모와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이의 학문은 날로 깊어가서, 15세 때에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서 더는 배울 것이 없을 정도였으며, 유교 경서뿐만 아니라, 그밖에 다른 여러 책까지도 통달하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스승 없이 趙光祖를 師叔하다가, 그는 조광조의 문하생인 休庵 白仁傑을 찾아가 受學하였다. 백인걸의 문하에서 牛溪 成渾을 만나는데, 성혼은 그의 오랜 친구가 된다. 성혼은 조광조의 다른 문하생인 成守琛의 아들이자, 성수침의 문하생이기도 했다. 또한 고향 파주는 친구 성혼의 아버지 성수침의 연고지이기도 했다. 청년기의 이이와 성혼은, 時流의 타락을 논하며,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고 맹세하였다.
‘우계 성혼’은, 1535년에 한성부 順和坊태어났다. 아버지는 사후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된 성리학자 成守琛이고, 어머니는 坡平尹氏이다. 고려가 망하자 은거한 成汝完의 후손으로, 함흥차사로 유명한 成石璘의 종6대손이며, 그의 동생인 예조판서 成石因의 6대손이었다.
종6대조 성석용은 성삼문과 성담수, 성담년의 증조부이며, 이기의 외고조부였다. 5대조 성억은 좌찬성이었고, 고조부 성득식은 한성부 판윤을 지냈다. 증조부 충달은 현령을 지내고 사후에 이조판서로 증직되었고, 할아버지 사숙공 성세순은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아버지 성수침은 조광조의 문인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 성수침에게 학문을 배웠다. 1539년(중종 34년) 5세 때, 己卯士禍 후 정세가 회복되기 어려움을 깨달은 아버지 성수침을 따라, 경기도 파주 우계로 옮겨 살았으며, 이후 파주에서 자랐다. 이후 파주 출신인 ‘율곡 이이’를 만나 친구가 되어, 그와 오랫동안 친분관계를 쌓게 된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그는 말을 삼가였고, 성품이 독실하였고 민첩하였다. 청소년기가 되어서는, 자신이 거주하는 집 이름을 ?庵이라 하고, 이를 호로 삼아 자신을 경계하였다. 그 뒤 ‘정암 조광조’와 ‘퇴계 이황’을 師叔하여 학문에 정진하였다.
8. ‘우계 성혼’에 대해 냉혹한 평가를 하다
1567년, 선조가 인재를 추천 받을 때, 士林에서는 이 亂世를 치유할 수 있는 인물로서 牛溪를 천거하는데, 우계의 사람됨을 물었다. 선조의 물음에, 율곡은 한마디로, 우계는 그러한 위인은 못 되고, 학문에 힘쓰는 착실한 선비라고 답변했다. 나라의 어려움을 건질 만한 인물이라고, 사림에서 떠받드는 인물이기 이전에, 자신의 오랜 절친한 친구를 착실한 선비에 불과하다고 한 것은, 비교적 냉혹한 평가였다.
그런데 선조가 이어서, “경과 우계를 비교하면 어떤가?” 라고 묻자, 이이는, “재주는 소신이 우계보다 낫긴 하나, 수신하고 학문적 노력에 있어서는 우계에 미치지 못한다.”고 솔직하게 답변했다. 성혼 역시 이이의 그러한 답변에, 유감을 갖지 않고 겸허히 받아들였다.
‘우계 성혼’은, 경기도관찰사 尹鉉의 천거로, 특별히 전생서 參奉을 제수받았는데, 이후 계속 조정으로부터 벼슬이 내려졌으나, 성혼은 이를 모두 사양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그 뒤 적성현감에 제수되었으나,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 여러 번 관직이 내려졌으나 사양하였고, 공조좌랑과 공조정랑을 잠시 지내고 관직을 사퇴하였다. 그 뒤 이이 등이 찾아와, 그에게 관직에 투신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사양하였다. 명종 말엽에 이량, 이기, 심통원, 윤원형 등의 외척 권신들이 몰락하고, 사림파들이 정치에 등용되자, 그 역시 출사하였다. 그러나 오래 머물러있지 않거나, 사양하기를 반복했다.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하자, 그는 인재를 초빙하는 정책을 펴, 선조 초년에 그는 학덕으로 천거되어 參奉·縣監 등을 제수받았으나 출사하지 않고, 파산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그 뒤로도 掌苑, 조지서 사지, 주부, 판관, 첨정 등의 직책이 내려졌으나, 모두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을해당론 이후, 심의겸, 정철 등을 중심으로 서인이 형성되자 그는 서인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선조 즉위 후, 이이가 선조에게 권하여 종묘 서령의 벼슬을 내렸으나, 병으로 등청하지 못하자, 왕이 약을 보내 주었다.
1568년(선조 1년)에는, 이황을 만나 사물을 담론하였다. 이때 그는 理氣一元論을 주장하였으나, 이후 절충적인 입장으로 선회한다. 그 뒤로 1572년부터 7년간, 이이와 수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理氣 논쟁을 한다.
