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메모
서문
제1부 아이들의 천국
제2부 신비한 작용
해설 | 사랑의 콜레주
앙리 드 몽테를랑 연보
20세기 프랑스 문단의 총아 몽테를랑이 남긴 ‘인생 작품’
앙리 드 몽테를랑은 소설과 희곡, 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에서 수많은 작품들을 남긴 다재다능한 작가다.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종신회원이었으며, 아카데미 프랑세즈 문학상을 비롯한 유수 문학상들을 수상했고, 4부작 소설 ‘젊은 여성들’ 시리즈로 대대적인 인기를 끌어 수백만 권의 판매고를 올리는 등 비평가들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사랑받았던 20세기 프랑스 문단의 스타였다.
그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삼 년 전인 1969년에 세상에 내놓은 『소년들』은 50여 년에 걸쳐 완성된 소설로, 그의 삶과 작품 전체의 요약본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집필이 시작된 때는 1914년으로, 소설의 모티브가 된 몽테를랑의 퇴학 사건 이 년 후다. 생트크롸 드 뇌이 콜레주의 철학반 학생이던 몽테를랑은 이 년 후배인 필리프 지켈과 특별한 우정을 나눴다는 이유로 퇴학당한 바 있다. 인생의 한 시점, 십대 시절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오랜 세월 곱씹으며 의미를 찾고자 하는 절대적인 필요에서 나온 작품이기에 『소년들』을 그의 ‘인생 작품’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소년들』은 사랑의 다채로운 모습을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감성적이고도 철학적으로 풀어내는 놀라운 소설이다. 주인공 알방 드 브리쿨과 세르주 수플리에의 뜨거운 우정을 중심으로 세르주를 향한 알방의 티 없는 사랑과, 역시 세르주를 사랑하는 드 프라츠 신부의 배타적이고 맹목적인 사랑, 원장 신부가 말하는 신의 사랑과 성스러운 사랑, 알방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사랑 등 사람들이 저마다 사랑을 생각하고 사랑을 하는 다양한 방식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랑의 다양한 양상은 종교와 믿음의 화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보다 깊은 차원의 철학적 논의로 확장된다. 불문학자 퍼트리샤 오플래허티가 논했듯, 『소년들』은 “신보다는 인간을 믿는 종교적 삶의 방식을 탐색”하는데, 그 방식이란 다름 아닌 사랑이다.
순수하면서도 타락한 천사의 둥지인 소년들의 학교
그곳에서 벌어지는 뜨거운 열정의 변주곡
파르크 콜레주의 철학반 우등생인 알방은 학교를 대표하는 신설 기구인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된다. 아카데미에 소속된 열 명의 엘리트 학생들은 선배가 자신이 점찍은 후배를 돌보는 ‘보호 그룹’이라는 활동을 시작한다. 알방은 몇 년 전부터 좋아하던 이 년 후배인 세르주에게 몰두해 있던 터라 그를 자신이 보호할 후배로 정한다. 그러면서 둘 사이의 천진무구한 사랑, 특별한 우정이 시작된다. 알방은 이 놀라운 모험을 통해 인생의 신비하고 믿을 수 없는 측면을 차츰 발견하게 된다.
알방은 세르주를 이전에 다니던 에콜 모코르네에서 만났다. 세르주는 태도가 불량스럽고 거칠어서 친구들과 선생들의 미움을 한몸에 받는 아이다. 속절없이 사랑에 빠져버린 알방은 세르주가 빌려준 연필에 입을 맞추고, 세르주가 침을 발라 붙여놓은 이름표를 몰래 떼어오고, 세르주의 머리카락 한줌을 얻어 수납형 펜던트 안에 넣고 다닌다. 세르주가 파르크 콜레주로 전학을 가자 어머니를 설득해 같은 학교로 옮기기까지 한다. 이전에도 타인을 향한 매혹을 경험했던 알방이지만, 세르주에게 느끼는 감정에는 “무언가 매우 흥분되고, 심각하고, 약간 고통스러운 면”이 있다.
알방과 세르주의 관계는 파르크 콜레주의 보호 그룹 아래서 좀더 내밀하고 열정적인 빛깔을 띠게 된다. 어느 목요일 저녁, 어스름이 짙어가는 시간에 알방은 인적이 드문 펠로타 경기장의 탈의실에서 세르주를 만난다. 열정 때문에 어둠 속에서 집게손가락에 피가 나고 외투의 안감이 찢어지기까지 했던 그 만남으로, 알방은 믿을 수 없이 놀라운 무언가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꿈만 같고”, “존재하는 건 이 순간뿐”이었던 그 경험 후 놀라운 충만감과 행복감이 그를 감싼다. 알방은 생각한다. ‘겁이 날 정도로 행복하다. 나는 그애를 너무 사랑한다. 이렇게 계속된다면 미쳐버릴 거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되기를 열렬히 바라고 있다.’
