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요재지이 (聊齋志異)는 '요재가 기록한 기이한 이야기'라는 뜻의 중국 청 시대의 괴기소설 모음집이다. 이 책은 저자 포송령이 민간에 전래되는 설화와 괴기담, 경험담 등을 모아서 만든 소설집으로, 귀신과 여우, 도깨비, 식인귀, 환생, 신선 등 다양한 판타지적 요소가 등장하는 단편 소설들로 구성되어 있다. 어느 것부터 골라 읽어도 서로 독립적인 이야기인 단편들은, 미녀 귀신에 빠져서 불륜을 저지르는 선비, 게으름에 젖어 집안을 망하게 했으나 여우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나는 귀족, 서로간의 우애가 돈독한 뱀들 등 환상적이고 신비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다른 중국 괴기담들과 달리, 저자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이야기를 해설하고, 줄거리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나름대로의 전거 등을 밝혔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야기의 다양함과 신비함으로 인해서 영화나 드라마의 주요 소재로 사용되었고, 이미 20세기 초에 다양한 서구 언어로 번역되어 읽히기도 했다.
* 1권에 40여편의 짧은 이야기들을 담은, 위즈덤커넥트판 "요재지이"는 2018년 12월을 시작으로, 매달 1권씩 간행될 예정이다.
<미리 보기>
[저승 판관의 우정 〈陸判〉 중에서]
능양에 주이단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자는 소명(小明)이요, 성정은 호방하였다. 그러나 그는 천성이 둔하여, 공부는 매우 성실하게 하였지만, 이름을 날리지는 못했다.
어느 날, 주이단은 같이 공부하던 몇몇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누군가 그에게 농담으로 말했다.
“자네는 호방하기로 이름났는데, 한밤에 시왕전(十王殿 : 저승을 다스리는 열 명의 왕을 모신 전각)에 가서 왼쪽 복도에 있는 판관을 업어 오면, 우리가 모두 돈을 추렴하여 자네에게 술을 한턱내겠네.”
원래 능양에는 시왕전이 있는데, 전각 안에 모셔져 있는 신상은 모두 나무로 조각되었고 마치 살아 있는 듯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대전(大殿)의 동쪽 복도에는 판관 목상이 하나 있었는데, 녹색 얼굴에 붉은 수염을 길러 특히 흉악한 인상이었다.
밤이 되면 두 복도에서 심문과 고문을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래서 시왕전에 들어간 사람 중 모골이 송연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모두 이런 요구를 해서 주이단을 골탕 먹이려 한 것이었다.
주는 그 말을 듣고 웃으며 일어나, 곧장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 밖에서 큰 고함 소리가 났다.
“이보게, 털보 선생님을 모셔왔네!”
친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이단은 판관을 업고 들어와서 탁자 위에 놓고 술잔을 들더니 신상에 술 석 잔을 연달아 올렸다. 사람들은 판관의 모습을 보고 모두가 놀라고 불안해하며, 급히 주이단에게 다시 전각으로 돌려보내라고 부탁하였다.
주는 술잔을 들어 올리더니 신상에게 술을 올리고 땅에 앉아 기도했다.
“학생이 우악스럽고 무례하니, 대종사(大宗師)께서는 부디 이상하게 여기지 마옵소서! 우리 집이 여기서 멀지 않으니 마음 내키면 언제고 술 한두 잔 드시러 와주십시오. 사람과 신이 다르다 하여 꺼리실 것은 전혀 없사옵니다.”
말을 마치자, 다시 판관을 업고 돌아갔다.
다음날이 되자, 과연 친구들은 주이단에게 술을 사주었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 술을 마셔, 주는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집에 돌아왔다. 취기가 사라지지 않았는데, 그는 또 등불을 켜고, 혼자서 자작(自酌)하며 술을 마셨다.
갑자기 어떤 사람이 문발(문에 치는 발)을 젖히고 걸어 들어왔다. 주이단이 고개를 들어 보니, 어제의 판관이었다! 주가 얼른 일어나 말했다.
“어! 제가 죽는 걸 보러 오셨군요! 어젯밤에는 대단히 실례가 많았습니다. 오늘 밤은 제 목숨을 거둬가시는 겁니까?”
판관이 수염을 들썩이며 웃은 후 말했다.
“아닐세. 어젯밤에 자네의 초대를 받았는데, 마침 오늘 밤에 여가가 있어서 자네 같이 화통한 사람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특별히 왔다네.”