1573년 공조좌랑·사헌부지평, 1575년 공조정랑, 1581년 정월에는 宗廟署令으로 체임되어 내려가던 중, 귀향을 허가받지 못하여, 다시 한성으로 상경하였다. 그가 되돌아오자, 왕이 직접 문병하고, 약을 하사한 뒤 治道를 물었다.
그러자 그는 치도의 방법으로서 간단하게, “임금은 반드시 몸과 마음을 수습하여 마음과 기운을 항상 맑게 하면, 근본이 서서 의리가 밝게 드러날 것입니다. 나라가 다스려지고 혼란해짐은, 일정함이 없어서, 오직 임금의 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어진 보필을 얻고, 훌륭한 인재를 널리 수합하여, 여러 지위에 두면, 훌륭한 정치와 교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라고 의견을 개진하였다.
9. ‘退溪 李滉’을 만나다
白仁傑의 門人이기도 한 이이는, 이황을 선학으로 모시고 존경하기도 하였다. 1558년(명종 13) 23살의 이이는, 당시 대학자인 58세의 ‘퇴계 이황’을 찾아가서 만났다. 이이는 그곳에서 이틀간 머물며, 이황과 학문의 여러 가지 문제와 사상을 논하고, 시를 짓고 토론하였고, 이황은 그의 재능에 크게 감탄하였다.
비록 견해를 일치시키지 못했지만, 그 후 이들은 가끔 편지를 서로 주고받으며, 학문에 관한 질의 응답을 나누곤 하였다. 그의 학식과 달변을 높이 산 이황은, 자신의 문인은 아니지만, 後生可畏라 하기도 하였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서신을 통하여, 敬工夫나 格物·窮理의 문제를 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교류하였다. 그러나 이황을 방문하여 담론하던 중, 理와 氣의 문제를 놓고, 이황을 논파하려 드는 것을 목격한 이황의 문도들은, 그를 異人으로 의아하게 보면서도, 적개심을 품게 되었는데, 후일 조정에 출사한 이황의 문도들 중, 그를 알아보는 이가 있어, 그를 스승 이황을 모욕하려 든 論敵으로 규정한다.
이이가 질문을 하면, 이황은 친절한 답변을 보냈고, 불교에서 과감히 벗어나 유교로 되돌아온 용기를 높이 평가하며, 칭찬하는 글을 보내기도 했었다. 그해 겨울 別試에 장원하였는데, 이이는 13세 이후로 29세까지 生員試와 式年文科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이로써 그는 과거에 총 9번 장원 급제하였다. 이는, 조선왕조에서 前無後無한 기록이다.
10. 理와 氣에 대해 논변하다
조선왕조의 통치 이데올로기는 忠孝다. 그러한 충효를 작동시키는 철학사상적 배경에는 理氣論이 배치되어 있다. 理氣 개념이 지극히 형이상학적인 탓에, 理氣論爭 역시 형이상학적인 卓上空論이기 십상이다. 그래서 조선왕조의 정치철학을 평가할 때, 항상 理氣論은 그 주된 비판 대상이 된다.
실상 理氣라는 것을 제아무리 明晳判明하게 규명하더라도, 인간존재의 실제적인 삶이 나아지는 역사적 사례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율곡 이이 역시, 이러한 理氣論에 대해서, 당대의 대표 碩學이었던 퇴계 이황과 논변한 것이다.
李滉(1502~1571)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本貫은 眞寶, 字는 景浩, 號는 退溪, 諡號는 文純이다. 이언적, 이이, 송시열, 박세채, 김집과 함께, 문묘종사와 종묘배향을 동시에 이룬 6현 중 한 사람이다. 이언적의 사상을 이어받아, 영남학파의 중추적 학자가 되었으며, 나아가 한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가 되었다.
학맥은 동서 분당 뒤에, 동인의 핵심을 이루고, 다시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릴 때, 이황 제자들은 남인, 조식 제자들은 북인을 이룬다. 한편 그의 저술 중 일부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약탈해갔는데, 일본 성리학 발전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佛敎와 陽明學은 異端이자 禍로 간주하고, 임금에서부터 동료,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불교 배척, 양명학 배척을 한결같이 말하였다.
이황은, 철저한 철학적 사색을 학문의 출발점으로 하여, 연역적 방법을 채택,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로 학문에 임하여, 어디까지나 독단과 경솔을 배격하였다. 그는, 우주 만물은 理와 氣의 이원적 요소로 구성되어, 그 중에 하나라도 결핍되면, 우주의 만상을 표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理氣의 도덕적 가치를 말함에, 理는 純善無惡한 것이고, 氣는 可善可惡한 것이니, 즉 理는 절대적 가치를 가졌고, 氣는 상대적 가치를 가진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심성 문제를 해석함에도, 역시 이러한 절대·상대의 가치를 가진 理기이원으로 분석하였다.
이것이 뒤에 奇大升과의 논쟁이 벌어진 유명한 ‘四端七情論’으로서, 이후 한국 유학자로서,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을 만큼, 중요한 주제를 던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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