보호 그룹의 분위기는 점차 육체적 쾌락에 몰두하는 방향으로 변해간다. 알방은 보호 그룹의 궁극적인 목적이 후배의 교육, “정신적 고양”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세르주와의 관계에서 새생활을 시작하여 다른 학생들의 모범이 되고 콜레주의 분위기를 개혁하기로 결심한다. 순수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알방의 개혁에 대한 의지는 다른 친구들의 반감을 산다.
이 커플이 초콜릿 보관실에 단둘이 있을 때, 세르주를 유별나게 예뻐하고 알방에게 질투심과 적의를 품은 드 프라츠 신부가 갑작스레 나타난다. 그는 “파리를 잡기 위해” 둘이서만 있었느냐면서 몰아붙인다. 결국 처음에는 둘의 관계가 종교적 성숙과 자비를 배울 기회가 될 거라며 관대함을 보이던 원장 신부도, 그리고 알방과 친하게 지내려고 애쓰던 친구들 또한 부정하다고 지목당한 이 우정에 등을 돌린다. 퇴학 처분을 받은 알방은 학교 밖에서 세르주와 만나지 않겠다고 드 프라츠 신부에게 약속하고, 순수한 열정만으로 뭐든지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던 인생의 한 시절이 막 끝났음을 깨닫는다.
파르크 콜레주를 떠난 후 알방은 마음을 달래려 애쓰지만 여전히 슬픔을 피할 수 없고, 이 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생생하게 피가 흐르는 이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고통이 완전히 헛된 것만은 아니다.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세르주는 알방에게 “바람조차 건드릴 수 없는 서늘한 저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는 “강렬한 추억”으로 남았으니 말이다.
“그들은 언제까지나 자신의 열정을 기억할 겁니다. 그리고 종교는 그 열정과 함께 남을 겁니다.” _본문에서
소설 속 인물들이 경험하는 다양한 모습의 사랑은 종교와 믿음의 주제와 엮여 한층 더 다채로운 빛깔을 드러낸다. 몽테를랑은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단언했지만 종교가 주요 동기로 작용하는 작품을 여러 편 남겼고, 『소년들』 또한 종교적인 배경을 취하여 가톨릭 학교를 무대로 삼고 있다. 서문에서 작가는 어느 신부가 무신론자 사제라는 이야기를 듣고, 『소년들』 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말한다.
나는 무신론자 사제에 대한 소설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감히 훌륭한 사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신자들의 가장 큰 선을 위해, 그리고 그들을 부단히 교화하기 위해 끝까지 임무를 완수하는 사제. 여기에 바로 나 자신, 그리스도교를 느끼면서도 신앙이 없는 나와 같은 사람을 위한 주제가 있었다. (13~14쪽)
종교에 큰 관심이 없는 알방과 세르주, 매우 독실한 원장 신부, 무신론자이면서 신부가 된 드 프라츠 신부 등 종교와 신앙에 대한 태도가 가지각색인 인물들이 사랑의 서사에 또다른 층위를 더한다.
파르크 콜레주의 원장 신부는 자신의 종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너는 가톨릭이니?’ 하고 묻는 것은 ‘너는 사랑을 믿니?’ 하고 묻는 것과 같다고요.” 사랑을 강조하는 원장 신부의 행보는 보다 긍정적이고 자연스러운 종교를 탐색하려는 작가의 시도로 보이기도 한다. 반면 알방을 퇴학당하게 하는 장본인인 드 프라츠 신부는 신앙심이 전혀 없는데, 어린 소년들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직업을 찾다가 성직에 몸담게 되었다. 사제라는 가면을 쓰고 연기하듯 예식을 거행하는 그에게 종교란 “거대한 속임수”일 뿐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가톨릭은 하나의 거짓말이다. 소년들은 거짓말 속에 살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한, 사회적 도덕 또한 하나의 거짓말이었다. 머리가 모자라는 자가 아니라면, 그 누가 가면을 쓰지 않겠는가?” 그런데 평생 표리부동한 생활을 성공적으로 지켜온 그에게 임종의 자리에서 놀라운 변화가 생기는데, 그것 또한 사랑의 신비한 작용이다.
『소년들』은 미학적인 서사를 통해 사랑의 다양한 얼굴을 아우르는 걸작이다. 작품이 보여주는 사랑의 양상은 때로는 코믹하고 때로는 고통스럽지만, 결국에는 달콤씁쓸한 아련함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그와 동시에 소설 속에 배어 있는 종교의 새로운 차원에 대한 몽테를랑의 고민은 『소년들』을 여러 겹의 의미들이 다성악처럼 공명하는 잊을 수 없는 작품으로 승화시킨다.