주이단은 크게 기뻐하며, 판관의 옷을 잡아당기며 잽싸게 자리를 권했고, 자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구(酒具)을 씻고, 불을 지펴 술을 데웠다. 판관이 말했다.
“날씨가 따뜻하니, 우리 차갑게 마시세.”
주이단은 그의 말대로 술병을 탁자 위에 놓고, 뛰어가서 집안사람에게 음식과 과일, 안주 등을 장만하라고 알렸다. 그의 아내는 이를 알고 깜짝 놀라, 주이단에게 방에 숨어서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말렸다.
주이단은 이를 듣지 않고, 그녀가 음식을 준비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쟁반에 받쳐서 나간 다음 술잔을 나누었다. 주이단이 판관의 이름을 묻자, 판관이 말했다.
“내 성은 육이고, 이름은 없다네.”
주이단은 그에게 고전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하였는데, 판관이 거침없이 대답했다. 주이단이 또 그에게 물었다. 요즘의 팔고문(八股文 : 여덟 개의 짝으로 이루어진 한시 문체. 중국 명나라 초기에서 청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과거의 답안을 기술하는 데에 썼다.)을 아십니까?
판관이 말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할 정도는 되네. 저승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도 인간 세상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네.”
육 판관은 주량이 매우 커서 연거푸 큰 잔으로 열 잔이나 마셨다. 주이단은 온종일 술을 들이켰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술에 취해 책상에 엎드려 깊이 잠들었다. 잠에서 깨니, 촛불이 어슴푸레한 것이 보이고, 귀신 손님은 이미 가버린 뒤였다.
이후, 육 판관은 2, 3일에 한 번씩 찾아왔는데, 두 사람은 점점 더 친해지게 되었고, 종종 한 침상에서 자기도 했다. 주이단이 자신의 문장을 육 판관에게 보여 주면, 육 판관이 붉은 붓을 들어 좋지 않은 부분을 고쳐 주기도 했다.
어느 날 밤, 두 사람이 술을 마시다가, 주이단은 술에 취해 먼저 가서 잠들었지만, 육 판관은 여전히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주이단이 자다가 갑자기 오장육부가 아파서 깨어나 보니, 육 판관이 침대 앞에 단정히 앉아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서 그것을 한 가닥씩 정리하고 있었다.
주이단이 놀라 말했다.
“무슨 원한이 없는데 왜 나를 죽이는 것이오?”
육 판관이 웃으며 말했다.
“두려워할 것 없네. 내 자네를 위해 총명한 심장으로 바꿔주는 것일세.”
말을 마치고는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창자를 잘 정리한 후, 주이단의 배 안에 넣고 잘린 부분을 잘 맞춘 후, 마지막으로 과각포(?脚布 : 전족에 사용하는 길쭉한 천)로 허리를 감았다.
모든 것이 다 끝나고 침상 위를 보니, 핏자국이 조금도 없었다. 주이단은 배가 조금 저릿하다고 느꼈다. 육 판관이 고기 덩어리를 탁자 위에 올려놓자, 주이단이 무슨 물건이냐고 물었다. 육 판관이 대답했다.
“이것이 바로 자네 심장일세. 나는 자네의 문장이 술술 나오지 않는 이유가 자네의 심장 구멍이 막혀서 그런 것을 알고 있었네(옛날 사람들은 심장에 구멍이 있어서 그것으로 생각을 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자네를 위해 저승에서 천 개의 심장 중 제일 좋은 하나를 골라서 자네의 것과 바꿨다네.”
이야기를 마치고 바로 일어서서 문을 열고 나갔다.
날이 밝자, 주이단은 붕대를 풀어헤쳐 보았다. 상처는 이미 나았고, 배에는 붉은 선만 남았다. 이후, 그는 문재(文才)가 크게 진보하여, 한번 읽은 문장은 잊지 않게 되었다. 며칠이 지난 후, 그가 다시 자신의 문장을 육 판관에게 보여 주자, 육 판관이 평했다.
“좋군. 그러나 자네는 복이 약해서 고관이 될 수는 없고 기껏해야 거인(擧人 : 과거 시험의 2차 합격자) 정도가 될 수 있을 걸세.”
주이단이 물었다.
“언제 시험을 보면 되겠소이까?”
육 판관이 대답했다.
“올해 보면 꼭 1등을 할 걸세.”
얼마 안 있어, 주이단은 과거에 합격하여 수재가 되었고, 가을에 다시 과거에 합격하여 1등으로 거인이 되었다. 그의 동창 친구들은 줄곧 그를 얕잡아 보다가, 그의 답안 문장을 보고는 모두 서로를 마주 보며 매우 놀랐다. 그리고 주이단에게 자세히 물어본 결과 육 판관이 지혜로운 심장으로 바꿔줘서 그렇게 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동창들이 주이단에 육 판관을 모두에게 소개해 줄 것을 청하며 육 판관과 교제하려고 하였다. 육 판관은 시원하게 응낙하였다. 그리하여 모두가 술좌석을 크게 벌이고 육 판관이 오기를 기다렸다.
초경(初更 : 저녁 7~9시)이 되자, 육 판관이 도착했다. 그의 빨간 수염이 나부끼고, 형형한 눈빛이 번개처럼 반짝이니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하였다. 모두의 얼굴이 망연자실하여, 자기도 모르게 몸이 떨려 이빨이 마주치며 딱딱거리는 소리가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둘 자리를 박차고 나가 도주하였다. 주이단은 곧 육 판관에게 자신의 집으로 가서 술을 마시자고 청했다. 술이 얼얼할 때, 주이단이 말했다.
“당신이 심장을 바꿔주셨으니, 제가 당신께 입은 은혜가 참으로 큽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부탁드릴 것이 있는데,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육 판관이 그에게 무슨 부탁이냐고 물었다.
주이단이 말했다.
“심장을 바꿀 수 있다면, 얼굴도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제 아내와는 어른이 되자마자 결혼한 사인데, 몸매는 예쁘지만, 얼굴은 별로 예쁘지 않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칼을 좀 대주실 수 있겠습니까?”
육 판관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천천히 방법을 알아보겠네.”
며칠이 지나, 육 판관이 야밤에 와서 문을 두드렸다. 주이단이 급히 일어나 그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청했다. 등불을 켜고 비추어 보니, 육 판관이 옷자락으로 뭔가를 싸고 있는 것을 보고, 주이단이 물었다.
육 판관은 말했다.
“자네가 지난번에 나에게 당부한 일인데, 줄곧 마땅한 얼굴을 찾지못하다가, 방금 미인의 얼굴을 구하게 되어 약속을 지키러 왔네.”
주이단이 그의 옷깃을 젖혀 보니, 피가 축축한 여자의 머리였다. 육 판관이 빨리 침실에 가자고 재촉하였다. 주이단은 아내의 침실 문이 밤에는 잠겨있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육 판관이 도착하여 한쪽 손으로 밀자 문이 열렸다. 침실에 들어가니, 주이단의 아내가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육 판관은 그 머리를 주이단에게 주고는 장화에서 비수를 꺼내어 한 손으로는 주 부인의 목을 누르고 다른 손으로 두부를 자르듯 힘껏 베니, 아내의 머리가 베개 옆으로 굴러 떨어졌다. 육 판관은 급히 주이단의 품에서 미인의 머리를 받아들고, 아내의 목을 벤 자리에 꼼꼼히 맞추더니 힘껏 눌러서 아내의 몸에 꽂았다. 그리고 베개를 머릿밑에 대었다. 모든 것이 다 끝난 후, 육 판관이 주이단에게 잘라낸 머리를 아무도 없는 곳에 묻게 하고는 자기는 떠나버렸다.
주 부인이 이튿날 일어나자 목에 살짝 마비가 가 있었고, 얼굴이 바싹 말라 있었다. 손으로 비비자 핏덩어리가 묻어 나와서 놀란 아내는 급히 하녀에게 세숫물을 대령하라고 소리쳤다. 하녀가 물을 들고 들어와 보니, 아내의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있어 몹시 놀랐다. 아내가 얼굴을 씻었더니, 물 한 대야가 온통 새빨개졌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하녀는 갑자기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바뀐 것을 보고는 더욱 놀랐다. 주 부인은 스스로 거울을 찾아 자기 얼굴을 비추어 보았데, 경악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주이단이 들어와서 아내에게 육 판관이 머리를 바꾼 경위를 일러주고, 아내를 거듭 살펴보니, 그녀의 눈썹이 곱고 뺨이 양쪽에 보조개가 있는 것이 정말 그림에 그린 듯한 미인의 얼굴이었다. 옷깃을 풀어보니 목에 붉은 실 같은 자국만 남았는데, 붉은 선 아래의 피부색은 확연히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